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2013 2 24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지금 여기, 하늘나라!

산 위에서의 체험으로 ... 



사순절을 지내면서 그 두 번째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측근 제자들과 함께 산위에 올라가셔서 보여주신 것을 전하는 성경기사를 읽게 됩니다. 이와 똑같은 복음 성경의 내용에 따른 축일을 교회는 매년 86일에 지내기도 하는데, 그 축일의 명칭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變貌) 축일이라 합니다. 옛적에는 이 축일을 좀 어려운 한자어로 현성용(顯聖容) 축일이라 했습니다. 그 뜻은 거룩한 용모를 찬란하게 보여주신 축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찬란하게 보여주시는 그분의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 세 사람이었음(루카 9, 28 참조)을 오늘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모습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은 아무러한 때나 아무데서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오늘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루카 9, 2829 참조).


이렇게 오늘 복음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을 제가 강조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사제 생활해오면서 수많은 애환을 겪어왔습니다만, 그 중에서 제가 가끔 자책하면서 가장 마음 아프게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일하던 본당에서의 일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오래 근무하신 내외분을 예비교우로 맞이하여 저 나름으로 성심껏 교리와 신앙 지도를 해드려서 그 부부에게 기쁘게 세례를 베풀어드렸습니다. 그 부부께서 영세하신 후 저는 그분들 사시는 지역의 신자들과 잘 어울리도록 구역반 모임에 안내를 하여 드리고 본당의 성경 공부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권고를 했습니다. 당시 그 본당에서 저는 매주간마다 신자들께서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성경 해설을 본당주보 형식으로 발행하여 배부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도 그러한 성경 읽기 프로그램에 따라 점점 더 신앙적 기쁨과 신심의 성숙을 얻도록 이끌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본당의 전례 활성화를 위하여 전례공부와 전신자의 성가개창 연습을 시켰습니다. 헌데 그리 하던 중에 그 부부께서 저에게 항의조로 하시는 말씀이 천주교회는 시키는 일이 너무 많아서 참 힘드네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부부에게 저는신앙생활이란 세례 받은 것으로 한 번의 자격증을 얻은 삶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깊이를 더해가고 성숙해져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그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그 부부께서 보이질 않기에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드렸더니 오지 말라며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그 구역장에게 그 부부의 사정을 알아본즉, 그분들은 천주교 믿기가 힘겨워서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불교의 절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불교 사찰에 다니면 우리 천주교에서처럼 매주간 정해진 날에 모이러 가지 않아도 되고, 우리 천주교회에서처럼 밥을 굶어야 하는 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적인 공부를 하라는 닦달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안면도 성당에서 지낼 때 느낀 것인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께서는 멀리서 주말관광으로 안면도에 와서도 성당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찾아와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요일이라는 그 주말휴가의 기회에 관광지에 가서 일부러 사찰을 찾아가 불공을 드려야 하는 불교의 계율이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여튼 우리 천주교 신자들께서 관광지에 가서까지 주일미사 봉헌을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그것은 참으로 갸륵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천주교 신자들의 태도는 곧 오늘 복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측근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라 힘들게 산에까지 올라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만이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고 신앙으로써 진정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특별한 노력을 요구당하지도 않고 편리함을 도모하기만 하는 것이 신앙의 길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힘들여 올라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해서 저는 신앙의 길이란 등산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산위에서의 체험을 전하고 있는 성경은 산을 특별한 장소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러 올라간 곳, 모세가 민족을 구해야하는 사명을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곳,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체험한 곳이 산이었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의 측근 제자들이 주님께 대한 특별한 체험을 한 곳이 곧 산이었습니다.


성경에서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일반적 체험으로도 산은 그 영험함으로 인하여 거기 들어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여줍니다. 그리고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하고, 정작 산꼭대기까지 오르면 거기 오르면서 흘렸던 땀처럼 잡다한 생각과 자만과 모든 욕심을 자신에게서 떨쳐낸 마음이 되어 산 아래 세상살이 사이의 갈등이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마치 산이 하늘과 가까운 곳이듯이 거기 오른 사람은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마음이 되어 잡다한 세상의 일거리에로의 집착을 벗어버리는 순간이 됩니다.


저는 15년 전에 개인적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였습니다. 그 종주는 일주일에 하루씩 구간을 나누어 가는 산행이었습니다. 하루의 구간 목표로 삼은 산의 허리에 접근하는 그날그날의 새벽마다 여명의 하늘 아래 마루금을 드러내는 그 산의 정상을 바라보게 되면 가슴이 고동치곤 했습니다


하늘과 맞닿은 저 산꼭대기의 기상으로 이 땅위에서 버둥대는 나 자신을 이겨보자는 결의에 차서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한번은 영하 10여도로 떨어진 추위 가운데 한 밤을 자동차로 달려서 강원도 태백과 정선 사이의 만항재에 이르러 새벽 4시에 함백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밭의 어두운 산허리를 오르면서 정상의 턱밑에서 신비스럽게 밝아오는 여명을 따라 꼭대기에 빨리 올라 해돋이를 보고픈 마음으로 성급히 기어오르느라고 넘어지기를 여러 번, 드디어 1,573m의 정상에 오르는 순간 험준한 동녘 준령위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희를 전하기 위해서 대전에 있는 친구 신부에게 휴대전화를 걸었습니다. 아직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짜증스런 대답을 하는 그분에게 그 일출의 장관을 전하기에는 저의 말이 참으로 한계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의 장관을 볼 수 없는 산 아래의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그 순간 심정은 아마 오늘 복음 성경에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면서 예수님께 거기 머물러 지내자고 말한 베드로(루카 9, 3334 참조)의 기분과 같은 것이었다 할 것입니다. 그 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은 아마 제가 함백산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의 장관보다 훨씬 찬란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태양보다도 더 빛나는 그분의 모습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땀 흘려 산을 오르듯이 우리가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얻어야 할 신앙의 체험인 것입니다. 목적도 없이 세상의 편안한 길을 배회하는 삶이 신앙의 길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주인공이신 그분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건네는 예언자들(모세와 엘리야)은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당할 고난과 죽음에 관한 대화를 하던 것이었습니다(루카 9, 3031 참조). 그러한 영광의 순간은 고난과 죽음을 전제로 한 미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미래가 당도하기까지는 자기들이 본 바에 대하여 뭐라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루가 9, 3031 참조). 그것은 우리 또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까지는 지금의 현실을 가지고 진정 신앙으로 성취할 목표를 잣대질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신앙으로 성취할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는 오로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 35)하는 말씀에 따를 수밖에 다른 기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하여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오리무중에 즉, “구름 속에서”(루카 9, 35) 오로지 예수님 가시는 길을 찾아 그분 말씀 따라 갈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사순절의 길을 걷는 동안에도 그분의 영광스런 모습을 찾는 발걸음이 되어야겠기에 교회는 그분의 수난을 예견하는 순간적 빅 이벤트로써의 그 영광 체험으로 우리의 용기를 북돋우고 있습니다. “임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었기에 그 모진 길을 가셨으리라는 말은 옛 유행가의 노랫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임을 오늘 복음이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는 복음 성경의 단락에서 그 첫 구절을 잘 살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 28)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번 2월의 <매일미사>24쪽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이 구절에서 앞부분을 빼고 그 때에 예수님께서()’라고 인쇄되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할 내용을 <루카 9,28-36>라고 제시하고 있는 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거두절미하고 편의성을 따른 지침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불만스럽습니다. 미사 참례하는 신자들이 성경의 전후 배경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교우님들께서 <매일미사>책에 의존해서만 전례를 참례하는 게 불만스러워서 전에 본당신부 노릇하던 시절에는 <매일미사>책이 아니라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라고 교우들을 닦달했습니다. 그것 때문에도 앞에 예를 든 부부 교우께서 힘들다면서 불교로 개종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본론에서 비껴나간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게재에 저의 주장을 해보았습니다.


