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승천대축일

2015. 8.15. 광복절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

눈을 떠야 광복이지!

 


 

오늘은 우리나라의 연중 가장 성대한 국경일입니다. 그리고 올해의 이 날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점치하로부터 풀려난 지 만70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이러한 광복절에 우리가 동시에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낸다는 것은 더욱 그 의미를 지닙니다.

 

동일한 날에 우리 교회의 축제와 더불어 맞이하는 70주년의 민족 최대축제는 매우 각별한 감회를 갖게 합니다. 8월 15일이라는 한날의 민족 광복과 성모승천의 축제는 서로 통하는 의미를 이룹니다. 그래서 오늘 이 두 가지 축제를 지칭하는 명칭의 뜻을 먼저 생각해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풀려난 역사적 사실을 일반적 의미의 ‘해방(解放)’이라는 말보다는 ‘광복(光復)’이라는 말로 일컫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사슬을 벗어났다는 수동적 의미를 넘어서 정신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는 능동적 의미를 강조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해방’이라는 말은 노예 신세를 면하게 된다는 수동성의 의미이겠습니다만, ‘광복’이라는 말은 빛을 되찾는다는 의미로써 스스로 새날을 펼친다는 능동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광복 70주년의 오늘은 우리 민족의 역사 자체에 중대한 의미 부여를 하게 됩니다. 그러한 오늘 ‘광복(光復)’과 ‘성모 승천’을 동일한 의미로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모 승천 대축일’은 성모님께서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그러나 ‘성모 승천’의 신비는 사실상 성모 마리아 한 개인에게 이루어진 사건 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표상으로 하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성모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신학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천주의 모친’ ‘새로운 하와’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 등등 성모 마리아를 일컫는 칭호가 많습니다만, 저는 오늘 그분을 일컬어 ‘교회의 표상’이라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는 눈으로 동시에 교회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교회의 표상’이라는 점은 오늘 미사에서 봉독하는 ‘마리아의 노래’(루카 1, 46∼55)로써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축제에 복음으로 읽는 ‘마리아의 노래’(루카 1, 46∼55)는 마리아 개인의 노래이기에 앞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원초적 공동체 즉 초대교회가 부르는 노래였음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그 ‘마리아의 노래’란 본시 구약성경에서 발췌하여 예루살렘의 첫 교회 공동체가 모임을 가질 때 늘 부르던 노래입니다. 루카복음서가 그 노래를 채집하여 ‘마리아의 노래’로 복음서에 수록한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 신자들과 마리아의 모습이 같은 처지로 비쳐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로 운명이 바뀐 체험을 실토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권세와 부요로 떵떵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힘없고 가난하여 멸시받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아니면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 보잘것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로써만 그 운명의 새날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의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는 무관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세와 부요가 하느님의 자비 앞에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마치 햇볕이 들면 곰팡이가 말라 없어지듯이 세상의 권세와 부요란 하느님 앞에서 스러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권력과 물질로 빚어지던 사람들 사이의 차별적 불행은 철폐될 것이고 오히려 간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사람들을 거두어 살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보다 더 바랄 세상이 또 있겠습니까? 이러한 새로운 날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박해 중에도 굳건히 믿음의 길을 가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희망을 표현한 것이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가 오늘 최대의 국경일에 부르는 ‘광복의 노래’와 그 의미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에 함축된 우리의 신앙고백은 하늘로 불려 올림을 받은 마리아처럼 이 세상 고통의 질곡에서 풀려나고(해방되고) 하느님 나라에 불림 받는 그날을, 즉 새로운 날을, 바라보는 하느님 백성의 노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천의 은총을 입은 마리아의 모습은 곧 하느님 백성의, 즉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 신자들의 예표입니다. 해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이 세상 죄악의 굴레 속에서 고통을 받고 죽어가던 인류가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즉 광복의 날을 맞이하는 대축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은 우리나라의 광복절 즉 우리 민족의 새날을 맞이한 기쁨과 그 맥을 같이하여, 우리가 나아갈 앞길을 희망으로 내다보게 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더 없는 기쁨을 선사하며 새로운 삶으로의 다짐을 외치게 하는 날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더불어 저는 뜬금없는 질문을 해봅니다. 8월 15일을 ‘해방의 날’이라 하지 않고 왜 굳이 ‘광복의 날(光復節)’이라 일컫는지요?

