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태 신부님의 그리스도교철학 3교시
아르케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 된다
서양철학사 개관 - 여유롭고 고상한 고민의 시작과 전개?
그래서 이제 철학을 봐야 겠죠. 철학의 시기를 네 시기로 나눕니다. 철학의 출발점은 탈레스로 부터입니다. 서양철학의 출발점인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시작해서 고대, 중세, 근대, 현대 철학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근본적 형태가 달라졌다고 봅니다. 중세의 시작이죠.
529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보기도
혹은 기원후 529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잡기도 합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나면, 전부 다 유럽이 그리스도교 사회가 되었죠. 앞서 300년간 박해를 받았고, 교회가 조금씩 형성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529년이 되는 때에는 유럽의 전 지역에 걸쳐 모두 그리스도교 사회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학교가 황제에 의해 폐쇄가 됩니다. 이교(異敎)의 철학으로 본 것입니다.
중세시대 전반부는 교부철학
우리는 중세시대의 전반부를 교부철학이라고 부릅니다. 최초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또한 주교님들이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는 시기적 특징이 있기 때문에, 교의를 설명하는 과정에는 외부 철학과의 대결과정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생각은 "너희들 생각보다 훨씬 좋다!"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렇게 설명을 하면서 수용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부터 플라톤 학교가 문을 다고, 그리스도교 사회 내에서 공부를 시키기도 하고 해야 하잖아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형태와 같다고 보면 되죠. 그런데 목적은 성직자를 양성하고 수도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부 격인 주교좌 성당 옆에 학교가 형성됩니다.
'학교'라는 말이 영어로 School이죠. 어원은 그리스 말에 있습니다. '스콜레'에서 왔습니다. '스콜라'라고도 하죠. 스콜라철학은 교부철학 이후의 단계입니다. 전반부인 교부철학과 후반부인 스콜라철학을 묶어서 그 전체를 '중세철학'이라고 합니다.
스콜라 철학은 교부 철학의 승계자이다. ‘가르침의 아버지’들이라고 표현되는 교부(敎父) 철학의 시대를 마치고 ‘학교 철학’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순서는 그리스(희랍) 철학의 순서와 일치한다. 그리스 철학을 대표하는 3대 철학자를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순으로 정리한다고 보았을 때,교부철학은 플라톤주의, 정확하게는 신 플라톤주의의 토대 위에 성립되어 있다면 스콜라 철학의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가 다시금 찾아온 것이다.
가르침의 아버지(교부)들의 후계자로 등장한 학교철학자 중에서
요한의철학노트/서양중세철학 2014.12.10 23:14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근대
근대철학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됩니다. 르네상스도 있고 한데, 거기서부터 근대와 현대를 긋기는 더 어렵습니다. 근대 철학인 데카르트 문제를 오늘날에도 문제삼는 것이니 어떤 이들은 17세기 철학, 18세기 철학, 19세기 철학 그렇게 말하는 데, 신학교에서는 칸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기도 하고, 대체로 1850년대를 구분선으로 삼습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이 생각하는 데 근본적으로 틀이 바뀝니다.
1850년을 근대의 구분선으로 잡기도 한다
사람들은 생각할 때 내가 가진 우주관을 가지고 생각하지요. 바로 근대철학을 이룬 것은 뉴턴의 물리학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아인슈타인의 1904년 상대성 원리로 절대적 원리가 흔들립니다. 따라서 1900년을 전후해서 현대 물리학이 이뤄지는데, 현대물리학이 이뤄지기 위해서 사용 용어들이 수학적 용어인데, 그러한 수학, 기하학이 그 이전 가진 유클리드 기하학을 벗어나니까, 몇 차원 공간도 연구하고, 기하학적 토대 위에서 이론들이 나오는 것인데 20세기 초에는 1920년내지 이때쯤에는 여지껏 알고 있는 세계의 상이 다르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심지어 혼란에도 빠지고, 오스트리아 비인, 비엔나에서는 여러분야 학자들 모여서 도대체 오늘날 우리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세계 상을 과학적 통일된 세계상 연구해보자. 함께 소위 비인 학단이 구성되기도 합니다. 히틀러 등장으로 흩어지지만, 그만큼 세계가 혼란스러운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상대성 이론도 ... 우리는 3차원의 공간 안에서만 살고 있으니, 과학자들이 하는 말을 듣다보면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모를 얘기를 막 쏟아냅니다. 그런데 진짜 세계가 그렇다는 겁니다. 당연시하던 것들과 전혀 다르게 생각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현대의 시작
바로 그런 것이 이 때부터 시작된 것 즉 20세기 초. 현대의 시작입니다. 그 이전의 절대에 대한 생각은 사람들이 안하게 되면서 모든 게 상대성으로 가면서,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 얘기했지만, 상대성 이론을 통해 절대적 진리가 뭔지 찾으려는 거죠.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야’라고 하자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 이 얘기 저 얘기를 합니다. 스티븐 호킹이란 유명한 물리학자는 몇 년전 쓴 책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한다는 그래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빅뱅은 4번 있었다?
