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인간노동 (1)
2015.4.15(수) 저녁 8시 09분 풍경. 제13기 대전사회교리학교 7주차 강의가 시작되고 있는 모습
강의는 강사와 수강생의 가위바위보 대결로 시작되었다. 강사를 이긴 사람만 남고 진 사람은 게임에서 탈락한다. 그렇게 서너차례 했는데, 최종 2명이 남았고, 그들에게 쌍용차 투쟁기록을 담은 책 <이창근 해고일기>가 각각 증정되었다. 그리고 강의는 쌍용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 필기자 주
이창근의 해고일기
(김덕진) 복직 약속을 믿고 살다가 지키지 않는 회사 때문에 거리에 나와서 오랜 시간을 보낸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은 대한문에서만 2년 넘게 농성하고, 농성자리 지키려고 2백일 가까이 성직자들이 나와서 미사를 보내며 함께 했습니다. 여기서 이창근이란 분은 저보다 한살 많은 형이고, 저랑 친하게 지냈습니다. (2014년 11월 13일) 대법원에서 쌍용차 해고 정당하다는 판결 이후, 밤에 술을 둘이 많이 먹었는데, 뭔가 결심한 듯 보였습니다.
재판부 판결문 "구조조정 당시 쌍용자동차가 처한 경영위기 상황은 국제금융위기와 경기불황에 덧붙여 연구개발 투자 및 신차 개발소홀에 따른 경쟁력 약화, 주력 차종인 SUV 세제혜택 축소 및 경유가격 인상에 따른 판매량 감소 등에서 비롯된 계속적·구조적 위기에 해당해 정리해고에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또 "기업 운영에 필요한 인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잉여인력은 몇 명인지 등은 경영판단의 문제에 속하는 것이므로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며 "사후적인 노사대타협으로 해고인원이 축소됐다는 사정만으로 회사가 제시한 인원 감축 규모가 비합리적이라거나 자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쌍용차가 정리해고에 앞서 부분휴업, 임금 동결, 순환휴직, 사내협력업체 인원 축소, 희망퇴직 등의 조치를 실시해 해고회피 노력을 다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한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2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을 완전히 뒤집었기 때문이다. 2014년 2월 서울고등법원은 2009년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무효'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대법원은 '사실심'이 아니고, 1심과 2심 재판부가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모두 듣고, 각각 내놓은 사실관계를 다루는 데 반해서, 3심인 대법원은 적용된 법률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법률심>으로 진행되기때문이다.
테이저 건은 총알이 나가는 총이다
(김덕진) 강제 진압을 당했을 때의 충격으로 강한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테이저 건이란 게 있습니다. 총알이 나가는 총입니다. 그 총알은 고무탄입니다. 그걸 맞으면 충격으로 쓰러집니다. 전기충격기가 동원된 강제진압을 했던 것입니다. (테이저 건은 끝부분이 낚시바늘처럼 생기고 발사하면 순간적으로 5만 볼트의 전류가 발생하면서 근육을 마비시켜 쉽게 빼낼 수 없도록 하는 신무기이다. 아래 사진은 2009년 7월 22일, 경찰이 쏜 테이저건의 총알이 쌍용차 노동자의 얼굴에 박혀있는 모습이다.)
