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

2016.4.10. 하부내포성지

 


우리 곁에 늘 와 계시는 분

"이보게들! 이제 그만 아침 밥이나 먹지!" (요한 21,12)




153마리의 물고기

 

저는 오늘의 복음 성경을 읽으면서 사흘 앞으로 다가온 4월 13일의 총선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복음 성경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 따라 그물을 쳐서 잡은 고기가 153마리였는데(요한 21, 11), 이번 총선에 출마한 각각의 후보들과 정당들이 국민들의 뜻에 따라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밤새 헛수고만 한 제자들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던 예수님의 말씀 따라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들었는데”(요한 21, 6), 그처럼 선거기간 내내, 아니 오래 전부터, 국민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해온 정치권 사람들이 흡족한 결과를 얻을 것인가…

 

밤새 헛수고 했을 때의 심정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하였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채 이튿날 날이 밝아올 때(요한 21, 3-4 참조) 그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요? 아마 기진맥진하고 실망하던 그들이었겠지요. 하지만 누구인지 잘 알아볼 수 없는 어떤 분이 나타나서 뜬금없이 그들의 사정을 물어보시고는 그물을 다시 치라는 게 아닙니까(요한 21, 4-6 참조). 하루 밤 헛수고한 어로작업을 끝내려던 그들은 알 수 없는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더 고기잡이의 전문가였지만


그런데 기진맥진해 있던 그들이 그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의 말씀 따라 선선히 다시 그물을 던졌다는 것은 오늘의 성경 내용에서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고기잡이로 치자면 그들이 전문가들인데 웬 낯선 사람이 나타나 그들의 밤새 헛수고한 실패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21, 6) 하는 것입니다. 이건 전문 어부들로서 자존심을 상하게 해주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데도 그 낯선 분의 말에 따라 그물을 다시 던졌다는 것은 이제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어버리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으로 해석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헛수고의 끝판에 던진 그물은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 알 수 없는 분의 말씀에 따른 것이 그런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렇듯이 정치인들 또한 민심 얻기에 실패를 했다 하더라도 길가에서 만나는 국민들의 뜻을 따를 겸허한 자세로 돌아간다면 의외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물 한가득 고기를 잡게된 사연에서 배울 교훈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밤새 헛수고한 끝에 그물 가득 고기를 잡게 된 그 사연을 들으면서, 이른바 표심 잡기에 사활을 건 정치권 사람들의 심정에 대고 물어볼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어획은 자신의 실력이 아니었다


시몬 베드로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던가요? 헛수고 끝에 기진맥진 실망하고 있던 차에 그물을 다시 던져보라는 어느 알 수 없는 분의 충고를 아무 생각 없이 따랐던 베드로는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요한 21, 7 참조). 그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뒤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 주님의 말씀에만 전적으로 따르는 투신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물음에 아무 이의 없이 사랑으로 응답함으로써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책무로 결국 목숨까지 바치는 소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요한 21, 15-19 참조). 그것은 엄청난 어획에 대하여 자신의 실력으로 된 일이 아님을 철저히 깨달은 베드로의 태도였던 것입니다.

 

진정 국민을 안심시키는 봉사의 자세로


그렇듯이 국민을 위한 투신으로 나선 정치인들이라면, 그 국민 각자들의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온몸을 던져서 대답을 할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던져서 이번 총선을 통하여 나타날 국민 여망을 겸허히 따르기로 몸 바칠 각오를 다져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여망에 대한 부응으로써 온몸을 불사를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러운 정치적 게임만을 계속하지 말고 진정 국민을 안심시키는 봉사적 자세로 신명을 다할 각오를 다져야 할 것입니다.

 

무릇 우매한 자만이 잘된 일 가지고 우쭐댄다


오늘 복음서에서 밤새도록 헛수고만 하고나서 의외로 얻은 엄청난 베드로의 어획과 더불어, 이번의 총선 결과로 나타날 결과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성공이든 그것의 주인공이 곧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릇 우매한 자만이 잘된 일을 가지고 우쭐대는 것입니다. 성공에 대하여 자만하는 것은 곧 실패로 돌아서는 우(愚)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된 일을 가지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의 베드로가 주님을 알아볼 줄 알게 된 것은 그가 이제 참 제자로서 걸어갈 삶의 길로 눈을 돌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듯이 총선에 승리하게 될 사람들은 이제 정말 국민을 위한 봉사자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참 삶의 길과 진정한 봉사자의 길로 걸어갈 깨달음을 얻어야 참다운 성공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잘나서 얻은 승리가 아니란 깨달음을 얻어야

