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

2015. 11. 8. 09:00 하부내포성지 도화담 공소

 

라면 한 봉지만도 못한 신앙일 수는 없지

사실 우리는 모두 과부같아야 합니다




사렙타 마을의 과부처럼


오늘의 말씀전례에는 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1독서 열왕기 상권 17장에는 이방인 지방의 사렙타 마을 과부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엘리야 예언자를 잘 대접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얻어 살게 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마르코복음 12장 38∼44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전 두 닢을 헌금으로 바친 가난한 과부를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동전 두닢을 바친 가난한 과부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다른 사람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 43∼44).

 

과부 이야기의 진실은 헌금을 걷어내야 보인다


간혹 목사들이나 사제들이 헌금을 정성껏 바치라고 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오늘의 이 과부 이야기를 설교용으로 써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 말씀의 강조 어구에 따라서 “진실로 말하자면”(마르 12, 43), 오늘의 과부 이야기는 절대로 헌금 강조를 위하여 써먹을 내용이 아닙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헌금에 관심을 둔 강론을 한번이라도 하셨다면 그분 역시 교회 사업을 위해 하느님을 팔아먹는 목사나 일부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 같이 속물(俗物)로 전락한 종교인 중의 한 사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종교인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오로지 하느님을 위하여 당신 자신이 하실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바치시는, 즉 목숨까지 바치시는 분으로서 그렇게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향한 순수 열정을 지닐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오늘의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11장 이하에 담긴 진실


마르코복음서 11장 이하를 통하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사흘 간 활동상을 읽으면서, 우리도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12장 44절로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셔서 하신 활동 내용이 끝납니다(마르 12, 44 다음 13, 1에 예수께서 성전을 나오셨다고 기록되고, 그 이하 13장에 성 밖의 올리브 산에서 제자들에게만 마지막 종말강론을 하시는 것을 참조).

 

당대 종교의 구조적 부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서 보신 것과 거기서 그분이 반대를 당하신 과정을 살펴보면, 그곳에서는 당대 종교의 부패구조(성전의 시장화 : 마르 11, 15∼19 참조)와 그 지도자들의 타락상(양심부패 현상 : 마르 11, 27∼12, 12 참조 : 예언이 먹혀들어가지 않음)과 현실타협주의(정치권력과의 교활한 공생추구 : 마르 12, 13∼17 참조 :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 사이의 비겁한 공생관계)와 비신앙적 회의주의(율법의 왜곡 : 마르 12, 18∼27 참조 : 율법 냉소주의적인 사두가이파의 부활 거부론) 등이 지배할 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이 발견한 것


예루살렘성전에는 순수하게 하느님을 향한 어떠한 인간의 경건도 어떠한 열성도 어떠한 신심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예루살렘성전을 예수님께서는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면 예루살렘성안으로 들어가시던 둘째 날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처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예루살렘성전과의 관계를 예수님께서는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루살렘성전에서는 하느님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 최후로 남은 과부 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보실 때 우리들에게서 아무러한 경건도 어떠한 열성도 어떠한 순수 신심도 기대하실 수 없으시다면 우리 교회 역시 예루살렘성 밖의 그 무화과나무 같은 것이 아닐는지, 우리 현실에 대한 냉철한 반성이 촉구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엉터리일 수 있더라도, 우리 중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과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과부의 모습이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 체류의 마지막 순간에 발견한 순수 인간의 신심일 것입니다.

 

'과부'를 식별하는 방법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일컫는 ‘과부’의 이미지를 제대로 식별해야 합니다. 과부란 어떠한 존재입니까?

 

우리말에 자녀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면 앞이 캄캄하고, 부모보다 자녀가 앞서 죽으면 부모 가슴에 못이 박히며, 혼인해서 살던 여자에게 남편이 죽으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말 속에서 우리는 하늘 무너진 처지를 과부의 한(恨)이라 하여 미망인(未亡人)이라고까지 부르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죽어 가슴에 못이 박히는 경우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만, 부모를 잃어 살 길이 막막한 사람 즉 고아에 대해서, 그리고 남편을 잃어 세상을 살아갈 아무런 희망도 지닐 수 없는 미망인 즉 과부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한 고아와 과부란 이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특별히 하느님께서 직접 보살펴주시는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암시합니다. 그래서 고아와 집 없는 사람과 과부는 하느님의 특별보호 대상이었습니다(탈출 22, 20∼23 ; 신명 10, 17∼18 ; 14, 28∼29 ; 24, 17∼22). 하느님께서는 과부의 하소연을 들으시어(집회 35, 14∼15 참조) 당신 자신이 보호자와 후견인이 되어주신다 하시고(시편 94, 6∼10과 오늘 화답송 시편 145, 9 참조), 과부의 무력함을 악용하는 자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이사 10, 2 ; 마르 12, 40 ; 루가 20, 47 참조).

