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원전 587년은 대단히 아픈 해입니다. 이 때에 바빌론의 침공이 있었고, 나라가 멸망했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을 잘 묘사한 책이 바로 애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굉장한 아픔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애가는 다섯편의 노래로 이루어진 짧은 책입니다. 바빌론 침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을 표현한 것이죠. 예루살렘 성전도, 백성도, 모든 것이 죽은 처지에 빠진 슬픈 노래인 것입니다.

 

애가, 애카, 아 어찌할꼬!


애가의 책 제목은 히브리어로, ‘애카’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첫 머리에 나오는 글자를 제목으로 삼는 데 애카는 우리 말로 ! 어찌할꼬!’란 뜻입니다. 이 상황을 어찌할꼬라는 이 말 자체가 탄식입니다. 애가의 저자는 예레미야로 보는 주장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바로 뒤편에 나오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쓰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것입니다. (애카의 익명성과 다양성 때문에 예레미야 저자가 아니란 주장도 있습니다)

 

애가는 다섯가지 노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애가(1,1~1,22)는 시온의 딸에 대한 얘기인데, ‘시온의 딸이란 (성모님도 시온의 딸이라고 하지만) 시온의 사람들’, 시온이란 지역에 사는 사람을 뜻하지만,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이 시온의 딸, 예루살렘 백성이 자신의 죄로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빠진 것을 탄식합니다. 그래서 첫째 애가는 탄식의 시입니다.

 

다섯편 중 1, 2, 4번째 애가는 국가적 탄식이다


첫 번째 애가는 어찌할꼬 하며 아픈 탄식이 나오는데, 첫째와 둘째와 넷째는 국가적 탄식입니다. 다음으로 셋째 애가는 개인적 탄식, 다섯 번째 애가는 공동체적 탄식입니다. 둘째 애가(2,1~2,22, 2장 전체)의 소제목은 '원수같으신 하느님'입니다.  마치 하느님이 백성의 원수처럼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죄가 하느님 심판의 원인이 되고 여기서 바빌론인은 하느님의 분노를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여기서 두번째 노래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것은 사실상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내용상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구약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분노와 징벌, 그리고 무서운 하느님만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아버지가 아이에게 구약성경을 설명할 때, 하느님은 굉장히 무섭단다. 그래서 너가 말 안들으면 엄청나게 하느님이 벌을 줘. 그러면 아이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래서 아이는 크면서 하느님께 다가설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징벌을 주시려는 하느님은 이 징벌을 통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례없는 고통을 겪으며 주님의 관심을 자기들이 가진 고통으로 끌어당기려는 겁니다. 주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 고통스러우니 들어주십시오. 이렇게 주님을 끌어당깁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주민들의 탄식이 둘째 애가입니다.

 

애가는 주님의 관심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을 살면서 인생의 힘든 고비를 겪을 때 오히려 그분의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인식합니다. 지금까지 당연히 여겼던 신체적 건강과 먹고 살만한 것들이 어느순간 갑자기 사라졌을 때,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지게 되었을 때,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엄청 커지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을 감당하여 추스리면서 한발자국씩 믿음의 길을 걸어가니 다시 하느님이 함께 하는 걸 느끼는 것입니다애가는 이처럼 주님의 관심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애가는 개인적 탄식입니다. 국가차원이 아닙니다. 셋째 애가(3장 1절~66절)의 소제목은 '고통과 희망'입니다. 고통을 받는 한 사람의 보고(3,1 '나는 그분 격노의 막대로 고통을 겪는 사나이')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셋째 애가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두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들어있습니다. 엄청난 고통에 빠져있는 것이지만, 셋째 애가는 개인들이 각자 신앙생활을 하는데 개인들이 믿음과 인내와 참회와 회개를 통한 희망을 노래합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은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신앙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잘 대답을 못합니다. 신앙이란 삶의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두는 것입니다. 부모들 중에, 특히 엄마들은 자녀를 첫째 자리에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를 돌보아주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신앙은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 애가는 내가 고통을 받든, 기쁨을 느끼든 하느님께 고개를 돌릴 때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징벌의 한가운데에서


