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13~23장에 대한 묵상글


예레미야의 다섯가지 고백


예레미야서의 1장부터 10장까지는 공적인 설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심판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고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면, 11장부터 20장까지는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체험과 그의 내면세계를 굉장히 많이 담고 있는 개인 고백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예레미야서의 세계를 특징짓는 것은 예레미야의 영혼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보여지는 예레미야는 매우 놀랍게도 진실하게 자신의 내면을 섬세하게 비추어냅니다. 그래서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는 다섯가지 탄식록이 들어 있습니다. 고통받는 심정의 토로이며, 이 예언서의 절정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대중의 적이고 왕에 대한 반역자로 취급당합니다. 그래서 BC 605년부터는 한 때 은둔생활을 합니다. 이 시기를 예레미야의 침묵시기라고 합니다. 이 때에 그는 고백록이라고 불리우는 5편의 탄식록을 탄생시킵니다. 일기와 비슷한 것으로, 당시 어떤 예언자의 것보다 종교문학적인 성격이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이후 시편의 탄원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다섯가지 고백록으로 하느님께 탄식하고 있습니다.

 

5편의 고백록은 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 입니다.

 

11,18~12,6 예레미야의 첫 번째 고백


11, 18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19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20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21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우리 손으로 너를 죽이겠다.” 하고 말하면서 내 목숨을 노리는 아나톳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2 “그러므로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그들을 벌하겠다. 젊은이들이 칼에 맞아 죽고 그 아들딸들이 굶어 죽을 것이다. 23 아나톳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살아남는 자가 없으리니, 징벌의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12,1 주님, 제가 당신과 소송을 벌일 때마다 당신께서는 정의로우십니다. 그럴지라도 당신께 공정성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의 길은 번성하고 배신자들은 모두 성공하여 편히 살기만 합니까? 2 당신께서 그들을 심으시자 그들이 뿌리까지 내리고 자라서 열매마저 맺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당신을 가까이 모시지만 속으로는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3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알고 살피시며 당신에 대한 제 마음을 떠보십니다. 도살할 양처럼 그들을 끌어내시고 살해할 날을 위하여 그들을 떼어 놓으소서. 4 언제까지나 땅이 통곡하고 온 들녘의 풀이 말라 가야 합니까? 그곳에 사는 자들의 악행 때문에 짐승과 새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앞날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고 저들이 말합니다. 5 네가 사람들과 달리기를 하다가 먼저 지쳤다면 어찌 말들과 겨루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만 의지한다면 요르단의 울창한 숲 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 6 네 형제들과 네 아버지 집안조차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는구나. 그러니 그들이 너에게 좋은 말을 한다 해도 그들을 믿지 마라.

 

첫 번째 탄식에서는 고향 아나톳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 합니다. 그래서 친구, 친척, 고향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예레미야의 탄식입니다. 그를 백성의 원수로 몰아붙이는 것에 대한 탄식입니다.

 

15,10~21 예레미야의 두 번째 고백


10 ,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11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풀어 주어 복되게 하리라. 재앙과 재난의 때에 네 원수가 너에게 간청하게 하리라. 12 누가 쇠를, 곧 북녘에서 오는 쇠와 청동을 꺾을 수 있겠느냐? 13 나는 너의 재산과 보화를 노획물로 내어 주리라. 그것은 네 거주지 곳곳에서 네가 저지른 온갖 죄악의 대가다. 14 나는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서 원수들을 섬기게 하리라. 참으로 내 분노의 불꽃이 댕겨져 너희를 거슬러 타리라."

 

15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아십니다. 저를 기억하시고 찾아 주소서. 저를 뒤쫓는 자들에게 복수하여 주소서. 당신 분노를 늦추시다가 저를 잃지 마시고 당신 때문에 제가 수모를 당하는 줄 알아주소서. 16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17 저는 웃고 떠드는 자들과 자리를 같이하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를 가득 채운 당신의 분노 때문에 당신 손에 눌려 홀로 앉아 있습니다. 18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19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 그들이 너에게 돌아올망정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20 그러므로 이 백성에게 맞서 내가 너를 요새의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 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건져 낼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21 내가 너를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무도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내리라.“

 

두 번째 탄식은 탄식이라기보다는 예레미야가 다시 재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 부르심을 힘들어합니다. 그런 재목이 아닌데 왜 부르심을 받을까 하며 힘들어할 때 하느님이 다시 불러주시며 힘을 넣어주십니다.

