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 2013 1 27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우리 가운데 늘 일어나는 일

하늘로 날아오릅시다!



오늘 우리는 미사 중에 봉독하는 성경을 들으면서 매우 감동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오늘 제1독서로 읽는 느헤미야서 8(210)과 오늘 복음으로 선택한 루카복음서 4(1421)이 매우 현장감 있는 분위기를 보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도 이 성경이 보도한 현장에 참석한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도 오늘의 성경 사건 현장에 참가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루카복음의 11절에서, 즉 루카라는 성경기자가 성경 저술을 시작하면서 첫 마디로 우리에게 하는 말이 참으로 중요한 깨우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첫 마디는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경 말씀이 봉독 되면 그 성경의 현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는 우리에게 자기가 전해주기 위하여 기록할 모든 사건이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루카가 이렇게 강조한 까닭이 왜일까 하는 것을 우리는 오늘의 느헤미야서 8장과 루카복음서 4장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1독서 느헤미야서 8장은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갔던 유다인들이 수십 년 만에 해방되어 고국 예루살렘에 돌아와 첫 기도 모임을 열고 사제 에즈라의 강론을 들으며 감격하여 울었다고 보도합니다(느헤 8, 2~9 참조). 그리고 이 날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날, 곧 해방의 날이므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축제를 올리는 날이 되었다고 보도합니다(느헤 8, 9~10 참조). 


바빌론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70년 동안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와 같이 성전에 모여 기도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서러움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대음악가 베르디(Verdi)의 유명한 오페라 나부코(Nabucco)’ 중에 노예들의 합창(Sklavenchor)’이 그 유다인들의 바빌론 노예 생활의 서러움을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그 합창을 참 좋아하는 저는 우리 하부내포성지의 카페 배경음악으로 깔아놓고 카페를 열 때마다 듣고 있습니다. 그 합창의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조국이여, 그대를 향해 그리움이 달려가노라!(Teure Heimat, nach Dir geht das Sehnen)!” 이러한 그리움으로 끼리끼리 몰래 모여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것이 그 70년간의 노예 생활 중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만, 이제 조국에 돌아와 공식적으로 모일 수 있고 그래서 그들의 지도자 사제로부터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느헤 8, 3) 성경 말씀을 실컷 들을 수 있음은 그들이 실감하는 해방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몰래 성경 읽다가 들키면 붙잡혀가던 바빌론 시절, 그러나 이제는 백주 대낮에 광장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실컷 들을 수 있으니! ! 이것이 광복이로고!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 날의 광복선포, 이 해방선언을 들어 봅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느헤 8, 10)


이 해방선언을 들으면서 저는 우리나라의 1945815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 생각납니다. 일본왕(일본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들어 천황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풀죽은 목소리를 녹음해서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했는데, 그게 연합국에 대한 항복 선언이었지요. 소위 천황이라는 자가 신처럼 이른바 신풍(神風 가미카제)’으로 세계를 향하여 미친 돌격전을 하다가 항복을 했으니, 그 누구보다도 그 전범자·압제자 밑에서 수십 년 신음하던 조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날 정오의 그 항복방송을 들은 조선 사람들은 그 대낮 그 시간에 서로 눈치만 보면서 조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던 죄수들(그 중에 독립투사로 잡혀있던 사람들)이 그날 저녁때 형무소에서 나와 만세를 부르며 해방을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민들이 덩달아 거리로 나와 만세 불렀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이 그랬는지 보질 못해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긍이 갑니다. 일제의 폭정에 숨죽이고 살던 일반 백성들은 그 일왕의 풀죽은 항복 발표를 긴가민가했을 것입니다. 일제 수십 년간 그 위대한(?) ‘천황 폐하의 그늘에 소극적으로 길들여진 소위 황국신민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황국신민이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했던 소위 불령선인들즉 독립지사들은 올 것이 왔다.”라고 즉시 알아차리고 감옥을 박차고 나와 만세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자 일반 시민들도 따라서 만세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 815일과 똑같은 상황을 오늘 제1독서에서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가 백성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는 현장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이런 말을 듣고 온 백성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말씀을 알아들었으므로, 가서 먹고 마시고 몫을 나누어 보내며 크게 기뻐하였다.”는 현장 보도(생 중개방송?)를 우리는 오늘 듣고 있습니다. 바빌론에서 70년 노예생활을 하던 우리가 정말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왔단 말인가? ! 정말 그렇구나! 우리의 사정 이야기를 백주 대낮 대로에서도 실컷 나눌 수 있네! 목숨 위태롭게 숨어서 소식 나누던 것을! ! 진짜네!


이러한 오늘의 느헤미야 실록을 들으면서 우리는 나자렛 안식일 회당의 그 자리에 루카의 안내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일어나 두루마리(성경)를 펴시고 큰 소리로 읽어주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야의 예언 인용).” 이런 성경말씀을 읽으시고는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그런데, 이어서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저는 선뜻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말씀은 그렇다 치고, 그것이 여기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어찌하여 이루어졌단 말인가 말입니다. ‘성경에 씌어있는 그 옛날이야기가 주일미사에 참례한 우리들에게 갑자기 이루어졌다니, 예수님의 뻥 대단하네!’ 제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이거 루카복음서 한국말 잘못 번역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있나 살펴보았습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라틴어로 번역하셨다는 불가카(Vugata) 성경의 바로 이 대목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이 성경은 오늘 너희들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Quia hodie impleta est haec scriptura in auribus vestris.)”


