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우주역사의 서막 연 최순달, 하늘나라로

전두환 대구공고 3년 선배로 부정적 평가도 함께 얻어


1984년 12월 설립했던 한국과학기술대학(Korea Institute of Technology)의 초대학장을 지냈던 최순달 현 KAIST 전기및전자공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10월 18일(토) 노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이고 발인은 10월 22일(수), 장지는 경기도 국립이천호국원입니다. 1931년 6월 20일 대구생으로 향년 83세의 고인에게는 유족으로 부인 홍혜정 여사와 아들 영택, 홍택, 딸 세경, 주경 씨 등 2남 2녀와 사위 필립씨가 있다고 합니다. 


최순달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 분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우주개발 역사는 더 늦게 시작되었을 것이며,  한국의 IT 발전도 더디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5공화국이 펼쳐놓은 과학정책의 선봉에서 화려한 업적을 일구어놓은 분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전두환의 5공에서 저지른 비리의 대표적 사례였던 일해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기도 한 분입니다. 


전두환의 대한민국 제5공화국에서 고인은 각종 기관장을 역임합니다. 특히 초대 기관장 자리를 많이 맡았습니다. 초대 한국전기통신연구소장 겸 한국전자기술연구소장, 초대 일해재단 이사장, 초대 한국전력공사 이사장, 초대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장 등이 그것입니다. 이 밖에도 제32대 체신부 장관,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등이 맡은 바 있습니다. 


2005년 7월 7일 출간된 책. 정가 11,000원. 행간풍경 출판사. 현재 절판상태이다. 이 책은 최순달의 자서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개발의 주역


그런데 무엇보다도 고인의 업적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우주로 쏘아올린 일입니다. 대구공고를 나와 서울대 전기공학과와 미국 UC 버클리의 전자공학 석사, 스탠포드대학교 전자공학 박사를 받은 그는 초대 한국과학기술대 학장으로 부임하여, 과기대 학생들을 선발하고 그들을 영국의 서리(Surrey) 대학으로 최정예 학생들을 유학보내면서 우주개발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고인이 가장 아끼는 제자들 중에서 인공위성 개발자로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 중에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다음의 링크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대한민국 제1호] 첫 인공위성 '우리별' 개발자 박성동 씨... 조선일보 2009.8.31


우리별 1호(KITSAT-1)의 성공은 세계에서 22번째 위성보유국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만든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우리나라 과학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1993년 6월 23일자 동아일보와 6월 24일 한겨레에 실린 관련기사입니다. <우리는 별을 쏘았다>는 '화제의 책'을 소개하는 내용인데, '우리별 1호' 제작팀의 집념과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현재는 절판되어 구하기 쉽지 않은 책이 되었습니다. 



    

1993년 6월 23일 동아일보와 24일 한겨레에 실린 기사이미지


단군이래 최대규모 240억 프로젝트, TDX(전자교환기) 국산화의 업적


이에 앞서서 고인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40대 중반이던 1970년대 중반 한국에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한국 과학기술계에 큰 족적을 남깁니다. 그 중에는 전자교환기의 국산화도 큰 업적이었습니다. 1981년 전기통신연구소(KETRI,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전신) 초대소장으로 부임한 그는 세계에서 11번째로 국산 전자교환기(TDX) 개발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TDX 개발에 따른 정부예산 요구액은 240억원이라는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의 연구비였기 때문에 "실패할 경우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한다"는 각서를 당시 양승택 개발단장과 함께 정부에 제출했다고 합니다. 


고인의 업적 중에서 또한 돋보이는 것은 인공위성 우리별의 개발을 가능하게 만든 대학의 설립이었습니다. 1984년 12월 31일 설립된 한국과학기술대학(KIT, Korea Institute of Technology)은 학사과정만을 두고 있는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과기대의 희망찬 개교와 우리별 발사의 성공


1986년 3월 3일 제1회 입학식을 가졌으며 이후 1989년 7월 4일 서울의 한국과학기술원에 흡수통합됩니다. 아니면 그 반대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서울에 있던 한국과학기술원이 대전에 있던 과기대의 캠퍼스로 이전되었고, 그 시절은 전두환이 모든 것인 시대였기때문에 박정희의 한국과학기술원(한국과학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통합기관)은 전두환의 한국과학기술대학으로 흡수통합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한국과학기술대학이 존재하고 그 초대학장이 최순달이 되면서 우리나라의 인공위성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경향신문 1986년 2월 18일자 보도. 이 지면에서 최순달 과기대학장은 "우리는 일단 우수한 학생과 양질의 교수확보에 성공했다"면서 88년 과학기술원이 대덕에 내려오면 과기원과 과기대는 우리나라 고급과학두뇌 양성의 수원지가 될 것"이라는 소감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고인은 과학기술 분야의 교육과 연구에서 큰 업적을 남기었고, 그렇게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큰 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미래창조과학부에서 고인의 시신을 국립현충원에 안장하는 일을 추진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여집니다. 이와 관련된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故 최순달 박사 국립묘지 안장 추진 "마땅한 일" ... 헬로디디 2014.10.19


