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2013. 1. 6. 10:00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수직과 수평의 성탄 축제

내림과 퍼짐의 성탄 축제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본래 16일이 이 축제의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에서는 16일을 공휴일로 할 수 없으므로 신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12-8일 사이의 주일(일요일)에 이 축제를 올립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오늘 일요일이 16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축일을 일요일에 우리 한국 신자들은 오늘 아주 걸맞게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래 주님의 성탄 대축일로부터 13일 만에 三王來朝 祝日을 지내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었습니다. 13일만의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주님의 성탄 축일로 지냅니다.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시리아, 이집트 등지의 동방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에서 그렇습니다. 오늘 모스크바에서는 성탄 본일로 축제를 올립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주님의 성탄절로 지내는 1225일은 예수님의 생신일을 찾아 기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원래 로마인들의 풍속에 밤이 가장 긴 동지에 약해진 태양이 이제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낮으로 다시 힘을 발휘하는 태양을 맞이하는 의미로써 태양신(Mithras)을 섬기던 날이었는데, 우리 교회가 참 빛이시고 正義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날로 바꿔 지내기 시작하여 고정된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Egypt의 문화도시 Alexandria 사람들이 15일과 6일 사이의 밤에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 Aion의 출생의 의미로 나일강 물을 길어 올리는 의식을 했는데 그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고 믿었다 합니다. 그러한 이방종교의 의식을 참 태양이신 예수님을 동방박사들이 뵈옵기 위해 찾아온 날로 기념하면서 그 Alexandria의 그리스도 신자들이 예수님 탄생일로 바꿔 기념하기 시작하여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겨울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해와, 어둠을 가로지르는 별(彗星), 그리고 땅을 가로지르는 강물에 반사하는 햇빛으로 포도주의 향기를 얻듯이,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강생신비 즉 하늘의 주님께서 땅의 인간들에게까지 오시는 구원사건을 이 성탄절 축제 기간에 서쪽의 로마 교회가 정한 축제로부터 동쪽의 교회가 정한 축제로 이어 기념하며 우리는 입체적이자 역동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즉 지난 1225일에는 내려오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오늘 16일에는 멀리 세상의 이방 끝까지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을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13일 사이의 입체적 강생의 신비를 우리는 크리스마스와 공현의 축제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려옴의 강생을 널리 알려짐의 공현으로 이 13일간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림과 퍼짐의 신비이지요. 역동이요 입체의 신비체험인 것입니다.


그 입체적이자 역동적 체험을 우리는 루카복음서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메시지로 생생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서 2장에 의하면 베들레헴 인근의 가난한 목동들이 마구간에 찾아옴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만, 마태오복음서 2장에 의하면 멀리서부터 동방 박사들 즉 이방인들이 찾아옴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드러나게 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카복음서는 소외된 사람들 즉 인간사회의 변두리에서 주님의 오심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것에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한편, 마태오복음서는 세계의 변방에서부터 인류가 주님 계신 곳으로 모여오게 함으로써 강생의 신비가 세계에 공개되는 계기를 이루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루카복음서에 의하여 강생의 신비가 우리 인간 삶의 밑바닥에까지 구현되는 것을 보는 한편, 마태오복음서에 의하여 강생의 신비가 세계만방의 온 인류 즉 모든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루카복음서에 의한 1225일의 축제에서부터 마태오복음서에 의한 16일 축제에 이르기까지 전례적 과정으로 주님 강생의 신비를 입체적으로 기념합니다.