하여튼, 오늘 복음의 첫 구절 루카 928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라는 시간과 산에오르셨다는 장소를 강조한 내용을 주목하자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장소와 시간은 곧 하늘나라가 성립되는 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3명의 제자들이 산위에서 체험한 그 는 언제였을까요? 그것을 눈치 채려면 그 구절의 바로 앞 구절을 읽어보면 됩니다. 루카복음 927절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고는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셨습니다(루카 9, 27). “이 말씀을 하시고는 여드레쯤 되었을 때”(루카 9, 28)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오르셔서 오늘의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더러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들일까?’ 하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3명 제자들과 같은 예수님 최측근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열심한 신자들이어야 합니다. 그 열심한 신자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라가면서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들’(루카 9, 2324 참조)입니다. 그런 사람들이어야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루카 9, 27)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는 여드레쯤 되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루카 9, 28).


그렇다면 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죽기 전에 이미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곧 번쩍이는 옷을 입으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곧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루카 9, 3031 참조). 이때 베드로는 넋이 나간 채 말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 현실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초막 셋을 짓자고 말입니다(루카 9, 3233 참조). 


그러나 정신 나간 베드로가 얼마나 착각하고 있는 지를 그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어느 듯 구름으로 덮이고 맙니다. 그 구름 속에서는 너희는 예수님의 말을 들어라.”하는 말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아무에게도 그 본 것을 말하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루카 9, 3436 참조). 그리고는 다음 날 산에서 내려와 세상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들은 마귀 들린 사람 때문에 소란을 떨고 있었습니다(오늘 읽은 루카 9, 2834의 다음 단락 참조). 산에서 체험한 천국과 대비되는 세상의 현실로 돌아온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우리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현실하느님 나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 마침 빌그림 신부님(Fr.B.Grimm)의 이번 주 강론 말씀을 참고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아시아 가톨릭 뉴스(UCANEWS.COM)주일 복음 묵상에서 다음과 같이 강론하고 있습니다. 'The problem is that words just do not suffice'라는 제목의 강론인데 그 내용이 대충 아래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신들이 걸어가고 있는 현실의 세상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하늘을 목표 삼아 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일부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하늘나라를 지향하는 우리의 신앙이 그런 식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는 그림 신부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림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란 어느 장소와 어느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공(時空)이란 우주 안의 것입니다만, ‘하늘나라란 그걸 초월한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천국은 시공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서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였던 것입니다. ‘하늘나라란 여기 언제가 있었던 것 혹은 얼마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 또는 앞으로 생길 어떤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바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이 있는 사람들이다.”(필리피서 3, 20)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시민권이란 이 세상의 이 사람 저 사람의 정치적 시민권과는 다른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권이란 진정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 제자들이 예수님 따라 산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세상에서 보지 못한 현상으로 달라진 것을 체험합니다. 그분의 옷이 번쩍번쩍 빛나며 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나 또는 하늘의 현상을 그릴 때 빛나는 형상과 훈광(暈光)을 넣어서 묘사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현상은 우리 현실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란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볼 수 있는 것인 양 생각합니다. 이건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틀린 말입니다. ‘하늘나라는 아직 오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현실로 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우리는 지금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 하늘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희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하늘나라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고, 우리의 삶 속에는 이미 하늘나라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받음으로 인하여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늘나라가 이미 주변 현실로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림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음과 같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을 때 거기가 하늘나라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이미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 그곳이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상태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예배를 올립니다. 마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곳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끼었듯이, 우리가 하느님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 상태가 곧 이미 하늘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하늘나라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란 한국이라는 나라, 미국이라는 나라, 등등의 현실 정치적 단위의 국가 즉 어떤 곳과 어떤 시기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내가 사는 삶 속에 있는 나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속에 있는 하늘나라사람이 바로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여기, 내가 사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한 하늘나라 사람임을 확인하고 그 시민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순절이라는 특별한 시기를 각성하여 지냅니다. 그 각성하는 방식이 기도, 참회, 근신, 자선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예수님의 최측근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각성을 위하여 우리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우리의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이 아무 말도 못하였듯이 우리는 입으로 말하는 하늘나라 체험이 아니라 마귀 들린 사람들로 소란스런 현실의 세상에서 악을 추방하면서 우리가 당하는 고뇌를 묵묵히 걸머지고 부활의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 따라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듯이 우리도 부활절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의 길, 즉 고뇌와 참회 보속의 길을 가는 것은 진정 우리가 주님과 함께 얻고자 하는 영광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면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그 사순절 속에 영광의 부활의 날이 이미 함유되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봄이 왔음을 느끼고 깜짝 놀라서 땅속의 모든 미물들이 잠을 깨어 뛰어나온다는 경칩(驚蟄)이 멀지 않은 이즈음에 아직도 추위가 풀리지 않는 날씨라서 혹여 봄은 아직도 먼 데 머물러 있지 않은가 하여 움츠러들 수 있습니다만, 분명히 봄은 지금 우리의 산야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히려 찬바람으로 깜짝 잠을 깨고 서둘러 새로운 생장을 준비하라는 메시지가 이 사순절 중반의 소식인가 합니다.


