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2013 2 10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설날의 기도가 일년 내내 이루어지기를..!

오늘의 축원이 모두에게 축복이기를..!



계사년(癸巳年) 새해를 맞이하여 모든 교우님들의 가정에 축복을 기원합니다. 뱀띠의 해라는 계사년이 사실상 오늘 설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띠를 말하자면 사실상 음력으로 따져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29일에 태어난 아기라면 뱀띠가 아니고 용띠입니다. 오늘 태어나는 아기가 있다면 곧, 뱀띠이지요.


올해를 계사년이라 하는 까닭은 오랜 우리 동양의 전통적 역법에 따라 60년 만에 한 번씩 오는 해의 이름이지요. 60년을 일컫는 육갑은 1012지로 엮어지는데 그 12지에 해당되는 열두 가지 동물로 띠를 정하여 그에 따른 띠가 12년 만에 한 번씩 오지요. 그 띠에 대한 속설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 속설 자체가 의미가 있다 하기보다는 그 띠에 해당되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해의 특별한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어야 아름다운 새해맞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틀 전에 이곳 제가 사는 만수리 동네 사람 몇 분들과 임진(壬辰)년을 마감하는 송년 겸 새해 계사년 맞이를 위해서 파티를 한 일이 있습니다. 용의 해를 마감하고 계사년 뱀의 해를 맞이하기에 앞서서 용 비스름하기도 하고 뱀 비스름하기도 한 뱀장어로 안주 삼아 술 한 잔씩 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민물 장어는 너무 비싸고 하니 바닷장어로 하기로 하여 갯장어 몇 마리 구해다가 동네 아저씨들과 즐긴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계사년 원단(元旦)을 맞이하여 뱀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봅니다.


작년 임진년은 용띠의 해였기에 용띠라는 박근혜 씨가 대통령 당선 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용이 괜스레 용이 아닌 것이지요. 그게 생긴 건 뱀 같으면서 다리가 달리고 이상스레 날개 같은 것도 달린 것 같은데, 그건 아무도 실물을 본 일이 없는 상상의 동물이거든요. 우리말에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개천이 있어야 용도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흔한 지방 전설에 따르면 어느 개천의 좀 으스스한 곳엔 용이 하늘로 올라간 곳이라는 등의 형상이 야릇한 물구덩이나 바위 구멍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곳은 뱀이 나올 만한 곳입니다. 뱀은 대개 너덜 같은 돌무더기가 많은 곳에서 동면하다가 봄볕 따스할 때 기어 나오거든요. 땅속에서 동면하던 개구리가 뛰어 나오면 그걸 경칩(驚蟄)이라 하는데, 그게 양력으로 3월 초순입니다. 그런 경칩 계절이 확실한 봄의 징후인데, 개구리는 방정맞게 튀어나오다가 못된 사람들한테 보신용으로 잡혀 죽습니다만, 뱀은 슬며시 봄볕을 타고 나와서 껍질 벗고 자신의 삶을 찾아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번식하러 갑니다. 그러므로 뱀은 슬기롭게 처신하지요. 그래서 성경에 뱀을 슬기롭다고 일컫기도 한 것 같고, 사실은 사막지대의 중동 지역에서 영물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뱀은 건조한 사막에서든 그리고 물이 많은 습지에서든 적응하여 사는 동물이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그들을 마치 이리 떼 가운데 보내시는 것처럼 걱정하시면서 뱀처럼 슬기롭게처신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마태 10, 16 참조), 사실 성경에 뱀에 대한 언급은 모두 교활하고 해독을 품은 동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큰 뱀은 용을 뜻하는 것이 성경의 표현입니다. 중국문화권의 영향 하에 있는 우리 동양 문화권에서는 용을 상서로운 동물 혹은 권세 상징의 상상 동물로 여깁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현실적 지향성으로써 하늘과 땅 사이를 아우르는 신령성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러나 뱀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사는 땅을 기어 다니는 것으로써 매우 간교함을 형상화 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뱀은 매우 조심해야 할 동물인 반면 그러한 뱀의 생존에 어떤 신령성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여겨서 함부로 대하면 아니 되는 것이면서도 어떤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기도 해서 속물적 보신 탐식가들이 섭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뱀의 해 계사년을 오늘 맞이하면서 저는 뱀띠에 해당되는 모든 분들에게 올해가 특별히 좋은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뱀처럼 슬기롭게이 한해를 잘 지내시고 보람을 찾으시되, 주변을 스치면서 마치 용이 승천한 자국을 남기듯이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행운을 꿈꾸게 하는 역할을 하라고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 용띠의 해에 대통령 당선 된 분이 우리 국민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고, “개천에서 용이 나온다는 말처럼 낮은 물이 흐르는 개울 바닥 같은 우리네 어려운 실정의 세상 바닥에서 국민들의 보다 나은 삶의 꿈이 펼쳐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세상이어야 기회가 균등한 사회이거든요. 먼저 힘을 가진(기득권의) 권세가들(용들)의 세상이 아니라 땅바닥을 기듯이(뱀처럼) 세상 바닥에서 살자고 허덕이는 사람들의 행복이 보장되는 곳, 그곳이 개천에서 용 나오는 세상입니다.