이러한 성탄 대축일에서 공현 대축일 간에 강생 신비의 입체성을 체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탄의 밤에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일어난 사건은 저 높은 하늘로부터 어두운 인간의 삶 속으로 주님께서 내려오셨음을 말해주는 것임을 루카복음식의 강생 신비에 대한 수직적 구현으로 체험합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그 총독의 통치 체제하에 아기가 탄생하였음(루카 2, 1-7 참조)을 소개하는 루카복음서는 그 세속 권세의 상층부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이 낮은 곳에 버려진 비천한 사람(목동)들에게 저 한없이 높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의 강생 소식을 알려주었는데(루카 2, 8-20 참조), 이를 우리는 강생 신비의 수직적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반면, 마태오복음서에서는 강생 신비의 수평적 구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라는 의인의 마음속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통하여 동정녀가 무사히 아기를 낳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임마누엘>의 신비가 이루어짐(마태 1, 18-25 참조)을 소개하고, 이어서 예루살렘이라는 중심부에 멀리 동방이라는 주변부(변방)의 인류가 모여오게 된 사건(마태 2, 1-12 참조)을 보여줌으로써 이 강생 신비의 수평적 구현을 오늘 마태오복음서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루카복음식의 수직적 강생 신비의 구현과 마태오복음식의 수평적 강생 신비의 구현을 교회가 입체적으로 고백하는 과정이 성탄절로부터 공현 대축일에 이르는 전례입니다. 이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구원 메시지를 우리 사회의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까지, 그리고 우리 안에서부터 세계만방에까지 전해야 함을 다짐하게 됩니다. 이로써 이강생 신비는 역동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 이 강생신비의 역동성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또한 성탄절로부터 공현 대축일에 이르며 체험합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루카복음서에 따라서 하느님이신 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에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베들레헴 동리 밖 마구간에서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밖 그것도 어느 누구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를 향하여 저 높은 하늘의 합창을 실은 광명이 쏟아짐으로써 저 낮고 감추어진 곳 버림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이 환한 기쁨으로 채워지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성을 여기서 체험합니다. 작은 아기의 알려지지 않은 탄생이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어둠에 잡혀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마구간으로 달려가게 하였고 그들에게 구원이 되었듯이(루카 2, 15 참조), 그리고 그 구원을 이웃에게 전하기 위해 환희 작약하는 발걸음으로 뛰었듯이(루카 2, 17 참조), 사람이 바뀌는 체험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듯이 세상의 가장 먼 곳의 사람들에게 또한 구원 사건이 되는 것을 오늘 우리는 동방 박사들의 찾아옴(마태 2, 1 참조)에서 보게 됩니다. 그들의 찾아옴은 또한 세계를 움직이는 즉 세상을 바꾸는 강생 신비의 역동성을 보여줍니다. 그 아기의 탄생 소식은 세상의 지배자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지만, 세력가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 만큼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 소식으로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의 열정 위에 실려 옵니다. 이 소식은 갑자기 듣게 된 사람들의 처지가 불안해질 만큼 예사로운 것이 아니지요. 세상을 바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구세주 강생이란 이제 다른 세상을 만들 분이 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 번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이 사건으로 오늘도 이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하실 일을, 곧 그 분께서 세우셨던 심오한 계획(에페 3, 3-5 참조)을 이제 실행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생 소식은 그저 들려오는 한 소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큰 변혁을 일으키는 일대 사건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강생 신비는 저 외진 마을 어귀에서부터 세계 방방곡곡에 미치는 사건이 되고, 저 버림 받은 변두리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보잘것없는 일거리가 예루살렘 당국 중심부를 흔들어 놓는 사건을 일으키는 위력으로써 역동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주님을 찾아온 오늘 이 축제의 명칭으로 주님의 공현’(Epiphania : splendid appearance = ‘公顯이 적합하다 할 것)이라 함은, 그 말의 뜻이 그렇듯이, 이제 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출현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세주께서 우리 세상에 오셔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당국자들처럼 우리는 세상 혼란의 암흑 속에 파묻혀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세주로 강생하신 분의 별을 멀리 동방에서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다”(마태 2, 2)고 동방박사들이 말하였을 때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고 성서 기자가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2, 3 참조). 이 세계의 변혁을 이루게 될 하느님의 위대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저 멀리 세상의 동쪽 변두리 이방인들도 알아차리고 수만리 길을 찾아왔는데도, 예로부터 하느님의 도성이었던 그 예루살렘 중심부의 당국 사람들은 캄캄하게 모르고 있었음은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저 멀리서부터 진리의 별빛 따라 수만리 길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이방인들이 찾아오는 동안에 헤로데의 궁전과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세상의 이러한 중심부인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 베들레헴 그 버려진 동리 밖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조용한 그러나 위대한 사건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해가 지고 밤이 되어 깊어진 겨울밤의 하늘은 도시의 하늘이건 시골의 하늘이건 같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이겠지요. 동지섣달 긴긴 밤 베들레헴 동리 밖의 얼어붙은 밤하늘엔 쓸쓸한 목동들의 사랑 이야기 같은 반짝임으로 빛나는 별들이 보석같이 뿌려지고 어렴풋한 산 마루금 위로 하루의 삶을 밝혀오는 새벽이 달려옵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만이 뻗치는 곳, 그래서 잘난 사람들의 위세 등등한 이름들, 이른바 스타들의 명성만 번쩍이는 그 곳, 사람들의 힘자랑으로 떠들썩한 그 곳, 일컬어 사람들의 도시에서는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란 없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인가 하시고자 하셨던 그 예루살렘, 그곳은 이제 하느님의 도성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의 도시로 변하고 그곳의 하늘은 세상 권세의 매연으로 하느님 별빛의 그 반짝임을 가려버렸던 것이지요. 그 도성의 하늘 아래 천사들이 합창을 한들 권세로 지붕 삼은 사람들의 호사로운 잠자리에 무슨 구원의 메시지로 들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도 구세주 오시고 우리들의 세계에 그 분이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쾌락과 물질 만능의 흥청거림 속에서 우리의 하늘 또한 구원의 소식 퍼지지 못하는 듯 캄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에 계심을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알아보고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닫지 못하고 당황해 했던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부끄럽게도 먼지 묻은 성경책을 꺼내들고 주님 오셔 계심에 대한 예언을 뒤늦게 확인하려 했던 것처럼 구원 소식을 깨닫지 못하고 살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미 와계심을 새삼 깨우쳐 주는 이 축제의 날에 결심합시다. 구원 역사의 징후를 항상 성경 속에서 찾아가며 살기로 합시다. 그리고 세상의 주변에 아직 이방인의 처지에서 구원의 빛을 찾으려 하는 외교인들이 주님 구원의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에 찾아오도록 우리가 먼저 얻은 신앙의 빛으로 이끌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성으로 우리는 오늘 우리 믿음의 삶이 세상을 비춤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 주님 계심을 알아 볼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그로써 우리는 오늘 이 축제의 신비가 드러내고 있는 구세주 강생신비의 입체성과 그리고 역동성을 우리의 삶으로써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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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새해 첫날 미사

세계평화의 날  2013. 1. 1. 10:00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평화! 그것은 시시한 하느님의 일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는 가능하다




우리는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새해의 첫날을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일컬어 세계 평화의 날이라 합니다우리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이 새해의 첫날을 열게 되는 것은 그 의미가 깊은 일입니다. 이날은 지난 성탄 대축일로부터 만 일주일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날은 본래 성탄 제 8일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부활 축제나 성탄 축제를 하루만 지내지 않고 만 1주일 동안 지냅니다. 축일의 당일부터 시작하여 같은 요일을 맞이하는 날까지 만 일주일을 그 축제의 8부라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성탄 축제를 맞이했던 구랍(舊臘) 25일이 지난 화요일이었는데 오늘 새해의 11일이 또한 화요일입니다. 그렇게 대축일을 만 1주간 지내는 것을 그 축제의 ‘8일 축제라고 합니다. 이 성탄 제8부로써 성탄 축제를 완성합니다그러면 이 8부 축제가 어째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라는 명칭의 축제이겠습니까?