이창근, 이 분이 (2014년 11월 13일 대법원) 판결 이후 12월에 굴뚝에 올라가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 이야기 세상에 알릴까로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나는 관심없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다
읽다보면 마음이 아파서 다 읽어지지 않습니다. 쪽 글들이라서 아무데나 펼쳐서 읽으시면 됩니다. 책의 수익금으로 해고자들과 자녀들 위한 분홍도서관을 짓겠다는 것인데, 5십만원 쯤 팔려야 돌이라도 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물로 보내달라고 제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백권이 넘는 책이 사무실에 왔습니다. 택배 아저씨가 하도 자주 오시는 덕분에 일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제가 받은 그 책의 권 수에도 놀랐지만, 보내준 사람들을 보면서 더 놀랐습니다. 보내 준 사람들이 예전에 함께 일했거나 데모하던 친구들 중에서 인연이 5~6년 심지어 10년 이상 전혀 연락이 안되던 이들이 책을 보냈다는 톡을 보낸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관심없이 세상을 사는구나!'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다른 이들을 두고 야속하다고 생각하며 외면하던 제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밀양이나 강정 부분을 읽어라
책이 너무 많아져서 고민을 하던 끝에, 천주교 인권위원회 후원의 밤에서 만원 씩 받고 팔았습니다. 그 돈으로 각 지역의 마을에 있는 작은 도서관 마을 도서관들이 책을 보냈는데, 2백권을 팔았어요. 그리고 150권 책을 사서 팔았으니 이창근에 대한 제 의리는 지켰다고 봅니다. 사실 책이 재미있지는 않지만, 글 후반부에 등장하는 밀양이나 강정 등에 대한 얘기는 읽어볼 만합니다.
제가 2~3년 정도 대전에 와서 말씀을 드리는 것 같은데요.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대전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님이나 박상병 위원장님은 제가 할 말을 빤히 알것 같아서 이창근 얘기로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인권'이란 단어가 어려운가
아무튼 오늘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인권'이란 단어가 어려우신가요? 저보다 연배 높으신 분에게 '인권이 뭐냐?'라고 여쭤본다면 전인권의 <들국화>를 말하시는 분이 있을 지 모르겠고요. 조금 어린 분들이라면 김인권을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편안하게 '인권'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지 한번 얘기를 꺼내볼까요? 앰네스티, 유엔인권헌장, 무섭다, 좌파, 천주교인권위원회 ...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인권의 시작
사실 인권이란 단어는 한국사회에서 군사 독재정권을 오랜기간 형성된 개념입니다. 그 때에 군사독재와 싸우는 민주화운동, 그리고 억울하게 감옥 간 사람들 구명하는 운동 등으로 인권이 비롯되었습니다. 근현대사에서 보았을 때,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오래되었겠지만, 1974년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인권운동의 시작으로 봅니다. 당시 민청학련 현재 다 무죄와 배상받은 사건으로 유신당시 있었던 때 같이 생긴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인권위원회와 함께 천주교에서 생겨나면서, 민주화운동과 양심수석방운동이 같이 전개된 겁니다.
천주교에서 시작된 인권운동
천주교에서 인권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과, 농민운동이나 사회복지분야에서도 가톨릭이 기여한 바가 큽니다. 인권에 대한 개념을 말했을 때, 인권이란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나도 있고, 상대방도 있고, 옆집이나 슈퍼아저씨 인권도 있고, 극악한 범죄자도 인권이 있고, 대통령이나 세월호 유가족에게도 인권이란 있습니다. 그런데 개개인의 충돌과정에서 무엇이 우선되는가를 따질 때 어렵고 힘든 일이 있습니다. 주변 장애인 시설이나, 집 주변이 출소자 주거촌이 생긴다거나, 화장장이 생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표면적으로는 동네가 위험해지고 아이들 키우는데 범죄자들 오는 게 걱정된다고 하지만, 사실상 집값 떨어진다는 걱정 즉 재산권 침해에 대한 우려입니다. 내 집을 비싸기 팔 권리이고 인권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겁니다, 나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 꼭 너가 해야하는 일인가?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시설들도 분명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거지요. 인권운동하는 사람 필요하다 그런데 왜 너가 그걸 해야 하나? 라고 부모님이 말씀할 수 있듯이, 시설이 필요하다고 할 때, 그게 내 집 주위에 하필 생기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겁니다, 그럴 때 성숙한 사회의 수준과 의식같은 것들이 그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하니 권리의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동네와 아이들에게 더 조은 교육현장이고 집 값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조건들이 해결되면 될 것입니다.
