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25일 일반알현 때 하신 말씀


친교의 집

일치의 친교를 위해 험담하고 잡담하려거든 차라리 혀를 깨물어라


  

우리는 신앙고백을 할 때, “하나인 교회를 믿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곧 교회는 하나이며 본질적으로 단일성을 지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 특히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표현한 신앙고백문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말한다. 주일미사나 축일미사 때 원칙적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바쳐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도신경을 바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우기 쉬운 사도신경을 바치는 게 보편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지구상에서 가톨릭 교회는 모든 대륙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로 3천여개의 교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 모든 교회들이 하나인 교회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가톨릭교회 교리서 요약편>에서는 이 의문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온 세상에 널리 퍼져있으며 흩어져 있지만, 그것은 단 하나의 신앙과 단 하나의 성사생활과 단 하나의 사도적 계승, 그리고 단 하나의 공통희망과 단 하나의 사랑을 가진다.”(161)  이 정의는 매우 아름다우면서 명확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죠. 단일성을 지녀야 하는 구체적인 단어들은 무엇입니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앙, 성사, 희망, 사랑, 사도적 계승 등입니다. 그 단일한 한가지가 교회라는 보이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기둥을 떠받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둥인 것입니다.

 

아주 작은 공소에서도, 아주 거대한 대성당에서도, 우리는 그 크기와 지역에 상관없이 단 하나의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형제자매가 함께 하는 집이며 가정입니다바로 이 하나의 교회! 이것이 하느님이 주신 위대한 선물이 됩니다. 단 하나의 교회는 모든 이를 위해 존재합니다. 유럽사람을 위한 교회와 한국 사람을 위한 교회 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한 가족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한 가족인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언제나 굳건하게 결속되어 있는 가정의 모습인 것이지요

 

여기서 개인의 신앙에 대한 숙제가 드러납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로서 그러한 일치를 느끼는가?’ 

내 자신 안에, 또는 내가 속한 작은 단체에 갇혀 그러한 일치에는 관심이 없는건 아닌가?

내가 속한 단체를 위해, 내 조국을 위해, 내 친구들을 위해 교회를 사유화하는 사람은 아닌가?’

 

이기주의와 신앙이 부족하여 발생하는 사유화된 교회를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입니다. 질문을 계속 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통 중에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무관심한가?’

가족 가운데 하나가 고통받는 것처럼 느끼는가?’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받고 있으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 내놓는다는 말을 듣거나 생각할 때 그 이야기가 내 마음에 와닿는가, 아니면 아무 느낌도 없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형제자매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리스도에 대한 일치로 연결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교회의 단일성이 손상되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교회의 일치에 해를 입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는 매우 치명적인 역사적 단점이 숨어있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 역사는 단일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의 일치를 망가뜨리는 몰이해, 분열, 갈등, 분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을 드러낼 수도 없었으며,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을 드러낼 수도 없었습니다그러나 그처럼 교회의 일치를 훼손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었고, 나 자신이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진행중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분열, 곧 가톨릭 교회 신자와 정교회 신자와 개신교 신자 사이의 분열을 보면, 교회 일치를 완전하게 실현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느낍니다.

 

일치는 선물입니다


일치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선물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합니다. 그 선물을 충만하게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친교를 나누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친교는 몰이해와 분열을 극복하도록 교육되는 방식입니다. 그 노력과 교육을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종교 간의 순수한 일치를 위한 대화의 장으로 확대되어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종파 사이에서 확산시켜야 합니다우리의 세상은 일치가 필요합니다. 일치와 화해와 친교가 더욱 더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친교의 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를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바오로 사도는 위의 말씀처럼 교회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만과 허영에 맞서는 것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그리고 인내심과 사랑만이 일치를 지키는 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계속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분이십니다.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4,4~6).

 

이처럼 분열하지 않고 일치하는 것은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풍요로움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자문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가정에서, 본당에서, 공동체에서 일치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가’.

나는 험담하고 떠벌리기만 하는 잡담꾼인가?’

나는 분열이나 불화를 조장하는 사람인가?’

 

험담과 잡담은 악입니다. 아주 해로운 악입니다. 그것은 상처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험담과 잡담을 하려면 차라리 혀를 깨물어야 합니다. 쓸데 없는 말을 쏟아내는 것보다는 혀를 깨물어 말을 못하게 만들어 험담과 잡담을 늘어놓지 못하게 하는 게 더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혀를 깨물 정도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어떨까요?

 

나는 공동체의 친교를 해치는 상처를 인내와 희생으로 아물게 하는 겸손을 지녔는가?’

 

최후의 질문


이제 최종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은 아주 아름다운 질문입니다.

 

교회 일치의 원동력은 누구입니까?’

 

교회 일치의 원동력은 성령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 받은 성령이 그 원동력이십니다. 우리의 일치는 우리의 협력이나 협동심, 또는 교회 내의 민주주의적 노력으로 이뤄진 결과가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성령은 조화의 원천이시며 언제나 교회 안에 조화를 이루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문화와 언어, 그리고 다양한 사고의 틀 속에서도 조화로운 일치를 실현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일치의 원동력입니다.

 

성령의 원동력을 얻어받기 위해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친교를 나누는 우리의 의무 가운데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어 교회 안에 일치를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 저희가 분열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더욱더 깊이 서로 일치하게 해주소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 성인이 평화의 기도에서 청하듯 저희가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는 일치를 가져오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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