번역이 좀 이상하지요?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옛날이야기도 아니고 앞날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당장 여기서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시는 예수님께서 오신 것 자체가 벌써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렇듯 희망을 잃고(가난한) 노예 살이 하는(묶인) 절망의 어둠 속에서(눈멀어서) 억눌려 신음하는 중생에게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 자체는 벌써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절망으로 짓눌린 우리라면, 그런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제 그 구원을 우리 자신의 몸에 직접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만화 생각이 납니다. 동아일보(20001218일자)에 실렸던 황중환 씨의 ‘386라는 연재만화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새들에게 날개가 없었답니다. 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새들은 몸집에 비하여 두 다리가 아주 가느다랗게 생겨서 걸어 다니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새들은 자기들에게 볼품없고 연약한 다리 두 개만을 주신 하느님을 원망하며 신세를 한탄하였답니다. 그러자 어느 날 하느님께서 새들을 불러 모으시고는 등에 지고 다니라면서 커다란 짐을 두 개씩 주셨습니다. 새들은 궁시렁거렸습니다. “에이! 가느다란 두 다리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데, 왜 이런 짐까지 지고 다니라신담!” 이렇게 새들은 투덜댔습니다. 그 때 어디선지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낙엽들이 바람에 날리는데, 하느님께서 짐으로 주신 것이 새들의 등에서 나뭇잎처럼 펄럭이는 것입니다. 새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다가 혼이 날 것 같은 두려움으로 그 짐 두 개씩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 짐이 펄럭이는 대로 몸뚱이를 움직였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새들의 몸이 공중에 둥둥 뜨는 것이 아니겠어요. 하느님께서 주신 그 짐을 가지고 투덜거리던 새들에게 그것은 두 개의 날개였답니다. 그래서 새들은 어디든 다리 품 팔지 않고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오늘까지 훨훨 날아다닐 수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새의 가느다란 다리처럼 우리는 연약한 처지로 간신히 지탱하는 삶입니다. 그런데도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세상에서 나에게 너무나 많은 짐을 부과합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농사꾼으로서, 장사꾼으로서, 노동꾼으로서, 남의 일 맡은 일꾼으로서, 너무너무 힘듭니다. 앞이 안 보입니다. 애들 때문에, 늙으신 부모님 때문에, 늘 병에 시달리는 식구 때문에, 내 몸도 여기저기 쑤시고 기운 없는데, 수입은 밑바닥이고, 혹시나 서민정책 앞세우는 후보가 대통령 되면 나아질까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을 새롭게 해보아도 잘 풀리지도 않고 빚만 들어나니 말입니다. 성당에 가 봐도 별 도움도 없이 마음 부담만 더 들고 말입니다. 성당서도 돈 내라는 말을 해대니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연약한 다리로 간신히 지탱하는 나의 이 모든 힘든 사정이 정말로 무거운 짐 덩어리인데, 사실 알고 보면 그게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날개처럼 말입니다. 식구들 때문에 힘들지만, 나라 사정이 어지럽지만, 내 몸이 말을 안 들어주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계속 해야만 한다는 나의 각오와 노력이 곧 나의 날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늘을 처다 볼 줄 아는 행위인 것입니다. 새처럼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문득 나의 삶이 붕붕 떠오릅니다. 하늘을 처다 보는 그런 기도는 새의 날개처럼 하늘을 대답으로 삼는 것입니다. 절망은 없다는 대답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한다는 것은 늘 우리가 희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성경말씀은 너희의 귀 안에서 이루어진다.”하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즉, “말씀이 들리면 주저앉지 말고 일어나라. 듣고 앉아만 있으면 뭐 하냐? 일어나 너 자신을 추슬러야, 될 것이 되는 거다.” 우리 자신의 날갯짓을 촉구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갯짓은 곧 사랑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112장에 한 몸의 여러 지체를 예로 들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1코린 12, 1230 참조). 사랑의 행위를 뜻하는 날갯짓이란 하느님께로부터 하사받은 우리 삶 속의 짐을 믿음으로 놓치지 말고 짊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힘으로 사랑을 실천할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이라는 이 땅 위에서만 집착하지 않고 비상(飛上)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과 사랑과 희망에 대하여 다음주일에는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113장에 설명하면서 사랑을 특찬 하는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 귀속에 들려온 예수님의 구원 선포로 우리는 지금 그렇게 절망의 굴레를 끊고 천상의 행복을 향하여 눈을 뜨고, 우리를 짓누르던 세상 부조리의 짐을 벗어버리며, 그분이 제시하시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소망으로 사랑의 짐을 지고 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우리의 날개를 활짝 폅시다. 즉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며 실천합시다. 그런 믿음 실천이라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늘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일’(루카 1, 1,)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연중 제2주일, 2013 1 20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왜 술에 물 타?

대답: "우리의 작은 노력, 하느님의 전능을 이끌어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의 2장 1~11절에 보도된 기사를 읽어보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카나'라는 마을에서 어느 집 혼인잔치가 있었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님과 예수님께서 참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예수님의 친척이나 잘 아는 집의 혼인잔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보도를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단 둘이서만 그 혼인 잔치에 가신 게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 받으셔서 가셨습니다. 아마 성대한 잔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으실 정도의 집안이라면 꽤 부자 집이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혹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 중 어떤 사람의 잘 아는 집안의 혼인 잔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추측하여 우리가 짐작 할 수 있는 것은 그 혼인이 있던 집은 가난한 집이 아니라 나름 잘 사는 집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집안의 혼인 잔치 중에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잔치 중에 술이 떨어진 것입니다. 이게 무슨 낭패란 말입니까? 부자 집이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 와중에 성모 마리아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술이 없구나.”하고 그 낭패스런 사정을 알렸습니다. 그런 걸 보면 그 혼인집은 아마 예수님과 친척 관계라도 되는 사이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님은 친척여자로서 아마 그 혼인집의 부엌(과방)일을 거들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친척도 아닌 괜한 여자가 남의 집 잔치에 술 떨어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게 아니겠어요?


여기서 더 희안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머니 마리아님께서 과방 일을 거들다가 아들 예수님께 와서 술이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말을 하자 예수님의 반응이 너무나 생뚱맞습니다. “뭘 어쩌자는 겁니까?”하는 식의 예수님 대답인 것입니다(요한 2, 34의 내용 참조). 예수님께서 아마 함께 참석한 제자들과 파티석상에서 신나게 술을 잡수시면서 흥겨워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웬 김빠지는 말을 하는 것이었겠지요. 그렇지요! 잔치 집에서 흥겹게 술 마시며 부하들과 함께 떠들고 있는데, 거기 따라온 어머니가 술 떨어졌다고 말하니 어머니, 나보고 어쩌라는 겁니까?”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요한 2, 4)라고 반문하신 걸 보면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님께 짜증조로 반항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추측을 하면서 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들이 똘만이들을 데리고 친척집 잔치에 와서 술을 적당히 마시지 웬 그리 일어나지 않고 계속 마시고 앉아 있느냐고 어머니께서 잔소리를 하신 것은 아닌지, 그래서 기분 나빠진 아들이 퉁명스럽게 잔소리 좀 그만 하세요.”라고 한 게 아닌지 싶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있어서 어머니 마리아님께서 걱정이 되어 그러신 게 아닌지그러자 아들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잔소리에 짜증나서 그리 대답하신 것이 아닌지, 저는 그런 추측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잔치 집에서 주거니 받거니 잔을 돌리면서 술을 마시다가 주정을 부릴까 염려스러운 나머지 어머니께서 , 술 떨어졌다.”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자 아들이 엄마, 왜 그러세요?”하면서 반항한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교우 분들과 술을 마시고 좀 취해서 허튼 소리로 떠들며 주정을 부린 경력이 많습니다. 제가 안면도 성당에 있던 시절에 월급 줄 식복사 둘 수가 없어서 저의 어머니를 모셔다 놓고 밥 시켜 먹고 살던 때가 있습니다. 그 시절에 제가 교우 분들과 술을 먹고 비틀비틀 들어오면 어머니께서 저에게 그런 비슷한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사람들, 술 안 먹고 못사나?”하시면서요.


