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 1주일

2015. 11.29. 하부내포성지

 

매일 매일 새로운 날!

우리에게는 365일이 희망의 날이다!



곧 오실 주님을 맞이할 희망의 노래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절은 희망을 메시지로 전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의 교회는 ‘곧 오실 주님’을 맞이할 희망을 노래하는 전례를 올립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곧 오실 분’이라는 신앙을 이 시기에 교회가 고백합니다. ‘대림절’(待臨節)이라는 말은 ‘오시는 분을 기다리는 때’라는 뜻이지요. 오시는 주님께서 지금 우리 문 앞에 당도해 계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을 오늘 대림 첫 주일의 복음에서 전해 듣게 됩니다.

 

종말론적 인식을 촉구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시간은 이미 주님의 시간으로 바뀌는 지점에 맞닿아 있다는 전갈을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이 시대에 대한 종말론적 인식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의 시간이란 항상 마지막 지점에서 미래에로 건너뛰는 찰나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현실이란 항상 순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순간의 다음은 꼭 우리가 맞이해야 할 주님의 시간인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어야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 신앙에 정향된 것이 됩니다. 우리 신앙이란 궁극적으로 현세가 아니라 현세를 뛰어 넘는 새로운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수리 산골에는 흰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연중 시기를 마감하는 지난 주간에 여기 만수리 산골에는 흰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수북이 내린 눈 속에서 대림절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열 두 장이었던 달력에 마지막 한 장으로 남게 될 12월은 저물어가는 한 해를 마감할 정리를 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해가 또 지나간다고 생각하니 쓸쓸해집니다. 여기 만수리 공소의 큰 느티나무 두 그루는 마당을 그늘로 채우던 그 무성했던 잎들을 떨구어 온통 낙엽으로 덮더니 이제는 그 거대한 몸집을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앙상한 가지들 사이에 달려드는 차가운 바람에 맞서 윙윙 소리를 지릅니다. 그것은 갑자기 들이닥친 겨울 앞에 생물들이 마치 죽음을 눈앞에 맞이한 듯 생장을 뚝 멈추고 고난의 시간을 대비하는 몸부림 같기도 합니다.

 

냉혹한 고독과 어떤 절박함


그렇듯이 한 해를 마감해가는 마음은 그 풍요로움으로 가득하던 들녘 대신 찬바람만 줄달음치는 빈 벌판에 나선 듯 냉혹한 고독과 어떤 절박함으로 휘감기게 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들을 뒤로 하고 미지의 앞날을 대비하면서, 그렇듯 지나가고 또 지나가는 시간 따라 아쉬움과 두려움이 찬바람처럼 휘감아 돌면서 마음을 빈 벌판으로 몰아붙이듯, 이 겨울의 문턱에서 맞이하는 대림절은 오늘 복음 성경에서 제시하는 묵시적 양상으로 우리의 깨달음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시간에 대한 깨우침을 촉구


이렇듯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겨울맞이에서 우리가 접하는 대림절 메시지는 사라져가는 시간에 대해서 그리고 새로이 다가오는 시간에 대해서 깨우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기실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것은 사람이 새로워지는 즉 젊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한 해 만큼 더 늙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타들어가는 촛불처럼 우리 모두는 소멸되어 간다


그러므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해가 가고 있음은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그 한 해 만큼 늙게 되었다는 사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듯 지구도 시간이 흐를수록 늙어갑니다. 그러면서 타들어가는 촛불처럼 우리 모두는 소멸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매 순간 벗어나면서 우리는 미지의 다음 순간과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현기증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그 아찔한 미지의 시간에 대한 절대권을 쥐고 계신 분을 믿는 신앙이 없다면 그것은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의 허망한 껍데기를 기꺼이 벗어던진다면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미지의 시간을 한 손에 거머쥐신 분이 우리를 받아 주시기 위하여 지금 우리 앞에 와 계시다는 그런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일컬어 현실 극복의 바람 즉 희망이라 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허망한 껍데기를 기꺼이 벗어던짐으로써 진정 새로운 삶을 향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러한 새 삶을 지향하여, 오늘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듯이, “그날이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루카 21, 34) 대비함으로써, 오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것”(루카 21, 36)이 우리의 대림절 다짐인 것입니다.

 

나 또한 이 방에 잠시 머무는 손님이라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35년 전 쯤 로마에서 공부할 때 저를 극진히 사랑해주시던 노인 신부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탈리아인으로서 베네딕도 수도사제로 당시 80세이셨던 분입니다. 저의 서툰 이태리어 실력을 보충해주시던 분입니다. 제가 논문을 쓰면서 원고를 들고 그분께 가면 하나하나 교정해주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방에는 낡은 침대 하나와 삐거덕거리는 걸상 두 개와 책상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실내에 필요한 다른 가구도 없이 불편해서 어떻게 사시느냐고 여쭙자 그분은 저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했습니다. “이 방에서 네가 써야할 가구가 있느냐?”


이 방은 나를 지나가는 손님으로 맞이해준 것일 뿐

 

그분의 그 반문이 무슨 뜻인지 저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답으로 질문을 다시 했지요. “저는 이 방의 손님이잖습니까?”

 

그러자 그분은 다음과 같이 저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이 방에 잠시 머무는 손님이라네. 마치 이 세상에서 자네도 나도 손님이듯이 말이야. 자네와 나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잖은가. 그렇듯이 나는 이 방의 주인이 아니지. 이 방은 나를 지나가는 손님으로 맞이해준 것일 뿐일세.”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나가는 손님으로 이 세상에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손님 신세를 면하고 안주할 그 어떤 곳을 향하여 우리는 이 세상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매 순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들을 그만 마치게 될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흐르는 시간 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완성된 시간 즉 하느님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때입니다. 그 때가 오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걸 확실하게 깨닫고 매 순간 깨어있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 분의 재림(再臨)을 앞당겨 체험하는 게 우리의 일상


그렇습니다. 매일매일 그리고 매순간 우리가 깨어있는 삶 속에 이미 주님께서 마지막에 일으키실 종말의 완성이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가는 모든 시간을 완전히 채워서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러 오실 그분의 재림(再臨 Parousia)을(1필립 3, 13 : 오늘 제2독서 참조) 앞당겨 체험하는 것이 깨어있는 우리의 하루하루입니다. 항상 깨어있다는 것을 일컬어 ‘희망’이라 합니다. 종말 즉 완성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큰 희망이 있을까요?

 

다음 주에 들려줄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기대하라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새로운 세계의 완성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매일 희망하면서, 그 희망에 대한 실제적 체험으로써 세상의 절망적 상황을 이겨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365일이 희망의 날들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매일매일은 새로운 날들입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365일은 매력적인 하루하루입니다. 희망의 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을 갖게 하는 확신, 즉 믿음을 지니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음주일에 요한 세례자가 말해줄 것입니다(루카 3, 3∼6 참조).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5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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