연중 제17주일

2015. 7. 26.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 주일미사 교우들

주일미사 교우들, 호수 건너편으로 예수님 따라간 사람들

 


무더운 여름의 한 가운데 

 

지금은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때입니다. 아마 이번 주간부터 대략 2주간 동안에는 피서지 방향 도로의 교통 상황이 최대의 혼잡을 이룰 것입니다. 이렇게 7월말에서 8월 초순까지는 여름 휴가철의 절정(peak)입니다. 지난주일의 마르코복음서 6장 30∼34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쉬러 가신 보도를 보았습니다. 어느 계절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는 보도(마르 6, 32 참조)는 이 여름철 휴가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휴가란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복음전파활동의 성공적 결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까닭에 식사하실 겨를조차 없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따로 한적한 곳에 쉬러 가셨는데, 거기 또한 복음을 갈구하는 백성이 몰려오고 있음을 지난 연중 제16주일의 마르코복음서 6장 30∼34절과 오늘의 요한복음서 6장 1∼2절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휴가플랜을 포기하실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휴가란 우리들이 이 여름철에 어딘가로 즐기러 떠나는 휴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휴가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휴가체험이란


예수님과 함께 마치 휴가차 떠나듯이 한적한 곳으로 가서 지낸다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휴가와는 다른 체험을 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의 전혀 다른 체험을 성경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쉬러 가신 그 때가 어느 계절이었는지 마르코복음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요한복음서에는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고 강조해서 보도되고 있습니다(요한 6, 4).

 

요한복음서가 이렇게 마르코복음서와는 달리 임박한 그 파스카 축제를 상기시키는 그 점은 곧 예수님께서 단순히 휴가를 하시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신 것이 아님을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깨우쳐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다”(요한 6, 1)는 언급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탈출(Exodus)의 행보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홍해를 건너 광야에 간 ‘출애굽’의 역사를 연상케 하는 것입니다.

 

호수의 특별한 의미


그리고 그 ‘호수’도 유다인들이 일반적으로 일컫는 ‘갈릴레아 호수’라고만 하지 않고 요한복음서는 ‘티베리아스 호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요한 6, 1 참조). 갈릴레아 호수를 ‘티베리아스 호수’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당시 유다인들을 식민통치하던 로마 황제의 권력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그 갈릴레아 호수를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스 호수라 하였는데,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는 백성을 폭압적으로 지배하던 세상의 권세를 넘어 하느님께서 지배하시는 땅으로 가셨다는 뜻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 권세에서 탈출하여 하느님 권세의 영역으로 ‘건너가는 행보’가 곧 ‘파스카’입니다. ‘탈출→건너감’을 ‘파스카’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호수 건너편으로 가는 그 행보는 그러한 파스카의 때가 되었기 때문임을 요한복음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요한 6, 1∼3 참조).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세상 권세의 바다를 건너 광야로 가신 그것은 곧, 새로운 나라를 맞이하는 백성의 모임, 즉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파스카의 잔치를 그분은 베푸십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더 이상 이 세상의 걱정꺼리나 배고픔의 고통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만이 있습니다. 거기 몰려온 백성을 예수님께서 보실 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주셨다(마르 6, 34 참조)고 지난주일의 마르코복음서가 보도하였듯이, 예수님께서는 ‘이집트’라고 하는 이 세상 왕국의 폭정을 떨치고 오로지 하느님만 의지하여 광야의 길로 나아온 이스라엘 백성(탈출 5, 1 참조)과 같이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그 외진 곳, 즉 거기 광야처럼 한적한 곳, 거기에 가면 오로지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고 달려온 하느님의 새로운 이 백성과 함께 당신이 이루실 파스카(과월절)축제를 올리시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오늘의 요한복음서 6장은 구약성서 탈출기에서 일어났던 과월(Pascha)의 과정을 연상하도록 분위기를 잡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 1∼3 참조)

 

이러한 보도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하여 볼 수 있었던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이끌려 홍해 바다 건너편 광야의 시나이 산에 올라가 하느님을 뵈옵고 제사를 바치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새로운 백성이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분을 따라 물 건너편 광야에 몰려와서 이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광야에서 먹여주시던 그 주님의 주권 행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집트 종살이의 기억