 

17,12~18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


12 저희 성소가 있는 곳은 처음부터 드높은 영광의 옥좌였습니다. 13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

 

14 주님, 저를 낫게 해 주소서. 그러면 제가 나으리이다. 저를 구원해 주소서. 그러면 제가 구원받으리이다. 당신은 제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15 저들이 저에게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나? 내려와 보시라지!” 16 그러나 저는 당신께 재앙을 재촉하거나 파멸의 날을 기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 아십니다. 제가 당신 앞에서 아뢰었기 때문입니다. 17 당신께서는 저를 두렵게 하지 마소서. 재앙의 날에 당신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 18 저의 박해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하시되 저는 수치를 면하게 해 주소서. 그들은 두려움에 떨게 하시되 저만은 두려움을 면하게 해 주소서.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닥치게 하시고 그들을 부수시되 갑절로 부수어 주소서.

 

그 다음에 세 번째 탄식은 반대자들의 비웃음을 받습니다. 사람이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조롱받는 것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오늘날 그런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2014년 106일 저녁 730분에 천주교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 성당에서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촉구>를 위한 시국미사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는 이번 미사를 통하여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 구성과 특검을 통한 관련자의 엄중한 처벌 등을 요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평위 측은 미리 배포한 시국선언문을 통해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국가가 사고의 진실과 구조 실패의 책임 등을 온 힘을 들여 규명해야 한다""잘못된 언행으로 유족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세력들은 사죄하고, 과장된 보도로 불신을 안겨준 언론도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미사의 2부에서는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셨던 한 아버님(가톨릭신자)  김학일(루도비코) 형제님과 변호사 한 분이 나오셨습니다. 김학일 형제님은 416일의 세월호 참사 이후로 아이를 잃은 뒤, 모든 국민이 자신들의 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고 마음아파한 한달여를 지내고 난 이후로 전혀 다른 상황의 온갖 조롱과 빈정거림에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세월호를 통해서 로또 당첨 된 것 아니냐는 식의 빈정거림과 조롱 등을 들으며, 그 이전의 위로와 공감은 많이 사라지고, 이렇게 조롱을 받는다는 것내가 그 조롱받는 상태에 있을 때 비웃음 당하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은 견디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세월호 유가족 김학일 형제님은 잔잔하게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인가 하시면서 그럼에도 자신의 아이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그 진상을 밝히고 싶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PBC뉴스 2014-7-18자

[인터뷰 전문] 단원고 희생자 김학일 "도보순례 십자가 교황께 봉헌할 것"

 

세월호 침몰사건과 비슷한 일로, 몇 년전 미국의 비행기 한 대가 허드슨 강에 떨어졌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장의 현명한 판단으로 탑승자 155명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놀라운 얘기입니다. 시국미사에서는 그 동영상을 보여주었는데, 기체가 이상한 상황에서 기장은 안내방송으로 좁은 통로를 열고 양쪽 날개로 균형있게 일렬로 나가게 했습니다. 물 한복판에서 아직 반쯤 잠겨있고 날개만 떠 있는 그 양 날개에 균형있게 155명을 나누어 일렬로 서게 하는데 1분 밖에 안걸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있는 동안, 각 헬기와 비행기가 오고 배들이 도착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고작 3분이었답니다. 그래서 이 3분만에 155명이 모두 구조되었던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에서는 3일이 지나도 아무 것도 제대로 움직인 것이 없다는 얘기가 있고, '높은 사람이 없어서 일을 못한다', 또 '높은 사람이 와서 라면 끓여먹고 갔다'는 등의 얘기들만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비행기 사건 동영상을 보는 것은 더욱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김학일 형제님은 무엇보다도 가슴아픈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어가는 것이라고 하신 바 있는데, 예레미야도 그랬던 것입니다. 반대자들의 비웃음 속에 예레미야가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18,18~23 예레미야의 네 번째 고백


18 그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

 

