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새해 첫날 미사
세계평화의 날 ․ 2013. 1. 1. 10:00 ․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평화! 그것은 시시한 하느님의 일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는 가능하다
우리는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새해의 첫날을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일컬어 ‘세계 평화의 날’이라 합니다. 우리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이 새해의 첫날을 열게 되는 것은 그 의미가 깊은 일입니다. 이날은 지난 성탄 대축일로부터 만 일주일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날은 본래 성탄 제 8일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부활 축제나 성탄 축제를 하루만 지내지 않고 만 1주일 동안 지냅니다. 축일의 당일부터 시작하여 같은 요일을 맞이하는 날까지 만 일주일을 그 축제의 8부라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성탄 축제를 맞이했던 구랍(舊臘) 25일이 지난 화요일이었는데 오늘 새해의 1월 1일이 또한 화요일입니다. 그렇게 대축일을 만 1주간 지내는 것을 그 축제의 ‘8일 축제’라고 합니다. 이 성탄 제8부로써 성탄 축제를 완성합니다. 그러면 이 8부 축제가 어째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라는 명칭의 축제이겠습니까?
탄생하신 예수님은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 신비가 강생의 신비입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곧 그분은 우리 인간과 똑 같은 육체를 지니고 오셨습니다. 인간 육체를 지니고 오신 하느님, 그분은 한 여인으로부터 세상에 태어난 분이십니다. 분명히 마리아라고 하는 한 여인에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태어나셨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그 신비가 인간 역사에 드러난 사실임을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루카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에 가보니 과연 천사들이 말해준 바대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루카 2, 16) 찾아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목자들이 자기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가서(루카 2, 20 참조),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모두 놀라워하였다(루카 2, 17-18 참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마리아님께서 마음속에 간직하여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고 복음서가 증언하듯이, 우리 교회는 이 사실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그 귀중한 체험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아기의 탄생이 확인되고, 그 아기가 여드레째 되는 날 천사의 전갈대로 ‘예수’라고 하는 이름을 갖게 된 사실(루카 2, 21 참조)로써 마리아의 아들인 그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는 오늘 이렇게 확인하며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 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은 구세주 강생의 신비를 확실한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축제는 성탄 축제를 완성하는 축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한 여인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그 사실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신 분으로 오셨음이 사실이요, 우리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세상 속으로 하느님께서 분명히 오셨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완전히 한 운명을 지니시는 분이됨으로써 인간의 모든 비극까지 당신 것으로 삼으시는 그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나약한 우리 인간에게 이보다 더한 큰 위안과 희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강생 신비를 완전히 드러내는 이 축제와 더불어 우리 인간의 역사적 흐름을 짚을 수 있는 한 해의 시작인 새해 첫날을 맞이하는 것은 따라서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과 함께 우리 인간들이 역사의 길을 동행한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오늘의 이 축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해를 새로이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모든 애환의 길을 함께 하여 오셨고 그리고 우리가 걸어갈 새로운 날들도 그렇게 함께 가주실 분, 그분은 그렇게 마리아라는 여인의 아들로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앞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날들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한 희망적 사실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우리의 나아갈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 우리의 새해 첫날인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세계인들의 ‘국제연합’(UN)이 ‘세계 평화의 날’이라 정하고 평화를 기원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의 구세사적 목표,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일과 우리 인류의 역사적 과제가 한 가지임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이렇게 인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세사적 사건과 세계의 평화가 동일선상의 것임을 이 한해의 첫날에 기원하는 오늘의 미사에서 복음서가 구세주의 베들레헴 마구간 탄생 사건을 성모 마리아님께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 간직하였다고 전하고 있음(루카 2, 19)을 우리는 가슴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하시는 일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조용하게 성취되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 마리아님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게 되었다는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외로운 목동들이 구유에 눕혀진 아기를 보러 찾아오게 된 사연을 마리아님이 마음속 깊이 새겨 간직했다는 것입니다(루카 2, 17-19 참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천사들에게 들은 바”(루카 2, 20)를 마구간의 구유에 눕혀진 아기에게서 깨달을 줄 알던 목동들의 말을 마리아님은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긴 것입니다(루카 2, 17-20 참조). 