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2년 12월 30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속 썩이는 아들 예수의 일을
“마리아는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성탄 대축일의 8일내(팔부) 일요일을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한 주간(8일)을 강생신비로 경축하는 가운데 ‘주님의 날(일요일)’을 ‘주님의 가정 축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성탄과 더불어 주님의 가난한 가정을 경축하는 것은 강생신비의 일차적 구현이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 삶의 길을 똑 같이 걸어가시려 하심에 있어서, 인간이라면 이 세상의 삶을 누구나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듯이 주님께서도 예외 없이 그러한 가정에 속한 삶부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인생의 관점으로 볼 때 가정을 이루지 않고 사는 저 같은 성직자가 가정에 관하여 운운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인간의 가정적 삶의 고뇌나 즐거움에 대하여 피력하는 바를 소개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나자렛에서 이루신 가정생활에 관한 우리 신앙적 관점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 성서의 짤막한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살펴보면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길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느라고 3일간이나 헤매다가 성전에서 그 아들 소년 예수를 찾았을 때(루카 2, 43-46 참조), 왜 그렇게 속을 썩이느냐는 식으로 어머니 마리아가 질책을 하자 아들 예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했다는 것(루카 2, 48-50 참조)을 우리 또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 평상시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는 아들 예수의 모습을 보고 마리아가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다(루카 2, 51 참조)고 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아들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과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엄마의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마리아의 말없는 태도에 대해서는 베들레헴 마구간의 그 밤에 천사들의 전갈과 목동들의 방문 사실도 마리아가 마음속에 간직했다 했듯이(루카 2, 19 참조),
예루살렘의 미아 예수의 사건과 나자렛 가정생활에 대해서도 마리아가 그렇게 마음속에 간직했다고 성서가 강조해서 기록하는 것은 베들레헴 탄생의 신비만큼이나 나자렛 가정생활도 중차대한 구세사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밖에서 속을 썩인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는 얌전한 것을 보고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서 “너 이 녀석 어디 두고 보자”면서 벼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어느 어머니의 수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학교 선생님 생활을 하다가 ‘효과적인 부모역할훈련’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민정씨가 쓴 ‘이 시대를 사는 따뜻한 부모들의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어느 어머니의 수기입니다.(이야기 중 작은 괄호 안 글은 윤종관 신부의 첨가임)
대학생인 아들이 연락도 없이 늦는다. 10분 전 12시다. ‘왜 전화도 못하나. 과미팅이다, 동문미팅이다, 클럽미팅이다, 소개팅이다 끝날 만도 한데, 못 먹는 술은 왜 자꾸 먹이고 먹는담! 이 녀석 오기만 해봐라. 부모 속을 이렇게 썩이다니.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다니, 오기만 해봐라.’
이럴 때일수록 왜 그 발 없는 불안한 소문들은 떠오르는지, (그리고 왜) 그 흉측한 소문을 들려주던 이의 떨리던 음성까지 떠오르는지, 초조하고 불안한 쪽으로 생각하면서 올림픽 대로를 한숨에 왔다갔다한다. ‘그래도 전화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전화도 못한 저는 얼마나 불안해할까, 집에서 걱정할까봐 더 초조해하겠지.’ (하며)나는 자신을 달랜다.
오늘따라 비가 오락가락한다. 12시 10분, 전철에서 내리면 버스가 끊긴다.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인 전철역으로 우산을 들고 나간다. 드문드문 지나치는 사람이 무섭다. 역 출구에서 서성인다. 전철에서 나오는 사람이 끊겼다. 웬일일까? ‘오! 하느님, 제 아들을 지켜주소서!’ 나는 (이렇게)기도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면서)길가에 두툼한 물체들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혹시 만취해 쓰러진 내 아들이 아닌가, 깡패에게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모습은 아닌가, (이렇게 불안해 하다가 가슴속에 원망이 맴돌아) ‘아니, 이 녀석이! 이렇게 애를 태우게 하다니! 못 오면 못 온다고,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해주지.’(하며 중얼거린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바꾼다. ‘오! 하느님, 화내지 않겠습니다. 제 아들을 지켜만 주소서!’(하며 돌아오는 길에 하느님께 매달린다. 그러면서) 길이 엇갈려 이미 집에 들어와 있다가 대문을 열어줄 아들을 상상하며 초인종을 누른다. 뛰는 가슴과 떨리는 손으로.
