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일

2015. 10.25 하부내포성지

 

미혹(迷惑)의 구렁에서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 48)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던 여정 중 그 막바지 단계의 사건을 오늘 복음서에서 봅니다. 그 여정 중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수난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8, 31∼9, 1 : 마르 9, 30∼32 : 마르 10, 32∼34 참조). 그러나 예수님의 그 말씀을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엉뚱하게도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의 영예로운 자리나 바라면서(마르 10, 35∼45 참조)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도시인 예리코에 이르기까지도 아직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지요.

 

예리코 성벽처럼 미혹에 갇힌 제자들


그 예리코는 옛적에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마지막 단계로 지나야 할 도시였는데 거기 가로막고 있는 성벽을 믿음의 기도로 무너뜨렸던 곳이었습니다(여호수아 6장 참조). 그렇듯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던 여정의 마지막 지점에서 제자들 또한 예리코 성벽 같은 미혹(迷惑)을 떨쳐내야 할 믿음으로 깨달음의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그 미혹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오늘 눈을 뜬 기적(마르 10, 46∼52)에서 우리는 체험해야 합니다.

 

눈을 뜬 것은 눈먼 거지였다


오늘 눈을 뜬 예리코의 그 눈먼 거지는 어떠한 사람이었겠습니까? “티매오의 아들” 즉 “바르티매오”(마르 10, 46)라고 마르코복음서가 소개하고 있는 그 “눈먼 거지”는 예리코의 길거리를 지나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보았음직한 바로 그 거지였던 것입니다. 그 눈먼 거지는 지나는 뭇 사람들한테 멸시받는 존재였습니다. 왜냐면 그 당시 눈먼 사람이라면 천벌을 받은 죄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과 가까이 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는 그저 지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세요, 자비를!”(Have mercy, please! Have mercy!) 하고 부르짖을 뿐입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그러한 그에게 소문으로 듣던 ‘나자렛 출신 예수’라는 분이 지나가신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 48) 라고 말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지나는 사람에게 ‘한 푼 줍시오.’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부르짖음은 우리도 반복하고 있는 호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면서 올리는 부르짖음 아니겠습니까?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Christ, have mercy!) 하고 우리도 미사를 시작할 때마다 주님께 애소(哀訴)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컬어 “주님! 그리스도님!”이라 하듯이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면서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부르짖은 그 눈먼 이의 외침은 우리가 하듯 그분을 ‘그리스도’로 호칭하는 믿음의 애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렇기에 그 눈먼 이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 51) 하고 물으시는 그분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 51) 하고 호소합니다. 이 순간 그는 이미 소경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을 뜬 사람입니다. 그는 “한 푼 주십시오.”가 아니라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믿음을 고백한 것이지요.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 52)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경우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까요?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교우님들 간혹 계십니다. “돈을 벌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아들 대학시험 잘 보게 해 주십시오.” “집안의 우환을 쫓아주십시오.”

 

한 푼 달라고 하는 것은 자비를 구하는 게 아니다


이런 기도는 “한 푼 주십시오.” 하는 거리의 거지와 같은 부르짖음이지요. 거지가 손 내밀며 부르짖는 말은 지나는 사람을 그저 ‘한 푼’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구걸하는 말일 뿐입니다.

 

십 수년전 본당시절 에피소드


제가 십 수 년 전 도시 본당에 있을 때의 체험담을 말씀드려봅니다. 제가 있던 그 본당의 지역에는 속칭 ‘맹인 촌’이라는 변두리 산비탈 동네가 있었습니다. 행정당국에서 생활능력이 없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하여 허술한 주택을 지어 살게 해준 지역이었습니다. 거기에 사는 분들 가운데 우리 천주교 신자 장애인 세대도 몇 있었습니다. 그분들께 제가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선물도 주고 고해성사와 봉성체를 해드리곤 했습니다.

 