탄생하신 예수님은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 신비가 강생의 신비입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곧 그분은 우리 인간과 똑 같은 육체를 지니고 오셨습니다. 인간 육체를 지니고 오신 하느님, 그분은 한 여인으로부터 세상에 태어난 분이십니다. 분명히 마리아라고 하는 한 여인에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태어나셨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그 신비가 인간 역사에 드러난 사실임을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루카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에 가보니 과연 천사들이 말해준 바대로,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루카 2, 16) 찾아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목자들이 자기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가서(루카 2, 20 참조),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모두 놀라워하였다(루카 2, 17-18 참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마리아님께서 마음속에 간직하여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고 복음서가 증언하듯이, 우리 교회는 이 사실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그 귀중한 체험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아기의 탄생이 확인되고, 그 아기가 여드레째 되는 날 천사의 전갈대로 예수라고 하는 이름을 갖게 된 사실(루카 2, 21 참조)로써 마리아의 아들인 그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는 오늘 이렇게 확인하며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 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은 구세주 강생의 신비를 확실한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축제는 성탄 축제를 완성하는 축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한 여인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그 사실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신 분으로 오셨음이 사실이요, 우리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세상 속으로 하느님께서 분명히 오셨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완전히 한 운명을 지니시는 분이됨으로써 인간의 모든 비극까지 당신 것으로 삼으시는 그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나약한 우리 인간에게 이보다 더한 큰 위안과 희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강생 신비를 완전히 드러내는 이 축제와 더불어 우리 인간의 역사적 흐름을 짚을 수 있는 한 해의 시작인 새해 첫날을 맞이하는 것은 따라서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과 함께 우리 인간들이 역사의 길을 동행한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오늘의 이 축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해를 새로이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모든 애환의 길을 함께 하여 오셨고 그리고 우리가 걸어갈 새로운 날들도 그렇게 함께 가주실 분, 그분은 그렇게 마리아라는 여인의 아들로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앞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날들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한 희망적 사실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우리의 나아갈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 우리의 새해 첫날인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세계인들의 국제연합’(UN)세계 평화의 날이라 정하고 평화를 기원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의 구세사적 목표,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일과 우리 인류의 역사적 과제가 한 가지임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이렇게 인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세사적 사건과 세계의 평화가 동일선상의 것임을 이 한해의 첫날에 기원하는 오늘의 미사에서 복음서가 구세주의 베들레헴 마구간 탄생 사건을 성모 마리아님께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 간직하였다고 전하고 있음(루카 2, 19)을 우리는 가슴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하시는 일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조용하게 성취되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 마리아님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게 되었다는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외로운 목동들이 구유에 눕혀진 아기를 보러 찾아오게 된 사연을 마리아님이 마음속 깊이 새겨 간직했다는 것입니다(루카 2, 17-19 참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천사들에게 들은 바”(루카 2, 20)를 마구간의 구유에 눕혀진 아기에게서 깨달을 줄 알던 목동들의 말을 마리아님은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긴 것입니다(루카 2, 17-20 참조). 이러한 성경의 기록에서 우리가 오늘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세상의 힘 있는 지도자들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새해의 첫날은 UN이 정한 평화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정치판도에서는 그 평화의 희망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강대국의 명분하에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고 사람들 사이에 서로 죽이고 다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 간에는 군사력에 맞서 경쟁함으로써 평화를 지킨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북 간에도 늘 군사적 힘에 의한 대치로 이른바 국가안보를 담보해야한다는 식으로 민족분단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끝없는 대결논리로는 진정 평화에 대한 왜곡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폭력을 맞서기 위한 빌미로 내가 더 큰 폭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라는 것을 힘센 사람이 이루는 것인 듯 착각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평화란 그걸 달성할 수 있다는 어떤 실력발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 실력을 유보함에서 평화는 가능한 것이 된다고 깨달아야겠습니다. 오늘 봉헌하는 미사의 복음 성경에서 본 마리아의 태도처럼, 하고 싶은 말을 생략하고 마음에 담아둔 그 어떤 무엇인가가 평화를 담보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즉 평화란 우리 서로의 주장을 유보함으로써 우리 사이에 슬며시 이룩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포기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 자신의 포기가 곧 사랑입니다. 서로가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서로 사이의 불편함은 사라집니다. 그럼으로써 평화가 실현 됩니다. 그런 평화 실현의 구체적 방식을 다음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의지할 사람 없이 홀로 된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장모님이 눈이 좋지 않아서 안경을 맞춰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위에게 언치어사는 처지에 그 장모님께서는 가난한 사위에게 미안스러워서 한사코 사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라서 아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남편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위는 문득 혼자서 안경점에 가서 안경 가격을 알아보았습니다. 사위는 장모님이 부담 느끼지 않고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게 안경이 아주 저렴한 가격인 것처럼 장모께 얘기해 달라고 안경점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오만 원을 내놓으며 아내와 장모님 앞에선 정가에서 오만 원을 뺀 가격을 말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며칠 후 장모님과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안경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모님보고 안경을 고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가 고른 안경은 정가가 십만 원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위와 미리 짠 대로 안경점 주인은 오만원이라고 말하려다가 할머니 표정으론 그것도 비싸다며 놀라실 것 같아 가격을 만원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경로우대 특별 서비스라는 그럴듯한 거짓말까지 둘러대며 말했던 것이지요. 할머니는 안경을 써 보시고 가격도 싸고 좋다며 자꾸만 거울을 보셨습니다. 그때 사위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 돈을 꺼내려는데 진열대 밑에서 불쑥 꼬마 아들이 고개를 내밀더니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여섯 장을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안경 해 드리려고 동생이랑 모은 것이라며 수줍게 웃는 꼬마의 말에 그 외할머니(장모님)와 엄마(아내) 눈자위가 점점 붉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안경점 주인은 그 만 원도 차마 다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 장모님의 사위인 그 꼬마의 아버지와 안경점 주인은 서로 미리 짰던 것을 서로의 눈빛으로 행복하게 확인하면서 미소를 교환했습니다. 그리고는 할머니와 외손자 꼬마의 아버지인 사위와 엄마인 아내와 그 꼬마는 안경점 주인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행복해했습니다. 그 네 식구와 안경점 주인 모두 다섯 사람은 그 순간 행복했습니다. 그 모두가 각박한 세상의 돈 걱정에서 해방된 따뜻한 승리를 거둔 사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는 격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 서로를 배려하는 가장 지고하고 고귀한 형태의 관계에서 사랑을 이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사랑을 이루는 그 고귀한 형태의 관계란 서로가 자기 자신의 입장을 유보한 관계인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 평화가 실현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격언은 어떻게 해야만 진정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에 대한 승리이고 자기 자신에게 지고 서로에게 승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힘으로 맞서 궁극적으로 얻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서로에게 양보하여 져주는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 이른바 평화유지군을 파병한다면서 소위 세계경찰국가임을 자처하는 미국이 주도한 전쟁들에서 진정 승리한 일이 있습니까? 힘으로 이겨 전쟁을 승리로 맺는다고 선언하던 초강대국의 자만 뒤에는 그러한 전쟁 이후에 오히려 그 초강대국의 군인들이 더 많이 희생당하고 있고 그 전쟁 주도의 군대는 더욱 수렁에 빠진 형색이 되곤 합니다. 그리고 파괴와 살육은 더욱 그 잔인성의 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힘으로는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서로의 패배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들의 현실에 우리 구세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아주 힘도 없으신 존재로 그저 가난한 여인의 품을 빌려 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오심에 대한 소식은 너무나 시시하게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가난한 목동들)에게만 알려졌고, 그 사실을 마리아님은 조용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기주장으로 혹은 자기 힘으로 차지하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가슴에 묻어둘 줄 아는 조용한 마음의 양보로 서로 승리처럼 이루는 사랑, 그것이 평화임을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그리고 새해의 첫날에 거듭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강력한 지도자의 성공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시시한 하느님의 일에 의해서 보잘 것 없는 인간 사이에 이룩되는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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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2 12 30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속 썩이는 아들 예수의 일을