‘이집트’라는 종살이 땅에서 노예 생활로 연명하던 백성이 이제 ‘광야’로 나가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릴 수 있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을 직접 먹여주시는 분은 곧 하느님 당신 자신이셨던 것처럼, 오늘 주님을 따라 세상살이를 벗어나 오로지 그분을 따라 이 광야에까지 나아온 이 백성을 주님 당신 친히 먹여주시는 분이심을 오늘 우리는 ‘빵의 기적’(요한 6, 8∼3)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휴가란 세상에서 즐기는 놀이를 하러가는 휴가가 아니라, 세상 밖의 하느님 나라 성취의 일, 즉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때 영원히 이룰 휴가와 같은 하느님 나라 체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따로 외딴곳을 찾아 떠나셨지만(마르 6, 32 참조), 물 건너의 그 한적한 곳에서 이 나라 저 나라 헤매던 양떼와 같이 가엾은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당신께서 모으실 새 백성이자 당신께서 친히 먹여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채워 이루실 새로운 삶을 선포하시는 것이 이 요한복음서 6장 전체의 말씀입니다.

 

광야의 길로 나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몸소 먹여 주셨듯이(탈출 12∼16장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떡과 물고기로 구름 같은 5천 군중을 배불리 먹여 주십니다. 이 기적은 최후만찬 때에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후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신 그 성찬(마르 14, 22∼25 참조)의 예표입니다.

 

광야의 성찬은 주일마다 베풀어진다


오늘날에도 그 광야의 성찬은 주일(일요일)마다 베풀어집니다. 세상살이의 얽매임에서 탈출하여 주일미사에 참례하러 오시는 교우들이 그렇게 그 광야의 성찬을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미사에서 이루어지는 ‘천상잔치(聖餐典禮 성찬전례)’의 예표가 곧 그 광야에서 이루어진 ‘빵의 기적’입니다. 이 천상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군중이 오는 것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요한 6, 5 참조) 오늘도 푹푹 찌는 더위를 무릅쓰고 주일미사에 모여온 교우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을 먹일 생명의 음식은 세상에서 구해올 음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현실론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 5)하고 말입니다. 그 현실론자 중의 하나가 필립보였습니다. ‘필립보’라는 이름은 당시에 희랍식 이름입니다. 우리의 이 시대에 미국식 경제론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현실이듯이 그에 맞추어 오늘날의 국제어가 영어인 것처럼, 로마제국 판도에서는 잘 나가는 사람들은 당시의 국제어인 희랍어를 자랑스레 사용하고 이름까지 희랍어로 개명하여 행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필립보’라는 이름의 제자는 아마 잘난 체 하면서 당시 세상의 현실론에 익숙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던진 예수님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뜻을 함축한 말씀이었습니다. “필립보야, 너는 지금의 이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많은 사람들을 굶지 않게 하기란 불가능하겠지?” 하고 질문하신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렇게 현실론자를 시험해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작정하고 계셨던 것입니다(요한 6, 6 참조).

 

빵의 기적


예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그 일이란, 새롭게 모여온 하느님의 백성을 당신 친히 먹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당신 백성에게 직접 천상잔치를 베푸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지 않고자 세상에서 먹을 것을 구하려 하겠지만, 당신 백성에게는 당신이 직접 주시는 생명의 음식을 주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광야에서 베푸는 빵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그 ‘빵의 기적’은 그래서 이 세상의 잔치가 아니라, 그렇듯 ‘천상잔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천상잔치를 통하여 주시는 생명에 대하여 우리는 앞으로 ‘연중 제21주일’(8월 23일)까지 4주간 동안 주일복음으로 요한복음서 6장을 계속해서 봉독할 것입니다. 오늘의 ‘빵의 기적’이란 어떠한 사건적 의미가 있는지 요한복음서는 그 6장 전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깨우쳐줄 것입니다. 단순히 물질적 음식의 엄청난 증가만을 이 기적에서 볼 것이 아닙니다.

 

이 ‘빵의 기적’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의 음식이란 늘 불어나는 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불어나는 빵이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빵’이라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그 빵이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과 같이 무한정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당신 자신의 몸처럼(요한 6, 39∼40 참조) 그렇게 ‘살아있는 빵’(요한 6, 51)인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곧 살아 움직이는 우리의 먹을거리라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우리는 앞으로 한 달 가량 주일복음으로 자세히 듣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빵의 기적’을 체험한 백성처럼, 우리 또한 세상이 아닌 곳에서의 체험을 하는 백성으로서 그걸 깨닫게 되는 말씀을 4주간 동안 들을 것입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64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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