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일

(2012. 12. 23. 만수리 공소 : 윤종관 신부)

The Lord is at hand

그러니 변해야지!





오늘은 대림절 제4주일이면서 주님 성탄의 거룩한 밤을 맞이하기 하루 전날입니다. 내일 밤에 성탄축제의 전례를 거행하게 됩니다. 성탄축제를 목전에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전례는 이렇게 다가온 주님의 강생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미 가까이 오셨으니 어서 경배하세하고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가까이 오셨다는 메시지를 영어 기도서에서는 “The Lord is at hand”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주님께서 우리의 손닿는 곳에 와 계신다는 말이겠지요.


이러한 주님의 오심에 대하여 우리는 오늘의 복음 내용으로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루카 1, 3945 참조).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외친 인사말이 곧 오늘 우리 또한 감격적으로 고백할 깨달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바치는 기도인 성모송이 곧 그 내용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모든 여인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시라면서 그분의 태중에 계신 주님이 더욱 복되시다는 칭송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엘리사벳은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가 1, 44)하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엘리사벳의 실토가 곧 우리 자신들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에서부터 주님 오심에 대한 체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가 기뻐 뛰놀듯이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에 들어오시는 주님을 만난 기쁨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그 깊은 내면은 아주 조촐하고 작은 마음인 것입니다.


성탄절이 오면 사람들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흔히 외형적 행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 마음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성탄절 사건이 있어야, 오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불우이웃을 도우러 밖으로 나간다든가 교회 공동체의 성대한 행사와 잔치를 벌일 수 있습니다만, 그런 것보다 더 먼저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미 마리아의 뱃속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로 하여금 발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 동네로 향하게 하셨듯이(루가 1, 39 참조), 또한 그 예수 아기는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세례자 요한 아기를 뛰놀게 하여 엘리사벳의 감격적 체험고백을 표출케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두 영혼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함께 깨닫는 공감을 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라는 두 여인의 영혼이 공감한 감격은 신시대와 구시대가 하나로 만난 감격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으로 부끄럽게 살아온 늙은 여인 엘리사벳이 뱃속에 품은 아기, 그리고 남자와 살아보지 않은 처녀 마리아가 뱃속에 가진 아기, 이 두 아기가 만난 감격의 뉴스를 오늘 루카복음서가 전하고 있습니다.


이 두 아기의 감격적 만남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저는 문득 며칠 전의 우리나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과정과 그 결과를 연상합니다. 여태껏 지나온 과거의 우리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지겨워해 하던 국민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면서 투표를 했지요. 그리고 그 결과를 보면서 51%의 사람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한편 48%의 사람들이 패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식으로 국민 중에 반절 조금 넘는 승리자 무리와 반절 조금 못 미치는 패배자 무리로 갈라놓는 해석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지요. 51%48%로부터 책임을 전해 받았고, 48%51%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게 되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선거 결과를 두고 함께 만든 결과라면서 축하와 위로를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여, 졌다고 생각되는 48%가 이겼다고 생각되는 51%를 향하여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으니 격려를 보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겼다고 생각되는 51%가 졌다고 생각되는 48%를 향하여 도와달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곧 진정한 새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 축구 경기처럼 두 팀으로 갈라져 상대방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시합을 한 것이 아니라, 함께 역할 분담을 하기 위하여 서로의 장끼 시합을 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른 발과 왼 발의 역할 점검을 해볼 필요성 때문에 선거라는 시험과정을 치렀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른 발이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가속 페달을 밟기만 하면 자동차는 사고를 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른 발이 필요에 따라 가속 페달에서 적절하게 브레이크 페달로 옮겨 가 밟을 줄 알아야 하고 그럴 때마다 왼 발이 클러치 페달을 밟아주면서 동력 조절을 해주어야 자동차는 정상 운행을 할 것입니다.