여기까지만 보면 고인은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고인의 업적을 본받고 싶어하는 모범적인 인물이며 위인전으로 기록하여 역사에 남겨야 할 인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고인이 화려한 인생을 살았던 1980년대 전반기에는 전두환이라는 독재자가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전두환이라는 인프라는 최순달의 무궁무진한 활약의 터전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두환 시절 '초대' 기관장들을 맡았던 고인에게 과학기술계는 임자없는 신개척지와 다름이 없었지만, 당시 원자력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과학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은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정치적 격변기마다 과학기술계는 희생양이 되고 이용을 당하는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고인의 업적은 그의 독자적인 능력에 따른 것일까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이룩했던 과학기술의 업적들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기초과학에 대한 부정은 더욱 심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도 기초과학보다 산업발전에 필요한 응용학문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전두환 때에 넘어와서 그 정도는 더 심해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츨연연구소의 축소와 통폐합(1981년 16개의 출연연을 9개로 통폐합하고 과학기술처 산하로 일원화)입니다. 사실 TDX 국산화를 비롯한 각종 과학기술계의 큰 업적도 오로지 최순달의 놀라운 지도력에 힘입었다기보다는 꾸준히 성장하던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축적된 경험의 산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산업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가 등장한 것이 전두환 정권 때였던 것은 그 이전인 박정희 정권 시절의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투자와 지원이 있었던 까닭이라는 말입니다. 


위인전이 나온다면 전두환과의 인연은 어떻게 미화될 것인가


일해재단이란 게 있습니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으로 순직한 희생자의 유족에 대한 지원과 장학사업을 목표로 1983년 12월 발족한 재단입니다. 그러나 간판은 재단이며 연구소였지만, 5공화국의 비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곳이었습니다. 전두환의 동료였던 노태우 후임 대통령이었지만, 1988년 제13대 총선 이후 일해재단은 5공 비리의 대표적 사건으로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강제적인 기금조성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노태우를 후임자로 점지한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 후 펼칠 상왕정치, 막후정치의 본부로 활용하기 위해 세웠을 것이란 의문이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당시 일해재단은 초대 이사장 최순달의 노력에 힘입어서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약 598억 5천만원의 기금을 조성했습니다. 현 시세로 본다면 5천억원~1조원 가량은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MBC 드라마 5공화국에 아주 잘 나옵니다. 기업들에 대한 강제기금 조성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국내 7위의 국제그룹(회장 양정모)은 1985년 공중분해의 운명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노태우 정권 시절에 전두환의 일해재단은 청문회에 츨석해야 했고 초대이사장 최순달은 증인으로 1988년 11월 8일 청문회장에 출석한 바가 있습니다. 그 상황은 당시의 일간지 이미지와 청문회 현장을 소개합니다. 


1988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중 사진과 관련기사(아래)



198811월 8일 일해(日海) 청문회 일문일답

 

(두환)씨 지시보다 금액보다 더 거둔 이유 뭔가 질문

84년에 받은돈 영수증 최근 만들었다 최순달씨

 

... 이기택 위원장 ... 본인은 최순달 전 일해재단 이사장이 현직 한국과학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엄청난 규모의 재단을 설립하면서 사무조직이나 장부구조도 갖추지 않았던 일해 재단의 초대 이사장이 또 과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일해재단이 국민들로부터 저주와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안다면 솔직하게 참회의 증언을 할 것으로 믿는다.

 

김동규 의원(민주) ... 일해재단 이사장직은 누구로부터 제의받았으며 재직기간은?

최순달 ... 198311월부터 19853월이다. 청와대 교문수석비서관으로부터 제의받았으나 대통령의 뜻이었다. 본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구공고 3년 선배다. (주민등록상으로 전두환과 최순달은 동갑이다. 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 출신이고, 최순달은 1931년 6월 20일 대구 출신이다.)

 

김동규 ... 전 씨의 아호인 일해(日海)는 무엇을 의미하나?

최순달 ... 태양과 같이 온 세계를 비추고 바다와 같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알고 있다.

