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주일, 연중 제33주일
2015.11.15.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미래'라는 알 수 없는 낭떠러지 앞에서
세상 한가운데에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현실의 껍데기 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씨앗으로!
마르코 복음서 13장의 종말설교
연중시기가 끝나는 다음주일, 즉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앞서 오늘 연중 제33주일을 한국교회는 ‘평신도 주일’로 지내는데, 오늘의 미사에서 마르코복음서 중 ‘작은 묵시록’이라는 별명을 붙일 만한 13장의 예수님의 ‘종말설교’를 봉독합니다. 마르코복음서 11-12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을 성전에서 3일 동안 목격하시고는, 그 성전을 떠나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올리브 산에 올라 예루살렘성전을 내려다보시면서 묵시적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이 이 마르코복음서 13장에 수록된 ‘종말설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
당시의 그 예루살렘성전에서는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느끼시고 떠나오신 그분께 동행하던 제자가 그 성전의 현세적 영화를 감탄하는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 지를 지적하시고는(마르 13, 1∼2 참조),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 즉 거짓 예언들과 전쟁 등의 혼란과 박해와 인간들의 갈등과 재난들을 통하여 마지막의 때가 도래할 징표를 읽으라고 가르치십니다(마르 13, 3∼23 참조). 그 마지막 때 즉 종말에 보게 될 것이 곧 당신이 이루실 사건임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말씀(마르 13, 24∼37)으로 깨우쳐 주십니다. 이러한 13장 전체는 묵시록(黙示錄)과 같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부조리의 흑막을 걷어내려면
이러한 묵시(黙示·apocalypse)는 ‘현실을 지배하는 부조리의 흑막(黑幕)’을 걷어내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앞날’을 깨닫게 하여 주기 위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그것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오늘에서 내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즉 ‘지금’이라고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닥쳐올 앞날’의 징조를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깨달아라.”(마르 13, 28)고 하신 말씀이 곧 그러한 뜻입니다. 가지가 물이 올라서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징조임을 깨달으라 하시듯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보고 ‘곧 닥칠 다음 상황’을 예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시’의 메시지는 현실의 파국적 상황을 깨닫게 합니다. ‘종말’이 그것입니다.
오늘에서 내일을 보라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지금 당장의 일에만 매달려 있을 것이 아니라 앞날을 대처해 살아가는 것이 곧 ‘종말론적 삶’인 것임을 오늘의 예수님 말씀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란 현실을 직시함에 있습니다. 현실이란 항상 시간의 마지막 지점인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지점은 언제든지 간에 지금까지 달려온 시간의 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위치한 현실은 달려온 시간이 무너지고 있는 곳입니다. ‘미래’라고 하는 알 수 없는 낭떠러지 앞에까지 달려온 우리의 처지가 곧 ‘지금’이라고 하는 현실입니다. 여기서 이 우리의 ‘현실’도 우리가 지금까지 달려온 과거처럼 막 지나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이러한 현실을 묵시적으로 표현하여,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 24∼25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운명(殞命)의 순간에 일어납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던 순간에 태양마저 빛을 잃어 대낮이 캄캄해지고((마르 15, 33 및 루카 23, 44∼45 참조),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옛 聖人들이 살아나서 거리에 나타나게 되었는데(마태 27, 51∼53 참조), 그야말로 그 때까지 유다인들이 믿던 그들의 유일한 정신적 최후의 보루(堡壘)였던 예루살렘성전 지성소(至聖所)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짐으로써(마르 15, 38 ; 마태 27, 51 ; 루카 23, 45 참조), 현실의 모든 것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파국'의 사건
그러한 현실붕괴를 일컬어 ‘파국’(破局 catastrophe·καταστροφη)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파국’의 사건입니다. 현실에 드리워진 검은 베일을 쪼개는 것이 그런 ‘파국’입니다. 그 ‘파국’은 우리가 맞이해야 할 ‘새 시대’에 앞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것입니다(마르 13, 30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 ‘파국’을 맞이한 시대이며, 그러하기 때문에 새 시대의 징조를 지금 관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새 시대 즉 부활의 새 삶을 맞이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깨달아 사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종말론적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여, 지금 휘익 지나가는 세상을 살아가며 다가오는 ‘새 세상’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신자들입니다. 다시 어려운 말로 하자면, 지금의 이 찰나적 현실의 껍데기 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씨앗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끝장나 버릴 것 같은 파국적 상황인 요즈음
그 찰나적 현실이란, 곧 끝장나 버리는 파국의 시점(始點)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회적-국가적 또는 세계적 재난과, 인종 간 또는 체제 간 갈등과 가공할 무기경쟁, 어제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끔찍한 테러사건과 같은 우리 인간들의 야만성과, 이른바 개발을 앞세워 4대강을 썩게 하듯이 반생명적(反生命的) 파괴 행위들과, 비이성적 혼돈과, 도덕적 타락과, 무질서의 반문화적(反文化的) 감각주의(즉, 性의 타락상) 등을 대하면서, 우리 인간들에게 이제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할 수 없는 파국이 직면하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바라본 상황이 곧 파국적 상황입니다. 이러한 파국적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을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우리의 현실에 적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마르 13, 29)
그 다가오시는 ‘사람의 아들’(人子)께서는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시면서 천사들을 앞세워 보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마르 13, 26∼27 참조). 이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어지시는 그분은 부활하시어 하늘에 계시는 초월적 존재로서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내려오시는 분이시라는 의미로(다니 7, 13∼14 참조) 구름을 타고 오시면서 권능을 보여주시겠지만, 또한 동시에 오늘날에도 즉 우리가 아직 이 찰나의 현실에 빠져 있는 동안 언제라도 항상 당신이 뽑아낸 당신의 백성 속에, 곧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며 우리를 하나가 되도록 모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그분
그분은 이렇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 삶으로 우리를 바꿔주시는 분으로 오시는 분으로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금이 아닌 언제인가의 다음 날에 오실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는 바로 지금 그분이 와 계시는 것으로 대비하여 깨어 있으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마르 13, 32∼37 참조). 우리 자신 그러한 ‘깨어 있음’의 자세를 다짐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는 복음 말씀을 듣기 전에 ‘알렐루야’를 노래하면서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하는 말씀을 상기하는 것입니다(루카 21, 36 : 오늘의 ‘복음 환호송’ 참조). 즉 ‘종말론적 삶’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찰나적 현실 가운데 아직 걸어가면서도 이미 ‘주님께서 이루실 앞날’ 즉 ‘마지막 날’을 맞이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임을 증거 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 주일’이라는 오늘의 명칭을 내세우면서 이 연중시기의 마지막 기간에 그러한 그리스도인 모두의 사명을 새삼스럽게 다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에게 뽑힌 백성답게 그분의 권능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고, 그것이 곧 이른바 ‘평신도 사도직’ 수행의 본질인 것입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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