그런데 사실, 술은 좋은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항변으로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외워두고 삽니다. ‘전도서라고 이름 붙인 구약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한다.”(코헬 10, 19) 술좌석을 좋아하는 저의 금과옥조(?)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첫 기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요한복음서 2장의 카나 촌 혼인잔치에서 그 주제가 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즐기려고 음식을 장만한다.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한다.”(코헬 10, 19)는 성경말씀이 있듯이, 예수님께서도 카나 마을의 어느 혼인잔치 집에 가셔서 사람들과 함께 즐기시다가 그 집의 술이 떨어진 딱한 사정을 보시고 물을 술로 변하게 하는 기적으로 그 잔치의 흥을 성공적으로 돋구어주셨다는 오늘 성경의 보도 내용은 술 좋아하는 저의 엉뚱한 주장에 상당히 고무적인 내용이지요(요한 2, 1-11의 내용).


우리 속담에 술맛이 나빠지면 도가 집 어르신네 노름한 것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도가(都家)이란 양조장(釀造場)을 일컫는 말인데, 어째 술맛이 싱거워진 까닭이란 아마도 그 양조장 주인이 노름판에서 돈을 잃고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 잃은 돈의 분량만큼 술독에 물을 부어 판다는 뜻으로 이러한 속담이 생겼다 합니다. 아마 스스로 잘못한 탓을 다른 사람들이 기워 갚게 하는 얌체 짓을 비꼬는 속담인 것 같습니다


마치 국가의 경제정책이나 경제 단체의 경영이 잘못되어 애꿎은 국민들이 세금으로 그 부실을 때우게 되는 꼴이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이즈음 박근혜 당선자 측에서 노인들에게 약속한 공약에 관한 터무니를 딴 데로 돌리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뉴스입니다만, 그렇다면 술대접하겠다고 하고서는 딴 장난으로 그 술대접 받을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술맛 떨어지게 하는 꼴이지요.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눈에 보이는 성과란 4대강 살리는 사업을 했다는 것뿐인데, 그게 결국 4대강을 죽이는 꼴로 들어났으니, 그걸 다시 살려내려면 결국 국민들만 골탕 먹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도가집 어르신네 노름한 바람에 술맛이 나빠진 꼴입니다. 술통에 물만 잔뜩 탄 꼴이지요.


그런데 우리 가톨릭교회의 미사 중에 술에다 물을 타는 전례가 있습니다. 술맛 떨어지게 말입니다. 사제가 성체로 축성할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과정 중에 포도주에 물을 타서 준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봉헌하는 포도주 값이 아까워서 물을 타는 것일까요? 사제가 노름이나 딴 짓을 하고 미사의 제주(祭酒)에다가 그렇게 얌체 짓을 하여 제전비용(祭典費用)을 때우는 것일까요?


고대의 유다교 관습에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시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것은 술의 농도를 약하게 하여 마시려는 의도였다 합니다. 그런 고대의 풍속은 우리말에 복()은 반복(半福), 꽃은 반개(半開), 그리고 술은 반취(半醉)가 좋다는 말을 연상케 합니다. 이것은 만취(滿醉)하여 몸과 정신을 해롭게 하는 것보다는 술의 흥취를 적절히 즐겨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도 너무 넘치면 그로 인하여 화()가 이르게 되고, 활짝 핀 꽃은 곧 질 때가 되어 부패의 악취(惡臭)를 뿜어내기에 이르지만 반쯤 핀 꽃은 그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는 것이듯이, 술도 반쯤 취하여 그 맛과 흥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에 물을 탄다는 것은 얕은 수의 호도(糊塗)로 사실의 왜곡을 유도하는 짓을 일컫는 말입니다. 정치인들이 비난 받을 짓을 해놓고 여론을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그렇지요. 그렇듯 얌체 짓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물 탄 막걸리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제가 포도주에 물을 타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그렇듯 얌체 짓일까요? 어찌하여 사제는 포도주 성작에 물을 타는 것일까요?


미사 중에 제물 준비를 하는 사제가 포도주에 물을 타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사제가 그렇게 술에 물을 타면서 바치는 기도의 뜻을 우리는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뜻하면서, 성작 안의 포도주에 물이 들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듯이 우리도 참 제물로 하느님께 바쳐지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 하면서 우리는 포도주에 붓는 한 방울의 물과 같이 우리의 사소한 노력이라도 기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합쳐 바치고 우리의 인간적인 허약성과 부족한 점까지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서 받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작은 봉헌과 우리의 보잘것없는 희생도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물과 하나 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별것도 아닌 우리의 희생이 그 값없는 물 한 방울 같이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포도주와 하나 됩니다. 카나 마을의 혼인잔치에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물이 값진 포도주로 변하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하느님께의 제물로 승화되어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서 그 잔치 집 일꾼들에게 살짝 귀띔해주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간단한 말씀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을 시간에 과방에 술이 떨어져 난처해진 그 잔치 집의 일꾼들에게 성모님께서 이르신 말씀은 곧, 오늘도 교회가 신자들에게 전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하는 일깨움인 것입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음은 곧,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판단하고 믿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간단하게 이르시는 말씀입니다.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 2, 7)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로운 물로 즉, 우리 자신을 비우고 깨끗한 마음으로 채우고, 그 다음에 이르시는 주님의 실천 명령을 따라야겠습니다.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갖다 주어라.”(요한 2, 8)하고 이르시는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퍼주는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우리의 실천은 문득 하느님께서 몸소 빚으신 포도주처럼 이 좋은 포도주가 웬일이란 말인가!”(요한 2, 10 참조)하는 탄성을 들을 정도로 놀랄만한 결과를 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울이는 순수한 노력, 그것이 아무런 값도 없는 듯한 물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한 것이라면 주님의 값진 포도주 같이 변화되는 값어치를 발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노력은 항아리에 신선한 물을 가득 채우듯이 오로지 순수로 실천되는 것이라면, 저 잔칫상의 사람들이 즐기게 된 그 값진 포도주처럼 우리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우리 가운데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초에는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 4)하시면서 그 첫 기적 행사를 거절하신 듯 하였습니다만, 무엇이든지 당신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당신의 능력을 결국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듯이 아직 우리의 모든 구원이 이루어질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우리 사이에 문득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 사건이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작은 노력은 하느님의 전능을 이끌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그러나 순수한 뜻으로, 그리고 최선의 실천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하나 되는 결실을 얻게 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하는 사제의 예물 준비 기도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여야 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주님 세례 축일, 2013 1 13일 오전 9시 @ 도화담 공소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세례! 천지개벽!