(그때 안에서 들린다) “어머니 세요?”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 아들을 무사히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나의 얼굴을 읽으면서 그 애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만취한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다음엔 꼭 연락을 하겠습니다.” 나는 행복했다. 내 어깨를 꼬옥 감싸는 아들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까지도 싫지 않았다. 화난 대로 아들에게 쏟아 부었다면 이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까. 누가 말했던가, ‘고통을 통해 순수해지고 성숙해진다.’고.......
며칠 뒤 길이 막혀 늦어진 나를 기다리던 아들은 말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의 어머니를 무사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곳은 바로 천국임을 느꼈다. 나는 다시 한 번 체험했다. 십자가 뒤엔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것을, 좋은 부모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효과적인 부모역할훈련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고통과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이 일은 고통을 감수하며 노력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부모역할은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역할이며 소중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이야기에서 말입니다. 이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 간 것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말로써 통했습니까, 아니면 마음으로 통했습니까? 마음으로 통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마음으로 통하게 되기까지의 중간 단계는 없습니까? 그것은 몸에 배기까지의 서로 노력을 기울인 상호간의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렇게 늘 기다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고 소리 없이 그 사람을 내 맘속에 담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서의 성모 마리아가 그렇게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48-50 참조)는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 서로의 삶을 간직해줄 수 있는 그것을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란 상대방이 나에게 부담해야 할 사랑이라기보다는 내가 부담해야 할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얻는 것이나, 딸 수 있는 결실이나, 바라는 성과라기보다는 이루어 가는 것, 주는 것, 거름 같이 붓는 것, 그래서 키워 가는 과정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항상 진행 중이면서 아직 결론에 이르지 않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사실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싱겁고 또 어쩐지 말로 한 사랑은 거짓 같기도 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진행 중인 사랑이 가정 안에서는 방안에 가득 차면서도 공기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부부의 사랑이란 한 나무줄기에 흐르는 물과 같은 아내의 사랑이요 거름 같이 힘이 되는 남편의 사랑이되, 줄기 속에 함께 녹아 흐르는 생명처럼 보이지 않는 서로의 사랑인 것입니다. 아마 그런 부부 사이에 그래서 꽃이 피고 또 그래서 또 한 생명으로의 열매가 또 다른 나무를 탄생시키는 자녀의 모습으로 그들의 가정이라는 것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남으로 만나서도 하나가 되는 것이 부부인가 봅니다. 남남으로 만난다는 것은 서로가 분명히 ‘다른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이 ‘하나의 인생’을 사는 한 몸이 된다 합니다.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가 1995년 5월에 큰 사고로 온 몸이 부서져 의식을 잃었다가 닷새 만에 깨어났을 때 의사들의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먼저 으스러진 폐부터 수술하고 그리고 목에서부터 허리 아래까지 뼈를 한 토막씩 뜯어 맞추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크리스토퍼 리브는 자기 아내 다나에게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지 말고 자기를 그냥 죽게 놔달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나를 죽게 놔두는 게 나나 당신에게 더 나을 거요”라고 말입니다. 그 때 아내 다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건 당신의 마음 결정이므로 존중합니다. 허지만 떠나갈 당신은 여전히 나의 당신이에요. 그리고 난 그런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할 거예요.” 아내의 그 말을 듣고 크리스토퍼 리브는 그래서 살겠다는 마음을 되찾았고 그리고 그의 아내 다나는 전신마비의 그와 행복한 사랑의 부부로 계속 변함없이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답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라는 혼인 서약은 그렇게 해서 지속되는 사랑의 과정 속에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듯 항상 끊임없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니 영원히 결말 없이 계속 커나가는 것이 가정안의 사랑, 부부의 사랑, 부모 자녀 사이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그런 가정에서 시작하여, 그리고 항시적으로 끊임없이, 그러나 드러나지 않고 소리 나지 않게 성취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렛 성가정은 감추어진 가정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음”은 