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e 프란치스코, 2013 9 27일 교리교육에 관한

국제학술대회 참석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정리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기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시작하고, 그 안에서 머물고 만나라


 

이 글은 교리교사들에게 보내는 지침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데, Pope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회원들이 했던 것처럼,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식으로 조목조목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 세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먼저,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나눈다는 것을 말합니다.

2. 둘째,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그 분께 배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셋째, 앞의 첫째, 둘째와 동일한 맥락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그 분과 함께 변두리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Pope 프란치스코의 이번 말씀은 이렇게 세가지 요약에 대해 자세히 풀어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 그분과 왜 친밀한 관계를 나누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1. 먼저,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나눈다는 것을 말합니다.

 

친밀한 관계를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과 친교를 나눈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에서도 이 점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십자가 희생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꼭 붙어있어라’(요한 15,1~11).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친교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 바로 친교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그 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꼭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스승과 함께 머물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생동안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교리교사들이 교육과정을 마치고 나갈 때 교리교사 자격증을 땄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자격증은 큰 소용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제 막 아주 작은 여정을 마치고 더 큰 여정의 길로 들어선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자격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격증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바로 이것이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평생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러 있고, 그 분이 여러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 감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어떤 방식으로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러 있습니까? 감실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상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그게 조금 지루하거나 졸릴 수도 있습니다. 졸리면 그냥 졸면 됩니다. 주님께서 바라보고 있으니 아무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나 그 분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은 모두 같은 일입니다.

 

그것을 확신하는 게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확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교리교사 자격증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이 교리교사로서의 삶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뜨거워지고 주님과의 우정이 불타오릅니다. 그분이 진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며, 우리 가까이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신앙의 선물을 받지 못했다는 한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바라보실 수 있도록 자신을 주님께 내맡기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께 내 자신을 맡긴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고요한 시간을 내는 게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방식이 동일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알맞은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다음 단계의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위해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침묵 중에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면서 그 분이 나를 바라보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내맡기는 시간을 가지는가? 그분의 불길이 내 마음을 뜨겁게 하도록 나 자신을 그 분께 내맡기는가? 하느님의 따뜻함과 사랑과 부드러움을 마음에 품고 있지 않다면, 우리 가난한 죄인들이 다른 사람 마음을 어떻게 덥혀줄 수 있겠는가? 이 점을 깊이 행각해야 하겠습니다.

 

2. 둘째,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그 분께 배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옥 밖으로 빠져나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짜릿한 경험입니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체험입니다. 이제 내 자신의 감옥에서 빠져나와서 나를 중심에 놓지 않고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놓는 것은 감옥에 빠져나오는 것 이상으로 아름다운 체험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자기 중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가도록 이끄시고 그래서 자시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예수님과 나아감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 순간 나는 사랑의 역동적인 흐름에 몸을 내맡기고, 하느님이 직접 주도하시는 자휘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하느님이 중심이지만 언제나 당신 자식을 선물로 내어주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사랑의 역동적 흐름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누리며 다른 사람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에 따라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리교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리교사는 사랑을 위해, 예수님을 증거하고 이야기하고 예수님에 대해 선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자신에게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자신 밖으로 나가도록 밀어붙이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리교사의 마음은, 그 심장에서는 늘 수축과 이완운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수축이란 예수님과의 일치이며, 이완이란 다른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필요한 것은 수축과 이완 두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하고 다른 이를 만나기 위해 나아가는 것. 이 두가지 움직임 가운데 어느 한쪽이 부족하면, 심장이 멈추어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교리교사의 마음을 케리그마(Kerygma, 선포, 설교, 외침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케뤼그마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선포와 그 내용을 말함)를 선물로 받고, 자신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전합니다. ‘선물이라는 이 작은 한마디에 주목해봅시다. 교리교사는 자신이 선물, 곧 신앙의 선물을 받았고, 그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무엇하나 자신을 위해 취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다른 이에게 전해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거래가 아닙니다. 사업도 아닙니다. 온전히 순수한 선물입니다. 받은 선물이자 전해주는 선물입니다.

