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일
2015. 10.4.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꽃잎은 지지만, 꽃은 영원하다!
모든 여인은 죽지만, 어머니는 영원하다!
오늘은 연중 제27주일의 미사를 올리는 주일입니다만, 날짜로 오늘10월 4일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추앙하는 축일입니다. 현 교황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더불어 프란치스코의 이름으로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교우님들께 축하를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꽃잎은 하나 둘 떨어지는데, 꽃은 영원히 지지 아니하네.”
이 말씀이 어디에 기록되어 전해지는지 제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만, 연전에 타계한 천주교 신자작가 최인호 씨가 자기의 수필집 ‘부끄러움에 관한 명상’ 중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제목의 짤막한 수필 가운데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 매력적인 시어(詩語)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표현대로 모든 여인은 죽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꽃잎은 하나 둘 떨어지지만 꽃은 영원히 지지 않는다.”하신 말씀에서 ‘꽃잎과 꽃’ 대신에 ‘여인과 어머니’로 말을 바꾸어 글을 쓴 최인호 씨는 또 다른 수필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아홉 살인가 먹었을 때 하루는 그의 아버지께서 한 촉의 난 화분을 사오셨답니다. 그리고는 햇볕 잘 드는 현관 난간에 올려놓으시고 아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시더랍니다. 한데 그 후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고, 그 난은 현관 앞 공터에서 싱싱하게 자라며 끊임없이 꽃을 피워 오는 게 삼십 년이 지났답니다. 처음에는 몇 가닥 줄기에 불과하던 것이 그 세월에 큼지막한 떡시루와 같은 화분을 가득 메워 불어났답니다.
그런데 그 난은 그 현관 앞 공터에서만 자라는 게 아니고 아들 형제들 집집마다 베란다에서 혹은 현관 난간에서 자라고 있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딸과 사위의 집에서도 자란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이 있답니다. 그 아들딸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즉 사랑하는 남편을 그리는 마음 하나로 키우면서 분갈이 할 만큼 자랄 때마다 아들들의 집에 그리고 이민 가던 딸에게 나누어 주셨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조금만 날씨가 차가워져도 득달같이 아들딸 집에 전화를 걸어 “날이 추워졌다. 난 화분을 방에다 들여 놓아라. 안 그러면 난이 얼어 죽는다.”하시더랍니다. 그리곤 며칠마다 전화를 다시 걸어 “난 화분에 물 주었니?”하시던 어머니였답니다. 그 난은 그렇게 어머니께서 마치 자기 남편의 육신인양 정 붙여 물주고 가꾸어 아들딸들에게 나누어주고 일일이 전화로 확인해가면서 그 꽃대에 보랏빛 꽃이 피는 계절이면 그게 아버지의 유품임을 상기시키곤 하셨답니다.
그러시던 어머니께서도 돌아가신 후 어느 날 작은 아들(최인호)은 자기 집의 거실 앞 베란다에 이상하게도 흰 꽃이 핀 난 화분을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해서 자기 아내에게 그 꽃은 어이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 난 화분은 어머님께서 사 오셨던 난이예요.”하더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최인호 씨의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생전에 꽃을 유난히도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오래 전에 새로운 난 하나를 가져오셨던 모양이다. 이 난에서는 흰 꽃들이 피어난다. 너무나 순결하고 아름다워서 흰 면사포를 쓴 처녀의 수줍은 얼굴과도 같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난 화분을 하나 사오셨듯이 어머니께서도 죽음을 예견하시고 난 화분을 우리 집에 유산으로 물려주시고 가신 게 아닐까.
우리 집에서는 요즘 집 앞쪽과 반대편 뒤쪽에서 번갈아 난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하나는 현관문 앞에서, 하나는 거실 앞 베란다 위에서.
나들이 할 때면 나는 더 높은 곳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청을 올린다. ‘어머님, 다녀올께요.’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는 깍듯이 인사를 한다. ‘아버님, 다녀왔습니다.’
꽃이 무슨 아버지이겠냐마는 그 꽃 속에 숨은 마음이야 소중하지 않겠는가. 꽃이 무슨 어머니이겠냐마는 그래도 그 꽃 속에는 어머니의 영혼이 수북이 숨어 있음에랴.