KBS 인문강단을 보면 어떤 대학(연세대?) 교수분이 강의하시길, 빅뱅은 4번 있었다고 합니다. 뒷 부분에서 어떻게 이야기하냐면, 결국은 모르겠다는 겁니다. 우주를 설명하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결국 '나는 모르겠다'는 설명을 했던 겁니다. 그러면서 그 분도 스티븐 호킹 얘기하면서 굳이 신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다라고 언급하였어요. 즉 "신은 없다."란 말의 다른 표현인 셈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번개를 맞으면 ‘신이 벌 준 것이야’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개입시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지자, '신'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신은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더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이렇게 여러 가지 이런 저런 것들을 설명하는 과학적 시도 속에서 세상이 달라지면서 새롭게 설명하는 게 많아지면서도, 이전과는 다른 즉 20세기 초반으로부터 시기 구분을 위해 현대 철학의 탄생지점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즉 주체와 객체에 대한 담론이 그 이전과 다른 형태로 다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전하고 어떠한 세계상(像)을 가졌는가와 무관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존재에 대한 물음입니다. 존재론적 물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의학이 발전하여, 인간의 신체적 기능과 그 기능적 요소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요소적 설명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우리 인간이 처음 생각을 하면서 던졌던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이나 과거 고대시절에나 같은 틀을 갖추고 있어요. 그래서 이미 고대 철학 시기에 특정한 틀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중세 시대에는 신앙적 입장에서 새롭게 설명하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죠.
이성적으로 신을 찾으려는 노력
그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철학은 없고 신앙만 있었다는 무신론적 철학의 주장은 넌센스입니다. 인간의 논리를 가지고 설명하려는 논리학의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입니다. 오늘날 과학철학, 과학의 언어에 대한 진보가 있었다고, 그에 앞선 중세에는 그 앞선 고대 철학의 도움을 받아서 이성적으로 신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철학의 전통적 흐름 위에 서서 이성적으로 보아온 노력이기때문에 그러한 진지한 노력을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철학에서도 기본적으로 이어받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영구하게 물려받은 척학의 기본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입니다. 항구한 철학이며 고대로부터 이어받은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여가가 있다는 것
서양의 고대철학에서 우리는 기본적인 철학의 기본 주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시대를 보았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잖아요. 그리스(희랍)에서 서양 철학이 출발하였습니다. 그리스의 밀레토스라는 도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선교여행을 갈 때 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터키 지역에 있어요. 거기가 아마도 그 당시에는 해안도시인 만큼 교역(무역)을 통해 부유한 동네였을 겁니다. 배가 고플 때는 고상한 생각을 하기가 어려워요. 스쿨, 스콜라, 그리스말 스콜레의 뜻은 '여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가를 가진 사람들의 장소인 것이죠. 스쿨은. 그래서 여가를 가질 수 있는 놀고 먹는 사람들, 노예는 아니고, 자유인들이 가지는 겁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자들은 자유인인 겁니다. 그래서 일상 생활에 묶여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생각을 하자는 것이지요. 그리스 사회가 그 당시 특히 밀레토스는 부가 축적되어서 여유가 있기 때문에 고상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걸 탈레스란 사람과 그 제자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 밀레토스 학파를 형성하기 시작한 겁니다.
고상한 고민의 시작?