우리네 속설에 따라 12년 만에 한 번씩 자기 띠의 해를 맞이합니다. 살아 있으면 누구나 적어도 12년 만에 한 번은 자기의 세상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에 걸맞은 특별한 축복의 덕담을 다섯 번 듣다보면 회갑이 되어 자신의 태어난 해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그게 환갑이지요. ‘환갑이라는 게 뭡니까? 자기 태어난 해를 맞이한다는 것이지요. ‘환생한다는 뜻일까요? 그러므로 새봄에 뱀이 허물을 벗듯이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삶을 성숙시켜 간다고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설에 섣달그믐밤을 잠자지 않고 지내야 눈썹이 희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 ‘이라는 명절의 이름이 삼가는 날또는 사리는 날이라는 뜻이라는데, 아마 삼가면서 깨어 있는 자세로 새해를 맞이하지 않으면 팍 늙어버린다는 의미에서 섣달그믐밤에 잠자지 마라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라도 섣달그믐밤에서 정월초하루 새벽으로 건너오면서 이 설날의 강론 원고를 씁니다. 그래야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실감날 것 같아서 그리합니다. 왜냐면 값없이 한해에서 다른 한해로 넘어가는 나이를 먹고 싶지 않거든요. 값을 내면서 그 제야(除夜)를 해야만 원단(元旦)을 바라보면서 새롭게 기운이 솟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깨어서 즉 사리면서 이 새해를 정신 차려 조심스럽게 맞이하라고 올해의 설날을 이렇게 매서운 추위 속에 맞이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늘 이 설날은 조심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는 날이라는 뜻의 신일(愼日) 사리는 날이라는 뜻으로 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날이듯이 오늘 미사의 제2독서 야고보 사도 말씀에서 우리는 안개와 같이 사라져버릴 존재이기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삶을 살도록 늘 조심스런 생활을 해야 함을 다짐하게 됩니다(야고 4, 13-15 참조). 얼어붙은 눈길을 조심하듯이 그렇게 새해의 길을 걸어가라는 뜻으로 오늘 이렇게 강추위 속에 새해 첫날이자 주일을 맞아 교우님들께서 미사를 봉헌하러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속설에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을 지나 정초를 맞이하면 풍년이 든다 하는데 작년과는 달리 올해엔 우리나라 국민의 삶이 풍요로워지기를 기원하면서 오늘의 이 명절 미사성제를 올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오래 전승하여 온 바대로 이 설날에 덕담으로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줍니다. 그렇게 진정으로 서로 비는 마음을 오늘 제1독서의 민수기를 읽으면서 지니게 됩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위해 복을 빌어주도록 당부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민수 6, 22-27 참조).


그러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루카복음서에 말씀하신 바대로 항상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자세여야 행복을 얻는다는 깨우침으로(루가 12, 38 참조) 한해를 또한 살아가기로 더욱 다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 명절에 우리는 조상들을 기리며 그들을 위한 미사성제를 봉헌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오늘 이렇게 있을 수 있음은 조상들의 음덕(蔭德)임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덕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는 게 다 조상들의 그늘 아래라는 것입니다. , 나를 뼈와 살로 태어나게 생명을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지켜 물려주었고, 우리 삶의 방식 즉 정신적 가치 체계와 도덕적 가르침과 문화를 형성하여 물려주었으며, 더욱 참 인간으로의 삶이 되게 하는 신앙을 전해준 조상들의 덕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제 섣달그믐에 저의 가문 선산을 찾아 조상들 묘에 절을 올리고 기도하면서 저에게 그분들께서 물려주신 음덕 가운데 특별히 가톨릭 신앙의 가문을 이루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묘역 가운데 6대조 할아버지께서 천주교 신앙을 시작하셨다는 저의 가문 전승을 기억하여 그분 묘 앞에서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가문에서 직접적인 혈통의 조상들을 기립니다만, 오늘 같은 명절에는 더욱 넓은 시각으로 가문의 조상 말고도 우리 선대의 모든 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절 풍습은 그래서 우리가 각자 자기 가문의 조상뿐만이 아닌 우리 선인(先人)들 모두를 기리게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오늘 설날 미사를 봉헌한 후에 서짓골 순교성인 안장지를 찾아가서 성묘를 할 계획입니다. 비록 그곳이 외교인들의 토지라서 아직 봉분 묘를 만들어 드리지 못하였더라도 제가 후손으로서 찾아왔습니다하면서 절을 올릴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가문의 조상만을 기억하는 일이라면 굳이 오늘 같은 명절이 아니라도 각자 조상의 제삿날(忌日)을 지내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명절에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상들을 기리게 되는 의미로 합동 위령 미사를 봉헌하듯이 우리네 모든 선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달리 설명을 드리자면, 오늘 이 명절은 김씨 박씨 이씨 최씨 등등 모든 성씨의 온 백성이 보편적으로 조상을 기린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정신적으로 한 유대임을 깨닫고 모두의 행복이 각자의 행복임을 일깨워주는 날이 이 설날입니다. 그래서 이 설날의 명절 음식으로 동그랗게 떡을 썰어 넣어 끓인 떡국을 먹는 까닭은 우리 모두 둥그렇게 하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서 제 가문의 조상들과 더불어 우리 공소의 각 신자 가정마다 기억하는 조상들뿐 아니라 제가 어렸을 적부터 저의 고향 동네에서 이런 명절에 저의 세배를 받으시며 저에게 진심으로 덕담을 베풀어 주시던 모든 돌아가신 동네 어른들을 함께 기억하는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저의 성장과정과 지금까지 살아온 생의 역정에서 가르침과 보살핌을 주신 스승들과 은인들 그리고 간접적으로 알게 모르게 저에게 마음을 써주신 모든 선인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오늘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순교성인들의 안장지를 찾아가 그분들 덕분으로 내가 이렇게 자그마한 신앙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이 명절은 우리 민족 공동의 축제이자 우리 모두가 하나의 신앙 안에서 커다란 가족임을 느끼게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고, 그리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또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비는 것입니다.


진정 서로에게 감사하고 서로의 복을 빌어주며 또 한해의 삶을 진정 서로 모두에게 행복이 깃들도록 조심스런 배려로 대하며 새로운 한해를 함께 시작하는 오늘 이 설날은 참으로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이렇게 지내는 이 고유한 명절 자체를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은총의 날로써 감사드립니다. 그러한 은총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오늘을 시작으로 하여 우리는 더욱 한 해 동안 늘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들이 계속되기를 모두에게 축원합시다. 오늘의 축복이 곧, 한 해 동안 내내 이루어지는 축복이기를 소망하여 주님께 기도하기로 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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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 2013 2 3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괴로움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온다