 

김동규 ... 전씨가 아호에 합당하게 처세했다고 보는가

최순달 ... 일괄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김의원 ... 일해이념을 연구한 일이 있는가.

최순달 ... 이사장에 취임했을 때 정관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정관을 토대로 사업계획을 세우는 것이 내 임무였다. 그러나 실제 활동은 거의 없었다.

 

김의원 ... 증인은 68년부터 81년까지 美國籍(미국적)을 보유하고 있었는가

최순달 ... 사실이다.

 

김의원 ... 13년동안 韓國籍(한국적)을 버렸던 사람이 <아웅산> 유가족을 돕자는 취지의 재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부끄럽지 않았는가

최순달 ...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애국심 때문에 한국적을 포기했다.

 

김의원 ... 844월 조성희(趙成熙)씨를 데리고 재계인사모임을 하러다닌 것은 ()씨의 지시에 의해서인가

최순달 ... 재계인사들의 자발적인 모음에 초청돼 참석한 것이다. 절대 全前(전전) 대통령의 지시같은 것은 없었다.

 

김의원 ... 어떻게 증인과 조씨, 두사람이 돌아다녀 2개월남짓동안 137억원이라는 거액을 거둘 수 있는가. 위증하지 말라.

최순달 ... 절대 거짓말이 아니다. 위증이라면 처벌받을 각오가 돼있다.

 

김의원 ... 겉으로는 아웅산 유가족을 돕는다고 하고 실제로는 88년 이후 독재권력유지작업실을 만드는데 당신이 참여한 것 아닌가

최순달 ... 이사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한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들은 적이 없다.

 

김의원 ... 경비용 軍犬(군견)의 한달 식대가 80만원이고 비단잉어 한번 세수시키는 데 130만원씩 들었다.

최순달 ... 처음 듣는 얘기다. 거기에 군견이 있었다는 얘기는 이번 cjdannsghl에서 처음 알았다. 연구소의 영빈관 등도 국회의 현장답사때 신문에 난 조감도를 보고 처음 알았다.

 

김의원 ... 연구소 건립지역은 건축허가가 금지된 곳이다. 공사당시 규제에 묶여 있었는데 공사를 모두 끝낸 87년 규제를 해제했다. 그렇게 恣意(자의)로 해도 되는가

순달 ... 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이 위원장 ... 일해재단 비리에 대해 국민들이 알만한 것은 다 안다. 아무것도 모르는것처럼 얘기하면 곤란하다.

 

정일영의원(공화)

체신부장관으로 재직했던 825월부터 8310월까지 미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니냐. 증인은 81105일 국적을 옮기려 했지만 미국적이 상실되지 않아 국적이 회복되지 않았다. 국적이 회복된 것은 83615일이다.

순달 ... 법무부고시 1806호로 81105일 한국국적을 받았다. 70년대에 미국국적을 가졌던 것은 한국방위산업요원으로 근무하면서 미국과학기술기관출입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정의원 ... 창립총회는 어디서 했는가. 대통령의 참석여부는...

순달 ... 청와대 영빈관 오른쪽 건물이다.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정의원 ... 장세동씨의 증언과 다르다. 장씨는 삼청동안가라고 했다. 이사회는 모두 몇 번 했는가

순달 ... 내가 재임시 세 번 가량했다. 한번은 청와대에서 했고 나머지는 프라자호텔 롯데호텔에서 했다. 849월 주무관서를 문교부에서 외무부로 바꾸고 이사를 2명 보강하기 위해 한차례 했다.

 

정의원 ... 이사장을 맡은 뒤 미국 유럽 등지의 재단들을 시찰한 이유는...

순달 ... 국제적으로 우수한 연구소를 추진하라는 전 전대통령의 뜻에 따라 미, 일 스웨덴, 싱가포르, 필리핀 등지의 유명연구소를 시찰했다.

 

정의원 ... 정주영 회장에게 마음놓고 연구하려면 50억원 가량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한 일이 있는가

순달 ... 사실이다.

 

정의원 ... 그런데 84180억원 8523억원을 모금한 것은 너무 차이가 나지 않는가

순달 ... 본인은 이사장이기 때문에 재정사업 등은 마땅히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그러나 제 배경으로 봐서 돈관리문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임을 시인한다.

 

정의원 ... 모금방법은...

순달 ... 이사들의 지원태세가 돼있었다. 본인이 이사들에게 사업계획을 설명드린 일은 있다.

 

정의원 ... 844월 양정모 국제그룹회장을 만난 일이 있는가. 그 자리에서 양 회장은 기금목표액 3백억원은 너무 많다는 얘기를 했다던데...