마리아는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성탄 대축일의 8일내(팔부) 일요일을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한 주간(8)을 강생신비로 경축하는 가운데 주님의 날(일요일)’주님의 가정 축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성탄과 더불어 주님의 가난한 가정을 경축하는 것은 강생신비의 일차적 구현이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 삶의 길을 똑 같이 걸어가시려 하심에 있어서, 인간이라면 이 세상의 삶을 누구나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듯이 주님께서도 예외 없이 그러한 가정에 속한 삶부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인생의 관점으로 볼 때 가정을 이루지 않고 사는 저 같은 성직자가 가정에 관하여 운운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인간의 가정적 삶의 고뇌나 즐거움에 대하여 피력하는 바를 소개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나자렛에서 이루신 가정생활에 관한 우리 신앙적 관점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 성서의 짤막한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살펴보면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길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느라고 3일간이나 헤매다가 성전에서 그 아들 소년 예수를 찾았을 때(루카 2, 43-46 참조), 왜 그렇게 속을 썩이느냐는 식으로 어머니 마리아가 질책을 하자 아들 예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했다는 것(루카 2, 48-50 참조)을 우리 또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 평상시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는 아들 예수의 모습을 보고 마리아가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다(루카 2, 51 참조)고 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아들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과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엄마의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마리아의 말없는 태도에 대해서는 베들레헴 마구간의 그 밤에 천사들의 전갈과 목동들의 방문 사실도 마리아가 마음속에 간직했다 했듯이(루카 2, 19 참조), 


예루살렘의 미아 예수의 사건과 나자렛 가정생활에 대해서도 마리아가 그렇게 마음속에 간직했다고 성서가 강조해서 기록하는 것은 베들레헴 탄생의 신비만큼이나 나자렛 가정생활도 중차대한 구세사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밖에서 속을 썩인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는 얌전한 것을 보고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서 너 이 녀석 어디 두고 보자면서 벼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어느 어머니의 수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학교 선생님 생활을 하다가 효과적인 부모역할훈련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민정씨가 쓴 이 시대를 사는 따뜻한 부모들의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어느 어머니의 수기입니다.(이야기 중 작은 괄호 안 글은 윤종관 신부의 첨가임)


대학생인 아들이 연락도 없이 늦는다. 10분 전 12시다. ‘왜 전화도 못하나. 과미팅이다, 동문미팅이다, 클럽미팅이다, 소개팅이다 끝날 만도 한데, 못 먹는 술은 왜 자꾸 먹이고 먹는담! 이 녀석 오기만 해봐라. 부모 속을 이렇게 썩이다니.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다니, 오기만 해봐라.’


이럴 때일수록 왜 그 발 없는 불안한 소문들은 떠오르는지, (그리고 왜) 그 흉측한 소문을 들려주던 이의 떨리던 음성까지 떠오르는지, 초조하고 불안한 쪽으로 생각하면서 올림픽 대로를 한숨에 왔다갔다한다. ‘그래도 전화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전화도 못한 저는 얼마나 불안해할까, 집에서 걱정할까봐 더 초조해하겠지.’ (하며)나는 자신을 달랜다.


오늘따라 비가 오락가락한다. 1210, 전철에서 내리면 버스가 끊긴다.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인 전철역으로 우산을 들고 나간다. 드문드문 지나치는 사람이 무섭다. 역 출구에서 서성인다. 전철에서 나오는 사람이 끊겼다. 웬일일까? ‘! 하느님, 제 아들을 지켜주소서!’ 나는 (이렇게)기도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면서)길가에 두툼한 물체들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혹시 만취해 쓰러진 내 아들이 아닌가, 깡패에게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모습은 아닌가, (이렇게 불안해 하다가 가슴속에 원망이 맴돌아) ‘아니, 이 녀석이! 이렇게 애를 태우게 하다니! 못 오면 못 온다고,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해주지.’(하며 중얼거린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바꾼다. ‘! 하느님, 화내지 않겠습니다. 제 아들을 지켜만 주소서!’(하며 돌아오는 길에 하느님께 매달린다. 그러면서) 길이 엇갈려 이미 집에 들어와 있다가 대문을 열어줄 아들을 상상하며 초인종을 누른다. 뛰는 가슴과 떨리는 손으로.


(그때 안에서 들린다) “어머니 세요?”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 아들을 무사히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나의 얼굴을 읽으면서 그 애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만취한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다음엔 꼭 연락을 하겠습니다.” 나는 행복했다. 내 어깨를 꼬옥 감싸는 아들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까지도 싫지 않았다. 화난 대로 아들에게 쏟아 부었다면 이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까. 누가 말했던가, ‘고통을 통해 순수해지고 성숙해진다.’.......