그렇듯이 부활절은 멀기만 하고 우리의 사순절이 길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기쁨을 향하여 가기까지는 고뇌와 참회로 우리 자신을 일깨워야 함을 오늘 복음은 그 사순절 메시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강론 원고를 작성하다가 내다본 밤하늘은 정월 열나흘 달이 휘영청 뜬 하늘입니다. 잡곡밥 아홉 그릇까지 먹으며 맞이해야 한다는 대보름이 내일입니다. 원고를 작성하다가 한숨 돌리고자 밖으로 나가 바라본 열나흘 달은 두어 시간 전에 앞산 안테나에 걸려있더니 어느 듯 중천에 떠서 웃고 있네요. 만월에 아직 못 미친 열나흘 달이 오히려 더 예뻐 보입니다. 나를 내려다보면서 윙크하느라고 얼굴 옆모습이 조금 일그러져 있군요. 그러면서 내일 밤 다시 만나자 하는군요. 그렇게 보름달 다시 2(음력)에 뜨게 되면 부활절이 오는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사순 제1주일, 2013 2 17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내 그림자와 같은 마귀

성경말씀만 잘 외우고 있어도...!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고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면서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힘겨운 40일간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부활절을 준비하는 전통을 준수합니다.


본래 초기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축일 전 사흘 동안 특별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부터는 그 사흘 동안의 일을 40일 동안으로 늘려서 실천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셨던 것처럼(루카 4, 2 참조) 기도와 극기를 통하여 악()의 유혹을 끊고 새로운 다짐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의 발로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자연스럽게 사순절(四旬節) , ‘40일간의 시기(Quadragesima)’라고 일컬으면서 봉재(封齋)시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로 영어로는 Lent, 독일어로는 Fastenzeit라고 합니다. 절식하면서 검소하게 지내는 시기라는 뜻이지요.


이러한 사순 시기는 공교롭게도 봄의 절기입니다. 만물이 소생하여 새로운 기운으로 생동의 환희를 펼치는 이 절기에 하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극기로써 자신을 움츠러들게 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해마다 맞이하는 이 사순절은 저의 기분에도 매우 못마땅합니다. 길고 긴 겨울의 추위를 가까스로 헤쳐 나와 화창한 봄날을 즐기고자 들뜨게 되는 우리네의 자연스런 상춘(賞春)’의 분위기에 이 사순절이 찬물을 끼얹는 격입니다. 내일이 마침 봄을 재촉하여 비가 내린다는 우수(雨水) 절기이듯이 오늘 걸맞게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입니다. 우리 만수리 앞 아미산의 아직도 두껍게 쌓여있는 눈이 이 우수의 비로 녹아내리면서 이제 정말 앞 개천의 봄버들이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봄철이 되면 어디 함께 놀러가자는 제안이 많습니다. 그리고 전에 알던 분들이 봄나들이로 지나가다가 찾아와서 함께 먹고 마시자고 저를 밖으로 불러내게 되면 사순절의 검약정신을 빼앗기게 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 사순절이 왜 하필 이러한 절기에 오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오늘 사순절 제1주일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을 당하신 기록이 나오는데, 이 사순절에 봄나들이 사람들이 나를 유혹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생동하는 자연도 그렇거니와 우리 인간들도 들뜨게 되고 집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에 맞춰 이 봄의 계절은 마음을 산만하게 흩으려 놓습니다. 오죽하면 봄바람에 처녀들 바람난다는 속된 말이 생겨났을까마는 봄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계절입니다. 해서 사순절은 유혹의 계절, 곧 봄입니다.


하지만 봄나들이 상춘객들의 희희낙락하는 얼굴보다는 봄볕에 그슬려 임도 알아보지도 못한다.”는 속담의 말마따나, 봄바람에 터진 손등과 그슬린 얼굴로 부지런히 새로운 생명을 심고 가꾸는 논밭의 농부 같은 태도로 이 계절의 뜻을 헤아리라는 것이 사순절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해서, 행락으로 소비를 부추기는 계절이 아니라 땅을 갈고 씨를 심어 생산을 시작하는 봄의 계절이어야 하는 것처럼, 이 사순절은 우리 자신을 다시금 추스르고 마음의 밭에 은총을 심어 새로이 변화하는 삶을 일으키는 시기인 것입니다. 즉 농부가 묵은 땅 갈아엎고 새 흙으로 고르게 다져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는 봄철이듯이, 우리는 이 사순절에 자신의 낡은 습관을 떨쳐버리는 회개로써 생활 속에 주님의 은총을 씨앗처럼 심어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부활절을 준비해가야 하기에, 이 사순절은 은총의 시기라 일컬어집니다.


매년 이렇게 봄이면 다시 은총의 사순절을 새롭게 맞이하듯이, 늘 그렇게 주님의 은총은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여줍니다. 그러한 새로운 인간으로의 변화를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유혹을 이기시는 모습에서 터득해야 합니다.


유혹이란 무엇입니까?


유혹이라는 것은 나를 해코지 하려는 원수가 눈에 보이게 나타나서 마수를 뻗치는 것이겠습니까? 그 원수란 나 아닌 타자(他者)로서 나타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걸려 넘어지게 올가미를 놓아 유혹하는 악마는 사실 나 자신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내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즉 악마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늘 나와 떨어지지 않고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닙니다. 그 악마의 모습은 곧 나를 붙어 다니는 나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나에게 늘 붙어 다니면서 나를 약하게 만들고 나를 죄악에 빠지게 하는 악의 세력이 곧 악마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늘 그렇게 나에게 붙어 다니는 그러한 악마의 모습은 곧 나 자신의 그림자일 거라는 생각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담 이후 원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늘 그렇게 붙어 다니는 것이 악의 유혹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해서 악한 생각은 나의 그림자처럼 늘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나를 그 악한 생각에 담그게 합니다.


오늘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도 인간이시기에 그분에게도 그림자가 있었듯이 악마의 유혹이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마터면 빠지게 되는 것이 유혹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세상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그러한 유혹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유혹하는 악의 세력이 얼마나 집요하고 강렬한 것인지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오늘의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 사화’(루카 4, 1-13)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렇듯 집요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다가왔던 유혹의 악마는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었습니다. 인간의 그 본능이란 나 자신을 붙들고 나를 약하게 하는 육욕과 권세욕과 자기과시욕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인간을 어떻게 흔드는 것인가를 우리는 오늘 악마가 배고픔에 대하여, 명예에 대하여, 그리고 자만심에 대하여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에서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육욕은 어떠한 것입니까? 우리는 배고픔을 참으로 이기기 어려워하는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육체는 배고픔을 면하기로 그 욕망을 멈추지 않고 더욱 나아가 끊임없이 쾌락을 채우려고 합니다. 해서 먹고 마시고 육체의 즐거움을 채우기 위한 향락 산업이 도처에 성황을 이룹니다. 이러한 풍조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루카 4, 4 = 신명 8, 3 참조)는 성경 말씀으로 육체의 욕망을 물리치십니다. ‘빵만으로라는 말은 대통령 깜을 뽑을 때 경제문제를 우선시하는 선거 캐치프레이즈와 같은 것입니다. 먹고사는 게 우선이고 도덕이나 정의감은 뒷전인 현실이 빵만으로의 마귀 장난인 것입니다.


