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생명윤리의 원리와 기초



원리 principle 라는 말은 근원 source 라는 뜻의 라틴어에 어원이 있다. 특수한 임무나 규칙을 더욱 정당화할 때, 그 근원을 제공하는 넓은 의미의 의무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원리 자체는 여러 다른 방식에 근거를 둘 수 있다. 하느님 뜻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합리적인 일관성이 요구되는 것, 보편적인 선에 기여하는 것,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여러가지 것들로 이해될 수 있다.


근래에 들어서 【의학윤리】는 자율성, 악행금지, 선행, 그리고 정의라는 4가지 일반 원리(혹은 의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생명윤리학의 원리들이 정의하거나 함축하는 바는 대부분 종교분야와는 관계없는 임마누엘 칸트나 스튜어트 밀 등 철학자들의 사상에서 차용한 것들이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는 주로 환자의 간호나 연구에서 마주치는 딜레마나 의사와 환자 관계의 본질 등에 관해 언급한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이나 인간의 삶이 다른 삶과 구분되는 것, 또는 가치 등에 관해서는 직접적으로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다. 소위 '철학적 인간학'과 같은 분야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도덕적 의무의 기초와 내용에 대해 온전히 확립된 모든 설명은 명확하게든 묵시적이든 인간학을 전제함으로써 인간 본성과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원리라는 껍질 아래에서도 그와 같은 가정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는 심지어 삶의 의미만큼이나 큰 문제들에 대해서조차 중립적이고자한 사람들이 세속적인 윤리언어들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바로 그 방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공리주의적 윤리이론은 "도덕적으로 옳다."는 말을 "최대 다수에게 좋은 것이 최대의 선"이라고 이해함으로써 스튜어트 밀의 이론을 따른다. 이 관점으로 보면, 최상의 결과를 내는 것,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윤리적으로 옳은 일이고, 다른 것은 고려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행복(善)의 구성요소를 어떻게 결정하는가?" 등의 수많은 질문들을 그대로 남겨 놓는다.


더욱이 이런 식의 사고방식과 대화방식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근본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식의 언어는 인간 행동을 고립되어 있는 것, 항상 미래에 고정되어 있고, 오로지 보이는 결과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또한 이 입장에는 인간에 대한 특수한 견해, 즉 인간은 주로 바람직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현재 상황을 처리하는 개개인이라는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역사, 즉 인간이 존재하고 살고 선택하는 구체적인 관계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행동하는 주체의 성격을 형성하거나, 약속을 지키고 감사를 표시하는 따위의 특정한 의무를 표현하는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물론 공리주의 이론이 도덕적으로 전혀 공허한 이론은 아니다. 또한 윤리적으로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결정내리지 못하게 하는 이론도 아니다. 그 목적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고,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 윤리적인 질문을 만드는 이런 구성방법은 윤리적 행위자(moral actor)라는 가설적 존재를 설정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원자(原子)와 같은 사람이며,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이 정의된다. 또한 그는 논리적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고, 그의 행동은 미래에 이미 예견된 효과로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도덕적 삶의 일차적 요소가 행동의 결과로 계산되고, 그 결과에 맞게 행동을 선택한다는 사실이 가정된다.


이 이론은 인간 본성 탐구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사도 바오로의 사상과 공리주의 이론은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자면, 윤리적인 인간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소는 미래의 목적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정향(定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인류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이 가치있다고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주님이신 예수를 닮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성장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행동해야 하며,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기억하고 선포하며 믿어야 한다. 인간은 하늘이 정한 진로만을 순수하게 따르는 이성적인 대리인이 아니다. 즉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갈등을 겪고 해방되고자 노력하는 충동적 피조물로서 이 작업을 수행해 가는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변모는 교회에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령에 의해, 똑같이 가치있고, 똑같이 불림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람들을 통해 성취된다. 이렇게 볼 때, 윤리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복음을 공동으로 구현하는 일이다.


이제부터 생명윤리의 원리들을 명백하게 정의하고자 한다. 특히 의료분야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리와 이런 원리가 각각 적용됨으로써 발생하는 이론적이고 실질적인 문제점을 두루 살펴본다. 그리고 각 사례마다 이들 원리 안에 본연의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의무를 그리스도인이 껴안을 수 있도록 신학적 기초도 제시할 것이다. 동시에 필요하다면,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신념에 기초한 의무의 한계를 정하거나 재해석을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볼 때, 어떤 것이 원리가 될 것이며, 이들 원리를 적용했을 때 과연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자율성 - 악행금지 - 선행 - 정의



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2단계 1학년 가을학기(8~9월) 교재 [실천윤리신학] [01]


이 교재의 저자 이동익 신부님 1983년 사제품을 받고 로마 라테란 대학교 알퐁소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켄트의 성 안셀모 연구소에서 1년간 영성지도 및 상담과정을 수료하고 1991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윤리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9년부터 교황청 생명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가톨릭중앙의료원장을 역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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