며칠 뒤 길이 막혀 늦어진 나를 기다리던 아들은 말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의 어머니를 무사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곳은 바로 천국임을 느꼈다. 나는 다시 한 번 체험했다. 십자가 뒤엔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것을, 좋은 부모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효과적인 부모역할훈련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고통과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이 일은 고통을 감수하며 노력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부모역할은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역할이며 소중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이야기에서 말입니다. 이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 간 것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말로써 통했습니까, 아니면 마음으로 통했습니까? 마음으로 통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마음으로 통하게 되기까지의 중간 단계는 없습니까? 그것은 몸에 배기까지의 서로 노력을 기울인 상호간의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렇게 늘 기다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고 소리 없이 그 사람을 내 맘속에 담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서의 성모 마리아가 그렇게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48-50 참조)는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 서로의 삶을 간직해줄 수 있는 그것을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란 상대방이 나에게 부담해야 할 사랑이라기보다는 내가 부담해야 할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얻는 것이나, 딸 수 있는 결실이나, 바라는 성과라기보다는 이루어 가는 것, 주는 것, 거름 같이 붓는 것, 그래서 키워 가는 과정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항상 진행 중이면서 아직 결론에 이르지 않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사실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싱겁고 또 어쩐지 말로 한 사랑은 거짓 같기도 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진행 중인 사랑이 가정 안에서는 방안에 가득 차면서도 공기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부부의 사랑이란 한 나무줄기에 흐르는 물과 같은 아내의 사랑이요 거름 같이 힘이 되는 남편의 사랑이되, 줄기 속에 함께 녹아 흐르는 생명처럼 보이지 않는 서로의 사랑인 것입니다. 아마 그런 부부 사이에 그래서 꽃이 피고 또 그래서 또 한 생명으로의 열매가 또 다른 나무를 탄생시키는 자녀의 모습으로 그들의 가정이라는 것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남으로 만나서도 하나가 되는 것이 부부인가 봅니다. 남남으로 만난다는 것은 서로가 분명히 다른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이 하나의 인생을 사는 한 몸이 된다 합니다.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가 19955월에 큰 사고로 온 몸이 부서져 의식을 잃었다가 닷새 만에 깨어났을 때 의사들의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먼저 으스러진 폐부터 수술하고 그리고 목에서부터 허리 아래까지 뼈를 한 토막씩 뜯어 맞추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크리스토퍼 리브는 자기 아내 다나에게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지 말고 자기를 그냥 죽게 놔달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나를 죽게 놔두는 게 나나 당신에게 더 나을 거요라고 말입니다. 그 때 아내 다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건 당신의 마음 결정이므로 존중합니다. 허지만 떠나갈 당신은 여전히 나의 당신이에요. 그리고 난 그런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할 거예요.” 아내의 그 말을 듣고 크리스토퍼 리브는 그래서 살겠다는 마음을 되찾았고 그리고 그의 아내 다나는 전신마비의 그와 행복한 사랑의 부부로 계속 변함없이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답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라는 혼인 서약은 그렇게 해서 지속되는 사랑의 과정 속에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듯 항상 끊임없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니 영원히 결말 없이 계속 커나가는 것이 가정안의 사랑, 부부의 사랑, 부모 자녀 사이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그런 가정에서 시작하여, 그리고 항시적으로 끊임없이, 그러나 드러나지 않고 소리 나지 않게 성취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렛 성가정은 감추어진 가정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음은 구세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렇게 가정의 어머니 마음과 같은 사랑의 고요 속에서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으나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위대성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성가정 축일의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이란 볼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찬 곳이다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감추어진 보물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것이기에 감추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가정의 이야기가 밖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좋은 것이든 언짢은 것이든 말입니다. 그것은 그래서 최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일이 외적 강제력으로 보호될 지경이라면 그것은 벌써 비극입니다. 가정 폭력이 공권력에 호소되어 해결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가정폭력 방지법이든 보호법이든 그것이 노출되는 과정을 통해야 하는 실정에까지 이른 것이 현실이라면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정적 성장과 자아 성취를 이룰 수 없는 청소년들이 사회의 어두운 거리로 나와 방황하기에 이른 까닭은 가정이 은밀한 사랑의 보금자리로서의 본질적 기능을 상실한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커튼으로 가려져 보호되어야 할 방안 사정을 밖의 세상 풍조가 무차별적으로 역류해 들어와 흐트러뜨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실정을 바로 잡아 본래적 개인들의 성취 장소로 가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가정별 특수 여건이 개성적으로 보장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대학 가는 것만이 교육은 아니라는 것, 다른 가정보다 넉넉하지 못한 사정이라 해서 불행하다 여겨지지 않는 가정 나름으로 남모르게 행복한 이유 따로 있으면 그만 이라는 것, 그래서 식구마다 다른 집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귀한 역할을 이 세상에서 자랑스럽게 수행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스런 사회인으로서 인정받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사회 발전의 진원지요 인생 성공 행로의 귀착지가 곧 가정이라는 본질적 위상이 모든 것에 앞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우리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으로서의 공개되지 않은 세상살이를 나자렛에서 30년이나 하신 까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른 살 되셨을 때 비로소 공생활 하신 것으로 복음서들은 보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요즘 세상으로 쳐서 그 30살 먹도록 예수청년은 취직도 하지 않고 집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요? 그 또한 어머니 마리아의 속을 썩이며 무능한 아들이었는지 모를 일이지요.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고, 30년을 훌쩍 뛰어넘어 즉시 그분의 공생활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의 보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 기록자는 어머니 마리아가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가운데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갔다라고만 우리에게 짤막하게 그 30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사셨나 하는 것은 성서 기록자는 알지 못하고 오직 성모 마리아 가슴속에 기록된 것으로 아직 그리고 영원히 공개되지 않을 은밀한 가정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삶처럼 가정은 침묵하는 마음만큼이나 가득 찬 신비와 같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깰 수 없고 그리고 깨서도 아니 되는 그 침묵 같은 베일 속에서 사실은 사랑의 작업이 가장 생동적으로 계속되는 곳이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가정입니다. 부부가 사랑하고 그래서 부부가 부모 됨을 알고, 그리고 나아가 남남으로 만나 엄마 아빠 된 사실을 자녀들의 존재가 증명해주고, 그로써 부부 서로가 그리고 부모와 자녀 서로 서로가 개인으로서의 존중 받음을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런 곳이 가정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나자렛의 감추어진 가정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그분이 밖에서는,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어린 나이에도 하느님 아버지의 일로(루카 2, 49 참조) 모든 학자들의 경탄을 사는 모습이었습니다만(루카 2, 46-47 참조), 가정에서는 순종하는 삶으로(루카 2, 51 참조) 하느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을 채우셨던 것입니다(루카 2, 52 참조). 그러한 순종은 자녀가 부모에게 뿐만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에게 그리고 부부인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러한 마음 채워주기란 서로의 마음을 서로가 따르는 것이라고, 그런 마음 서로 따르기가 즉 순종이라 하여 그것을 강생하신 주님이 실천하셨다고 오늘 복음은 우리 모든 가정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서로의 마음 따름 즉 순종의 사랑으로 우리 모든 가정을 정화 할 다짐을 하면서 가톨릭 기도서 105쪽의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함께 바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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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5. 10:30 @ 서산 예천동 성당 
하부내포성지주임 윤종관 신부님 강론


예수 성탄 대축일 낮미사



성탄 축하합니다!

서로 기쁜 Christmas예요!” 하고 인사말을 교환합시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 모두 함께 기뻐하는 Christmas입니다.