우리의 권세욕은 어떠한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굴하게 만들기 까지 하면서 세상에서 얻는 것을 가지고 권세를 지닌 것처럼 착각합니다. 권력에 빌붙어서 신념을 팔아먹는 짓은, 요즘 높은 자리 후보자로 지명 받고 국회 청문회를 통하여 망신당하는 사람들이나 정치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평범한 우리들도 세상 체면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는 짓을 숨 쉬듯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듯 세상에 대한 굴종으로 그 세상 것을 얻으려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는 성경 말씀(신명기 6, 13 참조)을 상기시켜 주십니다(루카 4, 8).


우리의 자기과시욕은 어떠한 것입니까? 우리 인간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탓에, 우리 그리스도 신자라는 사람들도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고 세상살이에만 몸을 바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치 하느님 아니 계신 듯 착각하면서 늘 인간 자신의 생각만을 척도로 삼고 신앙인의 기도를 비웃기만 합니다. 그러한 비신앙적 인간에게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성경의 경고(신명기 6, 16 참조)를 들려주십니다(루카 4, 12).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먼저 그러한 유혹을 물리치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은 자신을 억제하시는 광야의 40일 체험이었습니다. 광야라는 곳은 세상의 번다함을 떠나 자신만의 존재를 확인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40일간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 걸어간 40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순절에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광야 같은 나 자신만의 조용한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나 자신만의 조용한 자리란 오로지 주님을 만나는 나 자신의 내면인 것입니다. 세상의 번다한 바람 즉 유혹을 차단한 나 자신의 내면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그것을 일컬어 기도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 속에서 오로지 주님만을 만나는 그것은 곧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신 예수님의 태도와 같습니다.


그래서 광야, 그곳은 나 자신의 내부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세상의 유혹에게 휘둘리지 않는 평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끊어버린, 즉 나 자신의 인간적 욕망을 벗어버린 나 본래의 참 자아가 그 광야에 나선 모습이요, 거기서 유혹이라 할 모든 것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광야의 참 자아는 그래서 닥치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기도로써 물리칠 수 있습니다. 기도란 오로지 하느님께만 마음을 기울이는 내면의 응답인 것입니다.


옛적에 어느 고명한 스승에게 제자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날마다 많은 유혹이 저를 괴롭힙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사는 방법은 없습니까?”


스승은 대답 대신 작은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한 후, 그 그릇을 들고 정해진 시간 안에 동네를 한 바퀴 돌아오되 물을 조금도 흘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그 제자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스승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자 스승이 물었습니다


거리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거리에 누가 있었는지 아무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제자에게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삶도 그와 같은 것이다. 네가 하는 일에 전심을 다한다면 유혹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전심으로 하느님 말씀을 따르려고 기도하며 자신을 억제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본능 속에서 뻗어 나오는 유혹의 손길과 세상의 악의 세력을 예수님과 같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40일의 여정을 함께 가고자 하는 신자들께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응수하여 들려주신 세 가지 성경 말씀을 외우다시피 하면서 죄악에 빠질 위험시에 늘 기억하기를 제안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유혹의 계절에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우리는 광야에 나선 듯, 나 자신만의 시간으로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길을 감으로써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러 40일의 여정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유혹이 닥칠 때면 늘 예수님처럼 이 성경 말씀을 외워서 대처하기로 합시다. 그래서 오늘 미사에 참례하신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유혹자에게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신 성경 말씀을 저의 선창에 따라 외쳐봅시다. 무슨 시위 현장에서 선창자의 외침을 따라 복창하듯이 따라 외쳐봅시다. 오른손주먹을 치켜 뻗으면서 말입니다.


1) “사람은 밥만으로 살지 않는다.” (신명 8, 3 / 루카 4, 4)

2)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신명 6, 13 / 루카 4, 8)

3)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신명 6, 16 / 루카 4, 12)


그렇습니다. 이러한 성경 말씀을 외우기만 하여도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재의 수요일, 2013 2 13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정초에 재수 없게?

왜 재를 뿌려?



우리는 오늘부터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단식 그리고 금육으로 정신무장을 하고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회개하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런 재를 받는 전례예식을 집전하는 사제로서 저는 오늘 참례하시는 교우님들께 다소 미안한 생각을 합니다.

제가 미안한 생각을 하는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저 자신부터 회개를 옳게 하고서 교우님들께 회개하라는 말을 하는가하여 저의 마음 한 구석이 찔리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오늘이 정월 초나흘인데 설날을 갓 지난 명절 분위기를 망치는 말을 하게 되어 그렇습니다. 사람을 두고 먼지()에서 왔으니 먼지로 돌아가라고 을러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초에 재수 없게끔 말이에요. 우리네 미풍양속에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정초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면서 새해의 좋은 일을 서로 축원해주는 게 인사인데, 이 새해의 벽두에 재를 뿌리니 정말 기분 잡칠 일이지요.