사랑은 곧 십자가이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봉독한 루카복음서 4장의 내용을 오늘 이어서 읽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며 복음 선포를 하시던 날에 일어난 사건의 보도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 가신 일을 마르코나 마태오 복음서는 그분의 활동기 중간에다 기록하였습니다만(마르 6, 1-6 ; 마태 13, 53-58 참조), 루카복음서는 그분의 활동 초기(개시기)의 사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카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활동계획을 고향에서 발표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명수행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활동개시로 이사야에 예언된 구원(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서 직접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경말씀(이사야 58, 6의 구원선포)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의 활동계획을 고향에서 발표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수행을 시작하시는데, 그분의 계획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억압받는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오신 예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노래’(루카 1, 46-55)로 제시된 루카복음서의 주제로써 예수님 활동의 목표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루카복음서에 끝까지 소개되는 예수님의 행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들도 그러한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할 내용의 것들입니다


이것은 오늘 읽는 복음의 대목에서도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왜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기적을 행하실 수 없으셨나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도와준 사람이란 소외되었던 이방인 과부였습니다(1열왕 18, 7-16 참조). 엘리사가 도와준 사람도 이방인이자 철저히 따돌림 당한 나병환자였습니다(2열왕 5, 1-14 참조).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이란 그것을 베푸시려고 오신 분을 받아들여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시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라고 하신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제가 지난주일 강론에 라틴어 번역문을 가지고 부언한 바와 같이 이 성경말씀은 오늘 너희들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Quia hodie impleta est haec scriptura in auribus vestris)”라는 뜻을 다시 되새겨야겠습니다.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옛날이야기도 아니고 앞날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당장 여기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을 우리 자신 안에서 성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성취란 우리 자신의 몸에 직접 받아들임에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어떠한 모습을 보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그들에게서 그분이 얻으신 것은 비신앙적 반응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선입관 때문에 예수님과의 인격적 신뢰관계마저 저버림은 물론이려니와 하느님의 뜻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을 조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개탄하시는 그분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 24) 당신이 당하시는 배척을 비감하게 토로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성경상의 예언자들과 예수님,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두운 세상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느라고 고통을 당하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음을 그분께서 적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 시작부터 그렇게 배척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묶인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언하는 삶은 그 모습 자체가 도전을 받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배척당하시는 실정에서 오히려 그분의 그 구세주로서의 소명이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구원이란 오히려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4, 21 참조).


반대를 받으심으로써 오히려 드러나는 진실입니다. 그것은 센바람에 너울이 벗겨지는 격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역풍을 정면으로 맞닥뜨림으로써 당신의 성취하시고자 하는 일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역설적인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 ‘죽음으로써 참 삶의 길을 가는 것그것이 십자가의 역설적 상황입니다.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십자가의 정의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도 구원의 방향은 그렇게 세상의 역풍 속을 나아가는 쪽에 있음을 교시하신 것입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 일상적으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 잘 아는 사이의 사람, 더구나 나의 덕을 입은 사람이 나를 배척하는 상황에서 내가 사랑과 희생을 단념하지 않는 그 길이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될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하다니! 배신 당한 심정에서 십자가가 과연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 심정을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나를 모욕했다면 참아주었을 것을!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맞서 왔다면 비켜나 숨었을 것을!

그러나 너였도다! 내 동배, 내 동무, 내 친구!

정다웁게 서로 같이 사귀던 너,

축제의 모임에서 주님의 집을 함께 거닐던 너였도다!”(시편 54, 1315)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내 몸과 붙어있다시피 나와 함께 숨을 쉬는 사이에서 괴로움을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모양은 나무토막으로 내 어깨에 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형제, 내 식구, 정다운 내 친구, 나와 함께 매일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십자가는 나를 짓누릅니다.


그렇지요! 나와 별 관계도 없는 사람은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이가 아닙니다. 나와 아는 사이가 아니면 나의 마음을 상해줄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를 미워하진 않습니다. 나와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일수록 나의 걸림돌 노릇을 합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잘 안다는 나자렛 고향 사람들이 그분을 배척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동네 골목에서 예수님과 얼굴을 매일 마주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잘 아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루카 4, 22)이라는 것만 알아챌 뿐입니다. 그 고향사람들은 자기들 귀는 막고 눈만 삐딱하게 뜨고 예수님을 쳐다봅니다. “제까짓 게 뭐라고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보지 않고 가난한 목수 집 아들의 겉모습만 알아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속에서 흘러나오는 인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처지(지위)만을 따져보는 세태가 이런 것이지요.


제가 얼마 전에 교회의 행사에 참석했다가 사회적으로 꽤 잘 나가는 직위에 계신 한 교우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오래 전에 도시 본당에서 있을 때 알게 된 분인데, 저보고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만수리 공소에 있다고 했더니, 그분께서는 잠시 말을 못하시는 듯 머뭇거리다가 매우 안타까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면서 아니, 어찌 그리 됐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주교님께서 그리로 보내시던가요?” 하고 덧붙여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요.”하고 대답했더니 , 그래요? 무슨 일로, ,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 옆자리의 다른 분들에게 시선을 옮겨 자기의 근황에 대한 장광설로 요란스레 대화를 하면서 저를 힐끗힐끗 보다가 그 다른 분들과 어울려 자리를 뜨기에 제가 인사하려고 다가가도 못 본 척 가버리시더군요