 

과부란 오로지 하느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처럼 과부에게 죽은 아들을 되살려주기도 하셨고(루카 7, 11∼15 ; 1열왕 17, 17∼24 참조), 아들이신 당신 자신이 돌아가시면 아들까지 잃은 과부가 되실 당신 어머니 마리아를 운명하시는 순간에 당신의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맡기기도 하시는 특별 배려를 보여주십니다(요한 19, 26∼27 참조). 초대교회에서는 매일의 모임에서 과부들에게 생활필수품을 조달해주도록 배려했고(사도 6, 1 참조), 그들 중에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가 거두어 봉양했습니다(1티모 5, 16 ; 사도 9, 36∼39 ; 야고 1, 27 참조). 그러면 그 과부들로서는 이 세상이 아닌 하느님과 하느님나라에만 의지하는 존재가 되어 사는 것이었습니다(1티모 5, 5∼6 참조). 다시 말하여 과부란 ‘오로지 하느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과부는 하느님을 향한 열녀였다


그렇듯이 오로지 하느님께만 삶의 전부를 맡기는 사람, 즉 하느님께 향한 열녀(烈女)라 할 수 있는 과부처럼,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과 관계 지어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의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 오늘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개를 바친 과부를 제자들 앞에서 칭찬하신 것입니다.

 

렙톤 두닢의 값어치, 625원


렙톤(λεπτος)이라는 동전은 128개를 모으면 한 드라크마(δραχμη)가 되는데, 그 한 드라크마란 로마의 돈으로 한 데나리온(δηναριον)의 값어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드라크마 즉 한 데나리온은 현재의 미국돈으로 대개 20센트 정도). 마태오복음서 20장 2절에 보면 한 데나리온은 당시 일꾼의 하루 품값이었습니다. 그 하루 일꾼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만들려면 렙톤 128개를 모아야 했으므로, 요즘 우리나라 실직자들에게 관청에서 공공근로 작업을 시키고 주는 일당이 4만 원 가량 한다는데 그것을 한 데나리온이라 친다면, 오늘 그 과부의 렙톤 두 닢은 625원 정도의 돈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렙톤 두닢은 라면 두봉지 값


제가 어제 농협 ‘하나로 마트’에 가서 라면을 샀는데 ‘신라면’ 4봉지의 팩 하나에 4,800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라면’ 한 봉지에 1,200원이지요. 그것은 블랙(Black)으로 표기된 맵고 비싼 ‘신라면’입니다. 또 다섯 봉지를 빨간 색깔로 포장한 다른 ‘신라면’의 팩은 값이 3,200원이었습니다. 한 봉지에 640원인 셈이었습니다. 그 빨간 포장은 값이 거의 절반으로 싼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싼‘신라면’이 아니라 싼‘신라면’ 한 봉지도 사먹기에는 부족한 액수가 렙톤 두 개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 과부의 생활비였던 것입니다. 싼‘신라면’ 한 봉지도 제대로 사먹을 수 없을 정도의 그 절대적 가난의 처지에서 그 하루 연명도 하느님께 바치는 삶으로 더 의의를 삼은 것이 그 과부의 믿음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절망하던 예수가 찾은 유일한 희망, 과부


저는 교우들께 그렇듯이 굶으면서 헌금하셔서 교회유지를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헌금을 하라고 신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과부 같은 사람은 오로지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오늘 하루도 자신이 사는 의미가 없는 그런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목격하신 것 같이 이 세상이 아무리 절망적 타락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 향한 순수 열정의 과부 같은 신앙의 사람을 예수님은 우리들 사이에서 발견하시고자 하십니다.

 

오늘의 그러한 과부 이야기를 소개하는 사제의 강론이 신자들에게 헌금 잘 내라는 식으로 악용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범죄행위입니다. 그러한 왜곡의 강론으로 윽박질러서 오늘 신자들의 마음에 부담감을 안긴다면 그건 특정가중처벌법에 해당할 만큼 중대 범죄입니다.

 

렙톤 두 닢의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란 신자들보다는 사제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강신모 신부(의정부 교구 선교사목국장)께서 강론 원고에 강조하였습니다. 강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하시는 말씀은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자기는 쏙 빠지고, 신자들에게만 이 과부를 본받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강신모 신부의 강론 중 발췌


강신모 신부의 강론 원고 중 일부를 다음과 같이 옮겨 봅니다(정의구현사제단 발행, 선포와 봉사, 나-6호 123쪽에서).