물에 빠지셨다 나와 기도하실 때!



오늘,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셨다.”(루카 3, 21)고 하는 성경의 보도를 들으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세례 받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세례를 받으셨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분도 우리네 보통 인간들과 비슷한 처지로 세례를 받았구나 하는 생각인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저 자신이 세례를 언제 받았는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는 누대에 거쳐 천주교 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 사흘 만에 당시 공소회장님께로부터 세례를 받았답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것이지요. 그 사실을 저는 크면서 어른들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 저는 영세 대부님을 본 일도 없습니다. 제가 공소회장님에게서 세례를 받고나서 얼마 후에 본당 신부님께서 공소 판공을 하러 오셔서 보례를 해주셨다는데 그때 공소회장님의 집안 어른을 저의 대부로 정하셨답니다. 이 사실도 저는 다 커서 신학생 때 들어서 알게 되었지요. 그 대부님은 제가 초등학교도 다니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대부가 무엇 하는 분인지 어떤 분이지도 모르고 저는 성장했지요.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견진성사를 받았는데 그 견진대부로는 저에게 세례를 주었던 공소회장님이 서주셨는데 그때 이미 아주 연로하신 분이시라서 얼마 후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대부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 교우님들이 세례 받으면서 대부 대모님이 정해지고 대자대녀들과 인연을 맺어 사시는 것을 볼 때 부럽기만 합니다. 저로 말하자면 고아신자인 셈이지요. 대부대모의 사랑을 받는 교우님들과 비교해서 저는 불쌍한 신자이지요. 저도 큰 다음에 세례를 받을 걸 그랬나 싶습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에서 본 예수님의 세례 때엔 그분의 대부님이 누구였을까요? 성경 기록에 예수님의 대부가 있었다는 말이 없는 걸 보면, 예수님도 저처럼 고아신자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이렇게 유아세례 받은 저의 처지를 예수님의 세례와 엇대어 비교하는 게 좀 우스꽝스럽지요! 예수님은 사실상 성인세례를 받으신 분인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 큰 성인으로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선 유아였던 저와는 달리 확실하게 대부를 정하실 수 있으셨지 않겠습니까?


저의 이러한 우스꽝스런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기록에 그게 나옵니다. 세례 받으신 예수님의 대부 목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그걸 성경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 22)라고 말입니다. 그분의 대부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군요! 그 하늘에 계신 분께서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비둘기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성령을 말입니다.


이제 여기서 성경의 기록대로 예수님의 세례 현장에 가봅시다.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루카 3, 15)라고 오늘의 성경이 보도하고 있는 현장이 그곳입니다.


요한은 당시의 세상 돌아가는 꼴을 질타하면서 회개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루카 3, 36 참조). 그리고는 회개하러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받으라면서 욕설을 합니다.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입니다(루카 3, 7). 속에 든 독과 같이 못된 행실을 감추고 독사의 날름거리는 혓바닥처럼 회개한다는 말만 해선 어떻게 믿어줄 수 있느냐면서 회개의 실제 열매(행실)를 보이라고 고함칩니다(루카 3, 79 참조). 그리고 회개의 실천이란, 독차지할 줄만 알고 빼앗고 억누를 줄만 아는 이 더러운 세상을 나눔과 베품의 정의로운 세상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요한이었습니다(루카 3, 1014 참조). 이러한 요한이 독사들에게서 독을 빼는 세례 즉 물에 담가 독을 씻어내는 세례를 베풀자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세상이 온 것으로 착각합니다. 즉 요한을 새 세상 만들어주는 구세주로 여기게 됩니다.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하는 사람들이 모인 광야, 그곳이 곧 예수님도 찾아온 그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을 구세주로 여기는 그 현장에서 요한은 아직 세상이 바뀔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오셔야만 세상이 바뀐다고 말합니다(루카 3, 1518 참조).


그런데 그 현장에서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세례를 받은 한 사람(예수님)이 기도를 하자 하늘이 열렸습니다(루카 3, 21 참조). 이게 무슨 일인가요? 하늘이 열리다니요! 천지개벽인 것이지요! 세상이 몽땅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천지개벽을 이루는 세례는 그래서 요한이 말하기를 물의 세례가 아니라 불의 세례라고 했습니다(루카 3, 1617 참조). 그리고는 그 세례 받은 한 사람(예수님) 위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요한이 미리 말했듯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루카 3, 16)이라는 것이 이때 증명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 21)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우스꽝스런 저의 생각을 이어봅니다. “, 나도 세례 받을 때 그렇게 하늘이 열리고 성령 내려오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하셨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보고 착각하고 있네.” 라면서 비웃으실 분도 계시겠지요.


저의 이 우스꽝스런 생각이 정말 착각일까요? 아닙니다. 착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받음으로 해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 사람들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생각이 바뀌고 행실이 바뀐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바뀐 사람들 눈에는 세상이 바뀐 것을 체험하게 되고, 아니 더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선 생각이 바뀌고 행실이 바뀐 사람이 되는 체험을 저 자신의 과거 추억을 가지고 비유를 삼아보겠습니다.


