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2015. 8. 9. 09:00 하부내포성지 도화담 공소

 

그 분의 살을 먹으라고?

'집밥이 아니라 '엄마 밥'이어야 하듯 … !

 

 

지난 7월 26일의 연중 제17주일에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로 5천명 군중을 배불리 먹여주신 기적사화(요한 6, 1∼15 참조)를 본 우리는 요한복음서 6장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연중 제21주일까지 연속적으로 읽게 됩니다.

 

지난주일(연중 제18주일)에는 요한복음서 6장 24∼35절의 예수님 말씀을 읽었습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서 6장 41∼52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주일에 읽었던 말씀을 먼저 회상해야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 두 주간에 읽을 말씀으로 이 요한복음서 6장 전체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연중 제21주일 즉, 8월 23일까지 요한복음서 6장 전체를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떠나간 제자들처럼 될지도 모릅니다(요한 6, 66 참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5천명을 먹여주신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이 그분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옹립하려 하자 예수님께서 자리를 피하셨다는 2주 전의 복음 내용(요한 6, 15 참조)을 회상해야겠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풍랑의 물위를 걸어서 건너편 가파르나움으로 가십니다(요한 6, 16∼21 참조). 그 가파르나움이라는 마을은 예수님의 활동 거점이자 제자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살던 곳입니다. 그곳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저 일상적 인간관계에 의하여 잘 알고 지내던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던 호수 건너편 광야, 그곳은 동떨어진 세계를 뜻합니다. 우리도 가끔은 그런 광야에 가서 일상과는 전혀 다른 삶을 맛보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요즘 같은 피서휴가철에 그리 하듯이 말입니다. 현실의 중압감을 벗어버리고 별천지의 다른 세계에 안기고 싶은 심정에서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는 현실상황의 테두리에 머물러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듯이 군중은 별천지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가파르나움이라는 현실의 동네에 돌아와 일상속의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 25) 하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26∼27. 35)

 

이 말씀은 우리가 지난주일에 읽은 말씀인데 그 뜻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너희는 나로부터 물질적인 것을 기대하지 말고 나 자신을 너희 생명의 원천으로 삼아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우리는 오늘 복음서에서 유다인들의 반응을 보고 그 다음의 예수님 말씀을 읽습니다(요한 6, 41∼51 참조).

 

오늘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일컬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하신 말씀을 유다인들은 못마땅해 하면서 그분의 인격을 요셉의 아들이라는 현실적 차원에서만 인식하려 합니다(요한 6, 41∼42 참조). 그분을 왕으로 옹립하려던 열망이 언제 그랬었냐는 식의 변심을 우리는 여기서 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아니고서는 예수님 당신 자신을 아무도 알아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요한 6, 43∼46 참조).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영원히 살고 싶으면 당신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믿어야 하며,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내어주는 빵이라고 당신 자신을 일컫고 계십니다(요한 6, 47∼51 참조). 이 말씀을 유다인들은 못마땅해 하여 논란거리로 삼습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더욱 예수님의 본 의지를 확실히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란 당신 자신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 자신을 일컬어 우리에게 주시는 빵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당신 자신이 곧 우리 생명의 원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당신 자신을 일컬어 “살아있는 빵”(요한 6, 51)이라고 하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6장의 정점을 이룹니다.

 

살아있는 빵,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살아있는 빵”, 그것은 썩어 없어질 빵과는 달리 늘 싱싱한 빵, 항상 따끈따끈한 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저는 서양음식이랄 수 있는 ‘빵’ 대신 우리가 늘 먹는 ‘밥’을 생각하면서 나에게 가장 영양가 있고 늘 생생하고 따끈한 밥은 어떤 밥일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 밥은 자녀에게 있어서 어머니가 해주는 밥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상상해봅니다. 친엄마가 돌아가시고 서모가 계셔서 나에게 밥을 주신다면 그 밥맛이 어떨까요? 어쩐지 그건 달갑지 않고 썰렁한 식탁의 밥맛일 것입니다. 그리고 친엄마인데도 피곤하다면서 음식점에 전화해서 맛있고 기름진 자장면이나 피자를 배달시켜주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머니 친히 지어주신 밥이 아니기에 간식거리일 뿐입니다. 어머니가 지어주는 밥은 월급 받으며 차려주는 파출부의 밥과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나의 입맛에 맞게 하려고 당신 자신의 혀끝을 적응시켜 맛을 맞춘 밥을 지어주십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는 한 가지 입맛이 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살에서 나오는 젖을 먹고 자란 아들은 살면서도 어머니의 살인 그분의 혀끝 맛으로 지어진 밥맛에 길들여졌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혹 몸이 몹시 아파서 나의 밥을 지어주시지 못한다 한들 나 혼자서 밖에 나가 음식점 음식을 맛있게 사먹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해서 내가 솜씨 없다 하더라도 평소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 맛을 내 혀끝으로 감별하여 어설프지만 내 손으로 죽을 끓여서 편찮으신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듯 나의 사랑 고백을 자아내게 할 어머니의 누적된 사랑에 대한 나의 응답을 창출해줄 수 있도록 어머니는 이미 나에게 당신을 맞추신 분입니다.