천부인권이란
인권은 매우 어려운 규정짓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유명한 학자들 여러가지 설로 말하지만, 전 하나도 못 외우고 있습니다. 사실상 활동 속에서 느끼는 건 다른 겁니다. 천부인권의 뜻을 아시는 분? ...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리죠. 여기에는 사실 평등함이 괄호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똑같은가요? 나와 내 언니나 친구를 하느님이 정말 똑같이 평등하기 사랑하실까요? 살면서 평등, 똑같이 모두에게 이런 단어들이 진짜 그렇게 주어진 것인가? 이런 고민을 상당히 많이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뭐하시는 분이니?
천부인권이란 말이 말도 안된다는 사회적 구조들이 있죠. 요즘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하죠. 결혼할 때 아버지 직업 물어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뭐하냐고 물어본답니다. 결혼적령기 20대 중후반 청년들 부모님은 50대 초반인데 그 때에도 뭔가 이루기 어렵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때부터 권력이나 돈이 있어야 A등급 받는다는 겁니다. 즉 태어날 때부터의 경제적 수준과 문화를 향유하는 상황을 알아보려는 것이죠. 어렸을 때 영어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때 해외연수 다니는 서울 강남의 한 청년과 어떤 지역의 농산어촌에서 태어나서 선생님도 별로 없는 학교 다니다가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의 대학에 들어간 친구가 과연 평등하게 경쟁을 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인간승리가 가능한가
예전에는 뭔가 극복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칸방에서 여러 형제자매가 살면서 인간승리를 하는 것이 사례가 많나요? 그것이 티브이에 나오는 것은 드물기때문입니다. 출발선상의 불평등함을 해소해주고, 그래도 비슷하기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국가, 정부, 지방자치단체들이 해줘야 하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경상남도에서 많이 얘기되는 무상급식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무상교육에 관한 이야기들, 바로 이런 것들이 권리, 인권의 문제이며, 모두에게 똑같이 뭔가 구현되려면 필요한 게 있습니다.
성경의 오병이어 사례를 예로 들면, 제가 이해하는 성경의 그 말씀은 한 아이가 내어놓으니 모두가 다 내어놓아서 함께 다 먹었다는 겁니다. 국가나 제도, 법률 등이 받쳐주지 않으면 평등한 인권이 조성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여기 계신 분들 직업을 다 알지 못하니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이고요, 요즘 환경미화원, 공무원 뽑을 때 박사학위자들도 온다잖아요, 그것은 환경미화원 공무원 10급 기능직을 뽑을 때나 그런 겁니다, 청소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공무원을 뽑는다는 것인데, 우리나라에 그렇게 공무원으로 일하는 미화원이 많지 않습니다.
환경미화원이 1주일동안 청소를 안한다는 걸 상상해보라
그런데 보통은 동네나 일하시는 회사나 학교 등 환경미화노동자들이 있는데, 그 분들이 일주일 정도 안하신다면 여러분 생활이 어떻겠습니끼? 추석 연휴 삼사일 정도 수거 안하면 힘드시지 않나요? 아파트보다 다세대주택은 아주 심각하죠. 강아지와 길냥이들이 다 뜯어놓고 동네가 아수라장에 생활이 불편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대전대학교 이모교수님, 카이스트 교수님, 혹은 대단한 어떤 분이 1주일이나 2주일 없어진다면 우리 삶이 불편해질까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내 삶에 직접적 영향 미치지 않는 사람을 대접하고 그들은 명예를 누리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분들은 왜 최소 임금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공부를 많이 하면 노동의 가치가 몇 배 오르나?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노동의 가치가 과연 몇 배가 되는 걸까요? 예를 들어 대학교수, 시간강사 분들 보통 한달에 버는 수입이 100만원, 150만원 언저리가 많아요. 정말 강의한 시간이 따라 받는데 13만원, 17만원 한시간에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일주일에 아홉시간 정도 있다고 보면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이 교수가 되는 순간 대접이 완전히 바뀝니다. (전임직 교수에게는) 방도 주죠, 조교도 배치되죠, 월급도 뛰죠, 사람들이 '교수님, 교수님' 하면서 사회적 대접을 많이 받습니다. 그렇다고 교수가 되는 순간 지난 시간강사 때의 강의와 오늘 강의가 달라질 게 없는데 지위는 올라갑니다.