 

그렇듯 참 성공으로 이끄는 길로 간다는 것은 오늘의 시몬 베드로와 같은 깨우침을 통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그 베드로의 깨우침이란, 우리가 지금까지 혹 헛수고와 실패로 점철되어 살아왔다면, 그것은 주님 없이 나 자신의 힘으로만 살려고 했던 때문이라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혹 성공을 거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께서 나의 길을 함께 걸어오신 덕분이라는 그 베드로와 같은 깨달음을 얻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선거 결과로써 당선된 사람이나 승리한 정당이라면 그것은 곧 국민의 여망을 입은 것이지 스스로 잘나서 얻은 승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실의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문득 우리 곁에 와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언제라도 우리 고뇌의 현장을 지켜보시며 새로운 희망의 그물을 던지라고 가르쳐주시는 분으로 와 계십니다. 그리고는 그분은 우리의 고뇌를 삭혀주시기 위해서 먼저 상을 차려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고기잡이에 밤새 허탕만을 치고 지친 제자들이 여명에 어장을 떠나려 하자, 거기 서계시던 주님은 그들에게 다시 희망의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결국 성공을 거두게 하여 주십니다. 그 실패에서 성공으로 이끌어주신 그분은 그 성공으로 향한 마지막 땀을 흘리며 기운을 소진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장만하여 초대하십니다. “이보게들! 이제 그만 아침밥이나 먹지!”하시면서 말입니다(요한 21, 12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 실패의 현장에 그리고 우리 성공의 현장에 항상 함께 계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은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덧붙여놓은 것


요한복음서는 본래 그 20장으로 끝맺음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나중에 오늘의 이야기를 실은 21장을 덧붙여놓은 것으로 성서학계에 의해 판별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서에 덧붙여진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박해로 시달리면서 실의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오늘의 이야기를 덧붙여 들려줌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은 그렇듯 우리의 고뇌 속에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시는 분이시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실패를 맛본 시몬 베드로로 하여금 연거푸 세 번씩이나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게 하심으로써 실의에 빠진 당신의 양들을 돌보는 길로 목숨을 바치러 가도록 오늘 주님께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21, 19) 하시면서 말입니다.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먼저 죽으셨던 분이시기에 고뇌의 터널을 지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이 나아갈 희망의 길로 초대하시면서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거듭 확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말입니다(요한 21, 15. 16. 17 참조).

 

우리를 향해 던진 사랑의 그물


주님께서 던지신 그 질문은 주님께서 사실 우리를 향하여 던지신 사랑의 그물입니다. 그 사랑 확인의 질문은, 교회를 상징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시 던지라고 명하셨던 그 그물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상징하는 갈릴래아 호수와 같은 우리 고뇌의 바다에 던져지는 사랑의 포옹인 것입니다. 그 주님 사랑의 그물 가득 사로잡히는 고기는 153 마리였는데, 그것은 갈릴래아 호수에 사는 모든 고기들의 종류가 153종이었음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성서학자들의 해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그물로 오늘도 우리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교회에 모여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고기 종류가 153종


우리의 이 교회는 그렇듯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아우르는 사랑으로 가득 차면서도 터지지 않는 그물로(요한 21, 11 참조)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의 명에 따라 던져지는 그물(요한 21, 6 참조)입니다. 거기 모이는 주님의 모든 양들을 베드로는 목숨 바쳐 돌보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고뇌의 이 세상을 상징하는 갈릴래아 호수의 물고기처럼, 주님의 교회라는 사랑의 그물에 의하여 주님의 것이 된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 사랑의 그물로 우리는 주님께서 일컬어주시는 “그분의 양들”(요한 21, 17 참조)이 됩니다. 그러한 우리를, 즉 당신의 양들을, 돌보도록 파견 받은 베드로가 고백했던 사랑의 고백으로 우리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늘 우리의 고뇌의 현장에 와계신다는 믿음을 고백합시다!

 

그분은 늘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러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고뇌를 삭혀주시기 위해 상을 차려 놓으시고는 우리에게 정답게 말씀하십니다. “이보게들! 이제 그만 아침밥이나 먹지!”(요한 21, 12)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렇듯이 삶에 피곤한 국민들을 편안한 삶에로 이끌어주는 우리의 정치권이 되기를 또한 빌어봅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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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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