19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21 그리하여 그들의 자녀들을 굶주리게 하시고 그들을 칼날에 부치소서. 그들의 아내들이 자녀도 없는 과부가 되고 그 남편들은 흑사병에 걸려 죽어 가며 젊은이들은 싸움터에서 칼에 맞아 죽게 하소서. 22 당신께서 갑자기 그들에게 약탈자를 보내실 때 그들 집 안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게 하소서. 그들이 저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파 놓고 저의 발밑에 올가미를 숨겨 두었습니다. 23 주님, 당신께서는 그들이 저를 죽이려는 흉계를 모두 아십니다. 그러니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당신 얼굴 앞에서 지우지 마소서. 그들을 당신 앞에서 거꾸러지게 하시고 당신 분노의 때에 그들을 마구 다루소서.

 

네 번째 탄식은 실질적인 박해의 내용입니다. 백성이 예레미야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박해로 이루어집니다.

 

20,7~18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


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8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 거리만 되었습니다. 9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어찌하여 내게 생명의 선물을 주셨는가


14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15 저주를 받아라, "당신에게 사내아이가 태어났소!" 하며 아버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를 몹시 기쁘게 한 사람16 바로 그 사람을 주님께서 사정없이 뒤엎으신 성읍처럼 되게 하여라. 아침에는 울부짖음을, 한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듣게 하여라. 17 그가 모태에 든 나를 죽여 어머니가 내 무덤이 되고 내가 언제까지나 모태에 있지 못하게 한 탓이다. 18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고난과 슬픔을 겪으며 내 일생을 수치 속에서 마감해야 하는가?

 

다섯 번째 탄식은 예레미야의 소명의 위기입니다. 엄청난 박해와 비웃음 속에서 예언자의 자리에 회의를 느낍니다. “난 안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주목해야할 내용입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신앙의 기초까지 흔들립니다. 그럴 정도의 고통에 신음합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대 예언자인데, 이 예언자의 말을 들었다면 이스라엘이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이 흔들리는 예레미야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약한 사람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뽑아서 쓰는 사람은 너나없이 모두 약하다는 겁니다. 인간적인 예레미야를 보면서, 우리도 위로를 느끼게 됩니다. 나도 어떤 하느님 일을 해나가면서 인간적 약함에 많이 부딪칩니다. 그렇지만 20장에서 예레미야가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하느님을 알다가도 모를 분이라고 의심까지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앞으로 제2이사야 예언서에서 보는 야훼의 종이란 얘기와 신약에 와서 하느님 왜 저를 버리십니까?’라며 하느님을 원망하는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예수님이 이게 아버지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다시 만납니다. 예레미야의 이 탄식도 원망과 한탄을 모두 쏟아내다가 진짜로 하느님을 만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식과 원망 끝에 고통을 극복하고 하느님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다섯개의 고백 중 두가지를 뽑는다면?


여기서 5개 탄식 중에 대표적인 것 두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15장입니다. 15장은 예레미야를 다시 부르십니다. 예레미야는 너무 힘들어서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그의 신앙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하니님이 자기를 홀렸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기도로 자기연민이 많이 드러납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런 것이지만, 자기연민에 빠지기 시작하면 자기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그의 자기연민에 빠진 모습에 대해 하느님이 15,19절에서 응답을 합니다.

 

15,19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 그들이 너에게 돌아올망정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15장을 통해서 예언자에게 예언자의 불평불만이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하느님 뜻을 찾으면서 하는 것인지 살피게 한다는 겁니다. 자기 중심적 태도에서 이뤄진 것은 좀 더 내적인 정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만으로는 하느님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내적 정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5장을 통해서 하느님은 오롯한 너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저를 가져다 쓰십시오라고 생각하는 오롯한 마음. 자기 중심이 아닌 새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언 중 자기연민에 빠집니다. 너무 힘들어서,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새 마음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내가 다시 소명을 받았을 때 참회가 필요합니다. 참회하는 그 때 하느님이 내가 너와 있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8절에서도 나옵니다.