어두컴컴한 방을 밝히려 전기스위치를 올린 맹인 부부의 신앙심


그런 신자 중에 본래 태생시각장애가 아니고 젊었을 때 한약을 잘 못 먹어서 눈을 못 쓰게 된 부부가 있었습니다. 제가 방문하면 늘 정갈하게 방을 정리하고 아주 밝은 표정으로 봉성체를 기다리는 부부였습니다. 제가 그 집 토방에 올라서면 “예수님과 신부님, 오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 거기 문턱 조심하세요.” 하면서 어두컴컴하던 방을 밝히려고 전기 스위치를 올리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성체 모실 탁자 위에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며 전기 값 아끼려고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 있다가 거기 들어오는 사제에게 전기 불을 켜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성체를 영하고는 그 환해진 방안만큼이나 밝게 웃는 얼굴로 행복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두컴컴하던 방을 마치 축제의 불처럼 밝히기나 하듯 전등불을 켜고 즐거워하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런 그 부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들의 생활사정을 물어보았더니, 동사무소에서 주는 기초생활비로는 난방비나 또는 구역반의 모임회비를 다 충당할 수가 없어서 벌이를 하러 가끔 시내에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벌이가 무엇이냐고 묻는 저에게 그 부부는 “신부님이 아실 것 없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을 나와서 다른 집으로 향하는 제가 뒤돌아보면 그 부부는 방문을 열어놓은 채 밖을 내다보며 저의 뒷모습을 바라보듯이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것입니다. 앞을 못 보는 그들이지만 성체를 영한 그들의 눈은 제가 골목길 비탈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가 시내에 나가 돌아다니는데, 번화한 시장 어귀에서 그 부부가 길에 앉아 양은냄비 같은 것을 앞에 놓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편은 이쪽 길가에 부인은 저쪽 길가에 앉아서 말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리털까지 감전된 듯 우뚝 서서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아실 것 없어요.”하면서 저에게 자기들의 그 벌이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던 그들을 거기서 발견한 저는 한참 동안 앞가슴이 큰 바위덩어리로 짓눌리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들 앞의 냄비에 넣어주는 것 없이 그냥 지나치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우뚝 서서 바라보고 있던 저는 행여 그분들이 저를 알아볼까 하여 발소리 나지 않게 다가가서 냄비에 지폐 한 장씩 넣어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들여다본 냄비 속에는 동전 몇 닢이 들어있었습니다. 제가 소리 나지 않게 종이돈을 넣었습니다만, 그분들은 어찌 알았는지 돌아서는 저의 뒤에 대고 “고맙습니다.”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맹인 부부의 생활상


집에 돌아오면서 그리고 그 후 며칠이 지나도록 저의 눈에는 길거리의 그 부부 모습이 어른거리고 형언할 수 없는 착잡함으로 마음이 우울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성체 모시고 그 부부를 방문했을 때 그분들은 언제나 그렇듯 밝은 얼굴로 저를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보던 그런 얼굴이 아니지요. 돈 한 푼 냄비에 넣어주고 돌아서는 저에게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던 그 얼굴에서는 그런 밝은 빛을 엿볼 수 없던 기쁨을 그분들은 성체를 모시고 오는 사제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길에서 저를 행여 알아보았을지 몰라서 저는 그 후 그분들의 생활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부는 기도하면서 봉성체를 준비하고 사제를 기다리던 모습과는 달리 길거리에서는 그렇듯 밝은 얼굴이 아니었지요. 봉성체 때마다 가장 행복해 하는 표정은 그들이 지닌 신앙을 표현하던 그 얼굴이었지요. 구걸하여 돈 몇 푼 얻을 때의 얼굴은 그런 게 아니지요.

 

무엇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해야 하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지나가시던 마지막 동네 예리코에서 그 눈먼 거지는 그분을 ‘한 푼 줄 수 있는 분’으로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줄 수 있는 구세주로 깨닫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하며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눈먼 처지에서지만 지나시는 그분을 알아보는 신앙의 눈을 뜬 사람이었습니다. 겉옷을 벗어던졌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 모습을 벗고 새로운 발걸음으로 도약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자손’ 즉 ‘그리스도님’이라 그분을 부르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님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주님을 보게 하여 주시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을 알아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여, 그는 눈을 뜨고 곧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마르 10, 52).

 

예루살렘에 이르러서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그러나 주님의 수많은 기적을 보고 가르침을 듣고도, 또 더욱 주님께서 직접 당신의 수난예고를 세 번씩이나 들려주셨는데도, 그분이 예루살렘에 왜 가시는지를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그 여정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도록 아직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렇듯이 우리도 마치 주님의 땅을 향하여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예리코 성벽 같은, 그러한 미혹의 벽을 아직도 허물지 못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그 바르티매오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추한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서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태의연한 구실에 연연하여 참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세속적 타성을 떨쳐내야


참 믿음으로 눈을 뜨고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나설 수 있도록 우리는 세속적 타성을 떨쳐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보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알아보시기를 바란다면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신앙을 고백하며 떨쳐 일어난 그 바르티매오처럼 나 자신도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나의 앞에 와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믿음에 있어 소경이라면 나는 주님을 소경으로 취급하는 꼴인 것입니다. 그런 예를 들자면, 성경을 아예 읽지도 않는 신자일수록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 꼴인 것입니다. 그런 신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다하여 주님을 상대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님, 제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예리코를 지나시듯이 우리의 이 세상길 혼미함의 벽안에 갇힌 나의 앞을 지금도 지나시고 계십니다. 미혹(迷惑)의 구렁에서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믿음을 고백합시다. “주님, 제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마르 10, 48)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처지를 돌보시기를 내가 바란다면, 나의 캄캄한 처지에서도 나의 신호를 그분께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신호 그것이 곧,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 믿음으로 주님을 알아 뵙는 깨달음의 눈을 뜰 것입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0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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