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수난 성지주일

2016. 3.20. 10:00 · 하부내포성지 만수리공소

 


나는 두 사람이었네!

두 마음, 두 입 가진 나!




주님수난성지주일의 2중성, 성지(聖枝)주일과 수난주일

 

오늘 ‘주님수난성지주일’은 명칭 자체에서부터 2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을 ‘성지주일(聖枝主日)’과 ‘수난주일(受難主日)’로 합쳐 일컫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그 두 가지 의미의 주일 전례를 거행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예식에 이어서, 골고타 산상에서 십자가형에 처형되어 돌아가신 그분의 수난에 이르는 며칠간(5일간)의 사정을 오늘 한꺼번에 기념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상치된 상황을 표현하는 전례는, 즉 예수님의 영광스런 입성과 그분의 치욕적인 수난을 이어서 기념하는 그것은, 사실상 실제적인 우리 삶 속에서 동시적으로 엿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을 저는 신앙인이라는 나 자신의 모습 속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환영과 배척, 두가지 상치된 태도


주님을 향하여 환영과 배척의 두 가지 상치된 태도를 보여드리는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 자신의 삶 속에 두 가지의 모순적 내 얼굴이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중적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저는 ‘나는 두 사람이었구나!’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나의 얼굴을 거울에 비쳐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나의 두 얼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입당예식과 수난을 전하는 복음서의 모순


우리는 오늘 나뭇가지를 들고 주님을 환영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성당에 들어오는 행렬로 오늘의 전례를 시작합니다. 그 입당 예식으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하고 노래 부르는 우리들입니다(루카 19, 38 및 입성 기념예식의 따름 노래 참조). 이렇게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우리의 삶이어야 함을 늘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노래 부를 때 손에 들었던 나뭇가지를 집에 가지고 가서 십자가와 함께 벽에 걸어두고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의 그러한 신앙을 다짐합니다. 그러한 우리가 오늘 주님의 수난을 전하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라고 고함치던 군중처럼 태도를 돌변하여 악의 세력에 동조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한 입으로 주님을 찬송하고 그 입으로 죄악에 찬동하는 그러한 태도는 곧, 한 몸에 두 입 가진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곧 두 사람인 나 자신인 것입니다.

 

인간의 오락가락하는 두 마음 안에서 희생되는 예수


그렇게 몸은 하나이되 두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 갔다 하는 그 나의 두 가지 모습이 부딪치는 틈바구니에서 예수님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善)을 사랑한다면서도 얼마나 악(惡)에 익숙한가를 보여주는 모순 속에서 파괴되는 우리 인간들을 대변합니다. 그러한 인간파괴를 못 박아 놓은 형상이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의 모습입니다.

 

그분의 입성을 환영하던 그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던 입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고, 늘 따라다니던 제자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어 고백하던 그 입으로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겠다고 부인하고, 그분과 함께 어디라도 함께 갈 듯이 따르던 제자들도 그분을 팽개치고 모두 도망쳐버리고, 그분 일행의 일상을 보살펴야 할 최측근의 제자가 그분을 삼십 은전에 팔아넘기고, 하느님의 뜻을 백성에게 헤아려 주기로 지혜를 모아야 할 백성의 최고의회위원과 사제들이 모함의 연극으로 그분을 죽음에로 내몰고, 통치권으로 세상 질서를 가름해야 할 총독이 그분을 폭도와 바꿔쳐서 사형언도하고, 그래서 그분은 그러한 인간들의 모순의 틈바구니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인간들의 모순성을 뒤집어쓰고 죽으신 그 과정 속에서 곧, 이러한 인간 자신들의 파괴되는 인간성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당신 자신의 벗겨진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만 그 인간성 파괴가 그 끝을 고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그분의 죽음이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고 있다

 