이러한 재의 수요일을 설날과 같은 날짜로 맞이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2005년의 설날이 그랬었습니다. 그해의 양력 29일이었는데 그날이 마침 설날이자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절과 교회 전례가 상충되어 교우들께서 당혹스러워 할 것을 염려하신 주교님께서 그 얼마 전에 공문을 내려 보내셨는데, ‘재의 수요일을 이틀 연기하여 금요일에 지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다시 정정 공문을 보내시길 재의 수요일은 중요한 전례의 날이므로 생략할 수 없는 것이니, 그 재의 수요일 미사 중에 설날의 조상을 기억하는 기도를 하고, 단식과 금육의 의무를 관면하지만 재의 예식은 다른 적당한 날에 꼭 거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선 사목 현장의 본당 공동체에서는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엔 다행스럽게도(?) 설날과 4일의 시차를 두고 재의 수요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정초에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이 좀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명절 당일이 아니라 해도 며칠 상간의 정초 기분을 좀 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설날부터 보름 동안의 이러한 정초는 우리네 민간 습속에서 신성시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초신수는 곧 일년신수라고 하며, 정월 보름까지 치성을 올리는 습속이 바로 그런 정초신수를 신성시하는 심성입니다. 그러한 우리네 심성을 정반대로 거슬려서 교회는 재의 수요일이라면서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단식을 하라 하니 이 어찌 고약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올해처럼 며칠 상간이 아니더라도 으레 재의 수요일은 설날과 그리 멀지않은 기간으로 만나는 절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달력으로 맞이하는 정초와 절후로 맞이하는 입춘에는 새해 운수를 조심스럽게 점쳐보는 습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입춘과 정초에는 점집의 문턱이 번잡하기도 합니다. 봄맞이와 새해맞이는 그렇듯 민간에서 행운의 창을 열고 그것을 맞이하려는 간절한 염원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간 심성을 미신이라 해서 타파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저는 백성의 그러한 연약한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염원을 무조건적으로 배격하기란 좀 잔인하지 않은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러나 이러한 정월신수(正月身數)’사순절 맞이의 만남을 절묘한 조화로 읽고 싶습니다. 정월신수란 먹고 마시며 즐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심신을 곧바로 세워서 치성(致誠)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사순절 맞이의 재를 머리에 얹음은 우리의 치성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말에 시작이 반이다.” 하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새해맞이로 살피는 정초신수로써 한해 목표성취의 반절이 달려있다 할 수 있고, 가족과 이웃과 위아래 사람들 사이에 도리를 찾고 다짐하여, 하늘과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알고 그 뜻을 실천에 담도록 새로운 각오를 세우는 사순절 정신은 매 한가지 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소홀히 된 우리네 사이의 그늘진 곳에 대한 새삼스런 보살핌의 마음을 다시 지니게 되고, 대동 공영의 복을 함께 비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늘 재의 수요일에 다짐하는 40일간의 사순절 행보에 대한 기초로써 참회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결심 하에 부합되는 동일맥락으로 마음의 다잡음을 하는 것은 정초의 마음과 같은 정신인 것입니다. 참회로 묵은 때를 씻음은 정초의 새로운 마음과 같은 것이며, 자선은 서로 간에 혹여 잊었던 마음 씀씀이를 되살려 사랑하는 사이로 만남의 축제를 이룸과 같고, 기도하는 자세를 새로이 간추리는 것은 자신의 내면과 하늘과 생의 근본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이며, 몸과 마음을 삼가 다잡는 설날이었듯이, 오늘 우리는 진정 단식과 금육의 뜻을 올바로 찾기 위해 재를 머리에 얹습니다.


그러므로 설날에 정신을 삼가 뜻을 세웠듯이, 오늘 머리에 재를 얹는 경건한 참회를 통하여, 흙에서 온 우리의 실상을 하늘에 향하도록 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흙에서 온 몸의 욕망을 제어하여 단식을 합니다만, 그것은 몸의 단련에 앞서 정신으로 먼저 나 자신을 곧게 세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단식이란 입으로가 아닌 몸으로 바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율법적 명령으로서의 금육과 단식을 실천하기보다는, 오늘로 시작되는 사순절 기간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어주기 위하여 나 자신의 정당한 몫을 조금이라도 포기하는 실천의 하나라고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단식의 실천은 나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기 위한 작은 자선행위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당한 나의 몫을 타인에게 조금씩이라도 양도하는 그것이 진정 자선이요, 그럼으로써 타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참된 기도임을 깨달아서 이 사순절을 시작함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함과 같은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 그것이 곧 회개(참회)’인 것입니다.


정리하여 말씀드리자면, 사순절에 우리는 네 가지 덕목을 특별히 과제로 삼아 실천합니다. 참회, 기도, 단식, 자선입니다. 이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간결하면서도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와 닿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인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6장중). 하느님께서 알아보시는 자선과 단식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알아보시는 그런 자선과 단식은 세상의 눈에 띄게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서만 평가 될 수 있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참회(회개)로써 내 마음이 달라져서 내 마음의 말을 하느님께서 알아들으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 까닭이 나의 마음에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마음과 상통할 수 있도록 변화 되어 표출되는 내 마음의 지향이 곧 하느님께서 알아들으실 수 있는 나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나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머리위에 재를 얹습니다.


왜 재를 뿌리는가? 오늘의 전례는 재수없게끔 재를 뿌리는 게 아닙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누구나 뭔가 새로운 다짐 하나라도 하듯이, 우리는 사순절을 이 봄맞이로 맞이하면서 새로운 삶을 다잡기 위해서 머리에 재를 얹고 참회와 기도를 바치며 단식과 자선의 길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재의 수요일 전례를 올리기로 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2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설날, 2013 2 10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설날의 기도가 일년 내내 이루어지기를..!

오늘의 축원이 모두에게 축복이기를..!



계사년(癸巳年) 새해를 맞이하여 모든 교우님들의 가정에 축복을 기원합니다. 뱀띠의 해라는 계사년이 사실상 오늘 설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띠를 말하자면 사실상 음력으로 따져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29일에 태어난 아기라면 뱀띠가 아니고 용띠입니다. 오늘 태어나는 아기가 있다면 곧, 뱀띠이지요.


올해를 계사년이라 하는 까닭은 오랜 우리 동양의 전통적 역법에 따라 60년 만에 한 번씩 오는 해의 이름이지요. 60년을 일컫는 육갑은 1012지로 엮어지는데 그 12지에 해당되는 열두 가지 동물로 띠를 정하여 그에 따른 띠가 12년 만에 한 번씩 오지요. 그 띠에 대한 속설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 속설 자체가 의미가 있다 하기보다는 그 띠에 해당되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해의 특별한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어야 아름다운 새해맞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틀 전에 이곳 제가 사는 만수리 동네 사람 몇 분들과 임진(壬辰)년을 마감하는 송년 겸 새해 계사년 맞이를 위해서 파티를 한 일이 있습니다. 용의 해를 마감하고 계사년 뱀의 해를 맞이하기에 앞서서 용 비스름하기도 하고 뱀 비스름하기도 한 뱀장어로 안주 삼아 술 한 잔씩 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민물 장어는 너무 비싸고 하니 바닷장어로 하기로 하여 갯장어 몇 마리 구해다가 동네 아저씨들과 즐긴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계사년 원단(元旦)을 맞이하여 뱀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봅니다.