 

교리교사는 바로 거기, 선물이 교환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케리그마의 본질 자체도 바로 그것입니다. 케리그마는 파견되어 나가게 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뛰어넘게 부추기는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여기서 우리를 다그칩니다라는 표현은 우리를 소유합니다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나를 끌어당기고 파견하며, 나를 취하고 다른 이에게 선물합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그리스도인, 특히 교리교사의 심장이 박동합니다.

 

교리교사에게 묻습니다.

교리교사인 나의 심장은 그렇게 뛰고 있는가?

그리스도와의 일치, 다른 이와의 만남이라는 수축과 이완 운동을 계속 하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나의 성장은 그분을 다른 이에게 선포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인가?

 

교리교사는 위와 같은 움직임이 없이 제자리만을 지키는 이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3. 셋째 요점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의 의미를 중심으로, 그 분과 함께 변두리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요나는 어떤 인물입니까? 오늘날처럼 변화무쌍한 세상, 너무나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특히 요나는 매우 주목할만한 인물입니다.


신심이 깊고 차분했던 요나는 질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분명하였고, 정확한 틀을 갖춘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과 주변의 모든 것을 자신의 틀 안에서 단호하게 판단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분명해야 했습니다. 그런 것이 곧 진리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경직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격적인 결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교도의 거대 도시 니네베로 가서 설교하라고 불렀을 때, 그는 따르지 않은 것도 그런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니네베로 가라니요? 모든 진리가 다 여기에 있는 데 왜 그곳에 가야합니까?" 


요나는 주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니네베는 그의 틀에서 벗어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상의 변두리였습니다. 그래서 도망친 것입니다. 스페인으로 도망치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요나서에는 교육적인 비유가 풍부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틀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면 자신의 틀 밖으로 뛰쳐나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게다가 두려움을 모르는 분이십니다. 아니 두려움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에게 세상의 변두리는 두려운 곳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곳에서도 그분을 찾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창의적이고 충실하신 분이신 하느님은 교리교사의 실존을 지탱해주는 기둥입니다. 특히 그 분의 창의력은 교리교사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직하고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변화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의 환경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갈 줄 알아야 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에 빠진다는 것은 겁쟁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침묵은 박물관의 전시품이나 조각상에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경직되었다는 것은 그처럼 조각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 있지 않아서 메마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모임, 활동, 본당, 우리 삶의 테두리 안에만 갇혀 있다면, 우리는 갇힌 상태로 머물고 갇힌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됩니다. 방문이 계속 닫혀 있으면, 방에는 습기가 차고 곰팡이 냄새가 납니다. 그런 방에 갇혀 있으면 병들고 말 것이고요. 


그렇다고 거리로 나가고 변두리로 나가면 병이 들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변두리로 나간다면 그것은 길을 걷다가도 온갖 일들이 그리스도인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길에서 벌어지는 사고들을 목격하고 삽니다.


그러나 병든 교회에 갇혀 있는 것보다 길거리에서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수만 배 더 좋습니다. 연구에 몰두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늘 갇혀 있는 교리교사나 교회보다는 모든 위험을 무릎쓰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용기를 지닌 교리교사와 교회가 훨씬 더 좋습니다! 갇혀있는 자는 병든 사람입니다. 변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겟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권고하시는데,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밖으로 나가는 모습,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자세! 이것은 우리의 발걸음을 아름답게 해줍니다. 우리가 길을 나선다면, 곧 우리가 사랑과 사도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면,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걸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앞서 계실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앞서 계십니다. 그래서 스페인어로는 '프리메레아'라고 합니다. primerea는 스페인어 동사로 '첫째 가다', '가장 앞서다' 등을 뜻합니다. 이 동사의 명사형 '프리메로'(primero)는 선두를 뜻합니다. 또 주님은 '아몬드나무'(편도나무)의 꽃과 같으신 분입니다.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프리메로이십니다. 그분이 첫째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인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앞서 계십니다! 우리가 먼곳을 향해, 이 세상 끝을 향해 떠날 생각을 하며 겁내고 있을 때, 하느님은 이미 그곳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변두리와 끝에 있는 형제의 마음에서, 상처난 몸 속에서, 억압받는 삶에서, 신앙없는 영혼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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