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2016. 3.6. 10:00 · 하부내포성지 도화담 공소

 


자식 이길 수 없다는데 … !

살구꽃 피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루하고 힘겨운 여정, 사순절

 

사순절은 지루하고 힘겨운 여정입니다. 이런 사순절을 벌써 반절 이상 지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힘겨워해 하는 우리에게 오늘 사순 제4주일의 미사로써 위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의 미사 전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노래로 시작 합니다(그러한 기쁨을 오늘 사제의 장미 빛 제의 색깔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예루살렘아, 즐거워하여라.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탕자의 비유, 루카의 특종 보도


오늘의 이 입당송은 이사야 예언서 66장 10-11절의 메시지입니다. 이 기쁨의 메시지는 오늘 복음 성경의 내용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유명한 <탕자(蕩子)의 비유>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발견되지 않는 이 유명한 비유를 루카복음서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서의 단독보도기사입니다. 이렇듯 루카복음 단독보도의 오늘 이야기에서 그 내용상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우리는 잘 식별해야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루카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하여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많이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그 특징을 짚습니다.

 

루카에 등장하는 예수과 관심가진 이들


루카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활동 벽두부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큰 관심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주요기사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 예로써 예수님의 첫 설교(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는 그 주제가 이사야 예언서(61, 1-2 ; 58, 6)를 인용한 가난한 사람들, 포로들, 소경들,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은총의 선포였음을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4, 18-19 참조).

 

루카복음서는 <소외된 사람들의 복음서>


그리고 이어서 루카복음서는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여인들과 죄인들을 각별히 아끼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강조하여 전해줍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서에는 <소외된 사람들의 복음서>라는 별명이 붙여지고 있습니다. 이 별명을 좀 천박하게 고쳐부르자면, <왕따들의 기쁜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도 그렇듯이 소외된 사람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알아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즉 이 비유의 내용은 주님께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하여 최우선적으로 지극한 관심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그 주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거지꼴로 돌아온 아우를 왕따시키려한 형의 심보와는 달리,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며 그들과 즐겨 어울리시는(루카 15, 1-3 참조) 예수님의 심정을 오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되찾은 양과 되찾은 은전의 비유로부터 ...


루카복음서는 오늘의 <탕자의 비유> 한 가지만 불쑥 소개하는 게 아닙니다. 그 앞에 다른 두 가지 비유가 연이어 루카복음서 15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되찾은 양’(루카 15, 4-7)과 ‘되찾은 은전’(루카 15, 8-10)의 비유를 들려주셨다고 전하고, 이어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 11-32)를 말씀하신 것으로 편집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루카복음서의 이 15장은 이야기 세 가지로, 잃었던 것을 되찾은 주인공의 기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 세 가지의 주인공은 공통적인 존재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주인공은 한 분, ‘주님’입니다. 앞의 두 가지 비유는 세 번째 비유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서론적인 도움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의 비유에 대한 제목을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이라고 붙여야 합니다.

 

루카복음서 15장의 제목은 '아버지의 기쁨'


해서 루카복음서 15장의 전체적인 제목을 간단하게 붙이자면 ‘아버지의 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기쁨’이라는 주제(主題)에 대한 부제(副題)로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이라 붙이고 싶습니다. 가출하여 객지에 나가 소식 없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매일 대문 앞에 서서 동네 입구를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던 아버지께서 멀리 거지꼴로 터벅터벅 돌아오고 있는 작은 아들이 보이자 측은한 마음으로 달려가 그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그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을 보여주는 감동적 장면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서로 다르게 생긴 두 손


오늘의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예수님께서는 감동적인 그 장면에서 아버지로 묘사된 주인공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러한 마음을 전해주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한계성 때문에 하느님을 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해 주십니다만, 하느님은 아버지도 되시고 어머니도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네델란드의 저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의 장면에서 그 아들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두 손을 각각 다르게 그렸습니다. 손 하나는 늙은 남자(아버지)의 손이고 다른 하나는 늙은 여인(어머니)의 손으로 그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자 어머니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그렇듯이 자식 사랑으로 녹아드는 간절함을 지닌 부모의 마음으로 오늘 복음 성경은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우리말이 있듯이 오늘 복음서에 묘사된 아버지의 모습이 곧 아들을 이기지 못하고 애간장만 타는 모습입니다.