작년 임진년은 용띠의 해였기에 용띠라는 박근혜 씨가 대통령 당선 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용이 괜스레 용이 아닌 것이지요. 그게 생긴 건 뱀 같으면서 다리가 달리고 이상스레 날개 같은 것도 달린 것 같은데, 그건 아무도 실물을 본 일이 없는 상상의 동물이거든요. 우리말에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개천이 있어야 용도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흔한 지방 전설에 따르면 어느 개천의 좀 으스스한 곳엔 용이 하늘로 올라간 곳이라는 등의 형상이 야릇한 물구덩이나 바위 구멍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곳은 뱀이 나올 만한 곳입니다. 뱀은 대개 너덜 같은 돌무더기가 많은 곳에서 동면하다가 봄볕 따스할 때 기어 나오거든요. 땅속에서 동면하던 개구리가 뛰어 나오면 그걸 경칩(驚蟄)이라 하는데, 그게 양력으로 3월 초순입니다. 그런 경칩 계절이 확실한 봄의 징후인데, 개구리는 방정맞게 튀어나오다가 못된 사람들한테 보신용으로 잡혀 죽습니다만, 뱀은 슬며시 봄볕을 타고 나와서 껍질 벗고 자신의 삶을 찾아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번식하러 갑니다. 그러므로 뱀은 슬기롭게 처신하지요. 그래서 성경에 뱀을 슬기롭다고 일컫기도 한 것 같고, 사실은 사막지대의 중동 지역에서 영물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뱀은 건조한 사막에서든 그리고 물이 많은 습지에서든 적응하여 사는 동물이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그들을 마치 이리 떼 가운데 보내시는 것처럼 걱정하시면서 뱀처럼 슬기롭게처신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마태 10, 16 참조), 사실 성경에 뱀에 대한 언급은 모두 교활하고 해독을 품은 동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큰 뱀은 용을 뜻하는 것이 성경의 표현입니다. 중국문화권의 영향 하에 있는 우리 동양 문화권에서는 용을 상서로운 동물 혹은 권세 상징의 상상 동물로 여깁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현실적 지향성으로써 하늘과 땅 사이를 아우르는 신령성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러나 뱀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사는 땅을 기어 다니는 것으로써 매우 간교함을 형상화 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뱀은 매우 조심해야 할 동물인 반면 그러한 뱀의 생존에 어떤 신령성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여겨서 함부로 대하면 아니 되는 것이면서도 어떤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기도 해서 속물적 보신 탐식가들이 섭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뱀의 해 계사년을 오늘 맞이하면서 저는 뱀띠에 해당되는 모든 분들에게 올해가 특별히 좋은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뱀처럼 슬기롭게이 한해를 잘 지내시고 보람을 찾으시되, 주변을 스치면서 마치 용이 승천한 자국을 남기듯이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행운을 꿈꾸게 하는 역할을 하라고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 용띠의 해에 대통령 당선 된 분이 우리 국민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고, “개천에서 용이 나온다는 말처럼 낮은 물이 흐르는 개울 바닥 같은 우리네 어려운 실정의 세상 바닥에서 국민들의 보다 나은 삶의 꿈이 펼쳐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세상이어야 기회가 균등한 사회이거든요. 먼저 힘을 가진(기득권의) 권세가들(용들)의 세상이 아니라 땅바닥을 기듯이(뱀처럼) 세상 바닥에서 살자고 허덕이는 사람들의 행복이 보장되는 곳, 그곳이 개천에서 용 나오는 세상입니다.


우리네 속설에 따라 12년 만에 한 번씩 자기 띠의 해를 맞이합니다. 살아 있으면 누구나 적어도 12년 만에 한 번은 자기의 세상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에 걸맞은 특별한 축복의 덕담을 다섯 번 듣다보면 회갑이 되어 자신의 태어난 해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그게 환갑이지요. ‘환갑이라는 게 뭡니까? 자기 태어난 해를 맞이한다는 것이지요. ‘환생한다는 뜻일까요? 그러므로 새봄에 뱀이 허물을 벗듯이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삶을 성숙시켜 간다고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설에 섣달그믐밤을 잠자지 않고 지내야 눈썹이 희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 ‘이라는 명절의 이름이 삼가는 날또는 사리는 날이라는 뜻이라는데, 아마 삼가면서 깨어 있는 자세로 새해를 맞이하지 않으면 팍 늙어버린다는 의미에서 섣달그믐밤에 잠자지 마라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라도 섣달그믐밤에서 정월초하루 새벽으로 건너오면서 이 설날의 강론 원고를 씁니다. 그래야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실감날 것 같아서 그리합니다. 왜냐면 값없이 한해에서 다른 한해로 넘어가는 나이를 먹고 싶지 않거든요. 값을 내면서 그 제야(除夜)를 해야만 원단(元旦)을 바라보면서 새롭게 기운이 솟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깨어서 즉 사리면서 이 새해를 정신 차려 조심스럽게 맞이하라고 올해의 설날을 이렇게 매서운 추위 속에 맞이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늘 이 설날은 조심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는 날이라는 뜻의 신일(愼日) 사리는 날이라는 뜻으로 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날이듯이 오늘 미사의 제2독서 야고보 사도 말씀에서 우리는 안개와 같이 사라져버릴 존재이기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삶을 살도록 늘 조심스런 생활을 해야 함을 다짐하게 됩니다(야고 4, 13-15 참조). 얼어붙은 눈길을 조심하듯이 그렇게 새해의 길을 걸어가라는 뜻으로 오늘 이렇게 강추위 속에 새해 첫날이자 주일을 맞아 교우님들께서 미사를 봉헌하러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속설에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을 지나 정초를 맞이하면 풍년이 든다 하는데 작년과는 달리 올해엔 우리나라 국민의 삶이 풍요로워지기를 기원하면서 오늘의 이 명절 미사성제를 올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오래 전승하여 온 바대로 이 설날에 덕담으로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줍니다. 그렇게 진정으로 서로 비는 마음을 오늘 제1독서의 민수기를 읽으면서 지니게 됩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위해 복을 빌어주도록 당부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민수 6, 22-27 참조).