구세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렇게 가정의 어머니 마음과 같은 사랑의 고요 속에서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으나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위대성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성가정 축일의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이란 볼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찬 곳이다’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감추어진 보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것이기에 감추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가정의 이야기가 밖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좋은 것이든 언짢은 것이든 말입니다. 그것은 그래서 최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일이 외적 강제력으로 보호될 지경이라면 그것은 벌써 비극입니다. 가정 폭력이 공권력에 호소되어 해결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가정폭력 방지법이든 보호법이든 그것이 노출되는 과정을 통해야 하는 실정에까지 이른 것이 현실이라면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정적 성장과 자아 성취를 이룰 수 없는 청소년들이 사회의 어두운 거리로 나와 방황하기에 이른 까닭은 가정이 은밀한 사랑의 보금자리로서의 본질적 기능을 상실한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커튼으로 가려져 보호되어야 할 방안 사정을 밖의 세상 풍조가 무차별적으로 역류해 들어와 흐트러뜨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실정을 바로 잡아 본래적 개인들의 성취 장소로 가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가정별 특수 여건이 개성적으로 보장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대학 가는 것만이 교육은 아니라는 것, 다른 가정보다 넉넉하지 못한 사정이라 해서 불행하다 여겨지지 않는 가정 나름으로 남모르게 행복한 이유 따로 있으면 그만 이라는 것, 그래서 식구마다 다른 집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귀한 역할을 이 세상에서 자랑스럽게 수행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스런 사회인으로서 인정받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사회 발전의 진원지요 인생 성공 행로의 귀착지가 곧 가정이라는 본질적 위상이 모든 것에 앞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우리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으로서의 공개되지 않은 세상살이를 나자렛에서 30년이나 하신 까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른 살 되셨을 때 비로소 공생활 하신 것으로 복음서들은 보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요즘 세상으로 쳐서 그 30살 먹도록 예수청년은 취직도 하지 않고 집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요? 그 또한 어머니 마리아의 속을 썩이며 무능한 아들이었는지 모를 일이지요.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고, 그 30년을 훌쩍 뛰어넘어 즉시 그분의 공생활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의 보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 기록자는 ‘어머니 마리아가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가운데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갔다’라고만 우리에게 짤막하게 그 30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사셨나 하는 것은 성서 기록자는 알지 못하고 오직 성모 마리아 가슴속에 기록된 것으로 아직 그리고 영원히 공개되지 않을 은밀한 가정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삶처럼 가정은 침묵하는 마음만큼이나 가득 찬 신비와 같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깰 수 없고 그리고 깨서도 아니 되는 그 침묵 같은 베일 속에서 사실은 사랑의 작업이 가장 생동적으로 계속되는 곳이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가정입니다. 부부가 사랑하고 그래서 부부가 부모 됨을 알고, 그리고 나아가 남남으로 만나 엄마 아빠 된 사실을 자녀들의 존재가 증명해주고, 그로써 부부 서로가 그리고 부모와 자녀 서로 서로가 개인으로서의 존중 받음을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런 곳이 가정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나자렛의 감추어진 가정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그분이 밖에서는,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어린 나이에도 하느님 아버지의 일로(루카 2, 49 참조) 모든 학자들의 경탄을 사는 모습이었습니다만(루카 2, 46-47 참조), 가정에서는 순종하는 삶으로(루카 2, 51 참조) 하느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을 채우셨던 것입니다(루카 2, 52 참조). 그러한 순종은 자녀가 부모에게 뿐만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에게 그리고 부부인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러한 마음 채워주기란 서로의 마음을 서로가 따르는 것이라고, 그런 마음 서로 따르기가 즉 순종이라 하여 그것을 강생하신 주님이 실천하셨다고 오늘 복음은 우리 모든 가정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서로의 마음 따름 즉 순종의 사랑으로 우리 모든 가정을 정화 할 다짐을 하면서 가톨릭 기도서 105쪽의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함께 바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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