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와 아파트 경비원의 분신자살(시도) 무엇이 다른가?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 한 분이 모멸감을 견디지 못하다 분신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일주일 전 쯤 벌어졌습니다. 요한의 세상노트에도 기록을 남겼고, 이 사건을 계기로 '감정노동'에 대한 여러 언론의 보도현황도 간단히 정리해둔 바 있습니다.


요한의 세상노트 2014.10.14  우리가 강아지 새끼인가? .. 경비원의 분신자살 시도  


무엇보다도 분신자살은 암울한 군사정권 시대에 개인이 참을 수 없는 어떤 지경에 이르렀을 때, 최후의 항거수단으로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을 향해 발언하는 최종적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은 억압받던 개인이 개인의 인권에 대해 각성하고 그것을 사회적 차원의 대중각성 운동으로 전환시키던 민주화 운동의 극단적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1948~1970. 불꽃처럼 인생을 살다가 전설이 되신 전태일


분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전태일 열사가 계십니다. 1948년생이신 이 분은 봉제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산업역군'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진 노동착취에 항거하며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던 끝에 만 22세이던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전태일은 '열사'란 호칭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했고 우리는 지금도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 44년전에 벌어진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과 보름 전 쯤에 벌어진 아파트 경비원의 분신자살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그것은 본질적으로 공통점이 많습니다. 44년의 시간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태일이나 아파트 경비원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상은 여전히 척박하고 하위 노동자의 신세는 찬밥이고 개보다 못한 처지였을 것입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2시경의 일이었습니다.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쥔 채로 온 몸에 석유를 붓고 몸에 불을 당겨버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온 몸에 불길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거리로 뛰쳐나오며 전태일이 외친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등을 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기서 다른 점이 극명하게 보여집니다. 전태일의 요구상대는 정부와 업주였습니다. 정부와 업주의 극도로 불성실한 태도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정체가 분명한 상대였습니다. 이것이 아파트 경비원의 분신자살 시도와 첫번째로 다른 점입니다. 

아파트 경비원의 분신자살은 사회적 연대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아파트의 경비원들과의 연대는 사후약방문같은 식이었습니다. 사회적 연대가 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뚜렷한 목적을 공유할 수 없기때문입니다. 뚜렷한 목적이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자화된 개인의 소통능력부족때문일까요? 길들여진 감정노동의 터널 속에서 좌고우면하지 못하는 심리적 위축감때문일까요? 아니면 최저생계비 수준의 월급이라도 못받는 날에는 당장 굶어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때문일까요? 분신자살이란 극약처방에도 익숙해진 사회적 관성때문일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파트 경비원의 분신자살은 훨씬 더 병든 사회를 반영하고 있어보입니다. 44년전,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천대받던 노동자들을 암울한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지금보다 미래에 대해 훨씬 더 낙관적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한알의 씨가 되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들은 역사적으로 기념되고 있으며, 전태일은 2001년 민주화운동 보상법에 따라 정부에 의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태일의 죽음이 헛되게 되는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600만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노동환경은 훨씬 더 복잡다양해지면서 누구를 상대로 노동권의 향상이나 인권의 개선을 요구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도 있는 것입니다.  아파트 입주민 모두를 상전으로 모시도록 감정노동을 강요당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어찌보면 수백명에게 집단적인 린치를 당하고 있기때문에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또 하나를 상대해봐야 무슨 해결책이 있을까 등등의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들게 만들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들의 방문은 진정성이 있을까?

분신자살은 그 시도 자체가 너무나 무모하고 끔찍한 것이기에 사회적 영향력이 당연히 발생하였습니다. 2014년 10월 14일 오전 새누리당의 이군현 사무총장이 경비원과 가족을 만났습니다. 당 인권위원장 이한성 의원이 동행하였고, 이 사무총장은 병원 치료를 산업재해 보험으로 처리될 수 있게 해달라는 가족들의 요청에 “최대한 돕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음날인 2014년 10월 15일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을지로 위원회 우원식 위원장과 홍익표 의원등이 병원을 찾았다고 합니다. 비슷한 얘기들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봅니다. 어찌되었든 이들의 방문이 전시성 일회용이 아니라 입원중인 경비원분과 가족들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길 간곡히 기대해봅니다.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병원비용 문제입니다. 앞으로 여섯번이나 더 대수술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산재처리가 이뤄지지 않으면 당장의 치료비 마련에도 큰 어려움이 따르는 처지라고 합니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경비원 분의 부인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남편의 다른 동료경비원들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부인은 말씀하시기를 우리 남편도 문제지만 다른 경비원분들도 더 이상 이런 문제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게 해달라는 당부를 하신 겁니다. 

해당 아파트인 압구정동의 주민들이 성금을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해당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이 모두 이 경비원에게 모욕을 주었을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해당 입주민들 중에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속성이 더 강하고, 게다가 부자동네라는 인식에 대한 묘한 반발심리도 존재할 것 같습니다. 괜히 좋은 일 하고 더 욕먹을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불에 데인 가슴의 상처도 씻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경비원 가족에게 위로를 보내는 것입니다. 가장 상징적인 행위라고 보입니다. 그 아파트에 사시는 어떤 분이라도 '개인적으로' 병문안을 가고 위로를 보내는 것도 한가지 방법입니다. 성금도 중요하지만, 그런 행위가 모욕으로 멍들고 화상입은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씻어줄 수 있을 겁니다. 그 경비원 분은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보낸 같은 커뮤니티의 구성원이었습니다. 함께 '같은 시공간'을 나눠갖고 많은 시간을 공유하던 '인간'이었습니다. 보이지 않은 비물리적 현상으로 보았을 때는 교감을 주고받았을 거싱고, 그들 공간의 대기에는 서로 나누고 혼합된 공기가 흐르면서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과연 시대착오적인 공상에 불과한 것인지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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