제가 해군사관학교 사관후보생 교육을 받을 때의 일입니다. 젊은 사제로서 군종신부로 임관하기 위해 39년 전 진해에서 4개월 동안 해군 사관후보생 훈련과정 중의 추억입니다. 4개월간의 체험을 다 말하려면 어쩌면 그 4개월 과정만큼 4개월 동안 설명해야 할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 거리들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한 가지, 오늘 회개하려고 온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잠기신 요르단 강물을 상상하면서 말하고 싶은 사건이 있습니다.


진해 해군 사관학교 사관후보생대를 완전군장으로 출발하여 40Km 행군을 하던 날의 이야기입니다. 진해를 출발하여 창원시와 마산시를 거쳐 되돌아 나와 해병유격훈련장에 이르는 행군이었습니다. 무거운 군장으로 하루 꼬박 행군하여 마지막 구간에 진입하기 전에 마산 자유수출공단의 하수처리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훈련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하수처리장을 수영장 삼아 군장상태로 들어가 헤엄을 쳐야만 했습니다


전후좌우로 왔다 갔다 반복하여 두 시간 동안 그 더러운 하수처리장에서 헤엄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온몸을 그 더러운 물속에 잠수하여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때는 오월, <어버이 날>을 며칠 지난 때였습니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하는 어머니 노래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오물 덩어리를 입술에 스쳐야 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우리 동료 사관후보생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지요. 행군에 지친 온몸의 살갗이 군장에 스쳐서 벗겨지고 더러운 물에 불려서 쓰리고 아팠습니다


두 시간 가량 그런 인간적 한계 상황을 버티고 나서 그 더러운 물에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귀신같은 몰골로 유격훈련장까지 달리면서 우리 모두는 참으로 어느 때보다도 더 우렁찬 군가를 부르면서 뛰었습니다. 유격훈련장에 도착하여 대충 몸을 씻었지만 그 후 며칠간의 그 유격훈련장 체류기간 내내 역겹게 코를 찌르며 우리 서로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를 배겨내기란 정말 지옥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한 훈련과정을 거치고 나서 본대에 돌아와 다음과정의 교육에 들어갔을 때에는 모두가 훈련의 고됨을 마치 즐거움인양 받아들이는 자세로 변한 것 같았습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뚜렷한 태도 변화를 한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동료 사관후보생들이라야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입대한 저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들 사이에서 나이 많은 선배요 더욱 사제로서 늘 그들과는 다르게 근엄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일종의 차별 행위를 하고자 하는 강박감 속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중이었습니다만, 그 똥물 속의 잠수 훈련을 받은 후에는 그런 강박감을 떨쳐버렸던 것입니다. 그 더러운 구렁텅이에서 함께 뒹군 처지에 이제는 나이고 신분이고 스스로 따질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들과 똑같이 악을 써가며 달리고 고함치며 군가를 부르는 한 청년의 처지로 스스로 변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최악의 상황에 기꺼이 몸을 맡기게 된 것이지요. 그보다 더 처참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랴 싶은 그런 한계상황에서 체득한 새로운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이 추억담이 마치 저의 자랑을 위한 것처럼 소개되었습니다만, 오늘 세례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하기 위하여 저의 이야기를 늘어놓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해야 할 죄악의 인간들 대열을 함께 하시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상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 깨달아야 진정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회개의 대열 속에 몸소 들어가신 분이 오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씻어내려 들어간 그 더러운 물에 당신 자신의 온몸으로 잠기셨던 그분이 오늘 요르단 강물에서 세례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물에서 올라와 기도를 하시자 하늘이 열렸습니다


차단되었던 땅과 하늘 사이가 이제 소통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모든 죄악을 그분이 당신 몸에 무치고 감사를 드리시는 그 순간에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죄 없으시면서도 당신 자신의 죄인 듯 그 죄악을 당신 몸에 씌워서 감사드린 그분 때문에 새로운 삶의 기운 즉 성령이 내리고 하늘과 땅이 화합하는 새 세상이 된 것이지요. 그러한 하늘과 땅의 화합의 사다리가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결국 그러한 천지 화합의 사다리처럼 땅과 하늘 사이에 매달리시게 되는 사건은 골고타의 십자가 사건이 됩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여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란 그래서 인간의 죄악 위에 세운 사다리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으로 만들어져 하늘로 오르게 하는 사다리입니다. 십자가를 한번 새삼스런 시선으로 살펴보세요! 인간의 죄악을 모두 뒤집어쓰신 분이 당신의 온몸으로 형상을 이룬 것이 곧 십자가이지 않습니까? 그분이 그렇게 자신의 몸만들기를 시작하신 사건, 곧 인간들의 죄를 씻는 물속에 잠기시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신 사건을 오늘 성경이 보도한 것입니다. 죄악으로 멸망하게 된 우리 인간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악으로 찌든 세상에 빠뜨리신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 더러운 세상의 죄를 상징하여 죄악을 씻은 더러운 물속에 우리와 함께 들어가 당신 몸을 담그신 그분(미사 중 영성체하기 전에 바치는 기도의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바뀌게 된 것처럼, 우리 세례 받은 사람들 또한 세상 속에서 세상의 죄를 뒤집어쓰고 살면서 세상의 회개를 즉 세상 바뀜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바람으로 사랑 나눔회라는 모임을 이끌고 계신 이광석 님의 다음 시를 읽어봅니다.



물이 물을 만나 선()해지듯이

사람이 사람을 만나 물처럼 선한

세상을 만나고 싶다.

물이 물을 업고

더 큰 물길을 건너가듯이

삶의 등짐에 어깨가 처진 사람들과

주름살을 맞대고 싶다.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말귀를 알아듣는 물,

마음을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보다 먼저

제 소리를 만들 줄 아는 물,

언제나 가까이 다가가도

오래된 시집처럼

세월의 이끼를 잡고 있는 그대

물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침묵에

흠뻑 젖고 싶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7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주님 공현 대축일 2013. 1. 6. 10:00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수직과 수평의 성탄 축제