여러분도 여기 앉아서 콩나물국 잘 끓이는 법, 돈 잘버는 법 가르켜드릴려는 게 아니죠? 우리는 지금 고상한 고민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첫 번째로, 철학자인 겁니다. 우리가 묻고 있는 질문들이 그 이전에도 없었겠나요? 그 이전에는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신화적으로 설명을 했다고 보는 겁니다. 어떤 자매님이 신부를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합니다. "신부님, 왜 내 남편이 죽어야 하나요? 성당에서 활동도 아주 열심히 하는데요?" 의사가 설명할 때는 그냥 아무 항의없이 듣다가 그게 안되니까 신부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습니다. 신화적으로 혹은 주술적으로 설명을 하기도 하잖아요. 이를테면, "너가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 거야!" 그러면 점 집에 가면 꼭 이렇게 말합니다. "3대 조상이 뭐해서 그런 겁니닷!"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 사이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점 집에서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분들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밀레토스 이전에는 그런 식으로 설명으로 했다면, 바로 탈레스, 밀레토스로부터 다른 설명을 찾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다른 설명이 뭐죠? 이성만 가지고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이성만 가지고 설명한다.
이성만 가지고 문제를 설명하는 것인데,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왜 존재하는지를 묻는 겁니다. 내가 거울을 보니 미남이죠? 미남이든 아니든 동일한 나죠? 그런데 30년 후에 거울앞에 서면 추남이 서있죠? 헷갈리죠? 미남인지 추남인지. 저는 한번 저 어릴 적 고모부 시골 사시는 고모부 제가 신학생 때 돌아가셨는데, 그리고 나서 유학 갔다오고 그렇게 나중에 집안 모임에 갔는데, 고모부가 거기 계시는 겁니다. 당황해서 다시 가만 보니까 사촌 형이죠? 똑같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내 눈으로 볼 때, 내가 어렸을 때 그 나이 때 모습과 그 사촌형. 즉 고모부 아들이 그 나이 때 모습이 똑같은 거에요. 고모부로 보면, 고모부의 스무살 때와 예순살 때 모습보다 고모부 서른살과 아들 서른살이 더 똑같죠. 눈으로 보는 기준으로 한편으로 미남. 여기서부터 추남. 안 미남이죠. 미남, 비미남이죠. 이거는 A죠 이것은 not A죠. 하나의 동일한 인물. 내가. A이고 동시에 Not A인 것입니다. 이 백묵은 하얗고 동시에 하얗지 않다라고 표현하면 이성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모순율이 있기때문이죠. 그래서 이성은 묻습니다. 하얗다는 거야 하얗지 않는다는 거야.
나 예뻐? 하면 "예쁘고 동시에 예쁘지 않아!" - 배중율
이렇게 말하면 열받죠. 이성이 따라가지 못하니까. 이것을 설명해내는 것이 처음 출발에 교재에서 철학의 출발에서 논리학을 말합니다. 논리학은 생각하는 길입니다. 논리학은 객관적 길에 따라 생각하자는 겁니다. 이성이 작동한다면 하얗거나 하얗지 않거나. 배중률(排中律)이라고 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중간을 배척한다는 거지요.
이 백묵은 백묵이어야 한다 - 동일율
이 백묵은 백묵이어야 합니다. 동일율이라고 합니다. 나는 미남이다 30년 후에 미남 아니다. 그런데 내가 동일한 내가 아니면 의미가 없죠. 논리의 법칙은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보면 이성으로 설명하려고 했을 때, 이성으로 설명하려면 A는 A여야 하는데, 나는 미남인데 미남이 아니게 되면서, 나는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죠. 그러면 존재하는 게 참인지, 존재하지 않는게 참인지. 존재한다는 건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지. 여러분 존재하죠?
동일한 나는 동일한데 어떤 시점 존재하고, 어떤 시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된다고 한다면, 동일한 나가 시간이 지나면 내가 아니란 것인가? 이게 대체 뭔가 존재하는 모든 것. 어느 순간 없어지면 난 어디로 가는거야. 그래서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고상한 설명이 출발점이 바로 탈레스였던 겁니다.
설명할 수 있는 이성이 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있는 이성이 있으니 설명해야 합니다. 나한테는 해당되는 설명이라도 보편적 설명이 되지는 못하는 것.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것. 그 설명이 주어져야 나에 대한 설명도 참된 것입니다. 나에 대해 따로 남 따로는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똑같은 법칙으로 떨어져야 한다
무엇이든지 떨어지는 모든 것은 똑같은 법칙으로 떨어져야 설명이 되는 것이죠. 이 설명이 단순한 특정한 사람, 특정한 존재자, 특정한 여럿만 설명하는 게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해서면 설명이 되어야 진짜 보편적 설명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탈레스의 출발이 서 있습니다. 이성으로 찾으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물음의 주제가 되어서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어디에서 나왔다고 해야지 동일한 어디를 설명해야지 모든 것의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어떤 원리. 만유인력의 법칙같은 게 있어요. 설명하면, 떨어지는 게 궁금하지 않죠. 동일한 하나의 원리로 떨어지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일한 원리가 있다면, 그 원리 설명하면 끝나는 거죠.