 

앞에서 제가 강조한 말을 다시 반복합니다. ‘해방(解放)’이라는 말은 노예처럼 사슬에 얽매어 있다가 풀려난다는 수동성을 내포한 말이라면, ‘광복(光復)’이라는 말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능동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둠을 걷어내고 빛을 다시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인터넷을 통하여 읽은 다음과 같은 글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비록 타력에 의한 해방이었지만 우리의 눈물 나는 염원이 담긴 해방이었다. 그러나 해방은 어떻게 전개되었던가? 우리의 염원은 강대국들의 횡포를 당해낼 수 없었다. 나라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점 되었다.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들어서서 김일성을 세웠고 이남은 미군이 들어서서 이승만을 세웠다. 들어선 두 정권은 서로를 허수아비(괴뢰)라고 불렀다. 이렇게 되기 위해 그려 온 해방이 아니었다. 일본은 왕의 목이 잘린 것도 아니고 천황제가 폐지된 것도 아니었다. 악질적인 침략의 벌을 침략자가 받지 않고 그 희생자에 불과했던 우리가 받은 셈이었다. 독일이 받은 분단의 벌은 침략에 따른 벌이었지만 우리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했는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수치스런 전후처리였다.”

 

이 글은 이수태 씨라는 분이 “우리에게 과연 광복은 왔는가?”라는 제목으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기고한 글의 일부입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세월은 살 같이 흘러 마치 광복 70년이 순식간에 오듯 광복 100년, 150년도 순식간에 올 것이다. (…) 광복 70주년을 맞이했지만 암담하게도 이 땅에 회복된 빛은 보이지 않는다. 가로막힌 장벽, 전 세계가 이미 떨쳐낸 지 오래 된 허망한 대결구도만 삼엄하게 남아 있다. 이 깊고 오랜 정체가 풀려 모든 분야가 탁 트인 전망을 향해 시원하게 질주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그 옛날 광복의 꿈에 젖어 노심초사하던 선현들의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위에 인용한 이수태 씨의 글은 우리 민족의 최근 70년사를 회고하면서, 일제강점으로부터 벗어난 이후의 역사란 진정 ‘광복’을 실현한 것이 못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지적한 내용입니다. “이 땅에 회복된 빛은 보이지 않는” 그 현실은 과거 일제강점기 암흑의 연장선상에서 분단의 70년이 오늘까지 이어져온 우리 민족의 부끄러운 상황인 것입니다. 외세에 의한 이 비극적 분단을 우리 민족 스스로 해소하지 못하는 그것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란 남한과 북한의 체제와 정치적 상황 탓이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도 남과 북의 모든 국민(인민)의 대결적 의식구조 안에 주변강대국의 힘에 의존해야한다는 생각이 굳혀있는 탓인 것입니다. 남과 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민족 스스로는 통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서 지나온 70년을 버틴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과 북의 사이에 쌍방의 증오로써 스스로의 안보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적 자기기만이 또 있을까요? 한마디로, 서로 미워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 광복의 새 지평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해가 떴어도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런 빛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와는 달리 스스로의 눈을 떠야만 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을 떠야 다시 빛의 세계를 누릴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광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끼리 불행을 자초하던 갈등과 미움을 넘어감으로써 스스로를 해방할 것입니다. 우리가 한 민족이면서도 서로 미워하기를 체질화한 그것이 우리의 죄악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그 죄악을 떨쳐내어야 진정 광복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죄악으로부터 해방되는 광복의 자세로 또한 우리 민족 안의 갈등과 대결을 뛰어 넘을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갈등과 대결이라는 것은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아집과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은 오늘 새삼스럽게 ‘마리아의 노래’ 가운데 한 구절을 절실하게 되뇌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루카 1, 51) 이 노래의 구절은 마리아의 모습으로 광복을 간구하는 신앙인들 즉 교회의 노래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힘의 논리’로 해결하려 하는 교만한 대결로써는 암울한 분단의 역사를 통일의 시대로 승화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화해할 첫걸음은 곧 ‘힘의 논리’를 바로잡는 것이어야 합니다. ‘힘의 논리’란 무엇입니까? ‘증오의 대결논리’입니다. 하여 광복 70주년이 아니고 사실은 ‘분단 70주년’을 맞이한 우리의 부끄러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부끄러움을 깨달은 마음에서 우리는 오늘 하느님을 향하여 마리아처럼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 52)하고 말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이렇게 못난(비천한) 모습으로 70년을 살아왔습니다.’하고 실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눈을 뜨고 이제부터 진정 광복을 우리의 것으로 체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눈을 떠야 광복입니다.

 

그러한 광복을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의 축제를 모든 그리스도인의 축제이자 전 인류의 축제이며 우리 민족의 축제로 승화해야겠습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67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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