그러한 인간성 파괴는 그러나 오늘날도 우리 사이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인간파괴가 어느 정도인가를 우리 사회에서 통렬하게 체험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죽여 암매장하고서 수년간 태연하게 사회활동하고 살았다는 뉴스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의 귀로 들어야 할 사람의 이야기란 말입니까? 오순도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사이에 독극물 탄 음료를 마시게 하여 이웃들이 죽어나가는 그 마을은 사람끼리 살아가는 동네인가요? 선거철이 되어 여야를 불문하고 파벌끼리 누구를 죽인다는 둥 험악한 말로 난투를 벌이고, 그걸 평론한답시고 이른바 지식인들이 매스컴(종편)에 출연하여 입방아 쪄가면서 히히거리는 정치수준은 과연 이 나라가 정상수준의 사람들이 사는 나라란 말인가요? 이런 판국에 어느 정당의 어느 계파가 몰살당했다면서 그에 대한 상대 계파의 어느 정치인이 자기 당의 공천권을 휘두르는 사람을 평하여 말했습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제대로 된 사람인지 우리 스스로 모르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내가 사람인지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를 죽여 암매장하고 태연하게 몇 년간 살아오다가 행정기관이 아이의 소재를 파악하는 바람에 들통 나게 됐다는 이야기를 우리 대한민국 말고 다른 나라에서도 들을 수 있는가요? 이게 사람 사는 나라인가요?

 

뱃 속에 생긴 자기 새끼 죽이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근대화


우리 대한민국이 아마도 사람 사는 나라가 아닐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우리 대한민국 안에서 있어온 일입니다. 1960년대부터 있어온 일입니다. 5·16쿠데타 이후 군사독재에 의한 국가경제발전론은 우선적으로 인구조절을 기치로 하여 내세워졌습니다. ‘인구조절’이라…? 그건 ‘산아제한’을 뜻하는 것이고, 그리고 노골적으로 ‘인공임신중절’을 무제한적으로 시행하는 것이었지요. 말이 ‘인공임신중절’이지, 더욱 사실은 야만적으로 ‘낙태’라는 것이지요. 곧 ‘인구조절’하여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하는 새마을운동 노래를 부르면서 뱃속에 생긴 자기 새끼 죽이는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른바 ‘근대화 시대’가 오늘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근대화(近代化)가 아니고, 오로지 ‘야만화(野蠻化)’가 우리의 현실로 둔갑했을 뿐입니다. 근대화 시대에 낙태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 목숨 건져 대한민국의 세상에 태어난 세대가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서 이제는 자녀를 쓱싹 죽이고서도 태연히 살아가는 야만인들의 세상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타인은 필요에 따라 제거해버린다


이런 지경의 세상을 뭐라 일컬어야 하나요? 나 아닌 타인은 필요에 따라 제거해버리면 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자연스레 ‘죽인다’는 말을 합니다. 정치지도자로 나서는 사람들 끼리 서로 죽인다는 말을 하고, 그런 소식을 매스컴(종편) 출연자들의 입으로 뇌까리면서 히히거리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입니까! 우리들 서로가 쳐다본다는 게 섬뜩한 일입니다. 우리들의 얼굴이 사람의 얼굴인가요? 그 얼굴들에서 비쳐나오는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현실


우리 세계 내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인간들이 쓰레기 더미처럼 으깨져나가는 뉴스…! 여객선 침몰에 의해 수백 명 수장된 참상의 원인이 우리 정치계나 경제계의 부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규명되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현실…! 인민은 굶어죽어도 아랑곳없이 원자폭탄이다 뭐다 하는 대량살상무기나 개발하여 권력체제강화만 일삼고 있는 야만세력에 맞서 상대적 권력유지를 목표로 정치게임에 몰두하는 가증스런 허구적 자유민주주의…! 그 정치놀음에 놀아나는 시민세력들…! 거기서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어린 학생들마저 어른들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 하여 인간파괴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


인간다움의 출발점, 부끄러움

 