아르케, Arche ... 출발 혹은 시작
처음 이 고민을 한 사람은 어디 근거와 출처 무엇인가 있다는 데서 출발하겠죠.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알면 궁금해하지 않겠죠. 그것을 찾아야 겠죠. 뭔지 모르지만. 그러면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이 끝나니까. 그래서 처음 출발하는 원리같은 것이라고 부르죠. 그것이 무엇인지 찾기만 하면 되죠. 그 원리 같은 것. 처음 출발. 거기서 만물이 나오고, 삼라만상 다스리는 원리 같은 것. 너무 길죠. 그래서 그리스 말에서는 그런 말이 처음 거기서 출발해 나온 것이면서 거기서 나온 모든 것을 관할하고 다스리는 원리로 작용하는 것인데, 요것을 담은 개념을 ‘아르케’ Arche 라고 합니다. 출발 혹은 시작이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한 처음에'도 En Arche
요한 복음에도 ‘한 처음에’ En Arche 라고 합니다. 출발한 그것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관할하는 그런 원리가 바로 아르케란 말입니다 라틴말로는 프린치피움. 영어는 프린스펄이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 말에서는 딱 맞는 게 없어보여요. 그래서 그냥 ‘아르케’라고 합니다. 이것만 찾으면 이 원리만 찾으면 되는 데, 아르케라고 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하죠. 그래서 이와 같은 걸 찾는 노력이 되어서 이거처럼 특정한 질료와 물질이 모든 것을 출발하는 원리로 작동한다고 해서 그걸 물이다, 공기다 이렇게 계속 찾아가게 된 겁니다.
서양 철학의 출발은?
만물의, 모든 것의, 특정한 제한이 없이, 모든 것의 원리를 찾는 노력으로 서양철학은 출발한 것입니다. 변한다는 게 무엇인지, 존재한다는 게 무엇인지 논리적 설명을 하나하나 하려는 것인 겁니다. 이런 물음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경우라면, 이 물음은 아르케 뭐 그러면 이 물음이 마음에 담겨 있으면 이 귀중한 개념. 이럴텐데, 관심없으면, 아르케가 뭐야 이러면서 안보겠죠. 처음 철학의 처음 출발이 되는 그러한 종류의 물음이고 답을 하려는 노력 기울여가면서, 플라톤이란 철학자는 하나의 철학 체계 구성이 되고,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어 등장합니다.
플라톤은 이 세상 것은 다 무시하고, 이성이 바라볼 수 있는 관념의 세계를 구성하여 그 관념의 세계가 이 모든 것의 설명을 기준하는 사유체계를 만들면서 관념을 강조하여 지상 현실을 소홀히 하게 되어, 지상현실 개입시켜 관념으로 설명하는 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입니다.
플라톤은 지상의 것을 자세히 쳐다볼 필요 없죠. 관념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를 계속 생각하면, 지상 것 방해. 배고프고, 전화오거나 이런 것의 방해없는 그런 진리찾으려는 노력 형태 사유체계를 플라톤이 만들었다면, 그런 진리가 지상현실 속에 있으니 자세히 들여다보고 진리를 찾자는
그래서 관념의 중요성과 경험의 중요성. 이 두 개의 것에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철학이 진행된 것이죠.
2014년 1월 11일 오전 11시 45분 3교시 끝.
위 글은 서울 혜화동 소재 가톨릭대학교 진리관 강당에서 열린 <그리스도교 철학> 강의 4교시 중 1교시이다. 강사는 가톨릭교리신학원장이시며, 가톨릭대학 철학과 교수이신 김진태 신부. 이 블로그 내용은 당시 강의를 받아적고 기억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기에 실제 강의와 다를 수 있다. 이 특강은 통신신학교육과정의 1단계 1학년 학생의 1일짜리 동계연수의 오전 수업이며, 이것은 가톨릭 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학생연수프로그램으로 통신신학교육부는 2년씩 3단계로 각 1~2학년을 6년 동안 마치는 우편교육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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