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 2주일, 인권주일

2015. 12. 6. 09:00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역사를 가로지르는 우리의 길

우리의 대림절



시간을 가로질러 오신다는 것은


우리는 이 대림절에 지금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현세적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러 시간을 가로질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난 주일에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주님 말씀 따라 다짐하였습니다. 시간(時間)을 가로질러 오신다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관통하는 길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의 세 가지 의미


교회의 전례에서 대림절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세 가지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세 가지 방식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그분 오시는 것을 이 대림절에 대비합니다.

 

첫 번째 오심은 역사적 사실 


첫째로는, 구세주로서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여 오셨던 예수님의 성탄(降生)의 신비를 생활 안에서 실현하는 축제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즉 첫 번째 오심에 대한 신앙적 준비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은 역사적 사실(factum historicum)입니다. 2015년 전에 유다의 베들레헴 마을 밖의 외양간에서 동정녀의 출산으로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셨던 구세주의 탄생 사실(史實)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오신 해로부터 햇수를 기억하는 의미로 연호(年號)를 써서 올해를 ‘天主降生 2015年’이라 합니다. 서양말로는 A.D.2015이라고 씁니다. 이것은 라틴어로 ‘Anno Domini 2015’이라는 말의 약자인데, 그 뜻은 ‘주님 오신 해로부터 2015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다니!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여인의 아들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이 사실은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神이신 분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몸소 입으시고 인류의 죄와 불행의 세상에 함께 하러 오시게 된 그 크나큰 은총의 신비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실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를 신앙이 없으면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지없이 은혜로운 사건을 인류가 만난 것입니다. 그 크나큰 은혜의 신비를 깨닫고 보면 인간이란 그지없이 행복한 존재이지요. 하느님께서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셔서 연약한 인간이 되셨기에 말입니다. 이 강생의 신비를 생활 안에서 구현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대림절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하여 감사와 사랑의 삶을 갖추어 나가는 신앙인의 보람된 시기가 대림절인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 삶의 주님을 뵙고 맞이해야 

 

대림절의 두 번째 여정은, 지금도 항상 우리 인간들 속으로 들어오시고 계시는 주님을 뵙는 일입니다. 우리 삶의 주님으로 오늘도 매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러 오시는 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을 맞이하는 자세로 회개하여 죄를 끊고 보속을 하면서 사랑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도록 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에 한번 오시고 마신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도 우리 삶의 현장에 오시는 주님을 우리는 맞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오심은 과거의 일일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 엄청난 대림의 신비인 것입니다. 우리를 버려두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항상 서로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항상 함께 있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하듯이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면 우리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종말의 심판에 대비하는 것 


대림절의 세 번째 과제는, 세말(世末)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심판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당신의 것으로 완성하시기 위해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입니다. 즉 그분은 공심판을 하시러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의 재림을 잘 준비하는 신앙인이란 그 때를 두려워하며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불행을 씻어 주시고 해방시켜 주시는 승리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분께 드릴 사랑과 영예의 결실을 마련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의 참다운 신앙의 핵심적 태도란, 당신 나라를 완성하시러 권능과 영예를 지니시고 오실 임금님(마르 13, 26 및 14, 62 참조)을 기다리면서 그 분께 드릴 환영의 선물을 열심히 장만하는 삶 가운데 그분이 오실 날을 학수고대 하듯이 미래를 꿈꾸는 것입니다.


대림절에 대한 세가지 의미의 정리


이러한 세 가지 과제를 전개하는 대림절 전례는 ①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과거의 역사적 구원에 기본을 두고, ② 그 구원을 각자의 현재적 삶에 실현하면서, ③ 미래의 영원한 구원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결국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기억하고 묵상하며 기다리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신자들의 삶이란 그래서 항상(일생 내내) 대림절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일생 내내 대림절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역사를 가로지르는 우리 삶의 길입니다.

 

일생 내내 대림절의 삶 


그렇습니다.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그 구원의 성취를 기다리며 오늘의 삶을 희망 속에 영위하는 것이 우리의 일생 내내 계속되는 대림의 삶인 것입니다.

 

‘일생 내내 대림절의 삶’이라는 우리의 이러한 대림절 정신은 기다림 속에 희망을 끊임없이 일구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생을 살면서 늘 희망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 희망의 길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삶 그 자체가 인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귀퉁이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그래서 걸어야 할 우리 삶의 길을 늘 대림절 여정으로 즉 희망의 발걸음으로 걸어가라는 메시지를 특별히 이 대림절에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 4)로 들려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그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귀퉁이에서 들려오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이 지적하는 광야는 요한 세례자가 요르단 강 부근 지방에 나타나 회개를 부르짖기 전까지 도를 닦던 황량한 사막과 같은 장소를 일컫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장소보다는 희망이 차단된 우리 인간 삶의 영역을 되돌아볼 때 그것이 광야와 같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간 삶 자체가 광야가 아니겠는가 


그 광야와 같은 인간 삶의 영역에 전 인류의 구원 성취의 시기가 다가왔음을 오늘 복음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 6)는 희망의 메시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희망이 현실로 전이될 시기의 도래를 인류사적으로 주지하기 위하여 복음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려온 때가 곧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15년도임을 상기시키면서 당시 주변 지역의 세속 권력 판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루카 3, 1∼2 참조). 이러한 역사의 상황을 배경으로 들려오는 희망론은 그것을 사람들이 세상의 한 복판에서가 아니라 외진 곳에서 듣게 된다고 강조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 4)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모든 사람의 구원’(루카 3, 6)을 이루게 하라는 절규입니다. 오늘의 복음이 전하는 외침인 것입니다.