 

1, 8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 다음 한가지는 20장입니다. 이것은 다섯 번째 탄식인데, 이것은 예레미야의 내적 갈등과 믿음에 대한 얘기입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습니다. 예언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자비의 소명을 버리고 싶어합니다. 207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20,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꾐에 빠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어떤 수녀님은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는 중에 저는 당신에게 발목이 잡혔습니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발목이 잡혀 뗄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잡힌 발목을 온전히 주님께 응답하니 당신이 가시고자 하는 방향으로 데려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안따라가면 엄청나게 부딪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 말씀에 아랑곳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자기 소명을 버리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잊어버리고 하느님 손에서 벗어나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데, 209절을 보면

 

20,9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말입니까?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니 빠져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 고통 속에서 예레미야는 주님의 약속의 기대를 버리려는 것 같았지만, 다시 약속에 대한 깊은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207절에서 18절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탄식입니다. 예레미야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치욕과 모욕 속에서도 불길을 끄지 못하고 절망하다가 마지막에는 주님께 항복하고 의탁합니다. 그게 2011절입니다.

 

20,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이처럼 예레미야가 하느님과 맺은 초월적 사랑, 초월적 신앙, 이러한 믿음이 예레미야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엄청난 고통과 갈등을 호소하면서도 의지하고 응답드릴 수 밖에 없는 깊은 믿음을 바라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편 16장은 고독한 예레미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신자는 오늘날 우리사회에 굉장히 많지만, 이 당시 고대근동의 독신자는 당시 관습에 따르자면 독신자로 혼자의 몸이란 죽은 사람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사실 예레미야의 꿈은 소박하게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었지만, 독신자의 길을 걷게 하신 하느님의 뜻은 이스라엘도 이 예레미야의 이 죽음같은 삶처럼 전쟁에 나가고 남의 나라에 유배를 가고, 흩어지고,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란 것. 그래서 독신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언자의 사적인 삶, 생애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20장까지 안에서 바라보는데, 두가지 정도의 비유와 상징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13장의 아마포 띠를 말하는데, 이스라엘 멸망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운명을 보여주는 생생한 비유로 아마포 띠는 옛날 성경을 보면 모시 잠방이라고 해서 높은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 매는 띠입니다. 그래서 이런 아마포 띠를 허리에 걸치고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바위사이에 숨기라고 하니 아무 쓸모없이 썩어버리죠. 이스라엘을 당신께 꼭 매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특별히 사랑하고 뽑은 이 이스라엘을 당신께서 꼭 붙들어 매어두려고 했지만, 이스라엘의 고집, 교만, 불충실, 오만 이런 것들이 썩은 이 띠처럼 결국 파멸할 것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타락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엄청 높은 자리로 올라갔는데 그 기쁨에 맞갖은 삶을 못산다면 우리도 아마포 띠처럼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18장에 나오는 옹기장이 얘기입니다. 예레미야는 고대 근동에서 보여지는 옹기장이를 이스라엘 운명에 비유합니다. 옹기장이는 이스라엘 운명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말합니다. 옹기장이는 마음에 드는 원하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다시 작업하고 부숴트리기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옹기장이처럼 자신의 진흙인 인간을 당신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부숴트리고 단련시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옹기장이는 잘 만들었다고 하지만 마지막 공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가마에 들어가는 것이고 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에 들어가서 구워지지 않고서는 아무리 잘 만들지 않으면 작품이 안됩니다. 마지막 불에 들어가 단련되는 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작품을 만드는 단련의 과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철저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만이 죄에서 구원되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통해 빠져나오지 못하면 심판도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19(질그릇을 깨며 예언하다)은 되돌릴 수 없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으로부터 옹기그릇을 사다가 벤 힌놈 골짜기 여기서는 다른 이방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살육의 골짜기라고도 불렸는데, 이스라엘 백성도 이 파괴가 심한 저주받는 골짜기에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러한 무서운 예언을 예레미야가 감당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상징적인 얘기들이 있었고, 21장부터 23장까지에서 예레미야는 70년간 유배생활을 할 것이라고 고발합니다. 그리고 거짓목자와 거짓예언자를 고발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왕과 예언자 등이 지도자의 역할을 못해서 나라를 못지킨 것이라는 고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장은 새 백성이 형성될 것을 예언합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또 하느님의 자비를 애기합니다.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에게 잡힌 사람입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회개하고 하느님에게 돌아올 때 새로운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백주간 41주차 구약의 예레미야서 13~23장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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