 

몰래 찾아오신 아버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저의 아버지께서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관습에 따라 사제직 수행에 있어서 부모와의 사적인 연관성을 배제해야한다면서, 제가 하는 일에 대하여 궁금해 하시는 부모님께 일절 알려드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계시던 저의 아버지께서 제가 일하고 있는 성당을 보고 싶어서 아들인 저 모르게 다른 사람의 자동차를 빌려 타고 슬그머니 저의 성당에 다녀가셨답니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저는 그분께서 세상 떠난 지금에까지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토록 아들 있는 곳을 보고 싶으셨던 병석의 아버지 마음을 아들인 제가 몰랐었던 것이 그렇게 후회스럽습니다. 그렇듯이 아버지 또한 어머니 못지않게 자식 걱정 때문에 늘 조이는 마음으로 사는 분이지요.

 

혼자 밥 해먹고 살던 안면도 성당 시절


하지만 우리가 정서적으로 표현할 때는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분의 모습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제가 안면도 성당에서 살 때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본당의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밥해주는 분을 둘 수 없어서 저 혼자 밥을 해먹고 살았는데, 매번 끼니를 챙겨먹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일에는 대개 가까운 음식점에 가서 사먹곤 했습니다. 봄철 어느 주일에 본당의 주일미사를 끝내고 오후 공소의 미사를 드리러 출발하기 전에 음식점에 점심밥을 사먹기 위해 서둘러 나가던 길에 느꼈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글로 써본 것입니다.

 

살구나무와 어머니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가의 좀 외딴 집 앞 늙은 살구나무를 보게 되었다. 꽃봉오리가 막 터지고 있느라고 가지마다 불그레한 물감을 흘리고 있는 살구나무였다. 그런 외딴집 앞의 살구나무를 보자 나는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쩌면 해가 긴 봄날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오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의 배가 고프던 추억처럼 어머니 생각이 났다. 대문 앞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서있는 어머니를 보자 더욱 배가 고프던 그런 옛적 어느 날 같은 마음이었다. 집에 가면 어머니가 밥을 주신다는 생각으로 달려가다가 나를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모습을 집 앞에서 문득 보게 되는 그런 마음이었다. 사실 그렇게 시골 집 앞에 서있는 살구나무의 모습은 밖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같다. 그래서 어디고 살구꽃이 피면, 나를 기다리며 대문밖에 나와 계시다가 돌아오는 나의 모습을 보고 반가워하시던 어머니의 환한 얼굴 색깔로 그렇게 피는 살구꽃 같다.”

 

그렇습니다. 아들이 괴로울 때 언뜻 간절해지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으로 자식 걱정에 있어서는 아버지든 어머니든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식 걱정을 하시는 분의 모습으로 대문 앞에 매일 종일토록 나와 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인간을 못 이기시는 하느님 아버지


그렇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우리말처럼, 우리 인간들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느님께서 밤이나 낮이나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 걱정을 하시는 분이시라고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느님의 그 마음도 모르고 세상살이에 취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하느님 뜻과는 달리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가 당신의 품속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건 또는 얼마나 많은 나쁜 짓을 했건 개의치 않으십니다.

 

자녀다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시는 분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의 재산을 들고 객지로 나가 다 까먹고 타락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거지꼴로 돌아온 그 아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으시며 무조건 당신의 아들 자격을 되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아들 자격을 무조건 되돌려 주시는 표시로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이라는 상징의 반지를 끼워주시고는 기쁨의 잔치를 베푸십니다(루카 15, 20-24 참조).


잔치를 베푸시는 까닭 


그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집! 하느님의 나라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처지가 어떻든지 간에, 하느님 마음은 하늘보다 더 높고 넓은 자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오늘의 비유로써 예수님께서 강조하시고 계심을 우리는 새삼 깨달으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사순절 회개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더욱,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올해 ‘자비의 특별희년’의 사순절은 그러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간곡히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향한 회개의 발걸음


그러한 아버지의 자녀라면 오늘 비유의 끝 장면에 등장하는 큰아들처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심보(루카 15, 1-2 참조)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루카 15, 25-30 참조), 행여 우리 이웃의 형제자매와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의 참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스런 자녀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우리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듯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사순절 길의 반절을 넘었습니다. 부지런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이 되어 부활의 기쁨을 향한 회개의 발걸음으로 서둘러 나아가기로 합시다.

 

어제는 동면하던 땅속의 미물들이 봄볕에 잠을 깨어 뛰어나온다는 경칩(驚蟄)이었습니다. 살구꽃 피는 부활절이 곧 다가오고 있습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05





산골성지 하부내포 성지 소개 글   성지 연락처 및 성지 후원 계좌 안내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