 

외침은 세상 변두리에서 들려온다 


그 외침은 세상의 변두리에서 들려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 변두리에서부터 전 인류에게까지 그 절원이 성취되는 길이 열려야 한다고 광야의 소리는 외칩니다. 그 길이란 주님이 오시는 길입니다(루카 3, 4). 그 길을 닦으라고 외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 5∼6)

 

이 외침은 오늘 ‘인권주일’을 맞이하는 우리가 더욱 다짐해야 할 전 인류적 자각이어야 합니다. 12월 10일의 ‘세계 인권선언 기념일’을 즈음하는 ‘인권주일’을 맞이하면서 저는 ‘세계인권선언문’을 새삼스럽게 읽어보았습니다. 30조에 이르는 그 내용을 오늘의 복음 말씀에 따라 다음과 같이 축약할 수 있습니다.

 

인권주일과 세계인권선언문 


“사람 사이에 차별을 지우고, 억압적 권력을 내려놓고, 속임수를 바로잡고, 갈등을 없애라” 즉, 골짜기와 산과 언덕 그리고 굽은 길과 거친 길을 사람들 사이에 없애라는 것입니다(루카 3, 5∼6 참조).

 

세계인권선언문과 오늘의 복음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저는 지난 11월 14일과 어제(12월 5일) 서울에서 있었던 ‘민중 총궐기 대회’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 지난 11월 14일의 차벽과 물대포에 맞선 폭력시위, 그리고 어제의 차벽과 물대포 없이 평화로운 시위…

 

독한 체루액을 섞어 뿌리는 물대포의 현장 


그렇습니다. 골짜기와 산으로 길이 막힌 것처럼 위압적인 차벽에 갇힌 군중의 흥분이 폭력적 대응을 했지요. 구부러지고 걸림돌 많은 거친 길에서 휘뚝거릴 수밖에 없듯이 물대포와 캡사이신에 혼비백산하던 시위대가 분한 감정으로 쇠파이프나 망치를 휘둘렀지요. 지난 11월 14일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차벽도 보이지 않고 물대포가 나타나지 않은 어제(12월 5일)의 군중들은 평화적으로 의사 표시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집회나 시위의 자유를 선언한 세계인권선언과 우리의 헌법이 그렇듯이, 그러한 자유는 이 시대 우리의 대명천지의 것입니다. 그걸 공권력으로 봉쇄하고 저지하려는 권력층은 사실상 골짜기와 험준한 산처럼 사람들 사이의 생각이 오고감을 곡해하고(굽은 시각으로 보고) 그에 대해서 폭압적(거친 방식)으로 짓눌러버립니다. 차벽으로 막고 독한 체루액을 섞어 뿌리는 물대포를 쏘아대는 현장에서 누구든 공포심과 분노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TV조선의 궤변  


그런데, 시위대의 폭력적 대응을 하게 되었던 11월 14일의 영상을 더빙하여 방영하던 어제 밤 종편조선TV의 뉴스 앵커는 비아냥거리는 말로 어제의 평화시위를 보도했습니다. “오늘(즉 12월 5일)의 평화시위로 11월 14일의 폭력시위를 변명해서는 아니 된다”는 조선TV의 논지였습니다. 참으로 실소를 금치 못할 궤변으로 국민의 시각을 흐리는 뉴스보도였습니다. 그야말로 “길을 곧게” 내기가 이렇듯 어려운 현실이 우리의 언론 마당입니다. 우리의 언론 매체들 가운데 힘 있는 주류들이 모두 그런 식입니다.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언덕을 낮추고 굽은 길 거친 길을 바루고 평탄케 해야 할 언론 매체가 그 스스로 골짜기와 험준한 산과 오해와 걸림돌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폭력적 언론 조장을 하고 있지요. 이 시대 우리의 광야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교만과 독선과 권위주의가 기득권과 권력욕에 엉켜서 국민의 행복을 뭉개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불의와 갈등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독선과 기득권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불의와 갈등은 또한 나아가 인간 사이의 상호간 인권유린과 상호억압을 자아냅니다.

 

어느 사회철학자의 말과 같이 인간의 세상에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의와 갈등을 해소하고 인권을 존중하여 서로 아껴줄 줄 아는 세상이 되어 인간이 다시는 더 이상 인간을 해치지 않는 전기(轉機)를 조성하여 불행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는 삶의 성취를 오늘 복음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 6)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길을 지향하는 우리의 대림절이어야 


불의와 갈등의 권력을 목도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한편 자기 자신 안의 불의와 갈등은 없는지 대림절 동안 살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면서 우리는 이 대림절에 마음을 낮추는 겸허한 삶의 회복으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인간 서로 사이의 벽을 허물어서 주님 오시는 평화의 길을 다져야겠습니다. 그럼으로써 광야와 같은 우리의 시국 현실에서 실망하지 않고, ‘평화의 길’을 지향하는 우리의 ‘대림절’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대림절에, 마치 동리 밖 외진 곳에서 평화의 주님이 인간 역사 속으로 살며시 들어오시듯, 그리고 그분이 우리 사이에 지금도 살며시 와 계시듯, 나아가 우리의 험한 세상의 종말에 평화의 영원한 완성을 이루시러 오실 그분을 맞이해야 하듯, 우리는 그분을 늘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생이 내내 대림절인 것입니다. 역사를 가로지르는 우리의 길입니다.

 

그러한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회개로써 갈등과 불의의 이 세상 언저리에서부터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그 회개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하여 ‘자선주일’이 될 다음주일의 대림 제3주일에 요한 세례자가 구체적인 방법 제시로 알려줄 것입니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6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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