 

“‘다른 생물의 피를 바치는’ 구약의 사제들처럼 되어서는 안 되고,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는’ 율법학자들처럼 되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의 과부에게 파견되어 그녀로부터 온전한 마음을 배웠듯이, 이 과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배워야 합니다. (…) 기도를 열심히 한 후에, 그리고 대사회 활동을 열심히 한 후에, 부유한 사람들과 어울려 비싼 음식점을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마치 구약의 사제들이 직무 시간에는 정성껏 제사를 지낸 후에, 제물의 일부를 챙겨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통화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어떤 수준에 이르렀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몇 명과 얼마 동안이나 통화했는지 보면 됩니다. 수준 높은 사람들과만 통화를 했다면, 또는 만났다면, 평소에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대사회 활동을 많이 했어도, ‘온전히 자신을 바쳤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강론을 쓰고 있는 저 역시도, 교회의 문제들을 걱정한답시고 마음에 맞는 동료 신부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데에만 너무나 많은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어렵지만 끊임없이 이 방향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위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외치시나 봅니다. ‘양 냄새가 나는 사제가 되십시오!’”

 

사제들의 전적인 투신을 촉구하며


그렇습니다! 이러저러한 직무수행에 열중하여 성실한 사제로서 살 수 있습니다만, 과연 그게 자신의 삶을 전적(全的)으로 바치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란 과연 본질적으로 어떤 것일까? 사제이니까 선행을 많이 하면 그게 다 인가? 그렇진 않지요! 적덕(積德)하는 것 정도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로 충분한 게 아니지요! 자신의 삶을 짚어보자면 부족한 것 없이 살면서 남는 시간에 사람 선별해서 만나주고 가끔 호주머니의 남는 돈으로 누굴 도와줬다면 적덕(積德)이지요. 풍족한 데에서 조금 떠내어(마르 12, 44 참조) 적선하듯이 선행을 한다면, 그건 640원인 ‘신라면’ 한 봉지만도 못한 것입니다. 오늘의 과부는 그 ‘신라면’ 한 봉지 값도 되지 않는 자신의 삶 전체를 톡톡 털어서 하느님 앞에 나아간 사람입니다. 한 삶을 송두리째 바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인 성직자(사제)가 남는 시간 좋은(?) 일을 한답시고 생색내면서 다른 많은 시간에는 취미생활(예, 골프)에, 맘에 맞는 사람들과의 만남에, 짜놓고 준비된 여건의 직무수행에만 성실했다면, 그게 전적(全的)인 투신일까?

 

아파트 평수대로 교무금을 배정한다면...


아파트 평수대로 교무금 배정을 하는 관행 앞에서, 라면 한 봉지 값만도 못한 가난한 신자들의 정성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위선적 행위로 명예를 추구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잇속이나 챙기는 율법학자들에게서처럼(마르 12, 38∼40 참조), 오늘 예수님의 시선에 잡힌 가난한 과부는 보이지 않는 게 우리네 오늘날의 사목 현장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오늘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는 라면 한 봉지 값 정도의 그 과부의 헌금이란 하찮은 것으로 보이겠지요. 그러나 그 과부의 정성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의 정성은 라면 한 봉지만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어마어마한 하느님의 마음을 담은 보물단지가 된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 때문에 사는 믿음’이 곧 그것입니다. 하지만 위선적 명예와 탐욕에 급급한 사람들은 그 과부의 라면 한 봉지는 고사하고 빈 콩깍지만도 못한 얄팍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처럼


그렇듯 우리 신앙이 콩깍지만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루하루를 사는 동안 없는 시간 쪼개어 기도하는 사람, 바쁜 틈틈이 성경을 읽고 주님과 함께 하는 짧은 묵상의 시간을 감사히 여기며 기도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세상의 갖가지 유혹을 뿌리치며 손해를 보면서도 주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더 복되게 선택하며 그 세상에서의 배고픔 즉 손해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사람은, 곧 오늘 그 렙톤 두 닢의 과부 같이 ‘오로지 하느님 때문에 사는 믿음’으로 기쁨을 삼는 신앙인일 것입니다. 그렇듯이 사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과부’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과부의 마음으로 신앙을 오늘 고백해봅시다. 예수님처럼 ‘모든 것’ 바치는 심정으로…! 그렇듯 우리 신앙선조순교자들처럼…!.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2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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