옛적 만날 때에는 그리도 저와 절친한 것처럼 하던 분이었는데 그날은 그러시더군요. 그 행사 후 돌아오는 길에 그분의 그날 저를 대하던 태도가 왜 그랬을까 하는 저의 씁쓸한 기분은 저의 자격지심이었을까요? “공소에 있다고 무시당한 건가주교님께서 공소로 보내셨느냐고 묻고는 갸우뚱하던 그분의 태도란, 아마 나에게 무슨 잘 못 된 사연이 있는 듯 판단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인심이란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생각으로 타인을 바라보거든요. 타인을 자신의 눈에 뵈는 잣대로 보는 것입니다. 귀의 착각도 있지만 눈의 착각은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귀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기도 하지만,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농아장애인은 수화로 대화하며 눈으로 말을 알아듣고 있는데, 정상인은 눈으로 보면서 타인을 다반사로 곡해합니다. 이럴 때 농아장애인은 들리지 않는 귀로 타인의 말을 알아듣지만, 정상인은 눈귀가 다 열려있으면서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따로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상인이 장애인보다 더 장애자 노릇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나자렛 동향인들은 그런 정상인 장애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배반과 배척은 그처럼 정상인 장애자가 저지르는 짓입니다. 그런 정상인들의 장애에서 해방되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설파하셨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배반과 배척을 당하면서도 사랑과 희생을 단념하지 않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배반을 희생으로 상쇄시키고 배척을 사랑으로 갚아주러 가는 길이 그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 십자가는 모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희생이라는 횡선(橫線)과 사랑이라는 종선(縱線)을 엮어서 천을 짜듯 우리네 삶을 형성하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횡선과 종선이 서로 부딪쳐야 하는 십자가는 모순형상이듯이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익숙해진 세상살이의 원리로써는 읽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순적 십자가의 원리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할수록 희생해야 하는 모순이 그러한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유명한 코린토 113사랑의 찬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 중에서 137절의 말씀은 그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노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행위가 아닙니다. 배신도 덮어 원수를 삼지 않고 배척의 땅에도 신뢰(믿음)의 씨를 심으며 갈등의 가시밭에서도 화해를 청(소망)하면서 끝까지 견디는 희생의 길로써 용서의 마당에 이르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그래서 끝없는 숙제를 안고 걷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즉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는 짐인 것입니다. 그 짐이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늘 가까운 사람에게서 오는 괴로운 짐으로 말미암아 진실한 사랑은 증명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의 길을 가다가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걷고 있는 낙타를 만나 물어보았습니다. “얘 낙타야,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중 어느 쪽이 낫니?” 그러자 낙타가 대답했습니다. “오르막길이냐 내리막길이냐가 문제가 아니죠. 중요한 건 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할 일이 우리의 숙제는 아닙니다.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는 낙타의 짐과 같이 우리가 풀어가야 할 사랑의 숙제는 쉬운 길, 덜 어려운 길, 재미스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짐은 어느 낯모르는 사람보다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부과시키는 짐입니다. 그것도 나를 참기 어렵게 만드는 짐으로 나의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난처하게 하는 그런 사랑의 시험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결국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에 대한 세상의 증오를 마지막 십자가의 길에서 결정적으로 대결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신 말씀입니다. 그러한 대결의 길을 가야하는 소명은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서 말씀대로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아 세워 그렇게 하도록 정해주신 것이고(예레 1, 5 참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 소명의 길에서 역풍에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세워 주시고 옆에서 도와주실 것입니다(예레 1, 19 참조).


모든 거슬림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으려면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위기를 정면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13장에서 바오로 사도가 천명하시듯,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1코린 13, 7), 사랑은 으뜸(위대한 것)”(1코린 13, 13 참조)인 까닭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움과 배신과 저주 가운데서도 순교자적 자세로 몸 바쳐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리고 오로지 사랑 때문에 죄를 뒤집어쓰게 된 그에게는 그로써 하고자 하는 것 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그 용서라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승리하는 마지막 태도입니다


루카복음서는 오늘 고향에서 배척받으시고 죽임 당할 위기까지 당하셨던 예수님께서 결국 당신 동족들로부터 고발되어 십자가상의 죽음을 당하시며 마지막까지 용서로 일관하셨던 그분의 사랑의 승리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하고 기도하셨다고 그분의 최후시간에 대하여 특징적으로 전하는 루카복음서입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그런 사랑의 승리로 마쳐져야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대 받는 표적이자 수치스러운 것이 십자가이면서 또한 사랑의 도구이며 영광을 드러내는 승리의 표징이 십자가인 까닭이기에,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승리를 향하여 끝까지 나아가는 우리의 삶을 다짐하는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앞에 고백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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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 2013 1 27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우리 가운데 늘 일어나는 일

하늘로 날아오릅시다!



오늘 우리는 미사 중에 봉독하는 성경을 들으면서 매우 감동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오늘 제1독서로 읽는 느헤미야서 8(210)과 오늘 복음으로 선택한 루카복음서 4(1421)이 매우 현장감 있는 분위기를 보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도 이 성경이 보도한 현장에 참석한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도 오늘의 성경 사건 현장에 참가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루카복음의 11절에서, 즉 루카라는 성경기자가 성경 저술을 시작하면서 첫 마디로 우리에게 하는 말이 참으로 중요한 깨우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첫 마디는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경 말씀이 봉독 되면 그 성경의 현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는 우리에게 자기가 전해주기 위하여 기록할 모든 사건이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루카가 이렇게 강조한 까닭이 왜일까 하는 것을 우리는 오늘의 느헤미야서 8장과 루카복음서 4장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1독서 느헤미야서 8장은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갔던 유다인들이 수십 년 만에 해방되어 고국 예루살렘에 돌아와 첫 기도 모임을 열고 사제 에즈라의 강론을 들으며 감격하여 울었다고 보도합니다(느헤 8, 2~9 참조). 그리고 이 날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날, 곧 해방의 날이므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축제를 올리는 날이 되었다고 보도합니다(느헤 8, 9~10 참조). 


바빌론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70년 동안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와 같이 성전에 모여 기도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서러움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대음악가 베르디(Verdi)의 유명한 오페라 나부코(Nabucco)’ 중에 노예들의 합창(Sklavenchor)’이 그 유다인들의 바빌론 노예 생활의 서러움을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그 합창을 참 좋아하는 저는 우리 하부내포성지의 카페 배경음악으로 깔아놓고 카페를 열 때마다 듣고 있습니다. 그 합창의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조국이여, 그대를 향해 그리움이 달려가노라!(Teure Heimat, nach Dir geht das Sehnen)!” 이러한 그리움으로 끼리끼리 몰래 모여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것이 그 70년간의 노예 생활 중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만, 이제 조국에 돌아와 공식적으로 모일 수 있고 그래서 그들의 지도자 사제로부터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느헤 8, 3) 성경 말씀을 실컷 들을 수 있음은 그들이 실감하는 해방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몰래 성경 읽다가 들키면 붙잡혀가던 바빌론 시절, 그러나 이제는 백주 대낮에 광장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실컷 들을 수 있으니! ! 이것이 광복이로고!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 날의 광복선포, 이 해방선언을 들어 봅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느헤 8, 10)