그러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루카복음서에 말씀하신 바대로 항상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자세여야 행복을 얻는다는 깨우침으로(루가 12, 38 참조) 한해를 또한 살아가기로 더욱 다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 명절에 우리는 조상들을 기리며 그들을 위한 미사성제를 봉헌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오늘 이렇게 있을 수 있음은 조상들의 음덕(蔭德)임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덕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는 게 다 조상들의 그늘 아래라는 것입니다. , 나를 뼈와 살로 태어나게 생명을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지켜 물려주었고, 우리 삶의 방식 즉 정신적 가치 체계와 도덕적 가르침과 문화를 형성하여 물려주었으며, 더욱 참 인간으로의 삶이 되게 하는 신앙을 전해준 조상들의 덕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제 섣달그믐에 저의 가문 선산을 찾아 조상들 묘에 절을 올리고 기도하면서 저에게 그분들께서 물려주신 음덕 가운데 특별히 가톨릭 신앙의 가문을 이루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묘역 가운데 6대조 할아버지께서 천주교 신앙을 시작하셨다는 저의 가문 전승을 기억하여 그분 묘 앞에서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가문에서 직접적인 혈통의 조상들을 기립니다만, 오늘 같은 명절에는 더욱 넓은 시각으로 가문의 조상 말고도 우리 선대의 모든 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절 풍습은 그래서 우리가 각자 자기 가문의 조상뿐만이 아닌 우리 선인(先人)들 모두를 기리게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오늘 설날 미사를 봉헌한 후에 서짓골 순교성인 안장지를 찾아가서 성묘를 할 계획입니다. 비록 그곳이 외교인들의 토지라서 아직 봉분 묘를 만들어 드리지 못하였더라도 제가 후손으로서 찾아왔습니다하면서 절을 올릴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가문의 조상만을 기억하는 일이라면 굳이 오늘 같은 명절이 아니라도 각자 조상의 제삿날(忌日)을 지내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명절에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상들을 기리게 되는 의미로 합동 위령 미사를 봉헌하듯이 우리네 모든 선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달리 설명을 드리자면, 오늘 이 명절은 김씨 박씨 이씨 최씨 등등 모든 성씨의 온 백성이 보편적으로 조상을 기린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정신적으로 한 유대임을 깨닫고 모두의 행복이 각자의 행복임을 일깨워주는 날이 이 설날입니다. 그래서 이 설날의 명절 음식으로 동그랗게 떡을 썰어 넣어 끓인 떡국을 먹는 까닭은 우리 모두 둥그렇게 하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서 제 가문의 조상들과 더불어 우리 공소의 각 신자 가정마다 기억하는 조상들뿐 아니라 제가 어렸을 적부터 저의 고향 동네에서 이런 명절에 저의 세배를 받으시며 저에게 진심으로 덕담을 베풀어 주시던 모든 돌아가신 동네 어른들을 함께 기억하는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저의 성장과정과 지금까지 살아온 생의 역정에서 가르침과 보살핌을 주신 스승들과 은인들 그리고 간접적으로 알게 모르게 저에게 마음을 써주신 모든 선인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오늘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순교성인들의 안장지를 찾아가 그분들 덕분으로 내가 이렇게 자그마한 신앙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이 명절은 우리 민족 공동의 축제이자 우리 모두가 하나의 신앙 안에서 커다란 가족임을 느끼게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고, 그리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또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비는 것입니다.


진정 서로에게 감사하고 서로의 복을 빌어주며 또 한해의 삶을 진정 서로 모두에게 행복이 깃들도록 조심스런 배려로 대하며 새로운 한해를 함께 시작하는 오늘 이 설날은 참으로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이렇게 지내는 이 고유한 명절 자체를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은총의 날로써 감사드립니다. 그러한 은총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오늘을 시작으로 하여 우리는 더욱 한 해 동안 늘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들이 계속되기를 모두에게 축원합시다. 오늘의 축복이 곧, 한 해 동안 내내 이루어지는 축복이기를 소망하여 주님께 기도하기로 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연중 제4주일, 2013 2 3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괴로움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온다

사랑은 곧 십자가이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봉독한 루카복음서 4장의 내용을 오늘 이어서 읽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며 복음 선포를 하시던 날에 일어난 사건의 보도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 가신 일을 마르코나 마태오 복음서는 그분의 활동기 중간에다 기록하였습니다만(마르 6, 1-6 ; 마태 13, 53-58 참조), 루카복음서는 그분의 활동 초기(개시기)의 사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카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활동계획을 고향에서 발표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명수행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활동개시로 이사야에 예언된 구원(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서 직접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경말씀(이사야 58, 6의 구원선포)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의 활동계획을 고향에서 발표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수행을 시작하시는데, 그분의 계획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억압받는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오신 예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노래’(루카 1, 46-55)로 제시된 루카복음서의 주제로써 예수님 활동의 목표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루카복음서에 끝까지 소개되는 예수님의 행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들도 그러한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할 내용의 것들입니다


이것은 오늘 읽는 복음의 대목에서도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왜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기적을 행하실 수 없으셨나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도와준 사람이란 소외되었던 이방인 과부였습니다(1열왕 18, 7-16 참조). 엘리사가 도와준 사람도 이방인이자 철저히 따돌림 당한 나병환자였습니다(2열왕 5, 1-14 참조).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이란 그것을 베푸시려고 오신 분을 받아들여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시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라고 하신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제가 지난주일 강론에 라틴어 번역문을 가지고 부언한 바와 같이 이 성경말씀은 오늘 너희들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Quia hodie impleta est haec scriptura in auribus vestris)”라는 뜻을 다시 되새겨야겠습니다.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옛날이야기도 아니고 앞날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당장 여기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을 우리 자신 안에서 성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성취란 우리 자신의 몸에 직접 받아들임에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어떠한 모습을 보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그들에게서 그분이 얻으신 것은 비신앙적 반응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선입관 때문에 예수님과의 인격적 신뢰관계마저 저버림은 물론이려니와 하느님의 뜻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을 조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개탄하시는 그분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 24) 당신이 당하시는 배척을 비감하게 토로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성경상의 예언자들과 예수님,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두운 세상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느라고 고통을 당하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음을 그분께서 적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 시작부터 그렇게 배척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묶인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언하는 삶은 그 모습 자체가 도전을 받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배척당하시는 실정에서 오히려 그분의 그 구세주로서의 소명이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구원이란 오히려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4, 21 참조).


반대를 받으심으로써 오히려 드러나는 진실입니다. 그것은 센바람에 너울이 벗겨지는 격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역풍을 정면으로 맞닥뜨림으로써 당신의 성취하시고자 하는 일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역설적인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 ‘죽음으로써 참 삶의 길을 가는 것그것이 십자가의 역설적 상황입니다.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십자가의 정의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도 구원의 방향은 그렇게 세상의 역풍 속을 나아가는 쪽에 있음을 교시하신 것입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 일상적으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 잘 아는 사이의 사람, 더구나 나의 덕을 입은 사람이 나를 배척하는 상황에서 내가 사랑과 희생을 단념하지 않는 그 길이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될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하다니! 배신 당한 심정에서 십자가가 과연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 심정을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나를 모욕했다면 참아주었을 것을!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맞서 왔다면 비켜나 숨었을 것을!

그러나 너였도다! 내 동배, 내 동무, 내 친구!

