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잔치에 초대받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다


성경묵상 - 마태오 21장 ~ 25장


하늘나라의 이치와 세상의 그것은 아주 다르지만 ...


예수님은 앞선 마태오복음 20장(17~19절)에서 수난과 부활을 세번째로 예고하신 바 있다. 이제 진짜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수난에 대한 예고는 제자들의 동참을 진정하게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여전히 출세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내가 어떤 자리에 앉게 될까'에 대해서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부분(출세와 섬김, 20,20~28)에서도 역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와 세상의 이치가 다르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오 20,27~28)


예루살렘 입성, 복음서의 분기점


마태오 복음서 21장에 이르러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만난다. 이 사건은 복음서에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된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주로 자라났던 고향을 무대로 활동을 하신 바 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무대를 예루살렘으로 옮기신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여정 속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복음으로 선포하며 설교와 표징 그리고 기적을 보여주시며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보여주신 바 있다. 


성서백주간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눈을 뜨는 과정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곳에 오기까지 예수님은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나가면서 많은 사건을 헤쳐 나가셨다. 예리고를 걸어갈 때도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길고 긴 여정의 중간 중간 눈을 뜨고도 눈을 뜨지 못한 이들에게 가르침과 행동으로 눈을 뜨게 하셨다. 성서백주간의 공부도 (현재까지 95주간 진도) 2년 남짓의 기간동안 눈을 뜨는 작업을 해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시작점


이제 모든 여행은 끝이 났고, 오로지 한가지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가르침과 활동이 펼쳐지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마자 가장 처음으로 하신 일은 아버지의 집, 성전을 정화하는 일이었다. (마태오 21,12~17)


성전을 정화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성전은 정화하는 일은 십자가를 준비하는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 정화작업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실체와 뜻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지도자들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죽음의 길을 앞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까닭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이사야서에서 이미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림절을 맞이해서 독서를 통해 이사야서를 읽고 있다. 이미 예언자들을 통해 예고된 예언들이 성취되고 완성되었음을 마태오 사가는 나귀를 통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원하던 메시아의 모습, 즉 백마를 탄 승리의 전사의 모습은 아니었다는데 주목해야 하겠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전 15권)란 책이 있다. 그 책에 따르면 로마인 장군들이 나라를 점령하고 들어올 때마다 백마를 타고 온 전사처럼 화려하게 입성했고 전승을 기념하여 세우는 개선문들이 있다고 한다. 가보니까 로마는 시내 자체가, 거리 자체가 박물관이란 느낌이 들었다.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은 온유와 겸손함의 상징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한 메시아로 오셨다. 나귀는 온유와 겸손한 예수님을 상징한다.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지만, 무엇보다도 진정한 메시아는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을 알아들어야 한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백성들은 "호산나!, 호산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를 외치며 엄청나게 환영하지만, 그것은 맥락상 "메시아 만세! 만세!"라는 느낌으로 외쳤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의 출현을 기대하며 기뻐했던 것이 아닐까 싶겠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나귀를 타고 오신 모습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시며 그것을 알아듣는 이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임을 암시하고 계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정화가 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까닭


다시 예루살렘 성전의 정화에 대해서 이야기해본다. 예루살렘 성전 정화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 가장 처음으로 하신 일이다. 이 때 성전의 상황은 어떠하였나? 성전은 이미 장사꾼 소굴로 바뀌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들어가려면 성전세를 바쳐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그리스 화폐가 아닌 이스라엘 돈으로 바쳐야 했기에 필수적으로 환전상이 필요했고, 환전상의 이윤과 그 이윤을 착복하려고 자릿세를 요구하는 권력자가 먹이사슬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이윤을 착복하고 뇌물을 바치는 상납비리의 사슬이 성전 안에서 이미 비일비재한 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21,12~13)


예수님은 왜 진노하셨을까?


그 어느 때 보다도 예수님은 진노하셨다. 그것은 성경의 어느 구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분노였다.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작태때문이었다. 계속 돈 때문에 이들은 하느님까지 팔아버릴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돈 때문이다. 이런 식의 사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유튜브 영상 중에 「백년전쟁」이란 다큐가 있다. 꼭 시청하길 권장한다.





무화과 나무가 가리키는 백성은?