이 해방선언을 들으면서 저는 우리나라의 1945815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 생각납니다. 일본왕(일본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들어 천황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풀죽은 목소리를 녹음해서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했는데, 그게 연합국에 대한 항복 선언이었지요. 소위 천황이라는 자가 신처럼 이른바 신풍(神風 가미카제)’으로 세계를 향하여 미친 돌격전을 하다가 항복을 했으니, 그 누구보다도 그 전범자·압제자 밑에서 수십 년 신음하던 조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날 정오의 그 항복방송을 들은 조선 사람들은 그 대낮 그 시간에 서로 눈치만 보면서 조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던 죄수들(그 중에 독립투사로 잡혀있던 사람들)이 그날 저녁때 형무소에서 나와 만세를 부르며 해방을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민들이 덩달아 거리로 나와 만세 불렀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이 그랬는지 보질 못해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긍이 갑니다. 일제의 폭정에 숨죽이고 살던 일반 백성들은 그 일왕의 풀죽은 항복 발표를 긴가민가했을 것입니다. 일제 수십 년간 그 위대한(?) ‘천황 폐하의 그늘에 소극적으로 길들여진 소위 황국신민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황국신민이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했던 소위 불령선인들즉 독립지사들은 올 것이 왔다.”라고 즉시 알아차리고 감옥을 박차고 나와 만세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자 일반 시민들도 따라서 만세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 815일과 똑같은 상황을 오늘 제1독서에서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가 백성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는 현장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이런 말을 듣고 온 백성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말씀을 알아들었으므로, 가서 먹고 마시고 몫을 나누어 보내며 크게 기뻐하였다.”는 현장 보도(생 중개방송?)를 우리는 오늘 듣고 있습니다. 바빌론에서 70년 노예생활을 하던 우리가 정말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왔단 말인가? ! 정말 그렇구나! 우리의 사정 이야기를 백주 대낮 대로에서도 실컷 나눌 수 있네! 목숨 위태롭게 숨어서 소식 나누던 것을! ! 진짜네!


이러한 오늘의 느헤미야 실록을 들으면서 우리는 나자렛 안식일 회당의 그 자리에 루카의 안내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일어나 두루마리(성경)를 펴시고 큰 소리로 읽어주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야의 예언 인용).” 이런 성경말씀을 읽으시고는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그런데, 이어서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저는 선뜻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말씀은 그렇다 치고, 그것이 여기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어찌하여 이루어졌단 말인가 말입니다. ‘성경에 씌어있는 그 옛날이야기가 주일미사에 참례한 우리들에게 갑자기 이루어졌다니, 예수님의 뻥 대단하네!’ 제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이거 루카복음서 한국말 잘못 번역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있나 살펴보았습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라틴어로 번역하셨다는 불가카(Vugata) 성경의 바로 이 대목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이 성경은 오늘 너희들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Quia hodie impleta est haec scriptura in auribus vestris.)”


번역이 좀 이상하지요?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옛날이야기도 아니고 앞날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당장 여기서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시는 예수님께서 오신 것 자체가 벌써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렇듯 희망을 잃고(가난한) 노예 살이 하는(묶인) 절망의 어둠 속에서(눈멀어서) 억눌려 신음하는 중생에게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 자체는 벌써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절망으로 짓눌린 우리라면, 그런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제 그 구원을 우리 자신의 몸에 직접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만화 생각이 납니다. 동아일보(20001218일자)에 실렸던 황중환 씨의 ‘386라는 연재만화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새들에게 날개가 없었답니다. 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새들은 몸집에 비하여 두 다리가 아주 가느다랗게 생겨서 걸어 다니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새들은 자기들에게 볼품없고 연약한 다리 두 개만을 주신 하느님을 원망하며 신세를 한탄하였답니다. 그러자 어느 날 하느님께서 새들을 불러 모으시고는 등에 지고 다니라면서 커다란 짐을 두 개씩 주셨습니다. 새들은 궁시렁거렸습니다. “에이! 가느다란 두 다리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데, 왜 이런 짐까지 지고 다니라신담!” 이렇게 새들은 투덜댔습니다. 그 때 어디선지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낙엽들이 바람에 날리는데, 하느님께서 짐으로 주신 것이 새들의 등에서 나뭇잎처럼 펄럭이는 것입니다. 새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다가 혼이 날 것 같은 두려움으로 그 짐 두 개씩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 짐이 펄럭이는 대로 몸뚱이를 움직였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새들의 몸이 공중에 둥둥 뜨는 것이 아니겠어요. 하느님께서 주신 그 짐을 가지고 투덜거리던 새들에게 그것은 두 개의 날개였답니다. 그래서 새들은 어디든 다리 품 팔지 않고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오늘까지 훨훨 날아다닐 수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새의 가느다란 다리처럼 우리는 연약한 처지로 간신히 지탱하는 삶입니다. 그런데도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세상에서 나에게 너무나 많은 짐을 부과합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농사꾼으로서, 장사꾼으로서, 노동꾼으로서, 남의 일 맡은 일꾼으로서, 너무너무 힘듭니다. 앞이 안 보입니다. 애들 때문에, 늙으신 부모님 때문에, 늘 병에 시달리는 식구 때문에, 내 몸도 여기저기 쑤시고 기운 없는데, 수입은 밑바닥이고, 혹시나 서민정책 앞세우는 후보가 대통령 되면 나아질까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을 새롭게 해보아도 잘 풀리지도 않고 빚만 들어나니 말입니다. 성당에 가 봐도 별 도움도 없이 마음 부담만 더 들고 말입니다. 성당서도 돈 내라는 말을 해대니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연약한 다리로 간신히 지탱하는 나의 이 모든 힘든 사정이 정말로 무거운 짐 덩어리인데, 사실 알고 보면 그게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날개처럼 말입니다. 식구들 때문에 힘들지만, 나라 사정이 어지럽지만, 내 몸이 말을 안 들어주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계속 해야만 한다는 나의 각오와 노력이 곧 나의 날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늘을 처다 볼 줄 아는 행위인 것입니다. 새처럼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문득 나의 삶이 붕붕 떠오릅니다. 하늘을 처다 보는 그런 기도는 새의 날개처럼 하늘을 대답으로 삼는 것입니다. 절망은 없다는 대답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한다는 것은 늘 우리가 희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성경말씀은 너희의 귀 안에서 이루어진다.”하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즉, “말씀이 들리면 주저앉지 말고 일어나라. 듣고 앉아만 있으면 뭐 하냐? 일어나 너 자신을 추슬러야, 될 것이 되는 거다.” 우리 자신의 날갯짓을 촉구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갯짓은 곧 사랑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112장에 한 몸의 여러 지체를 예로 들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1코린 12, 1230 참조). 사랑의 행위를 뜻하는 날갯짓이란 하느님께로부터 하사받은 우리 삶 속의 짐을 믿음으로 놓치지 말고 짊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힘으로 사랑을 실천할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이라는 이 땅 위에서만 집착하지 않고 비상(飛上)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과 사랑과 희망에 대하여 다음주일에는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113장에 설명하면서 사랑을 특찬 하는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 귀속에 들려온 예수님의 구원 선포로 우리는 지금 그렇게 절망의 굴레를 끊고 천상의 행복을 향하여 눈을 뜨고, 우리를 짓누르던 세상 부조리의 짐을 벗어버리며, 그분이 제시하시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소망으로 사랑의 짐을 지고 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우리의 날개를 활짝 폅시다. 즉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며 실천합시다. 그런 믿음 실천이라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늘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일’(루카 1, 1,)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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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일, 2013 1 20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왜 술에 물 타?