옛 성인(프란치스코)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꽃잎은 하나 둘 떨어지지만 꽃은 영원히 지지 않습니다.’”(최인호, ‘부끄러움에 관한 명상’ 第三企劃 1991, 177∼183쪽 “난 잎에 어리는 얼굴” 중에서 인용)
이 글을 책으로 발표한 때가 1991년도인데, 그 후 십 수 년 지나고 타계한 최인호 씨의 형제들 집에 그 자줏빛 아버지의 난 꽃과 그 어머니의 흰 꽃 난이 지금도 피고 있을 것이라 저는 상상합니다. 그 최인호 씨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쓴 글을 제가 오늘 특별히 소개하는 까닭은, 오늘의 복음 성경을 읽는 가운데 ‘부부의 사이란 궁극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가는 사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제이기 때문에 부부생활의 체험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해서 혼인생활로 가정을 이루길 어찌 하라는 식으로 제가 교우님들께 말하면 별 설득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가정을 꾸려보지 못한 사제가 뭘 안다고…, 아내나 자식 때문에 당하는 고충을 알기나 해?” 하면서 교우님들께서 비아냥거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우자와의 갈등이나 자녀들 때문에 짊어지고 사는 고충 해소책을 제가 저 자신의 없는 체험으로 교우님들께 이야기해 드릴 자신이 없기 때문에 오늘 최인호 씨의 부모님 추억에 관한 꽃 이야기로 반복해서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그건 단순한 표현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란 궁극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가는 사이이다.” 하지만 이건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오늘날 세계 제3위의 이혼율을 보이는 나라가 우리 한국이랍니다. 2011년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이혼율이 약 47%라고 합니다. 두 쌍 중에 한 쌍이 이혼하는 셈이다. 1980년대의 이혼율은 8% 내외였는데, 그간 한 세대(30년)를 지내면서 계속 급격한 상승으로 47%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정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그 이유를 가정학이나 사회학 또는 인간학적 연구와 실증적 통계자료로 짚어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 치솟는 이혼율, 그것도 혼인 후 조기 이혼율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실을 놓고 볼 때, 저는 오늘날 혼인하는 사람들이 배우자 상호간의 포용적 이해나 가정 지키기를 쉽사리 포기하고 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1980년대에 비해 2000년대에 들어와서 결혼 건수는 21% 감소한 반면에, 결혼 건수 대비 이혼 건수는 470% 증가한 통계로 분석 된답니다. 미루어 보건대, 결혼하고 나서 수틀리면 빨리 이혼해버리는 추세인 것입니다. 그렇게 쉽사리 이혼하는 추세는 그 사유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만, 배우자 상호간에 서로 단점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서로가 상대방이 나에게 잘 해야 한다는 개인중심주의적 의식의 팽배가 그 원인의 바탕인 것입니다. 그 반증으로 2000년대에 들어와서 경제적인 이유로 이혼한 건수가 10배가량 증가하였으며, 사법연감의 통계에 의하면 자신에게 대한 상대 배우자의 태도(대우)가 좋지 않기 때문에 이혼한다는 경우가 30%에 육박한다는 것을 보면, 부부 상호간 사랑의 노력보다는 “네가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살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쉽게 갈라서는 경향이 점점 팽배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2010년도의 분석에 의하면, 성격차이와 경제적 이유로 20∼30대는 78.7%가 갈라서고, 40∼50대는 57.5%가 갈라지게 되는 이혼 사유라 합니다. 그러므로 혼인생활 황금기의 부부가 살다보니 성격이 안 맞고 경제적 능력이 미치지 못하다는 이유를 내걸어 이혼하게 되는 경우가 평균 68.1%입니다. 다른 것보다도 성격과 경제 여건을 탓하는 경향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율 세계 제3위이면서 또한 낙태율 세계 제1위의 우리나라는 물질적 풍요와 쾌락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풍조가 팽배해 있다는 그 반증을 보이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적 활동영역이나 경제적 독립이 강화되면서 남편의 경제력에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아내가 과감히 갈라서려 하는 의식의 팽배가 더욱 조기 이혼율을 치솟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앞서 인용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처럼 “꽃잎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는” 꼴인 것입니다. 