난 이 다음에 커서 청소노동자가 될거야!
그런데 우리 사회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 시험 잘보는 사람들이 많은 월급 받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과연 여기 계신 분들이 자녀들이 청소노동자를 만들 생각은 없으시잖아요? 아이들 중에서도 내가 이 다음에 커서 청소노동자가 될거야? 그런 생각 가진 사람이 있나요? 당연히 없죠, 그런데 인간의 노동, 노동이라는 것, 일할 자리만 줘도 고맙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얻으러 다니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사진출처: 꽃동네 홈페이지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인가
꽃동네 캐치프레이에는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하느님 은총'이라고 하지만, 얻어먹으러 다니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굶주린 이들을 사회와 국가가 보호해야 하는 겁니다. 시혜와 도움을 바라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당연히 제도적 안전장치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아버님이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지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낭만적인 공자님 말씀같은 게 위안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경남도 지방정부의 무상급식 철회가 욕먹는 이유
경상남도 무상급식 철회가 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는 실제로 무상급식을 폐지한 홍준표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내뱉는 말들 때문입니다, 실제로 부자들에게는 그런 혜택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그것은 선택적 복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자집아들 4학년이나 가난한 아들 4학년을 구분지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가난을 증명해야 밥을 먹는 안따까운 현실에서 차별의 문화가 생기고, 그들에게 가난에 대한 수치와 혐오를 심어주는 위험한 발상이란 사실에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은 ...
인터넷에 돌고 있는 말 중에 이런 우스개가 있습니다. 경상남도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성남에서 이사간 사람이다. 반면에 경남에서 홍준표 찍고 성남으로 이사온 사람은 제일 행복하다는 농담도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인권이란 가장 중요한 것은 인권감수성이 될 수도 있고 인권에 대한 이해일 수도 있지만, '인권 인권' 떠들지 않아도 다들 똑같은 수준에서 똑같은 권리를 누리는 제도와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떠들지 않아도 똑같이 누린다
인권의 역사는 자기 것을 지키는 싸움에서 시작된 것이죠, 재산을 지키고, 내 가족을 지키고, 영토를 지키는 것입니다. 마그나 카르타라는 영국에서 발표된 게 인권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영국의 왕이 있고 지역의 영주들이 있죠. 고려시대 중앙정부가 있지만, 지역마다 세력가들이 있는거죠. 중앙정부는 도지사들에게 분담금도 받고, 전쟁나면 사람도 빼고, 나라에 특산물 바치라고 해서 운영하는 거죠.
마그나 카르타 ... 인권의 출발
라틴어: Magna Carta, Magna Carta Libertatum, 영어: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대헌장(大憲章)
그런데 큰 왕이 있으면 작은 왕도 있는거죠? 저 사람은 자꾸 돈 내라고 하고 사람 징발하려고 하니 열받은 작은 영주들이 큰 왕이게 개긴 겁니다. 자꾸 우리한테 돈 내놓으라고, 사람 내놓으라고 하는 거 그만해라 힘들다. 그래서 왕이 세금 덜 걷고 사람 덜 걷게 했던 그것이 바로 인권의식의 출발입니다. 인류 최초의 마그나카르타라는 인권의 출발. 시작 자체가 내 것을 지키려는 것, 아까 님비로 말해지는 것, 그런 것입니다. 집 값 떨어질까봐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걸 싫어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 그런 갈등을 구조적으로 풀어주는 제도와 법률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영국의 왕 존(John, 1167~1216) 1199년 즉위해서 죽을 때까지 왕노릇을 한 이다.