네 번째 애가(징벌의 한가운데에서)는 4장 전체(22절)인데, 이것도 민족적 비가입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함락되었을 때, 살아남은 자들이 바치는 애절한 탄식입니다. 고통에 대한 보도가 죽 나오는데, 그 때 신앙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민족들에 대한 탄식이 나옵니다. 여기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간청, 간구들이 나옵니다. 우리가 헛된 것에 너무 많이 마음을 쏟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것을 예레미야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버림받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간구합니다


바빌론 유배는 참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피정의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처음으로 인도한 피정의 시간은 40년간의 광야생활이었습니다. 그 때 하느님을 다시 만난 것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바로 바빌론의 유배입니다. 첫 번째가 탈출기라면 다시 두 번째로 본모습을 찾게 만든 시간이 바빌론의 유배시간이며, 엄청나게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대 피정의 시간입니다.

 

종신서원을 하는 성직자 분들은 일생을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기에 앞서 한달간 대침묵의 피정 시간을 보냅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하느님을 만나야 평생을 살아갈 수 있기때문입니다. 신부님들도 부제가 되기에 앞서 한달간 대 침묵의 피정을 보냅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소리를 듣고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굉장히 고통스러운 동시에 하느님을 만나는 굉장히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와 같이 바빌론 유배는 엄청난 고통이지만 그 고통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행복한 시간도 됩니다.

 

애원의 기도


다섯째 애가(애원의 기도, 5,1~22)는 공동체적인 탄원이며 탄식입니다. 국가적 재앙일 수 있는 바빌론 유배와 나라의 멸망과 끌려가는 그 고통 속에서 민족 공동체의 기도를 올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속에서 올리는 탄원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57절입니다.


5,7 죄를 지은 저희의 선조들은 이미 없는데 저희가 그들의 죄악들을 짊어져야 합니다.

 

죄를 지은 선조들은 이미 없는데 그들의 죄악을 짊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후대에 내려온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521~22절이 연결됩니다.


5, 21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소서. 22 정녕 저희를 물리쳐 버리셨습니까? 저희 때문에 너무도 화가 나셨습니까? 


중요한 것이 회심이고, 하느님 앞으로 돌아서는 것


이게 57절과 21~22절이 연관을 갖습니다. 유배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한줄기 서광이 비추이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돌보아주십시오 하면서 참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참회를 할 때는 하느님께서도 두손 두발을 다 듭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칠 때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회심이고, 하느님 앞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5장은 공동체의 기도 속에서 주님의 서광이 비추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5장에서 죄와 벌이란 부정적인 용어와 함께 의로움과 보상이라는 긍정적인 것도 배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벌이라는 굉장히 견고한 사슬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사랑인 용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번져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탄식, 아픔에 대한 고통에도 결국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승리에 대한 사례가 한가지 있습니다. 성인 필리포 네리 신부님에 대한 영화입니다. 매우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이 성인은 오로지 나에게 주어진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끝까지 놓지 않는 원칙이었습니다. 내가 아이들을 완전히 버려진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가는데, 내가 가진 단 하나의 유일한 원칙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대하는 것인데, 결국 그 사랑이 승리합니다. 질서를 지키고 원칙을 지키고 그런 것보다도 마지막까지 남은 하나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성인 필리포 네리(1515~1595)은 워낙 재미있던 신부님이라 유머의 수호성인이 되셨다고 합니다. 참고사이트 연결


그래서 애가는 이렇게 부정적인 탄식과 고통이 많이 나오지만 마지막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릴 것이란 것. 그래서 다시금 희망의 서광을 보여주려는 것이 바로 애가입니다.



 성서백주간 45회차 중 애가(1~5장)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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