대답: "우리의 작은 노력, 하느님의 전능을 이끌어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의 2장 1~11절에 보도된 기사를 읽어보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카나'라는 마을에서 어느 집 혼인잔치가 있었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님과 예수님께서 참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예수님의 친척이나 잘 아는 집의 혼인잔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보도를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단 둘이서만 그 혼인 잔치에 가신 게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 받으셔서 가셨습니다. 아마 성대한 잔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으실 정도의 집안이라면 꽤 부자 집이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혹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 중 어떤 사람의 잘 아는 집안의 혼인 잔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추측하여 우리가 짐작 할 수 있는 것은 그 혼인이 있던 집은 가난한 집이 아니라 나름 잘 사는 집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집안의 혼인 잔치 중에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잔치 중에 술이 떨어진 것입니다. 이게 무슨 낭패란 말입니까? 부자 집이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 와중에 성모 마리아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술이 없구나.”하고 그 낭패스런 사정을 알렸습니다. 그런 걸 보면 그 혼인집은 아마 예수님과 친척 관계라도 되는 사이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님은 친척여자로서 아마 그 혼인집의 부엌(과방)일을 거들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친척도 아닌 괜한 여자가 남의 집 잔치에 술 떨어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게 아니겠어요?


여기서 더 희안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머니 마리아님께서 과방 일을 거들다가 아들 예수님께 와서 술이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말을 하자 예수님의 반응이 너무나 생뚱맞습니다. “뭘 어쩌자는 겁니까?”하는 식의 예수님 대답인 것입니다(요한 2, 34의 내용 참조). 예수님께서 아마 함께 참석한 제자들과 파티석상에서 신나게 술을 잡수시면서 흥겨워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웬 김빠지는 말을 하는 것이었겠지요. 그렇지요! 잔치 집에서 흥겹게 술 마시며 부하들과 함께 떠들고 있는데, 거기 따라온 어머니가 술 떨어졌다고 말하니 어머니, 나보고 어쩌라는 겁니까?”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요한 2, 4)라고 반문하신 걸 보면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님께 짜증조로 반항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추측을 하면서 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들이 똘만이들을 데리고 친척집 잔치에 와서 술을 적당히 마시지 웬 그리 일어나지 않고 계속 마시고 앉아 있느냐고 어머니께서 잔소리를 하신 것은 아닌지, 그래서 기분 나빠진 아들이 퉁명스럽게 잔소리 좀 그만 하세요.”라고 한 게 아닌지 싶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있어서 어머니 마리아님께서 걱정이 되어 그러신 게 아닌지그러자 아들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잔소리에 짜증나서 그리 대답하신 것이 아닌지, 저는 그런 추측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잔치 집에서 주거니 받거니 잔을 돌리면서 술을 마시다가 주정을 부릴까 염려스러운 나머지 어머니께서 , 술 떨어졌다.”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자 아들이 엄마, 왜 그러세요?”하면서 반항한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교우 분들과 술을 마시고 좀 취해서 허튼 소리로 떠들며 주정을 부린 경력이 많습니다. 제가 안면도 성당에 있던 시절에 월급 줄 식복사 둘 수가 없어서 저의 어머니를 모셔다 놓고 밥 시켜 먹고 살던 때가 있습니다. 그 시절에 제가 교우 분들과 술을 먹고 비틀비틀 들어오면 어머니께서 저에게 그런 비슷한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사람들, 술 안 먹고 못사나?”하시면서요.


그런데 사실, 술은 좋은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항변으로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외워두고 삽니다. ‘전도서라고 이름 붙인 구약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한다.”(코헬 10, 19) 술좌석을 좋아하는 저의 금과옥조(?)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첫 기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요한복음서 2장의 카나 촌 혼인잔치에서 그 주제가 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즐기려고 음식을 장만한다.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한다.”(코헬 10, 19)는 성경말씀이 있듯이, 예수님께서도 카나 마을의 어느 혼인잔치 집에 가셔서 사람들과 함께 즐기시다가 그 집의 술이 떨어진 딱한 사정을 보시고 물을 술로 변하게 하는 기적으로 그 잔치의 흥을 성공적으로 돋구어주셨다는 오늘 성경의 보도 내용은 술 좋아하는 저의 엉뚱한 주장에 상당히 고무적인 내용이지요(요한 2, 1-11의 내용).