내림과 퍼짐의 성탄 축제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본래 16일이 이 축제의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에서는 16일을 공휴일로 할 수 없으므로 신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12-8일 사이의 주일(일요일)에 이 축제를 올립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오늘 일요일이 16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축일을 일요일에 우리 한국 신자들은 오늘 아주 걸맞게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래 주님의 성탄 대축일로부터 13일 만에 三王來朝 祝日을 지내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었습니다. 13일만의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주님의 성탄 축일로 지냅니다.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시리아, 이집트 등지의 동방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에서 그렇습니다. 오늘 모스크바에서는 성탄 본일로 축제를 올립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주님의 성탄절로 지내는 1225일은 예수님의 생신일을 찾아 기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원래 로마인들의 풍속에 밤이 가장 긴 동지에 약해진 태양이 이제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낮으로 다시 힘을 발휘하는 태양을 맞이하는 의미로써 태양신(Mithras)을 섬기던 날이었는데, 우리 교회가 참 빛이시고 正義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날로 바꿔 지내기 시작하여 고정된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Egypt의 문화도시 Alexandria 사람들이 15일과 6일 사이의 밤에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 Aion의 출생의 의미로 나일강 물을 길어 올리는 의식을 했는데 그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고 믿었다 합니다. 그러한 이방종교의 의식을 참 태양이신 예수님을 동방박사들이 뵈옵기 위해 찾아온 날로 기념하면서 그 Alexandria의 그리스도 신자들이 예수님 탄생일로 바꿔 기념하기 시작하여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겨울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해와, 어둠을 가로지르는 별(彗星), 그리고 땅을 가로지르는 강물에 반사하는 햇빛으로 포도주의 향기를 얻듯이,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강생신비 즉 하늘의 주님께서 땅의 인간들에게까지 오시는 구원사건을 이 성탄절 축제 기간에 서쪽의 로마 교회가 정한 축제로부터 동쪽의 교회가 정한 축제로 이어 기념하며 우리는 입체적이자 역동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즉 지난 1225일에는 내려오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오늘 16일에는 멀리 세상의 이방 끝까지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을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13일 사이의 입체적 강생의 신비를 우리는 크리스마스와 공현의 축제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려옴의 강생을 널리 알려짐의 공현으로 이 13일간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림과 퍼짐의 신비이지요. 역동이요 입체의 신비체험인 것입니다.


그 입체적이자 역동적 체험을 우리는 루카복음서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메시지로 생생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서 2장에 의하면 베들레헴 인근의 가난한 목동들이 마구간에 찾아옴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만, 마태오복음서 2장에 의하면 멀리서부터 동방 박사들 즉 이방인들이 찾아옴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드러나게 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카복음서는 소외된 사람들 즉 인간사회의 변두리에서 주님의 오심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것에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한편, 마태오복음서는 세계의 변방에서부터 인류가 주님 계신 곳으로 모여오게 함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세계에 공개되는 계기를 이루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루카복음서에 의하여 강생의 신비가 우리 인간 삶의 밑바닥에까지 구현되는 것을 보는 한편, 마태오복음서에 의하여 강생의 신비가 세계만방의 온 인류 즉 모든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루카복음서에 의한 1225일의 축제에서부터 마태오복음서에 의한 16일 축제에 이르기까지 전례적 과정으로 주님 강생의 신비를 입체적으로 기념합니다.


