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7일(주일)

가톨릭성당 미사 강론



용서와 화해! 그것은 공동체의 표징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표징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명절을 앞두고 고향 찾아가신 분들 찾아오신 분들... 명절을 앞두고 고향이 그리워집니다. 저는 서산 논산 부근인데요. 제가 살던 집에서 논산초등학교 한 2킬로미터 넘는 거 같아요. 어렸을 적에 왜 그렇게 멀었는지 모르겠어요. 학교 가는 길이 여러개가 있었어요. 1코스, 2코스, 3코스, 4코스 ... 그런데 가장 가까운 길인 뚝방길을 이용하는데, 거기 말고도 수목원, 밭 많은 곳, 또 신작로, 산밑길 등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을 정도 되면 약간 멀어도 산밑길을 갑니다. 감이 떨어지는 철이거든요. 그 길로 가면서 주워먹으려고, 주워서 먹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빠른 길은 뚝방길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냇가에 깨끗한 물과 깨끗하고 이쁜 돌들 동글동글하고, 무늬도 이뻤고, 물고기도 있던 그런 어렸을 적 풍경에서 자랐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살면서 실제로 힘들고 괴로워하는 이는 바로 옆에 있는 이들입니다. (냇물 속의) 돌은 누구와 부딪치는가요? 바로 옆에 있는 돌과 부딪쳐서 갈아지고 둥글둥글해집니다. 우리 산에 가서 삐죽삐죽한 돌 보고 참 예쁘다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냇가의 둥글둥글한 돌 보면 이뻐요. 만져보고 싶고, 하나쯤 집어와서 집에 와서 보고 싶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과 많이 부딪칩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그리고 복음말씀. 서로 이것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그 용서는 사랑과 연결됩니다. 어떻게 용서해야하는가? 어떤 방법을 써야하는가. 그런 방법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상대를 용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잘못될 길에서 가르쳐서 돌아오게 하고, 공동체 안에서 가족이면 가족 성당이면 성당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힘이 되어주는 역할이 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딪치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갈 때는 둥글둥글한 돌로 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모난 채로 하느님께로 가면 덜 이쁘지 않을까 싶어요.

용서와 화해... 이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게 아니고, 반드시 해야 공동체가 유지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표징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명절을 맞이해서 가족을 만나는 데, 가족들 안에서 화해와 용서를 이루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 명절 최고로 행복했다고 생각하면 좋겠고, 우리 본당 공동체도 그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불평과 불만, 상처가 있을 수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하는가의 질문에 대해서, 초대교회, 우리 한국 초대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은 최근 복자가 되신 분들의 전기나 책들을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103위 성인 모시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그분들이 어떤 환경에서 사랑을 실천했는지 잘 모릅니다. 이번 124위 복자들도 마찬가지죠. 그분들만 아니고, 그 시대 살았던 신앙인과 순교자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기억하고 또 그들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활 속에는 예수에 대한 철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과 화해와 용서와 따뜻한 보살핌 등이 그들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순교를하도록, 신앙을 심어주는 뿌리가 되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도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알아서 본당 신부와 싸우고, 또 상처를 받는다고 하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달라질 수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게 사랑이고 용서고 그리고 자비로움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미사를드리고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좀 더 따뜻한 마음과 열려있는 마음, 관심, 용서 이런 것들을 생각했으면 좋겠고 특별히 순교자 성원인 9월에는 성인들과 함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 명절 잘 지내시고,또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잠시 묵상합니다. (강론 끝)

  제1독서...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3,7-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8 가령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9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제2독서 ...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3,8-10
형제 여러분,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복음 ...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014-9-7(주일) 오전 10:30 연중 제23주일.

방경석 알로이시오 주임신부 @대전교구 전민동 성당.


이 글은 강론 말씀을 필자가 재구성한 것이기에 실제 말씀과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 내의 성경구절은 글의 구성을 위해 삽입된 것입니다.



    매일미사의 오늘의 묵상     


오늘의 독서를 묵상하면서 이웃 사랑의 계명이 세상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엄중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거듭 깨닫습니다. 이웃 사랑은 감상적인 느낌이나 기분 내킬 때 베푸는 시혜가 아닙니다. 서로서로 지고 있는 외면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똑바로 인식하고 실행하는, 수고와 용기를 요구하는 실천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지고 가야 하는 사랑의 빚은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 나오듯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이는 예언자가 파수꾼의 두 가지 역할을 지니는 것과도 같습니다. 파수꾼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맡기신 사명이기도 합니다. 또한 파수꾼은 불의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형제들을 자신의 안위를 돌보는 것에 앞서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차원의 깨달음과 실천을 품고 있습니다. 불의에 대한 비판과 저항,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가 있을 때 이웃 사랑은 그저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뼈와 살을 가진 실재가 됩니다. 그러기에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공범’이 된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기억하고, 각성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월호’의 참극은 이런 의미에서 오랜 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과 분노의 바다가 우리에게 다가온 사월의 그날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의 기억을 고통스럽게 안고 살았던 이탈리아의 유다계 지식인 프리모 레비의 책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마음을 저미는 그의 시 ‘고통의 나날들: 까마귀의 노래 2’의 처음과 끝을 음미해 봅니다. 

“그대가 버텨 온 날들은 얼마나 되는가?/ 나는 하나씩 세어 보았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 왔던 고난의 세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어둠의 나날들/ 서서히 밝아 오는 새벽에 대한 공포감/ 그대를 기다리는 내 기다림의 불안감들/ (중략) 비록 그대의 꿈들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가을 낙엽이 구르고 시계가 멈추더라도/ 그대의 몸이 쇠락하고 삶의 마감이 오더라도/ 그대의 세상마저 저물어 새벽이 오지 않더라도/ 난 옆에서 그대를 지켜보고 있겠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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