하지만 꽃잎은 시들어져간다 하더라도 “꽃은 지지 않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 진리를 작가 최인호 씨는 읊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표현대로 모든 여인은 죽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여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쉽사리 이혼하는 이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어머니’라 일컬어지는 분들은 가정을 지키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 최인호의 어머니가 고이 키워 자녀들에게 남겨준 아버지의 보랏빛난초꽃과 자기의 영혼을 담아 아들에게 남겨놓은 하얀 난초꽃은 여기서 상징적으로 가정과 자녀를 지키는 부부의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부가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각자 상대방에게서 기대하는 좋은 것만을 좇아서 만난 듯하여 그 기대감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갈라서는 오늘날의 팽배한 풍조란 사실 그 까닭을 따지고 보면, 애시 당초 혼인이란 가정을 이루는 것이 그 목적임을 망각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지난해에 서울에 가서 1쌍 대전에 가서 1쌍의 혼인미사를 주례한 일이 있습니다. 작년의 그 두 쌍 신혼부부에게 저는 다음과 같은 말을 주례강론에 섞었습니다. “오늘의 혼인식은 둘이 사랑을 완전하게 맺었음을 공표하는 자리가 아니다. 이제부터 둘이 사랑을 하기 시작한다고 하느님과 세상의 눈앞에서 약속하는 자리이다. 오늘부터 둘이 살아가다가 상대방을 사랑할 가치가 별로 없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 때문일까? 상대방의 단점들이 드러날 때 그렇게 느낄 것이다. 오늘 둘이 사랑을 하기 시작한다고 약속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상대방의 결점(단점)을 사랑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상대방의 아름다운 점에 이끌려서 연애하여 오늘 혼인서약을 하게 되었다면, 그건 오늘부터 상대방의 결점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삶으로 들어간다는 서약인 것이다. 서로 결점을 먼저 사랑하라!”
작년에 이와 같이 5월 5일에 서울에서, 11월 22일에 대전에서 혼인주례의 강론을 했습니다. 5월 5일의 신혼부부에게는 “오늘 날짜가 그렇듯이 오래오래 상대방의 결점을 사랑하라”고 말했고, 11월 22일의 신혼부부에게는 “오늘 날짜가 그렇듯이 하나는 하나에게 서로 그 결점들을 두루두루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할 가치가 적다는 시각으로, 즉 상대방의 결점을 따져보는 눈으로 서로를 보게 될 때 혼인생활의 위기가 닥칩니다. 서로의 단점을 사랑해야하는 삶이 혼인생활입니다.
그렇습니다. 살다가 어떤 순간엔 혼자 뇌까릴 때가 있겠지요. “저따위 인간과 내가 왜 함께 사는 사이가 되었나? 그러나 어쩌나! 자식새끼가 있으니…!”하고 부부들께서는 상대방의 결점에 눈을 감아버리곤 하시지요? 그렇게 생각을 돌이키는 그 순간의 부부는 남녀 사이의 입장이라기보다는 부모의 입장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더욱 반복해서 강조해야할 말이 이것입니다. “부부 사이란 궁극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가는 사이이다.”라는 평범한 말입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이란 결과적으로 자녀를 얻고 키우는 가정으로써 그 완전한 성취를 하게 되는 사랑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하거늘 가정을 쉽사리 파기하고 자녀들에게서 무참히 보금자리를 깨부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혼이란 원초적으로 천륜을 거스르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사유에 의해서도 이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부 상호간에 상대방의 어떠한 결점도 덮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가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성경에서 이른바 율법을 빙자하여 이혼의 합법성을 획책하던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들은(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 8∼9)
이에 대하여 꽃잎과 꽃을 노래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으로 저의 해석을 붙여봅니다. 꽃잎이 피어 수술과 암술이 씨앗을 품는 동안 그 꽃잎이 지더라도 꽃은 그 씨앗을 맺기 위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인식한 작가 최인호는 ‘난 잎에 어리는 얼굴’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부부가 꽃잎으로 한 꽃을 이루면서 씨앗을 맺어가는 사랑을 한다면 자신들의 청춘이 시들어간들 모든 역경에서도 가정이라는 꽃을 영원히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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