순달 ... 만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은 없다. 언론보도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신경질을 내고 욕을 했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

 

정의원 ... 844월 롯데호텔에서 정주영 회장이 자기는 10억원을 내겠다고 하면서 다른 기업들에게 할당을 했다고 하는데...

순달 ... 그 자리에서 1백억원을 모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정 회장이 자진해서 얼마를 내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형편이 좋으니 좀 내지하는 식으로 모임을 주재했다. 그러나 총액은 모른다. “나중에 돌아가서 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합쳐져서 137억원이 된 것이다. 반대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김인영 의원(민정) ... 초대 이사장으로 현재도 일해재단은 설립목적이 타당했다고 보는가

순달 ... 두고볼 일이지만 당시는 좋은 취지와 목적으로 출발했으나 여러 가지 잡음이 나온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김의원 ... 증인은 처음 모금액을 5백억원으로 하려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이 2백억원으로 하향조정하라고 지시했다는데 사실인가

순달 ... 사실이다.

 

김의원 ... 5백억원 규모로 구상한 이유는 무엇인가

순달 ... 연구소를 운영하자면 일년에 50억원은 운영비로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운영비가 연 50억원정도 빠지자면 기금은 약 5백억원 정도 있어야 않겠는가

 

김의원 ... 2백억원이 늘게된 동기는

최씨 ... 퇴임후 일이니 잘 모른다.

 

김의원 ... 모금계획이 마련된 후 조성희씨와 기업체를 같이 방문했다는데 기업체대표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순달 ... 모두 수긍하고 반가와하는 듯 했다.

 

김의원 ... 조 증인은 몇 개 기업체에서 못마땅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는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위증을 하고 있따.

순달 ... 자발적으로 내는 돈이라고 해도 우리는 신세지는 입장이었다. 항상 공손한 마음가짐을 가지려 했다.

 

김의원 ...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을 만난 적이 있는가

순달 ... 부산에서 사업하는 친구가 장관을 그만 둔 후 놀러오라고 해서 조성희씨와 함께 갓따. 양씨와 저녁을 같이 먹었다.

 

김의원 ... 그 때 양씨가 할당액이 많다고 불평한 게 사실인가

순달 ... 일해재단 얘기는 일체 없었다.

 

김의원 ... 증인이 양씨가 불친절하고 오만하다고 고위층에 보고했다고 하는 소문인데 사실인가

순달 ... 아무리 인덕이 고약해도 그런말을 감히 어디가서 하겠는가

 

김의원 ... 초대 이사장직을 왜 퇴임했는가

순달 ...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했었는데 13개월만에 퇴임하게 되어 실망했다. 4년 임기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고 당시는 유감으로 생각했다.

 

김의원 ... 청와대 만찬도중 모 기업체 대표가 2억을 썼다가 전두환 대통령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22억을 썼다는 데 사실인가

순달 ... 만찬이 있는 83, 84년에는 조중훈 씨가 이사가 아니었다. 기부금 적으라고 백지를 돌린 사실도 없다.

 

박실의원(평민) ... 전두환 씨가 그 측근에서 세계적인 학술연구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얘기한 적 있느냐

순달 ... 전 대통령이 이사장직 맡길 때 세계 최고수준 연구소를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박의원 ... 설립배경추진이 매우중요하다. 전 씨 개인이나 그 집단이 다른 목적을 갖고 연구소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던 때에 아웅산 사건이 터져 더욱 구체화된 것 아니냐

순달 ... 최초 동기는 희생자들을 위한다는 데서 출발됐다.

 

박의원 ... 유족보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제보해온 사람도 있다.

순달 ... 귀국비행기 안에서 출연한 23억원은 다 나누어주었다. 교문비서실에서 나누어주었다.

 

김동주의원(민주) ... 증인이 일해재단을 그만둔 시점은...

순달 ...  853월이다.

 

김의원 ... 아니다. 85821일 수요일의 4차 이사회에서 사임한 것으로 회의록에 되어 있다. 증인기 사임시기를 3월과 8월로 차이를 두는 것은 책임소재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선 235천만원을 유족들에게 어떻게 분배했나.

순달 ... 그것은 본인이 취임하기 전의 일이다.

 

김의원 ... (서류를 내보이며) 여기 85821일 이사회회의록에 찍힌 최 이사장의 도장은 맞는 도장인가. 이 현대부지 결재서류도 최 이사장이 한 것이 맞는가(맞다는 표시로 최씨 수긍)

 

김의원 ... 841022일 조성희씨와 김인배 씨의 인수인계시 ‘5억 경호실장보관이라고 쓰여있고 84년도 영수증 철에서 10억원이 인수인계되지 않았다. 맞는가(최씨 다시 수긍표시). 이것은 당시 경호실장 장씨가 15억원을 먹었다는 뜻이다. 137억원 중에서 55억원을 제외하고는 영수증이 없다. 이것은 횡령 아닌가

순달 ...  ...

