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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5(금) 대림 제1주간 금요일
가톨릭 성당 미사 강론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욕망
눈 먼이들에게 도움을 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7-31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눈 먼 사람 둘이 예수님께 와서 눈 뜨게 해달라고 청하는 복음이죠? 그런가요? 아닙니다.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푼결과가 눈을 뜬 것입니다. 이 복음에서 눈 먼 사람은 무엇을 보고 싶어한 것일까요? 여러분 만일 눈이 먼다면 뭘 가장 보고 싶어할까요?
우리는 과연 눈을 온전히 뜨고 모든 걸 바라보는 눈뜬 사람인가요? 우린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을 볼 수 없는 눈 먼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보고 싶은 분 여기서 보고 싶으신 분? 눈 먼 사람들처럼 하느님을 뵙고 싶은 열망이 여러분에게 있나요?
사실 저도 그런 열망이 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강론을 준비하며, 늘 하는 고민은 어떤 강론을 할까? 그렇게 잠을 자며, 묵상기도에 굉장히 좋은 기도가 있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성 안셀무스의 신의 존재론적 증명인데,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성 안셀모 주교의 「프로스로기온」에서
(Cap. 1: Opera omnia, Edit. Schmitt, Seccovii, 1938, 1,97-100)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욕망
하찮은 사람아, 자, 네 바쁜 일을 잠깐 떠나고 네 생각의 소란에서 잠시 너를 감추어라. 이제 무거운 걱정들을 멀리하고 네 수고로운 번잡을 뒤로 미루어라. 하느님께 잠시 몰두하여 그분 안에서 쉬어라. 네 영혼의 내실에 들어가 하느님과 또 하느님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배제시키고, 문을 걸어 잠근 채 그분을 찾아라. 내 마음아, 이제 열성을 다하여 하느님께 이렇게 아뢰어라.
"주여, 내 당신 얼굴을 찾사오며 당신 얼굴을 뵙고 싶나이다."
주 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이 어디에서 어떻게 당신을 찾고, 또 어디에서 어떻게 당신을 찾아낼 수 있는지 가르쳐 주소서. 주여, 당신이 여기에 안 계신다면 부재하시는 당신을 내가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어디서나 계신다면 왜 내가 현존하시는 당신을 뵙지 못합니까? 당신은 진정코 다다를 수 없는 빛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그런데 다다를 수 없는 이 빛은 어디에 있고 또 내가 어떻게 그 빛에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 안에서 당신을 뵐 수 있도록 누가 그 안으로 나를 이끌고 또 인도하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표시로, 어떤 모습 아래 내가 당신을 찾겠습니까? 주 내 하느님이시여, 내 당신을 뵌 적이 없사옵고 당신 얼굴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주여,
당신의 것이지만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유배지의 나는 무엇을 하리이까?
당신께 대한 사랑에 애타고 있지만 당신 얼굴에서 멀리 내던져진 당신의 이 종은 무엇을 하리이까?
나는 당신을 간절히 뵙고자 하지만 당신의 얼굴은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나는 당신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으나 당신의 거처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찾아내려 하지만 당신이 거처하시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열렬히 당신을 찾으려 하지만 당신의 얼굴을 알지 못합니다.
주여, 당신은 내 하느님 내 주님이시고, 나는 당신을 뵌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셨으며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당신이 나에게 주신 것이지만 아직 나는 당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뵙도록 나는 지음받았으나 나는 지음받은 그 목적을 아직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 주여, 언제까지, 우리를 언제까지 잊어버리시고, 언제까지 우리에게서 당신 얼굴을 외면하시리이까? 언제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언제 우리 말을 들으시리이까? 언제 우리 눈에 빛을 비추시고 언제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리이까? 언제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오시리이까?
주여, 우리를 바라보소서. 우리 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빛을 주시며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우리 일이 잘 되도록 우리에게 되돌아오소서. 당신없이 잘 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께 향하려 하는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없이 우리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주여, 당신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어 찾는 이에게 당신을 보여 주소서.
당신이 가르쳐 주지 않으신다면 당신을 찾을 수 없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보여 주지 않으신다면 내가 당신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내 당신을 갈망할 때 찾고, 찾을 때 갈망하며, 사랑할 때 찾아내고, 찾아낼 때 사랑하게 하소서.
이렇게 어제 한참 고민하고, 기도를 하며 안셀모 주교처럼 하느님을 뵙고자 열망에 불타오른적 있나?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 먼 이들이 보고 싶어한 것은 하느님 예수님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하느님의 자비였고,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러한 자비로움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걸 통해서 우리도 이웃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눈 먼이들에게 도움을 준 예수님처럼 어려운 이웃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는 연말이 되길 바랍니다.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2014-12-5 금요저녁 7:30. 전민동성당
박지순 치릴로 보좌신부 강론
이 글은 강론 말씀을 필자가 재구성한 것이기에 실제 말씀과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 내의 성경구절은 글의 구성을 위해 삽입된 것입니다.
<매일미사 2014.12.5 오늘의 묵상>
독일 아헨 교구의 교구장으로서 온화한 인품의 훌륭한 사목자요 뛰어난 혜안을 지닌 신학자였던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는 어느 대림 시기에 다음과 같은 짧은 시를 통해 자신의 교구민들에게 성탄을 맞이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하나의 창문/ 대성당의 찬란하고 장엄한 유리창/ 그러나 빛이 없다면 이런 창문들이 무슨 소용이랴// 성탄절에 빛이 솟아오르네/ 성탄절에 나의 삶을 비추시는 그분이 태어나시네/ 비록 내가 아직 나의 삶에서 오직 어둠만을 보고 있을지라도// 나는 이제 그분의 빛 속에서 나의 삶을 두 손에 가만히 품고 싶다네/ 그 창문은 곧 빛나는 색채로 환해지겠지/ 그리고 많은 이들이 빛을 보게 되겠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 둘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실의에 잠긴 하느님의 백성에게 ‘거대한 전환’이 오리라고 예언합니다. 눈먼 이들의 눈이 어둠과 암흑에서 벗어나게 되리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대림 시기는 빛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존재의 창이 비로소 빛으로 밝혀지는 것을 갈망하는 때입니다. 빛이신 그분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삶은 눈먼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빛이신 분께서 세상에 가져오신 참된 변화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꿈꾸지도 못하며 그 빛 안에서 기뻐하지도 못할 테니까요.
이제 창의 먼지와 그을음을 지우고 본연의 찬란한 색채를 주님의 빛으로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고 닦을 대림 시기에 무엇보다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각자는 주님의 빛을 자신의 삶으로 증언하는 귀한 존재라는 진리일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어둠 속에 묻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빛은 어둠을 이기고 삶을 찬란하게 한다는 믿음을 어떤 처지에서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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