 

요즘에 이른바 ‘집밥 신드롬’이라는 현상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TV에서 연예인들이나 유명한 사람이 그들 나름의 레시피를 소개하면서 스스로 음식을 조리해서 즐기는 프로가 인기를 얻고 있답니다. 저는 그런 TV 방영을 시청하지 않았습니다만, 그에 대한 신문지상의 논평보도를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며칠 전(8월7일)의 경향신문 <세상 속으로>라는 연재칼럼을 관심 있게 읽었습니다. 그 기사 중에서 다음의 글에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집밥 신드롬은 ‘집밥 없는 시대’의 역설이다. 제대로 된 집밥을 못 먹는 시대가 집밥 신드롬을 낳았다. 실업의 고통, 세계 최장시간 노동, 가족 해체, 디지털 사회가 ‘집밥’을 찾게 한다. 매일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집밥’은 신드롬이 아니다. 회사가 아닌 집에서 밥을 먹고 싶다는 절절한 호소다.”

 

여기서 ‘집밥’이란, ‘엄마의 정성과 손맛’을 우선 떠올리게 한답니다. 그래서 엄마들이 부담스러워 한다는 기자의 관찰이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어떤 주부가 다음과 같이 실토하더라는 것입니다. “‘집밥이 좋다’는 메시지가 퍼지니 외식하자는 엄마는 나쁜 사람이 돼 버린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한 젊은 주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집밥도 여유가 있어야 먹는다. 녹초가 된 상태에서 일 끝나고 집에 가서 또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참을 수 없이 답답해진다.” 그래서 TV의 집밥 프로에 등장하는 유명인 남성들처럼 ‘집밥 신드롬’은 남성들을 부엌으로 이끌었지만 ‘밥 하는 일’은 여전히 여성 몫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맞벌이 직장생활을 하는 젊은 부부들은 각각 서로를 배려하여 음식 준비를 하고 독특한 레시피로 서로를 즐겁게 하려고 애쓴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엄마가 마음 써주는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심성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지적입니다. 한 젊은 직장인이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밥을 통해 ‘내 삶과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지’ 묻게 된다”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부모님 집에 가요. 엄마 밥이라고 다 맛있진 않아요. 하지만 엄마는 ‘살찌니까 조금만 먹어’라면서도 다 먹고 나면 ‘더 먹을래’라고 물어봐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주는 밥이니까 가능하죠.”

 

그렇습니다. ‘집밥 신드롬’에 편승하여 ‘집밥 스타일’의 외식업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만, 직장인이 집밥 먹고 싶다는 건 ‘집밥 스타일 식당’에 가자는 게 아니라 ‘집에 좀 보내줘’라는 ‘절규’라고 취재기자가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절규’는 ‘집밖’의 자녀로서 ‘집안’의 어머니의 밥을 찾는 것만이 아닙니다. 실제로 ‘엄마 노릇’을 하고자 노력하는 모성애는 이 각박한 직장생활의 시대에도 그것이 본성적인 것이기에 숭고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30대의 젊은 엄마가 자기 어린아이는 시어머니에게 맡기지만 이유식(離乳食)만큼은 꼭 퇴근하고 직접 만든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육아휴직이 끝나 6개월 된 아들을 두고 복직했을 때 참 마음이 아팠어요. 내가 무슨 영화를 보려고 이 어린것을 떼놓고…. 쇠고기와 계란 등을 섞어 죽을 끓이면서 생각합니다. ‘엄마는 낮 시간 너를 못 보지만 낮에 네가 먹을 걸 만들면서 늘 너를 생각하고 있어.’ 이유식 덕에 아이와 연결된 느낌이에요.” 이 얼마나 애틋한 이 시대의 엄마 모습입니까! 그렇습니다. ‘집밥 신드롬’의 현상을 취재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집밥, 따뜻한 관계를 이어주는 집밥. 그래서 ‘엄마도 행복한 집밥’을 만들고,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집밥’을 먹어서가 아니라 ‘엄마 밥’을 먹어서 진정 행복감을 얻는 것입니다.

 

본래 엄마는 음식 하는 걸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그 음식으로 자녀와 가족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입니다. 그 엄마의 밥을 먹을 수 있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엄마의 밥은 그냥 ‘집밥’의 뜻만을 지니는 게 아닙니다. 그 이상의 밥입니다. 사랑을 쏟아 부은, 그리고 생명을 주는 밥인 것입니다. 엄마는 자기의 모든 것, 물질로써의 밥보다 더 한 것, 즉 자기 자신을 자녀에게 주는 조리(調理)를 식탁에 차리면서 행복합니다.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어떤 물질로써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살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더욱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빵이란 살아있는 당신의 살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요한 6, 51 참조). 예수님의 이 말씀을 유다인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거나 알기를 거부하는 유다인들이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더욱 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 52)하는 이 논란은 말하자면 “우리를 식인종 취급하는 게 아니냐?”하는 반발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주일에 이어지는 말씀(요한 6, 51∼58 참조)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만,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의 살을 우리의 먹을 것으로 내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엄마의 젖에 대한 생각을 해봅시다. 아기에게 있어서 과학적으로 아무리 좋은 영양 관리가 되어있는 유아식(乳兒食)이라 하더라도 가난한 엄마의 젖꼭지를 빨아먹는 모유(母乳)보다야 아기를 더 튼튼히 자라게 하질 못한다 하지 않습니까! 엄마의 젖은 사실상 엄마가 몸을 지탱할 자신의 기운을 지니고 있는 살에서 나오는 영양분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아기에게 가장 좋은 음식은 엄마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지닌 당신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천상의 영양분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뜻으로 당신의 살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요한 6, 51)이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란 세상의 물질적인 빵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살’이라 하십니다. 그 ‘살’이란 당신 자신의 생명 자체입니다. 그러한 당신 자신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음 두 주간 동안 이어서 듣게 될 것입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66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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