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생명윤리의 원리와 기초


⑴ 자율성 ⑵ 악행금지 ⑶ 선행 ⑷ 정의



⑵ 악행 금지 


① 정의와 적용


악행금지의 원리는 말 그대로다. 남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금지하라는 것이다. 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생명윤리의 특성상 '악행 금지'는 의학적 맥락에서 살펴봐야 하겠는데, 그 까닭은 발전하는 의학적인 지식과 기술이 환자들에게 이익보다는 해가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생명윤리적 측면에서 악행금지의 원리는 거대한 힘을 저지하는 보호벽이 될 수 있겠다. 


의사와 간호사가 하는 의학선서는 해롭거나 불필요한 처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더 나아가서 환자들에게 적절한 치료를 할 것과 오진과 태만, 남용에서 환자들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의학적 관점에서 해악이 행해진다면 그 결과는 환자의 고통, 장애, 손상, 육체적 상해 그리고 죽음인 것이다. 따라서 별로 위험하지 않은 수술이라고 하더라도 그 수술행위 자체가 환자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 


부분의 선은 전체의 선에 종속된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총체적인 관점이다. 해로운 효과를 내는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즉 사지(四肢)를 절단하는 의료행위를 결행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영구적으로 장애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순간에서도 그것이 더 큰 해악을 피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본다면, 환자 몸 속의 장기들에 대해서도 그것은 단순한 조합이나 조직체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장기는 총체적인 유기체이다. 각각에 해당하는 부분의 선(善)은 전체의 선에 종속된다. 이른바 전체성의 원리이다. 즉 유기체의 일부에 대한 절단이 몸 전체의 건강을 위한다면 그러한 극단적 치료가 정당화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생명을 구하는 의료행위이기 때문이다.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은 매우 강한 것이다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도와야 할 의무보다 더 강하다는 의식은 의학에서의 악행 금지 원리가 병자를 돌보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도움이라는 목적보다 일반적으로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된다. 해를 피해야 한다는 의무는 병자를 이롭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들에 대한 한계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검증되지 않은 치료행위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그 목적이 아무리 숭고한 것이라도 검증되지 않은 상태의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며 목적을 달성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장기 공여의 문제


악행금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한 장기공여를 어떻게 누구에게 요구하고, 또 받아들여야 하는지의 기준점도 제시한다. 의사는 장기제공자가 이미 죽어가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그 죽음을 재촉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장기적출에 취약한 미성년자이거나 장기공여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악행금지의 원리가 적용된다.


새로운 의약과 장치의 실험에서 악행 금지


악행금지는 새로운 의약과 장치 실험에서도 상대적 우위를 차지한다. 신약을 개발하여 수천 명의 환자를 돕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는 해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옐ㄹ 들어 1960년대 발생한 탈리도마이드(배멀미약으로 기형아 출산과 같은 부작용이 생김)의 경우 치료약이 늦게 나오더라도 심각한 부작용의 피해를 방지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교훈을 주었다. 


더 나쁜 것은 의사가 끼치는 해악이다


의사로 인해 생겨나는 해악은 의학적 무능력보다 더 나쁘다. 치료수단 때문에 생기는 상해를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의무는 사회 건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할의 양상이다. 이 의무는 의사와 간호사들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의무가 바람직한 희사상과 간호사상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에 주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이다.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결심은 대부분의 의사들이 사형 집행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미국 사형수에게는 의사가 약물을 투여함으로써 사형을 집행했다) 


악행금지 원리는 매우 중요한 미덕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독일의 나찌 치하에서 인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 당시 의사들은 그 만행에 앞장서 있었다. 장애나 정신병이 있는 이들을 약으로 죽이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고, 수용소 포도들의 생체실험에 동원되기도 했다. 의학적 권위는 남용되었고 무고한 자들에게 살인과 고문이 벌어졌다. 그것은 신뢰의 끔찍한 배반이었다. 


해악을 미치지 않는 의학적 치료는 없다


그런데 위험이 없는 치료법은 없다. 해악을 미치지 않는 의학적 치료도 없다. 바로 이 점이 의사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의료행위의 결정은 임상적 판단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확히 결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사정이 모두 다르기때문에 객관적 통계를 구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다양한 처치법에 대한 찬반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과연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에게 인공 섭생을 시도하는 게 옳을 것인가? 말기 환자에게 적극 치료를 해야 할 것인가? 심각한 질병상태에 처한 신생아를 어떻게 치료할 수가 있을 것인가? 생존가능성이 미약했을 때 오히려 죽어가는 과정을 연장시키는 실험이 도움이 될 것인가? 그런 것들은 현실적으로 이익보다는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다. 


토론이 필요하지만, 무슨 토론을 해야 하나?


이처럼 반대된 의견이 부딪치는 현장에서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광범위한 맥락에서 토론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토론이 과연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원론적으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그리고 어떤 시점에서 생명유지의 투쟁을 그만 두는 것이 적절한지 이야기를 나눠볼 수는 있을 것이다. 




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2단계 1학년 가을학기(8~9월) 교재 [실천윤리신학] [04]


이 교재의 저자 이동익 신부님 1983년 사제품을 받고 로마 라테란 대학교 알퐁소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켄트의 성 안셀모 연구소에서 1년간 영성지도 및 상담과정을 수료하고 1991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윤리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9년부터 교황청 생명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가톨릭중앙의료원장을 역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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