이러한 성탄 대축일에서 공현 대축일 간에 강생 신비의 입체성을 체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탄의 밤에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일어난 사건은 저 높은 하늘로부터 어두운 인간의 삶 속으로 주님께서 내려오셨음을 말해주는 것임을 루카복음식의 강생 신비에 대한 수직적 구현으로 체험합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그 총독의 통치 체제하에 아기가 탄생하였음(루카 2, 1-7 참조)을 소개하는 루카복음서는 그 세속 권세의 상층부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이 낮은 곳에 버려진 비천한 사람(목동)들에게 저 한없이 높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의 강생 소식을 알려주었는데(루카 2, 8-20 참조), 이를 우리는 강생 신비의 수직적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반면, 마태오복음서에서는 강생 신비의 수평적 구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라는 의인의 마음속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통하여 동정녀가 무사히 아기를 낳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임마누엘>의 신비가 이루어짐(마태 1, 18-25 참조)을 소개하고, 이어서 예루살렘이라는 중심부에 멀리 동방이라는 주변부(변방)의 인류가 모여오게 된 사건(마태 2, 1-12 참조)을 보여줌으로써 이 강생 신비의 수평적 구현을 오늘 마태오복음서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루카복음식의 수직적 강생 신비의 구현과 마태오복음식의 수평적 강생 신비의 구현을 교회가 입체적으로 고백하는 과정이 성탄절로부터 공현 대축일에 이르는 전례입니다. 이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구원 메시지를 우리 사회의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까지, 그리고 우리 안에서부터 세계만방에까지 전해야 함을 다짐하게 됩니다. 이로써 이강생 신비는 역동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 이 강생신비의 역동성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또한 성탄절로부터 공현 대축일에 이르며 체험합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루카복음서에 따라서 하느님이신 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에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베들레헴 동리 밖 마구간에서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밖 그것도 어느 누구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를 향하여 저 높은 하늘의 합창을 실은 광명이 쏟아짐으로써 저 낮고 감추어진 곳 버림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이 환한 기쁨으로 채워지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성을 여기서 체험합니다. 작은 아기의 알려지지 않은 탄생이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어둠에 잡혀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마구간으로 달려가게 하였고 그들에게 구원이 되었듯이(루카 2, 15 참조), 그리고 그 구원을 이웃에게 전하기 위해 환희 작약하는 발걸음으로 뛰었듯이(루카 2, 17 참조), 사람이 바뀌는 체험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듯이 세상의 가장 먼 곳의 사람들에게 또한 구원 사건이 되는 것을 오늘 우리는 동방 박사들의 찾아옴(마태 2, 1 참조)에서 보게 됩니다. 그들의 찾아옴은 또한 세계를 움직이는 즉 세상을 바꾸는 강생 신비의 역동성을 보여줍니다. 그 아기의 탄생 소식은 세상의 지배자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지만, 세력가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 만큼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 소식으로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의 열정 위에 실려 옵니다. 이 소식은 갑자기 듣게 된 사람들의 처지가 불안해질 만큼 예사로운 것이 아니지요. 세상을 바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구세주 강생이란 이제 다른 세상을 만들 분이 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 번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이 사건으로 오늘도 이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하실 일을, 곧 그 분께서 세우셨던 심오한 계획(에페 3, 3-5 참조)을 이제 실행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생 소식은 그저 들려오는 한 소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큰 변혁을 일으키는 일대 사건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강생 신비는 저 외진 마을 어귀에서부터 세계 방방곡곡에 미치는 사건이 되고, 저 버림 받은 변두리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보잘것없는 일거리가 예루살렘 당국 중심부를 흔들어 놓는 사건을 일으키는 위력으로써 역동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주님을 찾아온 오늘 이 축제의 명칭으로 주님의 공현’(Epiphania : splendid appearance = ‘公顯이 적합하다 할 것)이라 함은, 그 말의 뜻이 그렇듯이, 이제 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출현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세주께서 우리 세상에 오셔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당국자들처럼 우리는 세상 혼란의 암흑 속에 파묻혀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세주로 강생하신 분의 별을 멀리 동방에서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다”(마태 2, 2)고 동방박사들이 말하였을 때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고 성서 기자가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2, 3 참조). 이 세계의 변혁을 이루게 될 하느님의 위대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저 멀리 세상의 동쪽 변두리 이방인들도 알아차리고 수만리 길을 찾아왔는데도, 예로부터 하느님의 도성이었던 그 예루살렘 중심부의 당국 사람들은 캄캄하게 모르고 있었음은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저 멀리서부터 진리의 별빛 따라 수만리 길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이방인들이 찾아오는 동안에 헤로데의 궁전과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세상의 이러한 중심부인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 베들레헴 그 버려진 동리 밖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조용한 그러나 위대한 사건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해가 지고 밤이 되어 깊어진 겨울밤의 하늘은 도시의 하늘이건 시골의 하늘이건 같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이겠지요. 동지섣달 긴긴 밤 베들레헴 동리 밖의 얼어붙은 밤하늘엔 쓸쓸한 목동들의 사랑 이야기 같은 반짝임으로 빛나는 별들이 보석같이 뿌려지고 어렴풋한 산 마루금 위로 하루의 삶을 밝혀오는 새벽이 달려옵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만이 뻗치는 곳, 그래서 잘난 사람들의 위세 등등한 이름들, 이른바 스타들의 명성만 번쩍이는 그 곳, 사람들의 힘자랑으로 떠들썩한 그 곳, 일컬어 사람들의 도시에서는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란 없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인가 하시고자 하셨던 그 예루살렘, 그곳은 이제 하느님의 도성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의 도시로 변하고 그곳의 하늘은 세상 권세의 매연으로 하느님 별빛의 그 반짝임을 가려버렸던 것이지요. 그 도성의 하늘 아래 천사들이 합창을 한들 권세로 지붕 삼은 사람들의 호사로운 잠자리에 무슨 구원의 메시지로 들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도 구세주 오시고 우리들의 세계에 그 분이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쾌락과 물질 만능의 흥청거림 속에서 우리의 하늘 또한 구원의 소식 퍼지지 못하는 듯 캄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에 계심을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알아보고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닫지 못하고 당황해 했던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부끄럽게도 먼지 묻은 성경책을 꺼내들고 주님 오셔 계심에 대한 예언을 뒤늦게 확인하려 했던 것처럼 구원 소식을 깨닫지 못하고 살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미 와계심을 새삼 깨우쳐 주는 이 축제의 날에 결심합시다. 구원 역사의 징후를 항상 성경 속에서 찾아가며 살기로 합시다. 그리고 세상의 주변에 아직 이방인의 처지에서 구원의 빛을 찾으려 하는 외교인들이 주님 구원의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에 찾아오도록 우리가 먼저 얻은 신앙의 빛으로 이끌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성으로 우리는 오늘 우리 믿음의 삶이 세상을 비춤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 주님 계심을 알아 볼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그로써 우리는 오늘 이 축제의 신비가 드러내고 있는 구세주 강생신비의 입체성과 그리고 역동성을 우리의 삶으로써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새해 첫날 미사

세계평화의 날  2013. 1. 1. 10:00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평화! 그것은 시시한 하느님의 일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는 가능하다




우리는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새해의 첫날을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일컬어 세계 평화의 날이라 합니다우리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이 새해의 첫날을 열게 되는 것은 그 의미가 깊은 일입니다. 이날은 지난 성탄 대축일로부터 만 일주일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날은 본래 성탄 제 8일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부활 축제나 성탄 축제를 하루만 지내지 않고 만 1주일 동안 지냅니다. 축일의 당일부터 시작하여 같은 요일을 맞이하는 날까지 만 일주일을 그 축제의 8부라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성탄 축제를 맞이했던 구랍(舊臘) 25일이 지난 화요일이었는데 오늘 새해의 11일이 또한 화요일입니다. 그렇게 대축일을 만 1주간 지내는 것을 그 축제의 ‘8일 축제라고 합니다. 이 성탄 제8부로써 성탄 축제를 완성합니다그러면 이 8부 축제가 어째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라는 명칭의 축제이겠습니까?


