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일

2015. 10.11. 09:00 하부내포성지 도화담 공소

 

자유를 얻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참 자유는, 모든 것을 버림에서!



 

오늘의 마르코복음서 10장 17∼30절은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걸어가야 할 ‘가난한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청빈의 덕’을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참다운 제자가 되려면 세상에서 가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삶’, 즉 청빈이란 빈민처럼 궁핍하고 거지같이 추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가난의 삶’은 기실 가장 ‘넉넉하게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청빈의 삶’이라 합니다. 그것은 역설적(逆說的)으로 가난을 살아야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어, 거기에 하느님나라를 얻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의 예수님 말씀은, 그분께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면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버리실(죽으실) 예정입니다.

 

우리도 죽게 될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몸마저 버리게 될 것입니다. 즉, 누구나 죽게 되면 아무 것도 더 가질 수 없이 가장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장 가난하게 되면서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 행복에 도달하자며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逆說)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삶이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 것입니다. 참 자유를 얻는 역설적 삶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적 삶의 방식을 우리는 ‘복음덕(福音德)’이라 합니다. 그 복음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정결(貞潔)과 순명(順命)과 청빈(淸貧)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하느님나라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세 가지 길, 즉 복음삼덕(福音三德) 가운데 오늘의 성경에서는 청빈의 덕을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나타났지만 재물 때문에 제자의 길을 택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시고(마르 10, 17∼22 참조), 제자들에게 청빈의 덕을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마르 10, 23∼31 참조).

 

하느님나라에로의 길로써 제시된 정결과 청빈과 순명이란 자아포기(自我抛棄)의 삶인 것입니다. 복음삼덕 즉,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참 행복의 경지란, 자기 자신을 포기해서 모든 것을 얻는 ‘참 자유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참 자유의 삶’이란 곧 현세적 삶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떠남으로써 시작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어차피 나 자신과의 싸움, 물질과의 싸움, 세상 사람들과의 싸움 가운데 삽니다. 이 세 가지 싸움에서 나의 자리를 빼버려야 합니다. 그 세 가지 싸움터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평화가 곧 하느님나라를 얻음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을 극명하게 분출시키는 것이 성욕(性慾)일 것입니다. 그 본성에서 해방된 사람 곧 자기 자신을 떨쳐 나아가는 길이 정결한 삶입니다. 그리고 물질과의 관계에서 사람을 얽매는 것이 탐욕(貪慾)입니다. 재물한테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 탐욕의 굴레에서 자기 자신을 빼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위에 오르고자 하는 권력과 명예욕 때문에 싸움을 일으킵니다만,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섬기는 사람의 모습이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 자신의 본성과 물질과 세상과의 대결에서 우리는 그 ‘자아포기’라는 근본적 결단으로써 승리의 기선을 잡고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섰던 어떤 부자는 결국 그 자아포기의 근본적 결단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불만을 품고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마르 10, 22 참조).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이 제시하는 모든 계명을 다 잘 지켜왔고(마르 10, 20 참조), 영생을 얻고자 하는 열망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입니다만(마르 10, 17 참조), 자신의 많은 재산에 대한 소유욕, 즉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기란 습관처럼 쉬운 일이었지만, 가진 것을 버리기란 그렇듯 어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포기로써 가장 큰 보화를 얻는다는 그리스도 추종의 행복을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부자가 떠나간 후에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 2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간혹 과장적 상징의 표현을 쓰시는데(다른 예 - 마태 7, 3∼5 ; 눈 속의 들보), 오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 하나도 없을 것 같다는 당혹감에 빠집니다(마르 10, 26 참조). 여기서 낙타가 빠져나가지 못할 바늘귀란 글자 그대로 옷 꿰매는 바늘의 귀를 뜻하기도 합니다만, 옛 성곽에 활 쏘는 돌구멍이 있는데, 그렇듯이 어떤 물체가 통과하는 구멍을 뜻하기도 합니다. 배수로의 중간에 물건이 걸려있으면 물이 흐를 수 없듯이,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세상 재물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잡아두는 장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애물은 우리의 진로를 가로막고 방해할 뿐만 아니라, 찌꺼기가 끼면 또 다른 찌꺼기까지 점점 더욱 걸리게 하여 결국 그 통로를 폐쇄시켜버리듯이,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가두어버리는 마력을 지닙니다. 돈 많은 사람일수록 더 인색한 경우가 그렇지요. “있는 사람이 더해!”라는 비웃음이 있듯이, 재물에 사로잡히게 되면 더 옹색해지기에 그렇습니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한 말이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불행한 게 아니라 불편할 따름이다.” 그러나 저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돈이 없어서 불편한 것보다는 돈이 많으면 더 불편하다.”하고 말입니다.