마태오복음21장 18절부터 22절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다'라는 비유의 말씀이다. 21장부터는 계속적으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일어나는 일들이다. 죽음 곧 종말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당신의 죽음 앞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말의 완성 때 보여줄 구원의 역사를 미리 보여주시면서 '무화과 나무'를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에 비유하고 있다. 회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마침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가까이 가셨다. 그러나 잎사귀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 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 맺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자 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다. (21,19)

자비란 무엇인가? 자비란 나와 만나는 다른 이웃을 하느님 마음으로 진실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느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란 사람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다. 왜 저렇지? 왜 저렇지?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내가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내 마음 안에 주님을 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한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공동체로서의 자격을 많이 잃게 되었다는 걸 무화과 나무를 통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감으로써 우리가 간청하는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두 아들의 비유(21,28~32)에 담긴 뜻, 회개와 믿음

복음에서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라는 아버지 말씀에 첫째 아들은 "싫다"고 말하고서는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지만,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해놓고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까? 여기서 큰아들은 죄인과 창녀와 세리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처음에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 듣지 않고 거절하며 죄 속에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며 회개가 이루어져 전폭적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급기야 따라 나서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부유한 종교 지도자들, 바리사이파, 대제관 등을 하느님을 오히려 철저히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구원 복음을 따르지 않았고, 단지 자기들 방식대로만 신앙을 지키고 믿고 있었던 것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번째 조건은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바라는 이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일 것이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21,33~46)에 담긴 뜻, 준엄한 심판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사악한 소작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곧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며 고위층들을 빗댄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남을 무참하게 죽이는 이들이다. 이들이야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다. 현 시대에도 권력이 없는 이들을 무참하게 대하는 이들이 많다. 현세에서 온갖 권력과 영화를 누리고 있다고 하여도 하느님의 눈길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의식하며 살아야 할 것을 깨달아야 한다. 

혼인잔치의 비유(22,1~14)에 담긴 뜻, 초대와 구원

구약시대에 하느님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구원을 알렸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통해서 구원을 알리셨다. 그러나 신 구약을 통틀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이 보낸 이들을 모두 배척하고 무참히 살해하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AD 70년에 이르러 성전의 파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복음사가는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겠다.

혼인잔치의 비유는 마지막 날에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다. 첫번째로 유다인들에게 그 권한을 주었으나 그들은 다 거절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마태오 22, 3~6)

초대만으로 구원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유다인들의 이 거절을 통해서 하느님은 방향을 바꾸시어 어느 누구다 다 초대하기에 이르신 것이다. 구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대했던 것이라면 신약에 이르러 새 백성들을 교회로 초대하고 계신 말씀인 것이다. 이렇게 초대를 받은 이들은 구원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처럼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주어진 초대가 곧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대만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예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앞선 복음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인지를 많은 설교를 통해 들려주신 바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설교는 산상설교라고 할 수 있고, 이에 다르자면 예복이란 바로 의로움을 실천하는 행위들을 말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종말의 구원을 받는 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교황님께서는 올해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신 바 있다. (2015년 12월 8일부터 2016년 11월 20일까지 한해를 자비의 희년으로 선포) 불안과 공포 속에서 많은 이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힘든 사람은 더 힘들어진 세상 살이 속에서 우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인식하자는 선언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 자비를 조금씩 실천하자는 소망을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이처럼 자비를 실천하는 마음은 바로 예복을 갖춰입는 행위와 같다. 누구라도 그러한 실천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갈 때 우리에게도 구원이 찾아오는 것이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22,15~22)

22장에서 유다 지도자들과의 마지막 논쟁이 붙었다. 바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가 그것이다. 첫 논쟁도 세금 문제였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로마 황제에게 주민세를 내야 하는지 안내야 하는지의 문제가 항상 걸려있었다. 특히 예수시대의 이스라엘은 속주 중 하나였다. 여기에 대해서 온건한 바리사이파는 편하고 조용히 살자는 차원에서 세금을 바치자는 쪽이었고, 열혈당원들은 납세거부운동을 펼치던 때였다. 로마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친다는 것은 로마 황제를 인정하는 것이기때문에 그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한 통치자는 하느님 밖에 없다는 사상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기가 막힌 대답을 내놓는다. 로마의 화폐는 흔히 직전 황제의 초상이 돈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 돈을 보면 시대를 안다. 이러한 풍습은 황제를 신격화하는 분위기와도 연관이 되는 것이다.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게 하신 예수님은 22장 20~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황제에게는 돈만 주면 되지만, 하느님께는 내 전 존재를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마태오 22,20~21)

부활논쟁(22,23~33)

사두가이들을 고위층 제관 세력으로 보고 바리사이들은 평신도 대표자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부활을 믿고 인정한 반면,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사두가이들에 수혼법과 관련지어 부활 논쟁을 일으킨 것이다. 