우리 속담에 술맛이 나빠지면 도가 집 어르신네 노름한 것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도가(都家)이란 양조장(釀造場)을 일컫는 말인데, 어째 술맛이 싱거워진 까닭이란 아마도 그 양조장 주인이 노름판에서 돈을 잃고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 잃은 돈의 분량만큼 술독에 물을 부어 판다는 뜻으로 이러한 속담이 생겼다 합니다. 아마 스스로 잘못한 탓을 다른 사람들이 기워 갚게 하는 얌체 짓을 비꼬는 속담인 것 같습니다


마치 국가의 경제정책이나 경제 단체의 경영이 잘못되어 애꿎은 국민들이 세금으로 그 부실을 때우게 되는 꼴이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이즈음 박근혜 당선자 측에서 노인들에게 약속한 공약에 관한 터무니를 딴 데로 돌리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뉴스입니다만, 그렇다면 술대접하겠다고 하고서는 딴 장난으로 그 술대접 받을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술맛 떨어지게 하는 꼴이지요.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눈에 보이는 성과란 4대강 살리는 사업을 했다는 것뿐인데, 그게 결국 4대강을 죽이는 꼴로 들어났으니, 그걸 다시 살려내려면 결국 국민들만 골탕 먹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도가집 어르신네 노름한 바람에 술맛이 나빠진 꼴입니다. 술통에 물만 잔뜩 탄 꼴이지요.


그런데 우리 가톨릭교회의 미사 중에 술에다 물을 타는 전례가 있습니다. 술맛 떨어지게 말입니다. 사제가 성체로 축성할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과정 중에 포도주에 물을 타서 준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봉헌하는 포도주 값이 아까워서 물을 타는 것일까요? 사제가 노름이나 딴 짓을 하고 미사의 제주(祭酒)에다가 그렇게 얌체 짓을 하여 제전비용(祭典費用)을 때우는 것일까요?


고대의 유다교 관습에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시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것은 술의 농도를 약하게 하여 마시려는 의도였다 합니다. 그런 고대의 풍속은 우리말에 복()은 반복(半福), 꽃은 반개(半開), 그리고 술은 반취(半醉)가 좋다는 말을 연상케 합니다. 이것은 만취(滿醉)하여 몸과 정신을 해롭게 하는 것보다는 술의 흥취를 적절히 즐겨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도 너무 넘치면 그로 인하여 화()가 이르게 되고, 활짝 핀 꽃은 곧 질 때가 되어 부패의 악취(惡臭)를 뿜어내기에 이르지만 반쯤 핀 꽃은 그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는 것이듯이, 술도 반쯤 취하여 그 맛과 흥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에 물을 탄다는 것은 얕은 수의 호도(糊塗)로 사실의 왜곡을 유도하는 짓을 일컫는 말입니다. 정치인들이 비난 받을 짓을 해놓고 여론을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그렇지요. 그렇듯 얌체 짓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물 탄 막걸리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제가 포도주에 물을 타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그렇듯 얌체 짓일까요? 어찌하여 사제는 포도주 성작에 물을 타는 것일까요?


미사 중에 제물 준비를 하는 사제가 포도주에 물을 타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사제가 그렇게 술에 물을 타면서 바치는 기도의 뜻을 우리는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뜻하면서, 성작 안의 포도주에 물이 들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듯이 우리도 참 제물로 하느님께 바쳐지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 하면서 우리는 포도주에 붓는 한 방울의 물과 같이 우리의 사소한 노력이라도 기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합쳐 바치고 우리의 인간적인 허약성과 부족한 점까지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서 받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작은 봉헌과 우리의 보잘것없는 희생도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물과 하나 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별것도 아닌 우리의 희생이 그 값없는 물 한 방울 같이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포도주와 하나 됩니다. 카나 마을의 혼인잔치에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물이 값진 포도주로 변하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하느님께의 제물로 승화되어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서 그 잔치 집 일꾼들에게 살짝 귀띔해주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간단한 말씀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을 시간에 과방에 술이 떨어져 난처해진 그 잔치 집의 일꾼들에게 성모님께서 이르신 말씀은 곧, 오늘도 교회가 신자들에게 전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하는 일깨움인 것입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음은 곧,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판단하고 믿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간단하게 이르시는 말씀입니다.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 2, 7)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로운 물로 즉, 우리 자신을 비우고 깨끗한 마음으로 채우고, 그 다음에 이르시는 주님의 실천 명령을 따라야겠습니다.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갖다 주어라.”(요한 2, 8)하고 이르시는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퍼주는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우리의 실천은 문득 하느님께서 몸소 빚으신 포도주처럼 이 좋은 포도주가 웬일이란 말인가!”(요한 2, 10 참조)하는 탄성을 들을 정도로 놀랄만한 결과를 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울이는 순수한 노력, 그것이 아무런 값도 없는 듯한 물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한 것이라면 주님의 값진 포도주 같이 변화되는 값어치를 발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노력은 항아리에 신선한 물을 가득 채우듯이 오로지 순수로 실천되는 것이라면, 저 잔칫상의 사람들이 즐기게 된 그 값진 포도주처럼 우리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우리 가운데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초에는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 4)하시면서 그 첫 기적 행사를 거절하신 듯 하였습니다만, 무엇이든지 당신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당신의 능력을 결국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듯이 아직 우리의 모든 구원이 이루어질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우리 사이에 문득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 사건이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작은 노력은 하느님의 전능을 이끌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그러나 순수한 뜻으로, 그리고 최선의 실천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하나 되는 결실을 얻게 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하는 사제의 예물 준비 기도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여야 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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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2013 1 13일 오전 9시 @ 도화담 공소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세례! 천지개벽!

물에 빠지셨다 나와 기도하실 때!