Christmas에서, 즉 성탄 미사에서 봉독된 전례 말씀 가운데 아주 소박한 표현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 봉독의 첫 구절인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 5278절입니다. 소박한 소식 전달이면서 한편 극적인 감동으로 전하는 외침입니다.


그 표현은 이렇습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느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고 시온을 향해 이르는구나, 저 소리, 보초의 외치는 소리.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주님과 눈이 마주쳐, 모두 함께 환성을 올리는구나.”(이사 52, 710 참조)


이 얼마나 순박합니까, 그 표현이 말입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하는 그 첫 구절의 감격 표현을 다른 성서 번역문에서는 어여쁘다, 기쁜 소식 전하려고 산등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저 발꿈치!”(Quam pulchri super montes pedes annuntiantis)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영어 번역 참고 : How wonderful it is to see a messenger coming across the mountains, bringing good news, the news of peace! ; 영어 미사경본 참고 : How beautiful on the mountains, are the feet of one who brings good news, who heralds peace, brings happiness, proclaims salvation, and tells Zion, "Your God is king!").


우리말에 며느리가 미우면 그 발뒤꿈치도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와는 반대로 이 성서 말씀은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의 발꿈치가 그토록 예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쁜 소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살려 주시러 오시는 분이 오신다는 소식이지요. 그 주님이 오시면서 우리를 처다 보시는데 그분과 내가 눈이 마주쳐서 가슴 터지는 감격의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고 오늘 예언서는 실토하고 있습니다(이사 52, 8 : Vox speculatorum tuorum ; levaverunt vocem, Simul laudabunt, Quia oculo ad oculum videbunt, Cum converterit Dominus Sion). 


그분과 눈이 마주쳐(oculo ad oculum)” 환호성을 지른다는 이 구절을 읽는 저에게 문득 지난 대통령 선거기간의 일이 연상됩니다. 대통령 후보들을 지지하는 군중의 환호 장면을 중계하던 TV 화면이 연상됩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후보와 눈이 마주쳐 악수하려고 아우성들을 처댔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런 현장을 지나간 일도 있습니다. 우연히 부여의 은행에 일보러 갔다가 그때 마침 그 부여 시장 통에 잠간 지나가는 박근혜 후보와 악수라도 한 번 하려는 아우성 때문에 제가 은행 골목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빠져버리고 골목이 열려서 은행에 들어갔더니, 그 은행의 한 여직원이 허겁지겁 들어오며 박근혜와 악수했다면서 수다를 떠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한 여직원이 그 손 죽을 때까지 닦지 마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박근혜와 악수했다는 그 여직원은 정말로 죽을 때까지 그 감동을 간직하며 행복해 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국가원수가 된 사람과 손을 잡아봤다는 그 여직원의 행복감이 죽을 때까지가 아니고 앞으로 5년 후에는 씁쓸한 추억으로 변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그러자면 그 새로이 국가원수가 된 사람이 진정 명예로운 임기를 마칠 만큼 잘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오늘 이 성탄에 듣는 기쁜 소식의 전갈은 우리에게 있어 한 순간 지나가는 추억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이 우리에게 지금 여기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우리와 잠간 악수하고 지나가시는 게 아니라, 그분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Immanel의 현실,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이 성탄 미사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서 1118절의 소식인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서 11~18절은 요한복음서의 서문(Prologue序詩前文)이며 이 요한복음서 전체를 축약하여 우리 구원이 무엇인지 세상에 알리는 典文(Canon공식 선언문)인 것입니다. 이 선언문의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분은 곧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다. 그분 자신은 그래서 하늘의 은총 자체요 진리 자체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매일같이 삼종기도를 바치며,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하고 고백합니다. ‘Immanuel’이라는 이름으로 그분을 일컫는 것입니다. ‘Immanuel’이신 그분은 그렇게 우리 가운데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오로 사도는 오늘의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 잘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이시오,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예배를 드려라.’”(히브 1, 1~3. 6)


그러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요, 진리로서 오실 때의 이 세상 실상을 오늘 요한복음서의 서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빛이신 그분이 오시는데 이곳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는 지적입니다. 앞서 히브리서의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듯이 본래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이 창조 되었듯이(히브 1, 2참조), 모든 것이 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말씀을 통하여 생겨나고 그 말씀으로 생명을 얻었는데도(요한 1, 3~4. 10 참조),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요한 1, 11 참조). 


이렇듯 세상은 어둠이 지배하고 무지에 싸여 있다는 이 현실의 한 가운데서 그분은 빛이요 생명으로 오신다고 요한복음서의 서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을 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요한 1, 5 참조),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현실의 암흑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며(요한 1, 14 참조), 그분의 충만한 은총과 진리를 받고 또 받을 수 있게 되었노라(요한 1, 16 참조)는 기쁜 소식을 오늘 요한복음서의 서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그렇게 암흑과 무지를 꿰뚫고 우리에게 전해옵니다


그렇듯이 오시는 분은 그래서 일 년 중 가장 어둠이 깊고 밤이 긴 동지를 가로질러 다시 떠오르는 태양으로 오시기에 이렇게 1224일 밤을 지새운 다음 1225일 아침을 맞이하며 주님 오신 곳에 모여 온 것입니다. 이렇게 오시는 소식이야말로 진정 어두운 곳에 헤매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복음이기에 교회는 옛적에(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이전까지) 미사를 끝마칠 때마다 저 어두운 곳의 상징인 북쪽을 향하여 요한복음서 서문을 매일 미사의 끝맺음으로 봉독하곤 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 전하는 그 때마다 생명과 빛, 즉 은총과 진리를 세상에 부어 넣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 전파의 전 과정을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육화’(Incarnatio Verbi)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 육화의 신비가 선포 성취되는 사건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언과는 달리 구세주 오시는 과정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탄생 과정이 그렇습니다. 그분 탄생의 소식은 어처구니없게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여행 나온 만삭의 임신부가 여관방을 얻을 수 없어 급한 김에 마구간에서 해산하여 그 핏덩어리 신생아를 가축의 여물통에 눕혀 놓았다는 어이없는 소식입니다


이러한 아기의 출생 소식은 위대한 지도자의 출현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역사적 인물들의 출생지에서는 신화 같은 어떤 위대한 내력을 듣게 됩니다.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곳은 무슨 영험한 풍수지리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팔자가 기구한 사람들은 그 출생지부터가 어떤 비극적 상황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의 어떤 아저씨가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도피 생활을 하다가 잡혀서 강제 입대를 하였는데, 그분의 부인이 논산 훈련소의 면회 날짜에 남편을 면회하려고 시어머니와 함께 작은 솥단지와 집에서 키우던 씨암탉을 잡아 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만삭의 몸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뱃속의 아기가 세상에 나오려 해서 논산 어딘가의 들판에 내려 아기를 낳았답니다.