 

20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부자였다고 기록되는 미국의 록펠러는 본래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악덕기업주라며 비웃었고, 혹 그가 자선기금을 기탁하더라도 그것을 더러운 돈이라며 사람들이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돈벌이 화물을 배로 보내면서 들게 되어 있는 보험을 돈 아깝다며 들지 않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자기 화물선이 출항할 때 폭풍예보를 듣고 사고를 당할까 하여 모처럼 보험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사고 없이 화물선의 항해가 끝났을 때, 그 보험금이 아까워서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자질 못하던 그런 구두쇠가 록펠러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48세에 큰 병에 걸려 이제 살 희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조용한 시골에 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재산이 많던 사람이었지만 가난한 사람이 먹는 만큼도 먹지도 못하고 돈을 쓸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루 몇 숟갈의 죽이나 먹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긴 밤 내내 잠도 못 이루고 눈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인생에 대한 많은 회한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하고 살아왔던 지난날과는 반대로, 이제는 어떻게 하면 돈을 잘 사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니 마음이 평화로워졌습니다. 구두쇠의 더러운 돈이라면서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만,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인류사에 난치병을 획기적으로 치유케 한 페니실린을 발명한 것도 그의 기부금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 참에 세계적인 복지사업을 세웠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계속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록펠러 재단’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부자 중에 일생 동안 돈을 가장 잘 쓴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는 사람으로서 이름을 남길 만큼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에서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예수님께서 어떤 부자에게 당부하셨지만, 그 부자는 그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르 10, 21∼22 참조). 재물을 버리기란 간직하기보다 정말 어려운 건가…!

 

여기서 우리는 오늘 성경의 그 떠나간 부자와 록펠러를 비교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자유를 얻기가 그렇게 어려운가?”하고 말입니다. 록펠러가 재물에 집착하며 살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 재물에서 떠나는 마음을 돌이켰다는 것은, 그러한 삶의 전적인 방향선회를 이루었던 것이라 할 그만큼 죽을병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듯이,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었습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어려운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가 돈이 많든 적든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돈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 삶으로의 전환 방법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물질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재물을 나누어 타인을 돕는 일이 선행(善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 행복을 얻게 됨을 우리는 여기서 깨닫습니다. 재화를 부둥켜안고 지키기란 나 자신을 얽매는 것이지만, 재화를 자신의 손에서부터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자유를 얻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가난에서 얻는 풍요(豊饒)이고, 청빈에서 행복을 깨달은 가난한 마음의 부자가 얻는 자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가진 것을 지킴으로써 행복을 얻기란 실로 힘든 고역이겠습니다만, 가진 것을 손에서 놓을 줄 아는 자유를 택함으로써 인생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와 행복의 바탕이란,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자아포기’ 그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나라로 향한 복음적 삶, 즉 ‘복음삼덕’의 기초는 자기를 떠남인 것입니다. 정결도 순명도 청빈도 모두 공통적으로 자기 자신을 버림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아포기’로써 인간 자신의 본성도 재물도 세상도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 제자들의 나아가는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자유의 길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죽음을 향하여 가시는 역설의 길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오늘의 말씀대로 깨닫게 하십니다. 그 역설적 자유의 길을 우리 신앙의 선조 순교자들께서 따라가셨습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76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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