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책 『인권』을 읽고 정리한 노트필기를 기반으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 

지리상의 발견과 상업혁명




십자군 전쟁은 1096년부터 1291년까지 약 200년에 걸쳐 중세 로마가톨릭 교황이 주동하고 선동한 종교전쟁이었다. 이른바 이슬람 세력권에 놓인 그리스도교의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대의명분을 내건 대형 사기극이었다. 2003년 3월 20일 인권수호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 대통령 부시의 침략전쟁의 기원을 십자군 전쟁에 두는 해석도 있을 정도이다.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11 사태 직후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불렀다가 아랍국가들의 거센 항의로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11세기 말은 이미 이슬람교가 중동 지역의 주류로 자리잡은 지 4백년이 지난 뒤였다. 이슬람교는 7세기에 창시되었고, 중동의 다수는 이슬람교 신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슬람교인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의 순례를 방해한다는 종교적 호소를 빌미로 '성지 탈환'이라는 목표를 내 건 것은 이슬람인들 입장에서 황당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아무튼 십자군 전쟁을 오로지 순수한 종교적 열의에서 비롯된 자발적 운동이며 명예롭고 진취적인 원정이라는 개념은 전 세계의 패권을 잡은 근대 이후에 비로소 통용되던 개념이었다. 한 마디로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인들에게는 부시의 이라크 침공 작전명처럼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으며, 야만적인 침탈에 불과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유럽의 문명 수준은 중국 대륙을 지배한 몽골의 원나라나 이슬람 문명과 비교한다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인들은 동방의 높은 문화를 알게 되었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중세의 시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른바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유럽 문명은 근세와 근대의 선진화된 사회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십자군 전쟁 당시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 동서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또한 내륙지역인 독일, 플랑드르, 상파뉴 등의 지역들도 상업로를 따라 도시가 발달하면서 도시인구가 크게 증가하며 수공업도 덩달아 성장했다. 중요한 것은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도시가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11세기는 봉건제가 절정에 달하고, 1077년 1월 25일 카노사의 굴욕이 말해주듯이 교황의 권력도 절정을 찍고 있던 시절이었다. 교황(그레고리오 7세)이 황제(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를 찍어누르던 시절이었다. 물론 7년 뒤(1084년) 복수전을 펼치기는 했다. 아무튼 황제와 교황이 묘한 권력 다툼을 벌이던 공간에서 새로온 자치도시들이 생겨났다. 특히 이탈리아의 피렌체, 피사, 제노를 비롯하여 베네치아에 이르기까지, 공백 속에서 도시들이 이미 생겨났고, 십자군 원정은 그러한 변화의 크기를 확장시켜주고 있었다. 



유럽에서 12~13세기는 봉건사회가 완성된 동시에 자치도시들이 형성되고 모습을 드러내던 시대였다. 13세기 말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도시의 비약적 발달을 가져왔는데, 이와 함께 유럽인 시각에서 신항로의 발견을 통한 새로운 대륙의 발견은 폭발적인 성장, 이른바 상업혁명을 불러일으킨 주요원인이 되었다. 아시아와의 무역은 물론이고 아메리카 대륙을 상대로 펼친 식민지 무역은 세계적 규모의 무역으로 성장하였다. 이미 대서양 연안의 여러 도시들인 포르투갈의 리스본,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영국의 런던 등은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시아와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서 흘러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은과 금은 유럽의 상업이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즉 15세기 말에 이르러 벌어진 상업의 일대 변혁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상업혁명은 도시 인구를 급속하게 증가시켰다. 게다가 상업과 수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은 시민계급으로 성장하였고, 시민계급의 규모와 경제력은 도시내의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그들은 교육을 통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면서, 발언권을 확장시키고, 이를 통해 근대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상업활동의 확대와 도시의 발달과 상업활동의 확대에 이르는 사회의 변동은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 대학이 설립되는 상황이으로 이어졌다. 이미 12세기 경에 시작된 새로운 지적 욕구와 문화적 운동에 따른 대학의 설립은 16세기 초 쯤에는 70개에 가까운 대학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는 점점 복잡해져가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전문인력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앞서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귀족과 교황권을 몰락시켰으며, 봉건사회를 해체했다고 언급했다. 즉 봉건사회의 붕괴는 ① 상업과 도시의 발달 ② 신항로 개척과 신 대륙의 발견 ③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 ④ 산업혁명 등을 통한 경제적, 계급적 변화가 핵심적 요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거론할 수 있는 것은 화폐경제의 탄생을 통해 봉건적 주종관계가 해체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농노가 영주의 땅을 빌려 경착하면 부역을 댓가로 지불해야 했다. 부역(役)이란 말 그대로  몸으로 때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역은 현물지대로 바뀌었고, 다시 화폐지대(地代)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화폐지대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경제적 타격을 받은 영주는 돈을 받고 농노를 자유농민으로 해방시키거나 소작농을 내쫓고 그 자리에 양을 키웠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봉건적 주종관계는 해체되었다.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

① 도시의 발달 

② 지리상의 발견과 상업혁명 

 ③ 부역에서 현물지대로, 현물지대에서 화폐지대로

④ 농민 반란

⑤ 길드(Guild)의 변질


③ 부역에서 현물지대로, 현물지대에서 화폐지대로


영주(領主, lord)는  중세 유럽에서 한 지역의 토호세력이었다. 자신이 소유한 땅과 지역인 이른바  영지(領地) 내의 최고 지도자이며  자기 세력권 안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들은 게르만족이나 슬라브족의 귀족, 구 로마의 귀족, 수도원, 교회 등이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의  봉건 영주는 자급자족적 독립 경제구조 안에서 농노들의 부역에 이해 공동체를 운영했다.  