이러한 성경의 기록에서 우리가 오늘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세상의 힘 있는 지도자들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새해의 첫날은 UN이 정한 ‘평화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정치판도에서는 그 평화의 희망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강대국의 명분하에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고 사람들 사이에 서로 죽이고 다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 간에는 군사력에 맞서 경쟁함으로써 평화를 지킨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북 간에도 늘 군사적 힘에 의한 대치로 이른바 국가안보를 담보해야한다는 식으로 민족분단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끝없는 대결논리로는 진정 ‘평화’에 대한 왜곡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폭력을 맞서기 위한 빌미로 내가 더 큰 폭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라는 것을 힘센 사람이 이루는 것인 듯 착각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평화란 그걸 달성할 수 있다는 어떤 실력발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 실력을 유보함에서 평화는 가능한 것이 된다고 깨달아야겠습니다. 오늘 봉헌하는 미사의 복음 성경에서 본 마리아의 태도처럼, 하고 싶은 말을 생략하고 마음에 담아둔 그 어떤 무엇인가가 평화를 담보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즉 평화란 우리 서로의 주장을 유보함으로써 우리 사이에 슬며시 이룩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포기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 자신의 포기가 곧 사랑입니다. 서로가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서로 사이의 불편함은 사라집니다. 그럼으로써 평화가 실현 됩니다. 그런 평화 실현의 구체적 방식을 다음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의지할 사람 없이 홀로 된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장모님이 눈이 좋지 않아서 안경을 맞춰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위에게 언치어사는 처지에 그 장모님께서는 가난한 사위에게 미안스러워서 한사코 사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라서 아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남편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위는 문득 혼자서 안경점에 가서 안경 가격을 알아보았습니다. 사위는 장모님이 부담 느끼지 않고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게 안경이 아주 저렴한 가격인 것처럼 장모께 얘기해 달라고 안경점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오만 원을 내놓으며 아내와 장모님 앞에선 정가에서 오만 원을 뺀 가격을 말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며칠 후 장모님과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안경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모님보고 안경을 고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가 고른 안경은 정가가 십만 원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위와 미리 짠 대로 안경점 주인은 오만원이라고 말하려다가 할머니 표정으론 그것도 비싸다며 놀라실 것 같아 가격을 만원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경로우대 특별 서비스’라는 그럴듯한 거짓말까지 둘러대며 말했던 것이지요. 할머니는 안경을 써 보시고 가격도 싸고 좋다며 자꾸만 거울을 보셨습니다. 그때 사위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 돈을 꺼내려는데 진열대 밑에서 불쑥 꼬마 아들이 고개를 내밀더니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여섯 장을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안경 해 드리려고 동생이랑 모은 것이라며 수줍게 웃는 꼬마의 말에 그 외할머니(장모님)와 엄마(아내) 눈자위가 점점 붉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안경점 주인은 그 만 원도 차마 다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 장모님의 사위인 그 꼬마의 아버지와 안경점 주인은 서로 미리 짰던 것을 서로의 눈빛으로 행복하게 확인하면서 미소를 교환했습니다. 그리고는 할머니와 외손자 꼬마의 아버지인 사위와 엄마인 아내와 그 꼬마는 안경점 주인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행복해했습니다. 그 네 식구와 안경점 주인 모두 다섯 사람은 그 순간 행복했습니다. 그 모두가 각박한 세상의 돈 걱정에서 해방된 따뜻한 승리를 거둔 사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는 격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 서로를 배려하는 가장 지고하고 고귀한 형태의 관계에서 사랑을 이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사랑을 이루는 그 고귀한 형태의 관계란 서로가 자기 자신의 입장을 유보한 관계인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 평화가 실현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격언은 어떻게 해야만 진정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에 대한 승리이고 자기 자신에게 지고 서로에게 승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힘으로 맞서 궁극적으로 얻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서로에게 양보하여 져주는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 이른바 평화유지군을 파병한다면서 소위 세계경찰국가임을 자처하는 미국이 주도한 전쟁들에서 진정 승리한 일이 있습니까? 힘으로 이겨 전쟁을 승리로 맺는다고 선언하던 초강대국의 자만 뒤에는 그러한 전쟁 이후에 오히려 그 초강대국의 군인들이 더 많이 희생당하고 있고 그 전쟁 주도의 군대는 더욱 수렁에 빠진 형색이 되곤 합니다. 그리고 파괴와 살육은 더욱 그 잔인성의 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힘으로는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서로의 패배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들의 현실에 우리 구세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아주 힘도 없으신 존재로 그저 가난한 여인의 품을 빌려 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오심에 대한 소식은 너무나 시시하게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가난한 목동들)에게만 알려졌고, 그 사실을 마리아님은 조용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기주장으로 혹은 자기 힘으로 차지하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가슴에 묻어둘 줄 아는 조용한 마음의 양보로 서로 승리처럼 이루는 사랑, 그것이 평화임을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그리고 새해의 첫날에 거듭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강력한 지도자의 성공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시시한 하느님의 일에 의해서 보잘 것 없는 인간 사이에 이룩되는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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