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의 전 존재를 드러내셨나?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의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성경묵상 - 마태오 16장 ~ 20장


비유 설교를 통해 알아듣는 하느님 나라, 마태오 복음 13장


마태오복음 13장은 몇가지 설교 이야기를 담고 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와 진주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비유를 통한 설교이야기, 즉 '비유설교'는 하늘나라에 관한 이야기의 어려움을 쉽게 풀어낸 것이다. 일상의 예를 들어서 쉽게 풀이해 낸 것이기때문에, 이 비유를 듣고 배우려는 이에게는 풍부한 지혜의 원천이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군중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 - 씨뿌리는 사람, 가라지, 겨자씨, 누룩


앞서 언급한 여러가지 비유 중에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는 모두 많은 군중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이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겪는 역경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이 비유들에 담긴 뜻이다. 


제자들 대상 전문교육 실시 -보물의 비유와 진주상인의 비유


보물의 비유와 진주상인의 비유, 그리고 그물의 비유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이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들이 지녀야 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13장에 담긴 다양한 비유의 설교에서는 교회의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밀을 파종하는 과정에서 집 주인의 농사를 방해하는 것이 원수의 계획된 의도라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도 악인과 선인이 공존하고 있으며, 바로 내 마음 속에도 악과 선이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우린 내 마음 속의 악과 선 중에서 무엇을 꺼내 사용할 것인가? 바로 그 선택에 따라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도 있고, 하느님을 먹칠할 수도 있게 된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알아들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


또한 가라지의 비유에서 악인을 가려내려면 선인도 다친다. 인간이 인간을 가려내어 악과 선을 단칼에 가려낼 권한은 없다. 그 권한은 바로 하느님의 몫이다. 심판은 내 권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살아갈 방향을 이 '가라지의 비유'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의(不義) 때문에 희생되는 선을 조심해야 한다. 악을 가려낸다고 선량함까지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선(善)을 이끌어 내는 데 조명을 비추는 것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도 불의 속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이웃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고통과 가난은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했다!", "못 했다!"라는 마지막 판단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다.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낸 자의 처신


보물의 비유와 진주상인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낸 자의 처신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진가를 아는 이라는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그 보물을 선택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마태오 사가(史家)는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뜻 대로 안되면 하느님을 원망할까?


내 뜻대로 안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내 뜻대로 안될 때 더욱 더 하느님을 신뢰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지금 내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해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새로운 자리를 마련하고 계심에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더 큰 자리를 마련해주시는 하느님을 믿음으로 선포하는 영광 속에서 큰 은총을 얻게 된다. 이러한 자세는 '누룩의 비유'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마태오 13,33)


누룩은 변두리를 가리지 않고 부푼다


누룩은 어디에서나 작용한다. 그것은 중심부와 변두리를 가리지 않는다. 변두리란 무엇인가? 밀려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변두리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느끼기도 하고,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일사천리로 무엇이든 잘 풀려나가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간절함을 간직하고 있다. 건강하게 80세까지 아무 병치레 없이 살아온 사람이라면 아픈 사람의 사정을 제대로 공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변두리로 밀려났다고 해서 그것이 꼭 해가 되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게 된다. 


하느님 나라가 더 빛나는 곳은 어디인가


하느님 나라는 고통받고 버림받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하느님이 드러나고 현존하는 하느님을 알리는 더 큰 자리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내 안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슬픔, 아픔, 기쁨, 즐거움, 외로움 등이 한데 섞여서 일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획일적으로 내 것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수난 예고를 못알아 먹는 제자들의 어리석음


14장 부터는 수난 예고이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는 14장 1절부터 2절까지에 이어, 3절부터 12절까지에서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라 쟁반에 담는다. 제수씨(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녀의 딸에게 어이없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 두가지 장면이 지난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이 움직이신다. 우리가 잘 아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야기(14,13~21)에 이어서,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14,22~33), 그리고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14,34~36)에서 병든이들을 고쳐주셨다. 


수난 예고를 알아듣게 하시려고 베푸신 그 수많은 은총과 기적들


14장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이 정말 당신의 말을 잘 알아듣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기적들이다. 게다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바로 성찬례를 뜻한다. 빵의 기적을 베풀며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나눔이다. 오천 명의 기적에서 우린 '나눔'의 기적을 깨닫는다.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14,19)


성체를 쪼개는 것은 나눔을 통한 현존의 증거


예수님의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듯이, 우리는 미사의 성찬례때마다 '나의 몸이다.'로 말해지는 그 성체를 쪼개는 의식을 거행한다. 빵의 기적을 베풀며 빵 안에서 이뤄지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눔을 통해서 보이는 것이다. 