탄생하신 예수님은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 신비가 강생의 신비입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곧 그분은 우리 인간과 똑 같은 육체를 지니고 오셨습니다. 인간 육체를 지니고 오신 하느님, 그분은 한 여인으로부터 세상에 태어난 분이십니다. 분명히 마리아라고 하는 한 여인에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태어나셨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그 신비가 인간 역사에 드러난 사실임을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루카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에 가보니 과연 천사들이 말해준 바대로,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루카 2, 16) 찾아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목자들이 자기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가서(루카 2, 20 참조),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모두 놀라워하였다(루카 2, 17-18 참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마리아님께서 마음속에 간직하여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고 복음서가 증언하듯이, 우리 교회는 이 사실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그 귀중한 체험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아기의 탄생이 확인되고, 그 아기가 여드레째 되는 날 천사의 전갈대로 예수라고 하는 이름을 갖게 된 사실(루카 2, 21 참조)로써 마리아의 아들인 그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는 오늘 이렇게 확인하며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 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은 구세주 강생의 신비를 확실한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축제는 성탄 축제를 완성하는 축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한 여인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그 사실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신 분으로 오셨음이 사실이요, 우리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세상 속으로 하느님께서 분명히 오셨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완전히 한 운명을 지니시는 분이됨으로써 인간의 모든 비극까지 당신 것으로 삼으시는 그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나약한 우리 인간에게 이보다 더한 큰 위안과 희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강생 신비를 완전히 드러내는 이 축제와 더불어 우리 인간의 역사적 흐름을 짚을 수 있는 한 해의 시작인 새해 첫날을 맞이하는 것은 따라서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과 함께 우리 인간들이 역사의 길을 동행한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오늘의 이 축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해를 새로이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모든 애환의 길을 함께 하여 오셨고 그리고 우리가 걸어갈 새로운 날들도 그렇게 함께 가주실 분, 그분은 그렇게 마리아라는 여인의 아들로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앞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날들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한 희망적 사실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우리의 나아갈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 우리의 새해 첫날인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세계인들의 국제연합’(UN)세계 평화의 날이라 정하고 평화를 기원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의 구세사적 목표,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일과 우리 인류의 역사적 과제가 한 가지임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이렇게 인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세사적 사건과 세계의 평화가 동일선상의 것임을 이 한해의 첫날에 기원하는 오늘의 미사에서 복음서가 구세주의 베들레헴 마구간 탄생 사건을 성모 마리아님께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 간직하였다고 전하고 있음(루카 2, 19)을 우리는 가슴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하시는 일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조용하게 성취되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 마리아님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게 되었다는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외로운 목동들이 구유에 눕혀진 아기를 보러 찾아오게 된 사연을 마리아님이 마음속 깊이 새겨 간직했다는 것입니다(루카 2, 17-19 참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천사들에게 들은 바”(루카 2, 20)를 마구간의 구유에 눕혀진 아기에게서 깨달을 줄 알던 목동들의 말을 마리아님은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긴 것입니다(루카 2, 17-20 참조). 이러한 성경의 기록에서 우리가 오늘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세상의 힘 있는 지도자들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새해의 첫날은 UN이 정한 평화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정치판도에서는 그 평화의 희망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강대국의 명분하에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고 사람들 사이에 서로 죽이고 다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 간에는 군사력에 맞서 경쟁함으로써 평화를 지킨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북 간에도 늘 군사적 힘에 의한 대치로 이른바 국가안보를 담보해야한다는 식으로 민족분단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끝없는 대결논리로는 진정 평화에 대한 왜곡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폭력을 맞서기 위한 빌미로 내가 더 큰 폭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라는 것을 힘센 사람이 이루는 것인 듯 착각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평화란 그걸 달성할 수 있다는 어떤 실력발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 실력을 유보함에서 평화는 가능한 것이 된다고 깨달아야겠습니다. 오늘 봉헌하는 미사의 복음 성경에서 본 마리아의 태도처럼, 하고 싶은 말을 생략하고 마음에 담아둔 그 어떤 무엇인가가 평화를 담보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즉 평화란 우리 서로의 주장을 유보함으로써 우리 사이에 슬며시 이룩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포기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 자신의 포기가 곧 사랑입니다. 서로가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서로 사이의 불편함은 사라집니다. 그럼으로써 평화가 실현 됩니다. 그런 평화 실현의 구체적 방식을 다음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의지할 사람 없이 홀로 된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장모님이 눈이 좋지 않아서 안경을 맞춰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위에게 언치어사는 처지에 그 장모님께서는 가난한 사위에게 미안스러워서 한사코 사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라서 아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남편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위는 문득 혼자서 안경점에 가서 안경 가격을 알아보았습니다. 사위는 장모님이 부담 느끼지 않고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게 안경이 아주 저렴한 가격인 것처럼 장모께 얘기해 달라고 안경점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오만 원을 내놓으며 아내와 장모님 앞에선 정가에서 오만 원을 뺀 가격을 말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며칠 후 장모님과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안경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모님보고 안경을 고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가 고른 안경은 정가가 십만 원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위와 미리 짠 대로 안경점 주인은 오만원이라고 말하려다가 할머니 표정으론 그것도 비싸다며 놀라실 것 같아 가격을 만원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경로우대 특별 서비스라는 그럴듯한 거짓말까지 둘러대며 말했던 것이지요. 할머니는 안경을 써 보시고 가격도 싸고 좋다며 자꾸만 거울을 보셨습니다. 그때 사위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 돈을 꺼내려는데 진열대 밑에서 불쑥 꼬마 아들이 고개를 내밀더니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여섯 장을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안경 해 드리려고 동생이랑 모은 것이라며 수줍게 웃는 꼬마의 말에 그 외할머니(장모님)와 엄마(아내) 눈자위가 점점 붉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안경점 주인은 그 만 원도 차마 다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 장모님의 사위인 그 꼬마의 아버지와 안경점 주인은 서로 미리 짰던 것을 서로의 눈빛으로 행복하게 확인하면서 미소를 교환했습니다. 그리고는 할머니와 외손자 꼬마의 아버지인 사위와 엄마인 아내와 그 꼬마는 안경점 주인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행복해했습니다. 그 네 식구와 안경점 주인 모두 다섯 사람은 그 순간 행복했습니다. 그 모두가 각박한 세상의 돈 걱정에서 해방된 따뜻한 승리를 거둔 사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는 격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 서로를 배려하는 가장 지고하고 고귀한 형태의 관계에서 사랑을 이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사랑을 이루는 그 고귀한 형태의 관계란 서로가 자기 자신의 입장을 유보한 관계인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 평화가 실현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격언은 어떻게 해야만 진정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에 대한 승리이고 자기 자신에게 지고 서로에게 승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힘으로 맞서 궁극적으로 얻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서로에게 양보하여 져주는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 이른바 평화유지군을 파병한다면서 소위 세계경찰국가임을 자처하는 미국이 주도한 전쟁들에서 진정 승리한 일이 있습니까? 힘으로 이겨 전쟁을 승리로 맺는다고 선언하던 초강대국의 자만 뒤에는 그러한 전쟁 이후에 오히려 그 초강대국의 군인들이 더 많이 희생당하고 있고 그 전쟁 주도의 군대는 더욱 수렁에 빠진 형색이 되곤 합니다. 그리고 파괴와 살육은 더욱 그 잔인성의 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힘으로는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서로의 패배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들의 현실에 우리 구세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아주 힘도 없으신 존재로 그저 가난한 여인의 품을 빌려 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오심에 대한 소식은 너무나 시시하게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가난한 목동들)에게만 알려졌고, 그 사실을 마리아님은 조용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기주장으로 혹은 자기 힘으로 차지하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가슴에 묻어둘 줄 아는 조용한 마음의 양보로 서로 승리처럼 이루는 사랑, 그것이 평화임을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그리고 새해의 첫날에 거듭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강력한 지도자의 성공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시시한 하느님의 일에 의해서 보잘 것 없는 인간 사이에 이룩되는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