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책 『인권』을 읽고 정리한 노트필기를 기반으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봉건제도의 해체에 따른 가치관의 붕괴 

로마 교황권의 쇠퇴와 절대주의 국가의 형성




인권은 근대 유럽의 발명품이며, 이는 그들의 역사적 발전과 그 조건에 따라 형성된 개념이다. 고대그리스의 희곡작가 소포클레스가 펴낸 비극 『안티고네』의 어린 주인공 안티고네는 실정법과 자연법 사이에서 고민을 한 끝에 법을 넘어선 정의를 선택한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 학파를 거쳐, 로마시대 키케로에 이르러 만민법 사상에서 보편적 인권의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고대 로마 최후의 공화주의자이자, 법률가 키케로(BC 106~BC 43)는 『법률론』 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potestas in populo, auctoritas in senatu

권력은 인민에게 있고 권위는 원로원에 있어야 한다


이후 봉건시대에 이르러 가톨릭 교황의 선동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의 패배는 결국 중세 봉건주의의 해체와 교황권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 사건이 되었고, 보편적 인권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연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인권 연표

  • 기원전 
    [441]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자연법사상의 문학적 실천
    [343∼328경]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고대 그리스 경험에 기초, ‘시민의 지위’ 정의
    [250∼220경] 크리시포스, [법률론]  스토아학파의 철학 체계화, 보편적 자연법 존재 강조
    [212경] 고대 로마의 만민법 사상 발전 
    모든 사람, 심지어 노예, 외국인, 야만인에게도 시민의 지위를 부여하는 일의 정당성 제시
    [54∼51경] 키케로, [공화국에 관하여] 자연법을 기반으로 만민법의 정당성 주장

  • 기원후 
    [30∼180] 가이우스, [법학제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관에 재산과 실생활 항목을 첨가
    [
    410∼420] 성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시대상 반영, 시민권 행사보다 종교적 구원 강조
    [1096∼1270] 십자군 전쟁 - 귀족과 교황권 몰락, 봉건 사회 붕괴
    [
    1215] 영국, 대헌장 제정 - 왕으로부터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
    [15세기 말] 상업 혁명 - 경제력과 규모가 커진 시민 계급이 발언권 획득
    [1309∼1377] 아비뇽 유수 - 교황의 세속적 지배력 쇠퇴
    [1402] 장 제르송, [영혼을 가진 생명체의 삶] - 자연법에 ‘정당한 자유’라는 의미 부여

  • [1517]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단독자로서 자율적 인간’이라는 근대적 인간상으로 가톨릭교회에 저항



봉건제도와 가치관의 붕괴

로마 교황권의 쇠퇴와 절대주의 국가의 형성,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


아비뇽 유수(幽囚) (1309~1377)

로마 카톨릭 교황청이 로마에서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겨져 머문 사건. 고대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쓰인 표현이다. 약 70년동안 머물면서 모두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생활하였다.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유럽사회에 빗발치자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1377년에 로마로 교황청을 이전하며 아비뇽 유수를 종식시켰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로마 교황권이 쇠퇴하면서 절대주의 국가가 형성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바로 <아비뇽 유수> 혹은 <아비뇽 이전>(1309~1377)이라고 불리는 시기였다. 이를 계기로 1378년부터 1417년간에 걸쳐 교회는 대분열의 시대를 맞이하고, 각 지역에서는 이단 운동이 벌어진다. 


십자군 전쟁의 결과는 봉건 제후와 기사들에게도 치명상을 입혔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죽어버리거나 비록 다행히 살아돌아왔다 할지라도 이미 재정적 파산에 이르렀다. 결국 이들의 추락은 교황 권위의 추락과 함께 근대를 촉진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또한 총이 개발되고 도시상업 자본가들의 요구에 따라서 유럽은 14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러 점차 중앙집권화되어 근대국가로의 변모를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더욱 확산시킨 것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였다. 십자군 전쟁의 통로 역할에서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한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은 1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과 예술을 수용하면서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이란 인간중심의 문화를 말하는 것이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과 사상과 예술에 등장하는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일종의 시대적 운동이며 문화혁신 운동이었다.  


이처럼 이탈리에서 불기 시작한 새로운 분위기는 유럽사회를 천년 이상 지배했던 그리스도교, 특히 로만 가톨릭를 중심으로 하는 낡은 질서를 붕괴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517년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황의 더러운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조항에 달하는 반박문에 대학 문에 내걸었다. 



1492년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흔히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기로 말하는데, 이러한 시대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한 최초의 인물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루터는 사실 새로운 시대를 꿈꾼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가 추구했던 교회의 개혁이 중세시대의 종말을 선언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루터는 근대적 변화의 사상적 근거를 만든 사람이다. 그만큼 그의 95개조 반박문은 시대적 공감을 얻었으며, 이에 대응한 과도한 가톨릭 교회의 탄압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변혁을 앞당겼다. 


여기서 하나 더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인쇄술'이라는 인프라의 발명이다. 루터의 반박문이 빠르게 독일 전 사회로 퍼져나갈 수 있던 이유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이었다. 대중은 이미 가톨릭 교회가 독점하던 지식의 공유를 요구하고 있었으며, 루터의 95개 논제는 라틴어와 독일어 번역판으로 인쇄를 거듭하면서, 그의 논리는 대중적 개혁의 논리로 보편화되었다. 


결국 마르틴 루터를 따르는 성직자와 상공인들이 기존 질서에 저항하면서, 세상은 점차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앙의 자유는 확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 사회의 기본 질서가 형성되어간 것이다. 물론 이는 16세기 후반부터 100년이 넘는 (유럽) 종교전쟁의 결과, 승자도 패자도 없는 타협에 따른 마무리였다. 


유럽의 종교전쟁은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대결이었다. 즉 새롭게 등장하는 개신교 세력과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대결이었다. 종교는 많은 갈등과 분쟁을 촉발시켰지만, 때로는 종교를 구실로 다른 욕심을 챙기려고 벌어지는 전쟁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종교전쟁의 결과 유럽은 근대 사회의 기본 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유럽 종교전쟁(European wars of religion)

종교개혁(1517)으로 촉발된,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서유럽, 중앙유럽, 북유럽을 휩쓴 일련의 종교전쟁이다. 개신교로 개종한 기사들의 난을 가톨릭의 수호자 신성로마황제가 진압한 소규모 분쟁인 기사 전쟁(1522년)이 최초의 유럽 종교전쟁이며, 이후 가톨릭 교회 측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한 반종교개혁을 시작(1545년)한 이후, 여러 차례의 크고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그 안에는 초대형 국제전인 30년 전쟁(1618년-1648년)이 등장하여 절정에 달했다. 비록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을 통해 종교의 자유 개념이 탄생하며 일단락이 되었지만,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쟁들이 종교를 구실로 벌어졌으며, 1710년에 이르러 유럽 종교전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고 평가된다.



2020년 4월 30일(목) 오후 12시 19분, 부처님 오신날 휴일에 안방 내 서재 책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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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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