그렇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그 원인은 우리 각자의 평범한 일상 속에 늘 품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주장과 이익 추구를 모든 윤리 도덕에 앞서 내세우고 그것이 아니면 싸워야 하며, 늘 경쟁상대를 제압한 안정이 곧 평화라고 거침없이 자타를 기만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늘 선(善)을 가장하면서도 현실적 자기 편익을 추구하여 악(惡)과 손잡을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단적으로 지적하자면, 도무지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사람이라면, 부끄러움을 인간다움의 출발점이라고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무슨 까닭으로 그럴까요? 그건 곧 각자 지닌 두 가지 모습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자신 안에서 부딪치는 모순 된 두 가지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몸은 하나이면서 두 가지 인간으로 사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분이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돌아가시는 순간에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이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들고도 깨닫지 못하며 그런 잘못들을 계속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그분께서 지금도 이 기도를 계속하고 계시지 않은지,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가슴을 쳐야 할 것입니다.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한다면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면서도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모순 된 삶이 내 안에 존재하는 한, 나는 두 얼굴의 가증스런 모습입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 사람들이 올리브 나뭇가지를 꺾어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더니, 나뭇가지가 채 마르기도 전에 예수님을 내리치는 채찍으로 사용하였듯이, 내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인간이라면 나는 두 얼굴의 가증스런 존재인 것입니다. 용서를 말하면서도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박애정신을 말하면서도 희생하지는 않고, 나는 쏙 빠지면서도 다른 이는 곤경에 빠뜨리고 나서 거룩한 척 기도하고, 앞에서는 이 말하고 돌아서서는 저 말하고,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는 등, 우리는 능수능란하게 두 개의 얼굴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나'라는 한 몸이 두 인간으로 행세했기에 예수님을 죽게 한 것


인간의 두 얼굴로 말미암아 즉, 선한 본성이면서도 악에 익숙한 나의 두 가지 모습 때문에, 그 중간에서 다른 사람이 아무 탓도 없이 희생된다는 그것이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수난사인 것입니다. 내가 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한 사람이 아니고, 선한 척 하면서 악에 발을 딛고 있는 모순적 삶의 이중성 때문에 즉, 내가 몸은 하나이면서 지금까지 두 인간으로 살아서 저 십자가의 두 나무토막이 엇갈린 그 사이에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것입니다. 즉, 나 자신 한 사람으로서 살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터인데, ‘나’라는 한 몸이 두 인간으로 행세했기에 예수님을 죽게 한 것입니다. 그분은 한 사람의 나에게서가 아니라 2명의 나한테 죽으신 것입니다.

 

해서, 나는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두 인간이었구나!”하고 말입니다. 이 고백은 그리스도를 모르고 사는 외교인보다도 오늘의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이 더욱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 않는가 하고 가슴을 치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욱 죄를 많이 지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필립 2, 8) 그분을 오늘 ‘수난주일’에 바라보는 우리들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세상의 탓을 뒤집어쓰지 않고서는, 함께 잘 살아보자면서도 서로 싸우는 이 모순 된 인간들의 세상에서 더 바랄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여 지금까지 나 자신도 그 두 가지 모순 된 인간으로 살아왔지 않은가 하는 깨달음을 오늘 ‘주님수난성지주일’에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 깨달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인간 세상의 모순을 우리 자신의 몸에다가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그 모습을 그리스도의 저 십자가에서 찾아서 그분의 모습대로 살기로 오늘 우리는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침 춘분입니다. 완연한 봄입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입니다. 그렇듯이 나의 삶에 있어서 낮과 밤은 같아야 합니다. 나의 영혼과 육신은 한 가지 실체의 인격이어야 합니다. 낮에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역시 밤에도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춘분일에 맞이한 주님의 수난성지주일은 이제 나의 삶이 주님 앞에서 ‘무슨 일을 하는 삶인지’ 확연한 것이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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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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