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승천 대축일
2016.5.8. 하부내포성지
하늘을 가슴에 담아 …
우리 발걸음 따라 하늘이 내려 앉네
부활신비의 역동적 체험 - 승천의 신비 체험
우리는 오늘 교회 전례력에 따라서 부활신비를 웅대한 입체감으로 체험합니다. 그것은 부활신비에 대한 역동적 체험, 즉 승천신비의 체험인 것입니다. 이 신비체험을 몸으로 느껴 보고픈 소박한 신자들의 관습에 따라, 오늘 많은 본당 공동체들은 산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면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렇게 산이나 들로 나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미사를 올리는 이 관습을 ‘야외미사’라고들 말합니다만, 저는 ‘하늘보기미사’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 까닭은 마치 주님을 따라 산에 올라가 그분께서 승천하신 하늘을 바라보던 제자들의 심정을 우리도 함께 가져 보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마침 ‘어버이 날’을 맞이하여 부모님 모시고 모두 함께 ‘하늘보기미사’에서 마음 드높이 하늘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오늘 바라보는 하늘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승천신비를 체험하고자 하는 우리의 하늘이란 결코 우리의 육안에 물리적으로 파악되는 우주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제가 10여 년 전에 TV에서 김용옥 교수의 강의를 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더듬어 설명하여보겠습니다. 김 교수는 그때 ‘최한기와 니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그 강의 중에, 김용옥 씨는 니체의 ‘초인(超人)’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명제 하에 신을 거부하기 위한 논지를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혼과 하늘나라 등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비하하고 오로지 인간의 몸과 현세적 차원의 ‘땅의 의미’만을 역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땅’의 강조를 통하여, 인간이 몸으로 달성해야할 수련을 강조하면서, 영혼구원이나 하늘나라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비웃는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것을 보던 저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 자칭하는 김용옥 씨의 그러한 주장은 참으로 경솔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본성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려는 억지 주장이었습니다.
김용옥의 주장은 인간의 종교적 본성을 부정하는 것
하지만 오늘 우리는 김용옥 씨의 그 오만한 ‘땅’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올립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을 따라서 말입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사제가 함께 감사송을 바치기 위하여 교우들에게 “마음을 드높이!” 라고 권유하면 모두 “주님께 올립니다.” 하고 환호로 답하듯이, 우리는 오늘 특별히 우리의 마음을 주님 따라 하늘로 올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땅에 마음을 붙이고 산다
우리는 평소 우리의 마음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삽니다. 이 땅에서 얻을 것이 무엇일까 하고 땅에다가 마음 붙이고 사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땅의 소출을 얻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 없이 인간이 살 수 없지요. 사람이 땅을 딛지 않고 허공을 걸을 수 없듯이 인간의 삶이란 땅을 그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삶의 풍요로움을 땅으로부터 얻고 있습니다. 땅 속에서 무엇을 캐내는 것으로써, 또는 땅을 일구어 얻어지는 열매로써, 인간은 몸을 키우고 참 인간다운 삶을 이룹니다.
그러나 땅과 관련하여 인간이 동물과는 달리 참으로 인간다운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그 몸으로 딛고 있는 발밑의 땅 만을 땅이라 하지 않고, 살아가며 차지하는 영역을 일컬어 땅이라 하며, 그 땅위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땀을 흘릴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땅 거죽만 보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땅 거죽만 보는 존재가 아니라, 땅속까지 깊이 탐색하여 그 땅속이 품고 있는 값어치를 찾아내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또한 땅을 일구고 거기에 씨를 뿌릴 줄 알아 거기서 생명의 신비를 만날 줄 아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은 더욱 땅의 끝을 향하여 눈길을 멀리 보낼 줄 알기에 모험의 발걸음을 내딛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땅 끝 너머에까지 상상의 길을 마음으로 여행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땅 끝이 맞닿은 거기에 땅을 덮는 하늘을 느낄 줄도 아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땅과 씨름하여 살아가는 삶이 인간의 한 생애
그래서 땅과 씨름하여 살아가는 삶을 인간의 한 생애라 하며, 그 땅과의 씨름을 끝마치면 곧 자신의 몸을 땅에 묻습니다. 그렇듯 한 생애의 끝에 땅에 묻히면서 이 땅을 떠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땅에 의지해야 하고 땅을 떠날 수도 없는 몸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땅과의 관계를 마치게 되는 시점에 몸이 땅으로 돌아가더라도 ‘이 땅을 떠난다.’고 합니다. 모순적 표현이지요. 