그런 바람에 시어머니만 간신히 훈련소의 아들을 면회하고 그 부인은 길갓집에 맡겨져 있다가 핏덩어리를 안고 돌아왔는데, 그 아기를 보고 싶은 군인 남편이 전방에서 탈영했다가 다시 붙잡혀서 감방 생활을 하게 되었고, 후에 세월이 지나 그 아기가 커서 군인 가게 되었는데, 강원도 어느 전방에서 사고가 나서 죽었습니다. 그 아이의 운명은 그렇게 길가에서 태어나 객지에서 죽은 운명이었습니다.


오늘 태어난 예수님도 그렇게 객지의 외양간 동물들 사이에서 여물통에 태어나서 결국 객지에서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들의 저주 속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팔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개 병원(산부인과)에서 태어나서 병원에서 죽어 병원(영안실)에서 북망산으로 떠나갑니다. 태어나는 곳과 죽는 곳이 같게 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가 봅니다. 우리 구세주는 하느님이시라면서 하늘에서 태어나 내려오신 분이 아니시고, 인간들의 따돌림 속에서 세상에 태어나 인간들의 저주 속에서 세상에 묻히신 분, 즉 죄악의 한 가운데 오셔서 죄악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시고 이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새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시려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빛이시지만 어둠 속에 오셨고, 생명이시지만 죽음의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서의 서문이 선언하듯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요한 1, 14 참조)


그렇듯 우리는 하느님 당신 자신이 우리 인간들의 비참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러 인간들 가운데 사람으로 오심을 보면서, 그분 때문에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그 어둠을 이길 수 있는 빛, 즉 새로운 희망을 우리 인류가 지닐 수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 축제는 우리 성당의 우리만의 축제가 아니고 온 인류의 축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만의 성탄 축제로 끝내지 맙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 강생의 은총을 함께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복음서가 우리를 깨우쳐 준 말씀을 명심합시다. “그 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요한 1, 11)고 지적한 말씀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분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 3 참조)고 오늘 상기시켜 주는 말씀이 그렇듯이,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보내신 분이라고(요한 1, 7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는 만국 앞에서 당신의 큰 능력의 팔을 걷어붙이시고 세상 구석구석에 당신 승리를 현실화 하시려고”(이사 52, 10) 오신 분이시라고, 그분의 강생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들은 우리는 이제 참 빛으로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도록(요한 1, 9 참조), 그리고 그분을 믿어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게 되도록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아가 하느님 강생의 이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그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파하여, 주님의 구원 즉 우리의 평화를 펼치기로 합시다. 하여, 저기 저 온 세계에 우리 구세주는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사명을 다짐하기 위하여 이제 우리 모두 신앙을 고백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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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4. 20:30

보령 동대동 성당 : 윤종관 신부님 강론


예수 성탄 자정 미사



성탄 축하합니다! Merry Christmas! 서로 인사해봅시다. “기쁜 Christmas예요!” 하고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Christmas를 축하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강생을 미사로 재현하며 오늘의 이 밤을 지새우는 것을 ‘Christmas’라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Christ) 강생의 미사(Mass)‘Christ-mas’라는 이 밤의 경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Christmas를 이 어두운 밤에 봉헌하는 사연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어둠(동지의 계절)의 한 가운데서 순결한 마음으로 그 어둠을 가로질러 하늘에 영광을 바쳐드리는 그 사연은 무엇입니까그것은 아마도 질기고 질긴 어떤 집착의 너울을 지금에서야 걷어버릴 수 있는 때가 왔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그토록 길고 긴 어떤 고독의 터널을 이제 겨우 벗어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지금까지 억눌려 온 어떤 압박의 덩어리를 분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요?


이렇듯 우리네 모두는 이러 저러한 고통스런 삶의 역정을 지나왔습니다. 질기고 질긴 너울 같은 집착으로 자신의 한계 속에 갇혀 살아왔으며, 세상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 가운데 진정 나의 고민을 이해하여 해결해 줄 사람은 없고 오해와 불신으로 길고 긴 고독의 길을 걸어야만 했으며, 세상과 부딪치는 일은 고역이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얻는 게 스트레스뿐이며, 사랑을 빙자한 가까운 사이끼리란 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부담뿐인 그런 인간관계요, 그러한 인간조직의 어떤 압박으로 나를 짓눌러 온 것입니다.


사실 오늘 밤 이 성탄축제의 전례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바뀌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전환을 이룰 것이라는 메시지를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됐습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혹사의 장대와 몽둥이가 정녕 부수어질 것입니다.”(이사 9, 1~3 참조)


이런 뉴스를 우리는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서에서 청취하였습니다. 당하고만 살아온 지난 세월을 보상해 주실 분이 오신다는 소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갈은 막강한 통치권을 행사하여 이 흉포한 세상을 평정함으로써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줄 왕이 되실 아기가 탄생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뭇 정치적 변혁으로 우리의 세상을 바꿔 줄 제왕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다는 소식인 것입니다(이사 9, 3~6 참조).


하지만, 그러한 예언과는 달리 오늘의 복음서가 이 밤에 전하는 소식은 어처구니없게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이 밤에 구세주 그리스도가 마구간에서 탄생하여 여물통에 누워 있다고, 한 밤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동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소식을 전했다는 것입니다(루카 2, 8~12 참조). 위대한 지도자의 출현 이야기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상스런 이 밤의 메시지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 깨달음을 얻으려면 우선 오늘 밤 전례의 제2독서(디토 2, 11~14)로 바오로 사도가 하신 말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구원의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한다(디토 2, 1112 참조)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곧 오늘 밤 마구간의 구유에 탄생한 아기를 구세주로 알아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타락과 분망 속에서는 아기 구세주를 만날 수 없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티토에게 보낸 서간 중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2,11~15)

