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일

2016.4.17. 하부내포성지 만수리 공소

 


오늘은 제가 반성하는 날입니다

성소주일은 사제가 반성하는 날



 

착한 목자주일


오늘 부활 제4주일을 일컬어서 ‘착한목자주일’이라 합니다. 그 까닭은 매해 이 부활 제4주일에는 요한복음서 10장을 봉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요한복음서 10장은 예수님께서 ‘착한목자’를 주제로 당신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가 밝히시고(요한 10, 1-18의 내용), 그 때문에 유다인들로부터 악의적 오해와 박해를 받으시고 결국 죽으실 운명의 빌미를 잡히시게 되는 내용(요한 10, 19-39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소주일


그 ‘착한목자’를 주제로 하여 우리는 오늘 그 착한목자의 부르심을 알아듣기로 다짐하면서 오늘을 또한 ‘성소주일’이라 합니다. 그 목자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 형태에 따라 ‘사제성소’니 ‘수도자성소’니 또는 신자들의 ‘일반성소’니 하는 이야기들을 오늘 교회는 펼칩니다. 

 

이러한 성소주일에 특별히 ‘착한목자’를 주제로 하는 사제성소에 대한 계몽을 많이 하게 되는데, 저는 오늘 그래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의 이 무거운 심정을 ‘착한목자콤플렉스’라고나 할까요?

 

착한 목자 콤플렉스?


저의 ‘착한목자콤플렉스’라는 것은 저 자신이 신자들로부터 ‘착한 신부’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저를 아는 신자 분들은 대개 저를 ‘무서운 신부’라고 평가합니다. 저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참 기분이 나쁩니다.

 

여기까지의 저의 이 이야기는 제가 매년 성소주일에 교우들 앞에서 했던 강론의 서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소주일 즉 착한목자주일의 강론으로 더 새롭게 드릴 말씀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뭐라 강론해야 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무서운 신부님 오셨다?


제가 오래 전에 있었던 성당에서 사귀었던 교우의 아들이 어제 혼인을 했습니다. 혼인하게 된 젊은이는 제가 그 성당의 주임신부로 있을 때 꼬마로서 미사복사를 하던 청년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 아들의 혼인미사에 와서 본당 주임신부님과 함께 미사집전을 해달라고 저를 졸라댔습니다. 그래서 제가 있던 그 성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혼인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성당 앞에서 만난 교우님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교우님들 몇 분께서 저를 일컬어 ‘무서운 신부님 오셨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말을 듣는 제가 오늘 같은 착한목자를 주제로 하는 주일에 무슨 강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제가 그래도 나이 먹어가면서는 ‘무서운 신부님’이라는 소리를 면할 때가 오겠지 하면서 나름대로 부드러운 언행을 하려고 애써보기도 하는데, 어제 만난 교우님들로부터 그 ‘무서운 신부님’이라는 말을 듣게 되니 오늘의 이 착한목자주일에 강론대에 서기가 참으로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저 자신보고 하시는 말씀으로 새기면서 읽어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 27-28)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다음과 같은 반성을 합니다. 참으로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하신 이 말씀을 나 자신도 할 수 있겠는가? 교우들께서 나를 일컬어 ‘무서운 신부님’이라 하는데 그 교우들이 나의 목소리를 듣고 나를 따라올 것인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하셨는데(요한 10, 29), 나는 과연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교우들을 냉담자로 만들진 않았는지?

 

이러한 반성과 더불어 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교우들이 나의 말을 따를 것인가?’

‘나 자신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나의 진심을 교우들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제가 살아가는 모습이 정의롭지 못할 경우에는 교우들께서 저의 말을 거짓으로 여겨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신자들을 진정 사랑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모습일 때에는 저의 삶이 아무리 올바른 것으로 보일지라도 저를 두려운 존재로만 볼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사랑에서 우러나온 언행으로 대한다면 설사 나의 행동에서 다소 틀린 것이 눈에 띈다 하더라도 교우들과 나 사이가 금이 가지는 않으리라 생각 됩니다. 말하자면 교우들에게서 발견되는 부족한 점이 저 자신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분”이라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주는 히브리서의 말씀처럼(히브 4, 15) 예수님을 닮음으로써, 신자들의 부족함 속에 나 자신의 몸도 담는 태도로 저 스스로 변화되어야겠다는 뒤늦은 깨달음을 오늘 지녀봅니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러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봅니다.

 

‘올바름을 주창하기에 앞서 잘못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반성을 합니다.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1고린 12, 22)고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처럼, 교우들 가운데 발견되는 부족함을 더욱 주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지난주일(부활 제3주일)의 복음서(요한 21, 15-19 참조)에서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씩이나 거듭 확인 질문하시고는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고 명령하신 바를 기억하면서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그 대답으로 교우님들을 대해야겠다고 또한 결심해봅니다.


저 자신에 대한 반성

 

그래서 오늘 ‘착한목자 주일’에 저 자신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올해 ‘자비의 특별희년’이 강조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저 자신에게 새기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잘못에 앞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사제로서 교우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교우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저 자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교우들께서 저의 진심을 알아듣게 될 것이겠지요! 그래서 오늘의 복음 성경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저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 27)

 

그렇습니다. 교우님들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저는 사제로서 실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님들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 자신이 사제로서 잘못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세월에 저를 만난 교우님들께서 ‘무서운 신부님’이라고 저를 일컫는 사실에서 저는 사제로서 실패를 거듭하여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아시는 모든 교우님들께 용서를 청하면서, 이제부터라도 교우님들의 마음과 삶에 동화하는 자세로 살도록 노력하기로 결심합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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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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