후손에 관한 규정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낳은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지워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남자가 자기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으면, 그 형제의 아내가 성문으로 원로들에게 올라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제 시숙이 이스라엘에서 자기 형제의 이름을 이어 주기를 거부합니다. 저에게 시숙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읍의 원로들이 그를 불러서 그에게 타일러야 한다. 그래도 그가 고집을 부리며 ‘나는 이 여자를 맞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면, 그 형제의 아내가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다가가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은 다음, ‘자기 형제의 집안을 세우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 하고 말해야 한다. 10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그의 이름은 ‘신 벗겨진 자의 집안’이라고 불릴 것이다.” (신명기 25,5~10)

이에 예수님은 부활은 새로운 차원의 삶이란 걸 명쾌하게 알려주신다. 마치 계란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처럼 말이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31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않았느냐?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22,30~32)

가장 큰 계명 (22,34~40)

예수님의 두번째 명령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의 이웃사랑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들은 피가 섞였다고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였으며, 이민족들도 이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다인의 태도는 예수님의 이웃사랑과 매우 다르다. 예수님의 이웃사랑은 원수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루카복음 10장 29~37절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온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묻고 계신다. "누가 너의 이웃이냐?" 바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답이 정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 전체를 껴안으시는 분이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22,35~37) 

마태오 복음 23장은 불행 선언

마태오복음서 23장은 불행선언문이다. 5장의 행복선언과 대비된다. 이 불행선언은 일곱차례 정도 나온다. 그러나 그 선언은 저주가 아니다. 굉장한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뒤섞인 탄식에 가깝다. 율법에만 머리를 박고 본래의 정신을 저버린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게시는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3.13)

잘못된 관점으로 백성을 이끌어간 지도자와 잘못된 관점에 끌려간 백성들 중에서 과연 누가 더 심판을 받게 되겠는가? 예수님의 탄식은 계속된다. 십일조만 강조하는 이들, 내적 정결보다 외적인 추구를 하는 이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기도 한다. 

마태오 복음 24장은 종말 설교

이제 막바지로 다다르고 있다. 종말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종말의 때가 오면 가짜 메시아들이 등장하고 온갖 재난들과 전쟁이 터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힘든 산고의 시작에 불과한 일이다. 예수님은 종말이 올 것임을 예고하지만 그러면서 그 종말이 언제 오는지는 당신께서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될 터인데, 그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24,14)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24,36)

종말은 지연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바를 충실히 하라는 것이 종말 설교의 중심 메시지가 되겠다. 이러한 교훈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서도 알수 있는 것인데, 우리는 종말을 맞이하는 자세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판가름된다는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 그 시간을 아무도 모르게 늘 깨어서 주님 앞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말의 비유는 계속된다. 깨어 있어라(24,36~44)에 이어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24,45~51)의 예에서도 보듯이 늘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사람에게는 주님이 언제 찾아와도 상관없이 맞이할 수가 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마태오 복음 25장도 종말 설교

열 처녀의 비유(25,1~13)는 주님이 오시는 날이 지연되더라도 해이해지지 말고 늘 기름을 준비하고 있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여기서 '기름'이 뜻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선행과 덕행을 말한다. 그리고 탈렌트의 비유(25,14~30)에서 문제가 되는 종은 바로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이다. 이 종에게 예수님은 아주 무섭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25,26)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 까닭은 이 종이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안전한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기 위해서 올라가는 산길도 평탄한 길이 아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인의 관심사는 개인의 안전성보다는 공동체를 위한 생산성인 것이다. 천국을 혼자 갈수는 없기때문이다. 이세상 공동체 안에서 내가 얼마만큼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 나라를 사는가가 가장 중ㅇ요한 것이다. 그래서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현재와 종말 사이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건강한 정신과 마음을 오로지 아낌없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위해서 쓰라는 것이다. 

예수님께는 능력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가 않다. 다섯 탈렌트를 받는 것과 한 탈렌트를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세상의 관점이다. 이 세상이야말로 개인이 가진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이니까 말이다.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내가 받은 탈렌트를 가지고 얼만큼 하느님이 원하는 성실한 삶을 살았는지 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25,31~46)

하느님이 주신 시간 안에서 나는 내가 만난 이들에게 얼마만큼 자비롭게 대했는가? 그것이 바로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다. 한 단어로 줄여 말하면 바로 '사랑'이다. 얼만큼 자비를 실천했는가? 얼만큼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는가?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자로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못알아본다. 구유안에서 가장 나약한 인간존재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할 수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자비와 사랑은 그리스도 신앙의 가치 서열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지상 최고의 가치이다. 사랑이 이긴다. 



2015.12.10(목) 8:30~10:00pm @ 전민동성당 1층

황토마스 원장수녀님의 성서백주간 강의 95주차 [마태오복음 21장~25장]에 대한 노트정리와 묵상글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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