봉건제 초기,  영지(領地)는  영주 직할지와 농노소작지로 구분되었는데, 영주직할지에서는 농노들이 순번을 정해 일정기간 부역에 봉사했다. 그런데 농노소작지에 비해 영주직할지의 생산성이 매우 떨어졌다. 이에 영주들은 소작지와 직할지를 통합하여 현물로 납부토록 했다. 즉 부역에서 현물지대(地代, Lent)로 바뀐 것이다. 


농노제(農奴制, serfdom)는 봉건주의(feudalism) 시대의 제도이다. 농노는 평민 신분이지만, 영주나 무사 계급에 경제적 관계로 예속되어, 토지에 예속된 상태에 속했다. 이들은 영주에게 각종 부역, 공납과 의무 행위를 제공해야 했다.


그런데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화폐 사용이 보편화되어 현물지대는 다시 화폐지대로 바뀌게 된다. 문제는 식민지 무역에 따라 유럽에 엄청난 양의 은과 금이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화폐지대란 정해진 금액의 돈을 지불하는 것인데, 화폐가치가 대폭 하락하면서 영주들은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영주들은 농노에게 돈을 받고 자유를 주었고, 자유농민 해방이 탄생하면서 봉건적 주종관계가 해체되어 갔다. 게다가 농노들이 떠난 소작지는 양을 키우는 목장으로 바꿨는데, 이때, 여전히 그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소작농들을 쫓아내기도 했다.  



④ 농민 반란


봉건적 주종관계가 해체되어가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영주들은 봉건제도의 부활을 시도했고, 이는 농민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비록 그들의 반란이 진압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영주들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⑤ 길드(Guild)의 변질


길드(Guild)는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도시를 중심으로 장인이나 상인이 조직한 조합이다. 사업권 면허를 통해 해당 지역의 생산권이나 상권을 독점했다. 


길드는 일종의 직종별 조합이었다.  시대의 특성상 한 도시 안에서 단일 품목에 관련된 직종 내니 직능의 조합으로 도시 정부의 규제 안에서 일종의 가내수공업 같은 형태로 형성된 조직이었다. 더 나아가 중세 유럽에서 대학의 형성 역시 길드에서 출발했다. 세계최초의 대학 볼로냐(1088), 옥스퍼드(1096), 파리대학(1150)  등은 모두 길드로 시작했다.


한 사람이 길드 안에서 성장하는 순서는 도제로 시작하여 이후 직인이 되고 최종적으로 장인이 되는 순서였다. 10대에 한 장인 밑에서 도제가 되면 사춘기 견습공으로 5년에서 9년 정도에 이르는 훈련을 받는 대신 숙식과 의복을 제공받았다. 물론 보수는 없었다. 이후 장인의 인정 하에 직인이 되면 독립기술자로 보수를 받는 지위에 올랐고, 최종적으로 장인이 되면 자기공장을 만들어 도제를 채용하며 직능에 따른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길들은 장인들의 조합이며 봉건 수공업자들의 조합으로  중세 유럽에서 대략 9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시대에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이처럼 유럽 도시 수공업을 중심으로 한 조직은 십자군 전쟁의 패배와 상업의 혁명적 발달과 함께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길드는 오늘날의 상공회의소를 연상할 수도 있는데, 아무튼 대체로 9세기부터 15세기에 유럽에 존재한 장인들 혹은 상인들의 평등한 조합이었다. 길드의 조합원들은 생활수준과 참여의 평등을 유지하면서, 일정 지역 내에서 담당 직업분야의 독점을 유지했다. 이는 지나친 경쟁으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경영조건을 통제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원료를 공동구매하고, 각종 단위에서 통제정책을 취했다. 즉  ① 직인과 도제의 수, ② 노동 시간, ③ 품질,  ④ 생산량, ⑤ 판매가격 등에 대한 통제를 가한 것이다. 


일례로 농촌의 질서는 영주와 농노의 신분적(예속적) 관계를 통해 유지되었듯이, 도시의 질서는 길드가 세운 수공업의 질서를 통해 유지되었고, 농촌과 도시의 이러한 통제를 통해 중세의 봉건 사회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상업의 혁명적 발달은 이러한 질서에 근본적 문제를 제기했다. 상업자본가로 성장한 새로운 세력들이 공급의 확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길드가 아닌 상업자본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수공업의 급속한 발전은 길드의 독점 지위를 붕괴시킬 만한 수준이었고, 길드에 종속된 시장 역시 해체되어 갔다. 이로 인해 길드는 기존의 통제정책을 벗어나 내부경쟁 체제로 몰입하게 되면서, 장인에 의한 직인과 도제에 대한 통제력도 잃어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길드의 봉건적, 신분적 성격은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2020년 4월 30일(목) 오전 11시, 부처님 오신날 휴일에 안방 내 서재 책상에서


키워드: 길드, 예속, 영주, 농노, 직인, 도제, 십자군 전쟁, 봉건사회, 조합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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