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5. 10:30 @ 서산 예천동 성당
하부내포성지주임 윤종관 신부님 강론
예수 성탄 대축일 낮미사
성탄 축하합니다!
서로 “기쁜 Christmas예요!” 하고 인사말을 교환합시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 모두 함께 기뻐하는 Christmas입니다.
이 Christmas에서, 즉 성탄 미사에서 봉독된 전례 말씀 가운데 아주 소박한 표현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 봉독의 첫 구절인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 52장 7~8절입니다. 소박한 소식 전달이면서 한편 극적인 감동으로 전하는 외침입니다.
그 표현은 이렇습니다. :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느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고 시온을 향해 이르는구나, 저 소리, 보초의 외치는 소리.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주님과 눈이 마주쳐, 모두 함께 환성을 올리는구나.”(이사 52, 7~10 참조)
이 얼마나 순박합니까, 그 표현이 말입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하는 그 첫 구절의 감격 표현을 다른 성서 번역문에서는 “어여쁘다, 기쁜 소식 전하려고 산등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저 발꿈치!”(Quam pulchri super montes pedes annuntiantis)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영어 번역 참고 : How wonderful it is to see a messenger coming across the mountains, bringing good news, the news of peace! ; 영어 미사경본 참고 : How beautiful on the mountains, are the feet of one who brings good news, who heralds peace, brings happiness, proclaims salvation, and tells Zion, "Your God is king!").
우리말에 며느리가 미우면 그 발뒤꿈치도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와는 반대로 이 성서 말씀은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의 발꿈치가 그토록 예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쁜 소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살려 주시러 오시는 분이 오신다는 소식이지요. 그 주님이 오시면서 우리를 처다 보시는데 그분과 내가 눈이 마주쳐서 가슴 터지는 감격의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고 오늘 예언서는 실토하고 있습니다(이사 52, 8 : Vox speculatorum tuorum ; levaverunt vocem, Simul laudabunt, Quia oculo ad oculum videbunt, Cum converterit Dominus Sion).
그분과 “눈이 마주쳐(oculo ad oculum)” 환호성을 지른다는 이 구절을 읽는 저에게 문득 지난 대통령 선거기간의 일이 연상됩니다. 대통령 후보들을 지지하는 군중의 환호 장면을 중계하던 TV 화면이 연상됩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후보와 눈이 마주쳐 악수하려고 아우성들을 처댔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런 현장을 지나간 일도 있습니다. 우연히 부여의 은행에 일보러 갔다가 그때 마침 그 부여 시장 통에 잠간 지나가는 박근혜 후보와 악수라도 한 번 하려는 아우성 때문에 제가 은행 골목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빠져버리고 골목이 열려서 은행에 들어갔더니, 그 은행의 한 여직원이 허겁지겁 들어오며 박근혜와 악수했다면서 수다를 떠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한 여직원이 “그 손 죽을 때까지 닦지 마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박근혜와 악수했다는 그 여직원은 정말로 죽을 때까지 그 감동을 간직하며 행복해 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국가원수가 된 사람과 손을 잡아봤다는 그 여직원의 행복감이 죽을 때까지가 아니고 앞으로 5년 후에는 씁쓸한 추억으로 변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그러자면 그 새로이 국가원수가 된 사람이 진정 명예로운 임기를 마칠 만큼 잘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오늘 이 성탄에 듣는 기쁜 소식의 전갈은 우리에게 있어 한 순간 지나가는 추억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이 우리에게 지금 여기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우리와 잠간 악수하고 지나가시는 게 아니라, 그분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Immanel의 현실,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이 성탄 미사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서 1장 1~18절의 소식인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서 1장 1~18절은 요한복음서의 서문(Prologue․序詩․前文)이며 이 요한복음서 전체를 축약하여 우리 구원이 무엇인지 세상에 알리는 典文(Canon․공식 선언문)인 것입니다. 이 선언문의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분은 곧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다. 그분 자신은 그래서 하늘의 은총 자체요 진리 자체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매일같이 삼종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하고 고백합니다. ‘Immanuel’이라는 이름으로 그분을 일컫는 것입니다. ‘Immanuel’이신 그분은 그렇게 우리 가운데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오로 사도는 오늘의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 잘 알려줍니다. :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이시오,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예배를 드려라.’”(히브 1, 1~3. 6)
그러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요, 진리로서 오실 때의 이 세상 실상을 오늘 요한복음서의 서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빛이신 그분이 오시는데 이곳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는 지적입니다. 앞서 히브리서의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듯이 본래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이 창조 되었듯이(히브 1, 2참조), 모든 것이 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말씀을 통하여 생겨나고 그 말씀으로 생명을 얻었는데도(요한 1, 3~4. 10 참조),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요한 1, 11 참조).