 

김의원 ... 이사회 회의록이 변조된 것이 맞는가

순달 ... 그렇다.

 

김의원 ... 모든 증거를 보여주었으니 양심적으로 얘기하라

순달 ... 지금까지 말한 것은 진실에 입각해 말한 것인데 김의원이 보여준 것을 보니 내 증언과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사표처리는 821일로 됐으나 실제 재단을 떠난 것은 3월이었다.

 

김의원 ... 그렇다면 증인이 당시 8월 이사회 사회를 본 것으로 되어있는 이 회의록도 허위문서인가

순달 ... 죄송하다.

 

신재기 의원(민정) ... 처음 기금목표가 5백억원이라고 보고를 받고 설립자인 전대통령이 2백억원으로 줄이라고 지시했는데 왜 기금은 결국 5백억원이 넘었는가

순달 ... 그것은 내가 잘 모르는 일이다.

 

김봉욱 의원(평민) ... 88년에 들어 마치 84년에 작성된 것처럼 20억원 기금영수증에 도장을 찍은 적이 있나(서류를 보여주며 추궁)

순달 ... 최근에 찍어 준 적이 있다.

 

김의원 ... 84년에 작성된 것처럼 된 서류에 최근 도장을 찍었다면 위조에 동참한 공범이 아닌가

순달 ... 법을 위반했다면 법에 따라 응분의 처벌을 받겠다.


(이하 생략)


5공 일해 청문회 (MBC 뉴스데스크. 1988년 11월 8일, 3분40초) 


 

 

고인에게는 명암이 엇갈리는 역사적 평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매체에서는 고인의 명복을 기리며 그 분이 과학기술계에서 쌓은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는 기사들이 거의 전부입니다. 굳이 들춰낼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고, 허물을 덮을만큼 위대한 업적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필자도 돌아가신 분에 대한 흠을 잡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한 인간의 개인사를 마감하는 죽음을 추모하는 분위기 안에는 고인의 공과를 '사실대로' 정확히 짚어내는 것이 고인에게도 합당한 자리라는 믿음으로 이 글을 남기려는 것입니다. 고인은 가톨릭 신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하지만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자신만이 잘 알 것이고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천국의 문을 두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데에도 사실의 정리와 기록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사실이 은폐되고 꾸며지고 미화된 이미지는 어이없는 일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그 사례를 말씀드리면, 대구공업고등학교 예전 홈페이지에서 동문 선배인 전두환을 자랑스럽게 미화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전두환과 최순달은 대구공고 동문입니다. 호적상 두 사람의 나이는 31년생으로 동갑이지만, 전두환이 24기이고, 최순달이 3년 선배인 21기입니다.  


대구공고 예전 홈페이지(모교를 빛낸 동문)에 있는 선배 전두환 자랑질 글을 소개합니다. 


... 어려서부터 '된다','안된다' 하는 판단이 올바르고 나이에 비해 행동이 의젓했으며, 친구가 남의 참외밭에서 참외를 따오면 호되게 나무라는 곧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기필코 선진 조국을 창조할 것을 다짐함으로써 불안과 방황의 여울을 벗어나 광명과 희망의 새 시대를 향한 대행진을 시작하였다... 보통의 정부나 위정자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권력형 부정부패 척결 ...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 ... 과학기술분야의 완벽한 성취 ... 오늘날 IT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당당히 유지하는 기초를 확고히 하였다. 당시 체신부 장관이자 21회 동문인 최순달 박사의 뛰어난 능력과 전두환 대통령의 혜안이 조화를 이룬 결과임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자랑이다... 미래 과학기술의 힘을 예견하고 기술자들을 아끼는 공업고등학교 출신 대통령으로서의 진면목... 두드러진 업적으로 역대 대통령 누구도 실현하지 못한 '단임제의 실천'을 들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정치 민주화에 불멸의 초석으로 기록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칭송받고 있듯이 국가경제 부문의 성과는 참으로 괄목할 만하다... 경제성장, 물가안정, 경상수지 흑자라는 세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경제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참고. 1983년 12월 1일 설립된 <재단법인 일해재단>(초대 이사장 최순달)은 1987년 8월 27 <재단법인 일해연구소>로 변경되었으며, 1988년 5월 4일 <재단법인 세종연구소>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음 지도는 세종연구소와 연결시켰습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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