귀족들의 강요에 의해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했다. (1215-6-15). 근대 민주주의의 첫단계로 손꼽힌다.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했고, 왕은 몇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결정적인 인생의 경험들
제가 개인적 경험을 말씀드리면, 제 인생에서 서너 장면의 결정적인 게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학생운동하면서 감옥에 갔는데, 은근히 대학 나왔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고요. 졸업은 못하고, 감옥에 3년 정도 있었는데, 그 당시가 1999년입니다. 밀레니엄이라고 새천년의 기대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감옥 가서 2002년 월드컵 하기 전에 나왔습니다. 그 때 안에 들어가 살면서 보니까 처우가 너무 열악해서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방에는 수도꼭지도 없고, 푸세식 화장실이었던 겁니다.
열악한 감옥 사정
많은 이들이 감옥에 들어오면 그런 열악한 내용에 대해 싸웠는데, 안에 았으면 그렇게 처우개선하라고 난리치던 사람들이 나가는 순간 여기를 뒤도 안돌아본다고 하는 겁니다. 교도관이 말하길, 너도 여기 나가면 잊을테니 적당히 시간 때우고 나가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면서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 때는 인권이 뭔지도 모르지만, 나가면 감옥인권 개선 운동을 반드시 한다고 찾다가 천주교 인권운동 들어왔습니다. 천주교 인권단체에서 '한국 감옥의 현실'에 대한 책을 발간했습니다. 그래서 그 단체가 아주 전문적인줄 알고 들어왔는데, 알고보니 책만 냈던 거였습니다. 그래서 고생하다가 감옥 실태조사도 많이 하고 진정처리를 하면서, 조사관으로 가서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계시던 교도관도 다시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에게 "당신이 날 사람 구실 하면서 살게 한 은인이다."라고 고맙다고 말하면서 연락도 하고 지냈는데, 그렇게 인권운동에 들어온 계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전에는 조국통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HIV 바이러스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그리고 허세가 생겼을 때입니다. 나는 좀 세련된 인권활동가라는 자부심이 들떠있을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 어떤 이가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보균자가 되어 에이즈 감영자 분류된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밥을 먹는 자리에 함께 갔는데, 이 HIV바이러스에 대해서 머리로는 다 아는데, 처음에는 망설여지는 겁니다, 같이 찌개를 먹는 데, 아마도 약 0.5초 정도를 망설였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찰나의 순간을 다 느끼고 아는 거죠. 그러면서 저는 그동안 허세떨고 다닌게 부끄럽고, 말로만 인권활동가라고 떠들고 다녔구나 하면서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술만큼은 내가 원할 때 마시겠다
또 하나의 다른 장면은 제가 중증장애인 친구들을 좀 알고 있습니다. 그 친구들은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활동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술을 먹으러 가서도 다 먹여주고 합니다. 그런데 한 형이 있었어요. 그 형은 가방에 구부러지는 빨대를 갖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유리잔에 소주를 가득 담아서 스스로 빨아 마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것도 먹여주니까 소주도 먹여주려고 하니까, 얼른 싫다고 하는 겁니다. 술 만큼은 자기가 마시고 싶을 때 마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걸 정말로 몰랐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있구나. 그동안 얘기를 듣고 그동안 내 자신 위주로 내 기준으로 이 사람을 불편하게 했을까 하는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세 장면의 기억들을 말씀드렸고, 이 밖에도 수많은 장면들, 늘 저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바닥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맞닥뜨릴 때 애써 외면하고 모른척할 때가 있겠죠.
2015.4.15(수) 8:52분 1교시 종료
2015년 4월 15일(수) 하기동성당 저녁 8시52분경. 천주교 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님의 대전사회교리학교 제13기 7주차 수업 [인권과 인간 노동] 강의 1교시. 이 강의는 필자의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된 것이며 실제 강연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의자의 의도와 맥락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습니다.
이날 성당 1층에서 아나바다 장터가 열렸다. 그리고 아래 사진은 이날의 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