그렇듯 우리 사회는 우익이 있으면 좌익도 있어야 정상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익 사람들이 좌익을 일컬어 무조건 빨갱이라는 등의 욕을 해가면서 편 가르기를 하고, 표로 이겼다 해서 적게 나온 표를 무시한다면, “잘 살아보세를 표방하면서 함께라는 말을 빼버리고 내 편만 잘 살아보세하는 놀부 세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여당이 야당 되고 야당이 여당도 되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사회는 막히지 않고 흐르는 강에서 물고기가 싱싱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살맛나는 국가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자마자 맞이하는 이번 성탄절을 즈음하여 광주 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님께서는 성탄 메시지에 박근혜 당선자는 48% 반대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만난 자리에서 그 두 여인의 뱃속에 든 두 아기의 서로 알아봄을 감격적으로 전하는 뉴스와 연관 되고 있습니다. 서로를 알아보고 기뻐하는 뉴스를 창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두 여인의 뱃속에 든 두 아기처럼 선거가 보여준 라는 두 가지 입장이 서로를 진정 알아볼 수 있는 입장으로 승화되는 경과를 창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두 아기란 그 두 여인이 품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렇듯 우리 사회가 보인 두 가지 입장은 곧 서로 만나 두 마음이 함께 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쁨을 오늘 두 여인에게서처럼 체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뱃속에 든 두 아기가 만나듯이 서로의 두 마음이 만난 기쁨인 것입니다. 그 두 여인의 모습은 곧, 주님 오심을 체험하면서 변화되는 우리 자신들의 영혼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 어떤 엉뚱한 곳에 계시는 주님이라기보다 우리 자신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으로 이미 우리는 각자들의 영혼이 차지할 수 있는 행복의 최고치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왜냐면, 마리아의 모습으로 표상되는 교회 안에 주님이 계심을 우리는 엘리사벳처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엘리사벳처럼 우리 각자의 영혼은 교회를 통하여 이미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아가 듣게 된 칭송을 우리 또한 서로에게 들려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으니, 당신은 행복하십니다.”(루카 1, 45)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듯 진정 복된 여인 마리아는 그래서 그 행복에 대한 화답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가 오늘 복음 내용에 뒤따라 수록된 그 유명한 마리아의 노래’(루카 1, 4655)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처녀 마리아 개인의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주님을 만나서 새 삶의 행복을 얻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노래교회의 노래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마리아처럼 정녕 행복한 사람들로서 그 마리아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성탄절에 우리는 그런 행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듯 우리가 복된 까닭은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해서 이미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차지하시고 우리 삶을 당신의 것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의 참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으로 얻는 기쁨보다 더 넘치는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얻는 기쁨으로 다가온 성탄절에 우리 서로를 축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축 성탄!” 또는 “Merry Christmas!”라고 축하하는 내일 밤의 우리 서로 함께 하는 인사는 그래서 우리 각자의 영혼에게 보내는 기쁨의 확인인 것입니다.


그런 기쁨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 안에서 눈에 띄는 티끌까지 일일이 씻어내는 참회의 고해성사로 정결한 순백의 영혼을 회복했습니다. 그러한 순백의 영혼이 실제의 White Christmas를 우리 내면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그럴 준비를 해온 대림절을 마치게 될 내일 밤 주님과의 고요한 만남을 체험하러 세상의 번잡함을 피하여 동네 밖 외양간 같은 오로지 주님만이 계시는 곳, 즉 우리 자신 마음의 고요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의 외양간을 덮을 밤하늘은 그래서 소리 없는 합창 같은 찬미가인 듯 별들의 초롱초롱한 빛으로 반짝일 것입니다. 그 때 하얀 영혼 즉, 하느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평화가 있으리라고 저 하늘 높은 곳의 영광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합창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얀 마음의 포대기로 내일 밤 강생하실 우리 주님 아기 예수를 감싸 맞을 준비를 해야겠지요!


그 아기 예수 같이 욕심 없이 가난한 마음의 우리 주변 사람들과 함께 성탄 축복을 나눌 채비로 어서 하얀 우리 마음의 보자기를 깔아 놓을 말구유를 찾읍시다. 고해성사로 깨끗해진 우리 마음이라면, 아직 불우함의 어둠 속에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작은 구유처럼 조촐한 우리 마음이어야 합니다. 동네 밖 마구간인 듯 가난한 이웃집에, 그리고 선거 결과로 우울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또 노력을 해도 해도 성공을 마주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노동자 농민들의 마음에, 베들레헴 밤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천사들의 기쁜 노래 소리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행 소식과 정치사회 지도층의 참된 변화의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대하는 성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가 성탄절에 예수 아기 같은 작은 모습으로 변화 된 모습을 이웃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내일까지 남은 대림절의 하루만이라도 그 작은 모습의 조촐한 우리 마음이 되어봅시다.


이 글의 출처는 하부내포 공식카페입니다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