자신의 전체를 드러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마태오 복음 14장 이후로 하느님은 많은 기적을 보이시며 계속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신다. 그것은 수난 예고를 하기에 앞서 자신의 전체를 드러내시며,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세상 일로만 바라볼 뿐이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14장 27절에서 "용기를 내라, 나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오 14,27)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탈출기 3,14) 


예수님의 '나다'와 하느님의 '나는 있는 나다'의 공통점


마태오 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나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탈출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셨던 바로 그 말씀 중의 '나다'와 같은 맥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못알아 들을 뿐만 아니라 무서워하다가 물에 빠지기까지 한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14,29~30)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신 예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붙잡으셨으며' 재차 믿음을 촉구하시는 모습이 14장 31절에 그대로 담겨 있다. 아래처럼.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14,31)



까다로운 정결례법의 허례허식


마태오복음 15장은 전통에 관한 논쟁이다. 유다교 정결례법은 엄청 까다롭고 복잡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정결례를 논쟁의 대상으로 하여, 이런 것들을 지키느라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게 소홀한 것이 옳지 않은 것임을 지적하신다. 코르반 법을 지키는 것보다 하느님의 법인 효행을 더 지키라는 강력한 명령이시다. 물론 예수님이 정결례법을 무작정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청결함은 정결례법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을 깨끗히 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회심하는 것이다. 


“너희는 또 어째서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이르셨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15,3~6)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 감복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설교 말씀을 통해 조금을 믿음을 발전시키려고 하신다. 특히 가나안 여자의 믿음(15,21~26)을 통해 모욕적인 언사에도 굴복하지 않는 여인의 놀라운 믿음에 감복하시는 모습을 보이신다. 예수님은 자비를 청하는 가나안 여인에게 일체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강조하지만, 여인은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으로 더욱 겸손하게 자비를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15,26~27)


백인대장의 사례도 그러했지만, 이방인의 태도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유다의 선민의식처럼? 내가 성당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가?  


15장에서 또한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15,29~31), 오천명을 먹이신 이후에 한번 더 사천명을 먹이시는 (15,32~39) 기적을 베푸신다. 


16장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세운 가톨릭 교회


마태오 복음 16장에서 드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온다. 가톨릭 교회는 바로 이 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다. 예수님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하신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고 하느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예수님께 세가지의 약속을 얻게 된 것이다. 바로 위에 언급한 교회의 창립이 첫번째라면, 두번째는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것이고, 세번째로는 땅에서 맺고 푸는 권능이 그것이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의 16장 18절~19절의 말씀은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가톨릭 교회에게 주어진 권능 (예: 사죄권 등)의 근거로 작동하는 것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6,18~19)


베드로를 혹독하게 책망하시는 예수님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표한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우리 모두를 앞서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마태오 16,13~20)한 그 순간부터 예수님은 오히려 베드로를 혹독하게 책망하신다. 바로 이어지는 16장 21절부터 23장까지의 구절이다. 베드로에게 세가지 약속을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계시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기에 앞서 그 수많은 기적과 권능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16,21~23)


왕(王)의 의미를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면



한자의 임금 왕(王)자는 매우 상징적이다. 수평선으로 그어진 위아래 선들은 곧 하늘과 땅을 상징하고, 그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십자가가 존재한다. 곧 나라의 임금 역할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이다. 게다가 왕(王)이란 글자에도 민심이 곧 천심임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늘과 땅(백성)을 서로 잘 소통하게끔 하는 역할을 잘 하는 이에게 우리는 대왕(大王)이란 칭호를 붙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서로 잘 연결시키지 못하는 불통의 임금을 향해서 우리는 세세대대로 비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민심을 등에 업고, 소망을 업고 하느님께 올리고, 하느님의 뜻을 내려 백성들에게 잘 전달하는 것. 그 몫을 잘하고 있는 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십자가의 의미 그 너머에 있는 것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혹독하게 책망하신 후로,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오 16,2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이 고통을 견딘다는 뜻이 아니란 사실이다. 예수님이 가셨던 길은 고통을 견디는 것 이상을 뛰어 넘어 곧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었기때문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으로 이웃과의 소통을 실천하셨지만, 평범한 인간들은 자신이 살려고 이웃 사이에서 불통을 초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나 그 죽음에는 곧 반전이 찾아온다. 16장 27절에서 말하는 영광이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16,27)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영광스럽게 변모하는 모습을 잠시 보여신다. 16장에 곧이은 17장의 첫번째 구절이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라는 소제목으로 17장 1절부터 9절까지이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17,1~3)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고 난 이후의 대처방법


예수님께서 변모하는 모습을 보려면 올라가야 한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은 그렇게 올라가는 것이다. 변모하는 것도 그렇게 올라가는 것이다. 성경공부도 변모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주위가 환하게 보이는 산 정상에 평생을 서 있을 수는 없다. 우리가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 그 만남 이후로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내 현재의 모습으로 내려와야 하고, 지금 여기의 순간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지 않았다. 또 한 차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산 위에서 초막을 짓고 살아야 하나?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17,4)


우스개 말로 가장 귀한 금은 현금도 아니고 조금도 아니고 '지금'이란 말이 있다. 우리는 늘 지금 여기의 순간을 살아야 한다. 내가 속한 기초공동체 안에서 예수님 말씀을 따라 이 땅에 천국이 올 수 있도록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 정상에서 내려와야 하는 까닭이다.


