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2016. 1. 17. 10:00 ·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어찌하여 술에 물을 섞는가?
우리의 작은 노력도 하느님의 전능을 이끌어냅니다
술 맛이 나빠지면 도가 집 어르신네 노름한 것을 안다
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봅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으로 오늘 복음서에 잔칫집 술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이름으로 쓰인 ‘전도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즐기려고 음식을 장만한다.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한다.”(코헬 10, 19)
이 성경 말씀이 있듯이, 예수님께서도 가나 촌의 어느 혼인잔치 집에 가셔서 사람들과 함께 즐기시다가 그 집의 술이 떨어진 딱한 사정을 보시고 물을 술로 변하게 하는 기적으로 그 잔치의 흥을 성공적으로 이루어주셨지요(요한 2, 1∼11의 내용).
우리 속담에 “술맛이 나빠지면 도가 집 어르신네 노름한 것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도가(都家)집’이란 양조장(釀造場)을 일컫는 말인데, 어째 술맛이 싱거워진 까닭이란 아마도 그 양조장 주인이 노름판에서 돈을 잃고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 잃은 돈의 분량만큼 술독에 물을 부어 판다는 뜻으로 이러한 속담이 생겼다 합니다. 아마 스스로 잘못한 탓을 다른 사람들이 기워 갚게 하는 얌체 짓을 비꼬는 속담인 것 같습니다. 마치 국가의 경제정책이나 경제 단체의 경영이 잘못되어 애꿎은 국민들이 세금으로 그 부실을 때우게 되는 꼴이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미사 중 술에다 물을 섞는 전례
그런데 우리 가톨릭교회의 미사 중에 술에다 물을 섞는 전례가 있습니다. 사제가 성체로 축성할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과정 중에 포도주에 물을 타서 준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봉헌하는 포도주 값이 아까워서 물을 섞는 것일까요? 사제가 노름을 하고 미사의 제주(祭酒)에다가 그렇게 얌체 짓을 하여 제전비용(祭典費用)을 때우는 것일까요?
복(福)은 반복(半福), 꽃은 반개(半開), 술은 반취(半醉)
고대의 유다교 관습에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시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것은 술의 농도를 약하게 하여 마시려는 의도였다 합니다. 그런 고대의 풍속은 우리말에 복(福)은 반복(半福), 꽃은 반개(半開), 그리고 술은 반취(半醉)가 좋다는 말을 연상케 합니다. 이것은 만취(滿醉)하여 몸과 정신을 해롭게 하는 것보다는 술의 흥취를 적절히 즐겨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복(福)도 너무 넘치면 그로 인하여 화(禍)가 이르게 되고, 활짝 핀 꽃은 곧 질 때가 되어 부패의 악취(惡臭)를 뿜어내기에 이르지만 반쯤 핀 꽃은 그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는 것이듯이, 술도 반쯤 취하여 그 맛과 흥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에 물을 탄다는 것은, 얕은 꾀를 써서 호도(糊塗)하는, 즉 사실의 왜곡을 유도하는 짓을 일컫는 말입니다. 정치인들이 비난 받을 짓을 해놓고 여론을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그렇지요. 그렇듯 얌체 짓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물 탄 막걸리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충청도말로 질책하여 “ 그걸 말이라고 하남? 그게 말이여, 말걸리여?” 하지요.
그렇다면 사제가 포도주에 물을 타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그렇듯 얌체 짓일까요? 어찌하여 사제는 포도주 성작에 물을 타는 것일까요?
미사 중에 제물 준비를 하는 사제가 포도주에 물을 타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포도주에 붓는 한 방울의 물 같이 우리의 사소한 노력도 기꺼이
사제가 그렇게 술에 물을 타면서 바치는 기도의 뜻을 우리는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뜻하면서, 성작 안의 포도주에 물이 들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듯이 우리도 참 제물로 하느님께 바쳐지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 하면서 우리는 포도주에 붓는 한 방울의 물과 같이 우리의 사소한 노력이라도 기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합쳐 바치고 우리의 인간적인 허약성과 부족한 점까지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서 받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작은 봉헌과 우리의 보잘것없는 희생도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물과 하나 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별것도 아닌 우리의 희생이 그 값없는 물 한 방울 되어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포도주와 하나 됩니다. 가나 촌 혼인잔치에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물이 값진 포도주로 변하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하느님께의 제물로 승화되어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서 그 잔치 집 일꾼들에게 살짝 귀띔해주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간단한 말씀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한창 잔치가 무르익을 시간에 과방에 술이 떨어져 난처해진 그 잔치 집의 일꾼들에게 성모님께서 이르신 말씀은 곧, 오늘도 교회가 신자들에게 전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하는 일깨움인 것입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음은 곧,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판단하고 믿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간단하게 이르시는 말씀입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 2, 7)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로운 물로 즉, 우리 자신을 비우고 깨끗한 마음으로 채우고, 그 다음에 이르시는 주님의 실천 명령을 따라야겠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요한 2, 8)하고 이르시는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퍼주는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우리의 실천은 문득 하느님께서 몸소 빚으신 포도주처럼 “이 좋은 포도주가 웬일이란 말인가!”(요한 2, 10 참조)하는 탄성을 들을 정도로 놀랄만한 결과를 낼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한 것이라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울이는 순수한 노력, 그것이 아무런 값도 없는 물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한 것이라면 주님의 값진 포도주 같이 변화되는 값어치를 발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노력은 항아리에 신선한 물을 가득 채우듯이 오로지 순수로 실천되는 것이라면, 저 잔칫상의 사람들이 즐기게 된 그 값진 포도주처럼 우리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우리 가운데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느낄 것입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초에는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 4)하시면서 그 첫 기적 행사를 꺼려하셨습니다만, 무엇이든지 당신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당신의 능력을 결국 드러내셨듯이, 아직 우리의 모든 구원이 이루어질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교회의 가르침대로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우리 사이에, 문득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노력은 하느님의 전능을 이끌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제의 예물 준비 기도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이어야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그러나 순수한 뜻으로, 그리고 최선의 실천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하나 되는 결실을 얻게 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하는 사제의 예물 준비 기도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께서는 한 목숨 바쳐 순교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길을 갔습니다. 내일 저는 38명의 순례자 형제자매들을 안내하여 4박5일 동안 일본의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 오우라 성당은 1882년부터 1894년까지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과 다른 세 분의 순교성인 유해를 12년간 봉안하여 모셨던 곳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처절했던 박해시기에 그 성인들의 유해가 훼손당할 것을 피하여 그곳에 모셨던 것입니다. 우리 하부내포 성지의 서짓골에 신자들이 비밀리에 안장해드렸던 그 성인들의 유해를 잘 모셨던 일본 교회에 감사드리면서 저는 서짓골을 출발하여 순례자들과 함께 오우라에 가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서짓골에 성인들의 유해를 목숨 걸고 안장 하였던 옛적의 교우들 또한 발각되어 순교한 사실을 기억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 같이 이름 없는 서짓골 신자들의 희생은 지금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값진 역사를 기록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역사를 기억하면서 서짓골 성지에서 오우라 성당에까지 기도의 발걸음을 이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세의 작은 일들 속에서 하느님께서 아주 값진 구원 성업을 계속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들이 사실상 매일매일 기적처럼 하느님 의향을 성취하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살아가기로 다짐하게 됩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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