이러한 모순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몸이었던 인간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실체는 이 땅 끝 너머에까지 덮은 하늘을 향하면서 그 몸을 땅에 묻게 되어 땅을 떠난다 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껍데기인 몸을 땅에 돌려보내면서 세상을 떠난다고 의식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망각한 김용옥의 주장은 그야말로 무식한 망발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본다면, 인간은 땅에서 거저 얻어먹지 않는 존재이며, 그 반대로 인간은 땀을 흘려 삶의 질을 땅에 입혀줌으로써 땅 자체에 정신적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정 인간이라 불립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으로 땅에서 거두는 것은 땅 자체의 열매가 아니라, 땅과 상대하여 형성하는 인간 자신의 삶 자체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란 결코 땅에 묻혀 스러져버리는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즉 이 땅에서 만들어 나가는 삶이 허무하게 없어져 버릴 것이라면 인생이란 처음부터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의 굴절들을 내 생애의 씨줄 날줄로 삼았는데 그것을 어느 날 이 땅속에 다 묻어버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이 땅과 씨름하여 얻은 내 생애의 그 값을 어느 날 한꺼번에 빼앗길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땀 흘려 가꾸고 추수한 알곡을 어딘가에 잘 거두어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디가 거기이겠습니까?
하늘입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떨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에페 1, 20-21)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을 덮는 죽음의 세력을 굴복시켜 승리하신 분이 되셨음을 의미하여,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이 ‘땅’과 그리고 이 땅위의 ‘모든 인간’을 구원하신 분이라는 바오로의 설명인 것입니다.
땅은 모든 것을 담고, 하늘은 모든 것을 덮는다
우리 속담에 “땅은 모든 것을 담고, 하늘은 모든 것을 덮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보존을 외치면서 인간들의 오물로 땅을 더럽히고 있음을 반성합니다. 땅은 인간들의 모든 더러움을 마다하지 않고 담아주고 있지요. 그러면서 땅은 인간들로부터 훼손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은 인간들의 죄악을 담기 위해 상처받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곧 인간의 죄악이 세상을 더럽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땅은, 즉 세상은 어지럽고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땅에 가득하다 하더라도 세상을 덮고 있는 하늘은 고고할 뿐입니다. 죄악의 혼란이 하늘로 퍼져간들 하늘은 항상 하늘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이 되셨습니다. 돌아가시고 땅에 묻히셨던 그분께서 일어나시어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땅과 하늘 사이에 가득 찬 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한 그분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 47-49)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시고, 이 세상의 죄악으로 죽으시고 땅에 묻히셨다가, 모든 권세 위의 하늘에 오르셔서 우리 모든 인간을 하늘로 불러올리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 하늘의 기운 즉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이 땅 위에 살면서 죄악과 대결하여 승리하고 그분을 따라 하늘로 오를 수 있는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다.
땅 끝 너머의 하늘에까지 눈길을 뻗어야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얻을 것을 찾아 땅에다가만 눈을 깔고 서로 부딪치며 다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을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땅 끝 너머의 하늘에까지 눈길을 뻗어야 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승천신비는 부활의 새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땅의 테두리에 갇혀 사는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하늘로 오르시는 그분을 바라보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늘을 허공으로 보지 말고 그 하늘로부터 그분의 지배력이 이 땅을 덮게 됨을 알아보라고 말하였습니다(사도 1, 1-11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승천신비를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승천신비의 체험이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이 세상의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이미 우리의 가슴에는 하늘을 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선조들께서는 박해의 이 땅위에서 하늘을 가슴에 품어 살다가 기꺼이 이 땅을 떠나 하늘을 향하는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하늘을 본 사람 답게
우리는 그렇듯 주님 오르신 하늘을 본 사람답게 그분의 하늘을 가슴에 담아서 이 땅 위의 사람들에게 그 하늘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위의 것만을 보지 말고 우리가 가슴에 담은 저 하늘을 함께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새로운 삶이 열려짐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우리 삶의 희망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발걸음 따라 그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앉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와 더불어 우리의 세상이 하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이 세상을 하늘과 가까워지게 하는 신비가 곧 다음 주일 성령강림대축일에 얻을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체험일 것입니다. 이 땅 위의 세상 곳곳에서 모여온 사람들이 하나가 되던 오순절이 그 성령강림을 체험한 날이었던 것입니다.
출처 -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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