마태오는 왜 교회 공동체 규범에 관심이 많았을까?


마태오 사가는 교회에 대한 관심이 큰 사가(史家)였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규범들에 대한 언급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교회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를 말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교회 공동체의 규범은 '겸손'이다. 교회가 겸손해진다는 것은 곧 내가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왜냐면 내가 곧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어린이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겸손을 상기시킨다. 18장 1절부터 5절까지(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오 18,3~5)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의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는 어린 아기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인간의 관점과 하느님의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고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전 존재를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명령이다. 겸손은 곧 나의 전부를 하느님께 의탁하는 행위이다. 내가 나에게 의탁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나를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세는 바로 '믿음'에서 비롯된다. 겸손하게 하느님께 의탁하는 그 믿음을 통해 나는 나를 비롯한 주위에서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형제를 진정하게 형제로 받아주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겸손한 마음의 상태에서는 육신의 눈은 물론이요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된다. 


죄를 짓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


그래서 작은 자를 밟고 넘어가지 말라고 가르치시고 이어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심지어 손과 발을 자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단호하게 내리는 명령이라고 생각해야 하겠다.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18,8~9) 


또 이어지는 대목에서 예수님은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강조하신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8,10)


여기서 작은이들이란 곧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다. 특히 공동체가 보여주는 작은 이들에 대한 헌신의 정도가 곧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 위에서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말씀하고 계신다. 


가톨릭 실천윤리 5종 세트


'① 겸손, ② 죄짓지 말라, ③ 작은 이들을 짓밟지 말라'에 이어, 네번째로 예수님은 ④ 죄지은 형제들에게 취할 태도(18,15~18)를 특별히 언급하신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줘야 하지만, 무턱대고 충고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감정적인 충고는 백번 하면 백번 실패한다. 감정적 충고의 결과는 감정이 더 나빠지는 것이다. 감정적 충고는 내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기때문에 상대의 감정을 수용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충고에 앞서서 수없이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 선한 기도의 끝에는 충고를 위한 분위기와 시간을 마련해주시는 주님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다섯번째는 일흔 일곱번 용서하는 것이다. (18,21~22) 여기서 일흔 일곱번이란 무한정한 용서를 말한다. 물론 그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계속적인 기도를 통해 주님이 선물로 베푸신 용서를 내가 다시 베풀면 그것으로 관계는 회복된다. 


이렇게 예수님은 믿음의 길 위에서 다섯가지 5종세트를 실천윤리로 제시하시고 있는 것이다. 즉 '① 겸손, ② 죄짓지 말라, ③ 작은 이들을 짓밟지 말라, ④ 죄지은 형제들에게 취할 태도(18,15~18), ⑤ 일흔 일곱번 용서'가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천을 통해 공동체의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 앞에서 다시 돌아보게 하는 길을 걸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구원받는 첫번째 자리에는 늘 겸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완결되는 끝자리에는 용서가 함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태오가 촉구하는 교회의 모습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온 세상이 그리스도화되는 것이었다. 


혼인과 이혼에 대해서


19장에서는 먼저 혼인과 이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모세는 이혼장을 써주라고 했다지만, 예수님은 엄격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을 가르치려 애쓰시는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다시금 어린이를 축복하시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께서 재차 아이들을 축복하신 까닭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19,13~15)


부자청년과 은수자 안토니오


그리고 다음으로 그 유명한 부자 청년이 등장한다. 19장 16절부터 26절까지의 이야기다. 젊은이는 슬피 울며 그 자리를 떠났지만 이 구절을 통해서 교회에서는 수도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가 수도생활의 근원이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19,21)


특히 19장 21절의 말씀은 은수자 안토니오 성인은 아주 크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겨준 유산을 누이 몫을 조금 떼준뒤 다 나워주고 빈 손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들의 하느님, 선한 포도밭의 주인


마태오 복음 20장에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가 등장한다. 하느님이신 포도밭 주인은 인간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다. 그것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뿐이었기에 그저 인간적인 셈법 안에서 불평을 터트리게 되었던 것이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20,12)


그러나 이른 아침에, 아홉시에, 열두 시에, 오후 세시에,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 와서 일을 한 이들에게 같은 품삯을 주는 포도밭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고 계신다.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는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의 공덕에 관계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분이다. 


20장에서는 세번째 수난 예고가 등장한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은 그 말씀을 못알아듣고 출세에만 눈이 멀어있다. 




2015.12.3(목) 8:30~10:20pm @ 전민동성당 1층

황토마스 원장수녀님의 성서백주간 강의 94주차 [마태오복음 16장~20장]에 대한 노트정리와 묵상글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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