이렇듯 세상은 어둠이 지배하고 무지에 싸여 있다는 이 현실의 한 가운데서 그분은 빛이요 생명으로 오신다고 요한복음서의 서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을 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요한 1, 5 참조),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현실의 암흑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며(요한 1, 14 참조), 그분의 충만한 은총과 진리를 받고 또 받을 수 있게 되었노라(요한 1, 16 참조)는 기쁜 소식을 오늘 요한복음서의 서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그렇게 암흑과 무지를 꿰뚫고 우리에게 전해옵니다.
그렇듯이 오시는 분은 그래서 일 년 중 가장 어둠이 깊고 밤이 긴 동지를 가로질러 다시 떠오르는 태양으로 오시기에 이렇게 12월 24일 밤을 지새운 다음 12월 25일 아침을 맞이하며 주님 오신 곳에 모여 온 것입니다. 이렇게 오시는 소식이야말로 진정 어두운 곳에 헤매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복음이기에 교회는 옛적에(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이전까지) 미사를 끝마칠 때마다 저 어두운 곳의 상징인 북쪽을 향하여 요한복음서 서문을 매일 미사의 끝맺음으로 봉독하곤 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 전하는 그 때마다 생명과 빛, 즉 은총과 진리를 세상에 부어 넣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 전파의 전 과정을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육화’(Incarnatio Verbi)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 육화’의 신비가 선포 성취되는 사건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언과는 달리 구세주 오시는 과정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탄생 과정이 그렇습니다. 그분 탄생의 소식은 어처구니없게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여행 나온 만삭의 임신부가 여관방을 얻을 수 없어 급한 김에 마구간에서 해산하여 그 핏덩어리 신생아를 가축의 여물통에 눕혀 놓았다는 어이없는 소식입니다.
이러한 아기의 출생 소식은 위대한 지도자의 출현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역사적 인물들의 출생지에서는 신화 같은 어떤 위대한 내력을 듣게 됩니다.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곳은 무슨 영험한 풍수지리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팔자가 기구한 사람들은 그 출생지부터가 어떤 비극적 상황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의 어떤 아저씨가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도피 생활을 하다가 잡혀서 강제 입대를 하였는데, 그분의 부인이 논산 훈련소의 면회 날짜에 남편을 면회하려고 시어머니와 함께 작은 솥단지와 집에서 키우던 씨암탉을 잡아 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만삭의 몸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뱃속의 아기가 세상에 나오려 해서 논산 어딘가의 들판에 내려 아기를 낳았답니다.
그런 바람에 시어머니만 간신히 훈련소의 아들을 면회하고 그 부인은 길갓집에 맡겨져 있다가 핏덩어리를 안고 돌아왔는데, 그 아기를 보고 싶은 군인 남편이 전방에서 탈영했다가 다시 붙잡혀서 감방 생활을 하게 되었고, 후에 세월이 지나 그 아기가 커서 군인 가게 되었는데, 강원도 어느 전방에서 사고가 나서 죽었습니다. 그 아이의 운명은 그렇게 길가에서 태어나 객지에서 죽은 운명이었습니다.
오늘 태어난 예수님도 그렇게 객지의 외양간 동물들 사이에서 여물통에 태어나서 결국 객지에서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들의 저주 속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팔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개 병원(산부인과)에서 태어나서 병원에서 죽어 병원(영안실)에서 북망산으로 떠나갑니다. 태어나는 곳과 죽는 곳이 같게 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가 봅니다. 우리 구세주는 하느님이시라면서 하늘에서 태어나 내려오신 분이 아니시고, 인간들의 따돌림 속에서 세상에 태어나 인간들의 저주 속에서 세상에 묻히신 분, 즉 죄악의 한 가운데 오셔서 죄악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시고 이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새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시려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빛이시지만 어둠 속에 오셨고, 생명이시지만 죽음의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서의 서문이 선언하듯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요한 1, 14 참조)
그렇듯 우리는 하느님 당신 자신이 우리 인간들의 비참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러 인간들 가운데 사람으로 오심을 보면서, 그분 때문에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그 어둠을 이길 수 있는 빛, 즉 새로운 희망을 우리 인류가 지닐 수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 축제는 우리 성당의 우리만의 축제가 아니고 온 인류의 축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만의 성탄 축제로 끝내지 맙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 강생의 은총을 함께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복음서가 우리를 깨우쳐 준 말씀을 명심합시다. “그 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요한 1, 11)고 지적한 말씀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분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 3 참조)고 오늘 상기시켜 주는 말씀이 그렇듯이,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보내신 분이라고(요한 1, 7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는 만국 앞에서 당신의 큰 능력의 팔을 걷어붙이시고 세상 구석구석에 당신 승리를 현실화 하시려고”(이사 52, 10) 오신 분이시라고, 그분의 강생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들은 우리는 이제 참 빛으로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도록(요한 1, 9 참조), 그리고 그분을 믿어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게 되도록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아가 하느님 강생의 이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그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파하여, 주님의 구원 즉 우리의 평화를 펼치기로 합시다. 하여, 저기 저 온 세계에 우리 구세주는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사명을 다짐하기 위하여 이제 우리 모두 신앙을 고백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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