11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12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13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15 그대는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이러한 것들을 말하고 권고하고 또 꾸짖으십시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베들레헴 동네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동구 밖 외진 곳에서 예수 아기는 탄생했습니다. 그 아기는 인간들의 동네에서 쫓겨나신 분처럼 마을 밖 축사에서 자신의 처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곳 동물들은 그분을 내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동물들한테서만 환영받은 구세주인가 봅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깨달음을 이끌어 주는 오늘 복음의 의도를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타락 상황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무공해 장소라 할 수 있는 마을 밖 동물들의 처소에서부터 인간 구원의 첫 메시지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곳은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 하신 말씀대로 인간들의 불경건과 세속적 욕심을 찾아볼 수 없는 곳입니다. 인간들끼리 다투고 시기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속이고 무시하고 협잡하고 탓을 덮어씌워 따돌리는 등의 죄악을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진정 하느님의 손길만이 체험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눈을 뜬 어느 부부의 이야기


그렇듯 하느님의 손길만을 깨달아 새롭게 눈을 뜬 어느 부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읽은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19966월호 32)에서 얻어온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했지만 서로를 위하는 행복한 부부가 있었다. 이 부부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아기뿐이었다. 아기를 갖기 원했지만, 아기는 생기지 않았다. 기독교인이기도 한 부부는 날마다 아기를 내려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교회에 나가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 16, 드디어 부인이 아기를 갖게 되었다. 너무나 기뻤던 부부는 부둥켜안고 울었고, 주위 사람 모두 축복했다


한 달, 두 달이 흐르고 드디어 기다리던 아이와 만나는 순간이 왔다. 아이를 낳은 부인은 빨리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입원실을 들락날락하는 가족과 친척들, 친구들, 이웃들의 얼굴도 모두 슬퍼 보였다. 부인이 남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우리 아기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왜 아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거예요!” 남편의 눈에서 대답 대신 먼저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기는 보기에도 흉측한 기형아란 말이오.” 아내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안 돼! 안 돼!”를 외치던 아내는 아기의 흉측한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는 아예 할 말을 잃었다

아기도 울고 남편도 울고 온 가족이 울었다. 그 날 밤 아내는 한잠도 자지 않고 어둠 속에서 기도를 올렸다. 이튿날, 병실에 들어서는 남편을 향해 아내는 방긋 웃어 보였다. 아내는 남편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어젯밤 밤새도록 기도를 했어요. 하느님의 뜻을 물었지요. 우리 두 부부가 어찌해야 하느냐고요.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 아기를 어느 집에 보내야 사랑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너희 가정에 그 아이를 보냈단다.’ 라고요. 여보, 그 아이 잘 키워야겠지요.”


우리가 성탄 전야에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 우리는 이 밤에 무얼 찾아 이 Christmas에 참여하나요?

우리가 이 Christmas Eve에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산모가 기도하고 되찾은 마음, 그 마음은 Christmas Eve의 마음입니다. 본래 아기를 내려달라던 기도로 하느님을 향하던 마음이었다면 이제 기형아인 아기를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또한 같은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 마음은 우리 또한 이 캄캄한 Christmas Eve에 찾아야 할 마음입니다. 우리가 처음 가졌던 마음(초심)입니다. 그 우리의 되찾아야 할 마음은 White Christmas 같은 환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일까 생각할 수 있었던 마음일 것입니다. 아직 어느 누구도 미워해 보지 않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최초의 마음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보았을 때(그 다른 사람은 아마 엄마일 것입니다만), 아직 미워해 보지 않은 하얀 마음으로 그 다른 사람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마 오늘 밤 이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 사람들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가축들의 외양간에서 태어난 저 베들레헴의 아기는 그래서 세상의 배척을 받은 그 곳에서 잘못된 이 세상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첫 시간으로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신가 봅니다. 세상의 어둠만이 그리고 고독만이 그분을 맞이하였지만 그분은 하얀 마음으로 이 세상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외양간에는 미워하는 사람도, 질시와 원망을 일삼는 사람도, 싸우고 따돌리고 거짓을 휘두르는 사람도 없고, 다만 가축들만이 밤을 지새우는 동안, 순수의 허공을 까만 어둠으로 덮은 하늘에서는 별들만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그 외양간에 쏟아 붓고 있었지요. 아마 그래서 그 별들의 눈빛들은 곧 저 벌판의 외로운 목동들에게까지 천사들의 합창이 되어 울려 퍼졌던 것 아닐까요! 그 합창은 이러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 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난주간에 우리나라의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하는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국민들의 대략 반절은 자기들이 잘 선택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여 승리감을 맛보았을 수 있을 것이고, 다른 반절은 그러질 못해서 패배감을 곱씹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듯 소란스럽던 선거가 지나고 연이어서 이틀 후에는 1년 중 가장 밤이 긴 동지를 지났습니다. 길고 길었던 선거기간의 소란이 가장 긴 밤의 어둠에 묻히고 이제 새로이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이 주간에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란을 긴 동지의 밤에 묻어버리고 고요한 성탄의 새벽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는 이제 정치적 승리감도 패배감의 씁쓸함도 다 떨거내고 새하얀 희망의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듯 새하얀 마음에서라야 서로를 잘 받아들이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진정 서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이라야 세상에 진정 평화를 깃들게 할 것입니다. 참 평화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비로소 찾아지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야 평화가 무엇인지 알지요. 그 별들과 같은 천사의 합창을 듣고 깨달아 순결한 마음 되어 달려온 목동들에게 그 하느님의 사랑 자체이신 아기 예수 그렇게 새로운 세상의 구세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 목동들처럼 새하얀 마음 되어 그 아기 앞에 노래합시다. 가톨릭성가 99장입니다. 이 성가는 194년전(1818)Austria의 산골마을 Oberndorf니콜라오 성당 젊은 Joseph Mohr 신부가 시를 쓰고 Franz Gruber 라는 樂士가 작곡하여 그곳 가난한 시골 사람들과 성탄 밤 미사를 올렸던 성가이지요. 저는 오늘 밤 이 성가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여러분과 함께 부르고 싶습니다. “으로 바꾸어서 말입니다.


1. 고요한 맘, 거룩한 맘, 세상엔 없는 맘, 이 맘 우리는 찾았어요. 구유 옆에서 찾았어요. 구세주 나신 이곳, 여기서 찾았어요.

2. 고요한 맘, 깨끗한 맘, 우리가 찾은 맘, 처음 우리가 가졌던 맘. 오늘 주님이 찾아준 맘, 새하얀 마음으로, 이 세상 다시 보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 밤에 되찾은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의 구원 즉 우리의 평화를 펼치기로 합시다. 거기 우리 구세주는 탄생하실 것입니다. (끝)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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