정다웁게 서로 같이 사귀던 너,

축제의 모임에서 주님의 집을 함께 거닐던 너였도다!”(시편 54, 1315)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내 몸과 붙어있다시피 나와 함께 숨을 쉬는 사이에서 괴로움을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모양은 나무토막으로 내 어깨에 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형제, 내 식구, 정다운 내 친구, 나와 함께 매일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십자가는 나를 짓누릅니다.


그렇지요! 나와 별 관계도 없는 사람은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이가 아닙니다. 나와 아는 사이가 아니면 나의 마음을 상해줄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를 미워하진 않습니다. 나와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일수록 나의 걸림돌 노릇을 합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잘 안다는 나자렛 고향 사람들이 그분을 배척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동네 골목에서 예수님과 얼굴을 매일 마주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잘 아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루카 4, 22)이라는 것만 알아챌 뿐입니다. 그 고향사람들은 자기들 귀는 막고 눈만 삐딱하게 뜨고 예수님을 쳐다봅니다. “제까짓 게 뭐라고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보지 않고 가난한 목수 집 아들의 겉모습만 알아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속에서 흘러나오는 인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처지(지위)만을 따져보는 세태가 이런 것이지요.


제가 얼마 전에 교회의 행사에 참석했다가 사회적으로 꽤 잘 나가는 직위에 계신 한 교우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오래 전에 도시 본당에서 있을 때 알게 된 분인데, 저보고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만수리 공소에 있다고 했더니, 그분께서는 잠시 말을 못하시는 듯 머뭇거리다가 매우 안타까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면서 아니, 어찌 그리 됐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주교님께서 그리로 보내시던가요?” 하고 덧붙여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요.”하고 대답했더니 , 그래요? 무슨 일로, ,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 옆자리의 다른 분들에게 시선을 옮겨 자기의 근황에 대한 장광설로 요란스레 대화를 하면서 저를 힐끗힐끗 보다가 그 다른 분들과 어울려 자리를 뜨기에 제가 인사하려고 다가가도 못 본 척 가버리시더군요


옛적 만날 때에는 그리도 저와 절친한 것처럼 하던 분이었는데 그날은 그러시더군요. 그 행사 후 돌아오는 길에 그분의 그날 저를 대하던 태도가 왜 그랬을까 하는 저의 씁쓸한 기분은 저의 자격지심이었을까요? “공소에 있다고 무시당한 건가주교님께서 공소로 보내셨느냐고 묻고는 갸우뚱하던 그분의 태도란, 아마 나에게 무슨 잘 못 된 사연이 있는 듯 판단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인심이란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생각으로 타인을 바라보거든요. 타인을 자신의 눈에 뵈는 잣대로 보는 것입니다. 귀의 착각도 있지만 눈의 착각은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귀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기도 하지만,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농아장애인은 수화로 대화하며 눈으로 말을 알아듣고 있는데, 정상인은 눈으로 보면서 타인을 다반사로 곡해합니다. 이럴 때 농아장애인은 들리지 않는 귀로 타인의 말을 알아듣지만, 정상인은 눈귀가 다 열려있으면서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따로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상인이 장애인보다 더 장애자 노릇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나자렛 동향인들은 그런 정상인 장애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배반과 배척은 그처럼 정상인 장애자가 저지르는 짓입니다. 그런 정상인들의 장애에서 해방되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설파하셨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배반과 배척을 당하면서도 사랑과 희생을 단념하지 않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배반을 희생으로 상쇄시키고 배척을 사랑으로 갚아주러 가는 길이 그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 십자가는 모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희생이라는 횡선(橫線)과 사랑이라는 종선(縱線)을 엮어서 천을 짜듯 우리네 삶을 형성하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횡선과 종선이 서로 부딪쳐야 하는 십자가는 모순형상이듯이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익숙해진 세상살이의 원리로써는 읽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순적 십자가의 원리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할수록 희생해야 하는 모순이 그러한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유명한 코린토 113사랑의 찬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 중에서 137절의 말씀은 그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노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행위가 아닙니다. 배신도 덮어 원수를 삼지 않고 배척의 땅에도 신뢰(믿음)의 씨를 심으며 갈등의 가시밭에서도 화해를 청(소망)하면서 끝까지 견디는 희생의 길로써 용서의 마당에 이르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그래서 끝없는 숙제를 안고 걷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즉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는 짐인 것입니다. 그 짐이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늘 가까운 사람에게서 오는 괴로운 짐으로 말미암아 진실한 사랑은 증명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의 길을 가다가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걷고 있는 낙타를 만나 물어보았습니다. “얘 낙타야,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중 어느 쪽이 낫니?” 그러자 낙타가 대답했습니다. “오르막길이냐 내리막길이냐가 문제가 아니죠. 중요한 건 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할 일이 우리의 숙제는 아닙니다.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는 낙타의 짐과 같이 우리가 풀어가야 할 사랑의 숙제는 쉬운 길, 덜 어려운 길, 재미스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짐은 어느 낯모르는 사람보다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부과시키는 짐입니다. 그것도 나를 참기 어렵게 만드는 짐으로 나의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난처하게 하는 그런 사랑의 시험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결국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에 대한 세상의 증오를 마지막 십자가의 길에서 결정적으로 대결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신 말씀입니다. 그러한 대결의 길을 가야하는 소명은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서 말씀대로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아 세워 그렇게 하도록 정해주신 것이고(예레 1, 5 참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 소명의 길에서 역풍에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세워 주시고 옆에서 도와주실 것입니다(예레 1, 19 참조).


모든 거슬림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으려면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위기를 정면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13장에서 바오로 사도가 천명하시듯,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1코린 13, 7), 사랑은 으뜸(위대한 것)”(1코린 13, 13 참조)인 까닭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움과 배신과 저주 가운데서도 순교자적 자세로 몸 바쳐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리고 오로지 사랑 때문에 죄를 뒤집어쓰게 된 그에게는 그로써 하고자 하는 것 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그 용서라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승리하는 마지막 태도입니다


루카복음서는 오늘 고향에서 배척받으시고 죽임 당할 위기까지 당하셨던 예수님께서 결국 당신 동족들로부터 고발되어 십자가상의 죽음을 당하시며 마지막까지 용서로 일관하셨던 그분의 사랑의 승리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하고 기도하셨다고 그분의 최후시간에 대하여 특징적으로 전하는 루카복음서입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그런 사랑의 승리로 마쳐져야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대 받는 표적이자 수치스러운 것이 십자가이면서 또한 사랑의 도구이며 영광을 드러내는 승리의 표징이 십자가인 까닭이기에,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승리를 향하여 끝까지 나아가는 우리의 삶을 다짐하는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앞에 고백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