오늘,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셨다.”(루카 3, 21)고 하는 성경의 보도를 들으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세례 받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세례를 받으셨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분도 우리네 보통 인간들과 비슷한 처지로 세례를 받았구나 하는 생각인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저 자신이 세례를 언제 받았는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는 누대에 거쳐 천주교 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 사흘 만에 당시 공소회장님께로부터 세례를 받았답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것이지요. 그 사실을 저는 크면서 어른들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 저는 영세 대부님을 본 일도 없습니다. 제가 공소회장님에게서 세례를 받고나서 얼마 후에 본당 신부님께서 공소 판공을 하러 오셔서 보례를 해주셨다는데 그때 공소회장님의 집안 어른을 저의 대부로 정하셨답니다. 이 사실도 저는 다 커서 신학생 때 들어서 알게 되었지요. 그 대부님은 제가 초등학교도 다니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대부가 무엇 하는 분인지 어떤 분이지도 모르고 저는 성장했지요.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견진성사를 받았는데 그 견진대부로는 저에게 세례를 주었던 공소회장님이 서주셨는데 그때 이미 아주 연로하신 분이시라서 얼마 후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대부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 교우님들이 세례 받으면서 대부 대모님이 정해지고 대자대녀들과 인연을 맺어 사시는 것을 볼 때 부럽기만 합니다. 저로 말하자면 고아신자인 셈이지요. 대부대모의 사랑을 받는 교우님들과 비교해서 저는 불쌍한 신자이지요. 저도 큰 다음에 세례를 받을 걸 그랬나 싶습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에서 본 예수님의 세례 때엔 그분의 대부님이 누구였을까요? 성경 기록에 예수님의 대부가 있었다는 말이 없는 걸 보면, 예수님도 저처럼 고아신자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이렇게 유아세례 받은 저의 처지를 예수님의 세례와 엇대어 비교하는 게 좀 우스꽝스럽지요! 예수님은 사실상 성인세례를 받으신 분인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 큰 성인으로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선 유아였던 저와는 달리 확실하게 대부를 정하실 수 있으셨지 않겠습니까?


저의 이러한 우스꽝스런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기록에 그게 나옵니다. 세례 받으신 예수님의 대부 목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그걸 성경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 22)라고 말입니다. 그분의 대부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군요! 그 하늘에 계신 분께서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비둘기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성령을 말입니다.


이제 여기서 성경의 기록대로 예수님의 세례 현장에 가봅시다.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루카 3, 15)라고 오늘의 성경이 보도하고 있는 현장이 그곳입니다.


요한은 당시의 세상 돌아가는 꼴을 질타하면서 회개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루카 3, 36 참조). 그리고는 회개하러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받으라면서 욕설을 합니다.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입니다(루카 3, 7). 속에 든 독과 같이 못된 행실을 감추고 독사의 날름거리는 혓바닥처럼 회개한다는 말만 해선 어떻게 믿어줄 수 있느냐면서 회개의 실제 열매(행실)를 보이라고 고함칩니다(루카 3, 79 참조). 그리고 회개의 실천이란, 독차지할 줄만 알고 빼앗고 억누를 줄만 아는 이 더러운 세상을 나눔과 베품의 정의로운 세상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요한이었습니다(루카 3, 1014 참조). 이러한 요한이 독사들에게서 독을 빼는 세례 즉 물에 담가 독을 씻어내는 세례를 베풀자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세상이 온 것으로 착각합니다. 즉 요한을 새 세상 만들어주는 구세주로 여기게 됩니다.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하는 사람들이 모인 광야, 그곳이 곧 예수님도 찾아온 그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을 구세주로 여기는 그 현장에서 요한은 아직 세상이 바뀔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오셔야만 세상이 바뀐다고 말합니다(루카 3, 1518 참조).


그런데 그 현장에서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세례를 받은 한 사람(예수님)이 기도를 하자 하늘이 열렸습니다(루카 3, 21 참조). 이게 무슨 일인가요? 하늘이 열리다니요! 천지개벽인 것이지요! 세상이 몽땅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천지개벽을 이루는 세례는 그래서 요한이 말하기를 물의 세례가 아니라 불의 세례라고 했습니다(루카 3, 1617 참조). 그리고는 그 세례 받은 한 사람(예수님) 위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요한이 미리 말했듯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루카 3, 16)이라는 것이 이때 증명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 21)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우스꽝스런 저의 생각을 이어봅니다. “, 나도 세례 받을 때 그렇게 하늘이 열리고 성령 내려오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하셨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보고 착각하고 있네.” 라면서 비웃으실 분도 계시겠지요.


저의 이 우스꽝스런 생각이 정말 착각일까요? 아닙니다. 착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받음으로 해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 사람들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생각이 바뀌고 행실이 바뀐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바뀐 사람들 눈에는 세상이 바뀐 것을 체험하게 되고, 아니 더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선 생각이 바뀌고 행실이 바뀐 사람이 되는 체험을 저 자신의 과거 추억을 가지고 비유를 삼아보겠습니다.


제가 해군사관학교 사관후보생 교육을 받을 때의 일입니다. 젊은 사제로서 군종신부로 임관하기 위해 39년 전 진해에서 4개월 동안 해군 사관후보생 훈련과정 중의 추억입니다. 4개월간의 체험을 다 말하려면 어쩌면 그 4개월 과정만큼 4개월 동안 설명해야 할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 거리들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한 가지, 오늘 회개하려고 온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잠기신 요르단 강물을 상상하면서 말하고 싶은 사건이 있습니다.


진해 해군 사관학교 사관후보생대를 완전군장으로 출발하여 40Km 행군을 하던 날의 이야기입니다. 진해를 출발하여 창원시와 마산시를 거쳐 되돌아 나와 해병유격훈련장에 이르는 행군이었습니다. 무거운 군장으로 하루 꼬박 행군하여 마지막 구간에 진입하기 전에 마산 자유수출공단의 하수처리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훈련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하수처리장을 수영장 삼아 군장상태로 들어가 헤엄을 쳐야만 했습니다


전후좌우로 왔다 갔다 반복하여 두 시간 동안 그 더러운 하수처리장에서 헤엄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온몸을 그 더러운 물속에 잠수하여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때는 오월, <어버이 날>을 며칠 지난 때였습니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하는 어머니 노래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오물 덩어리를 입술에 스쳐야 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우리 동료 사관후보생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지요. 행군에 지친 온몸의 살갗이 군장에 스쳐서 벗겨지고 더러운 물에 불려서 쓰리고 아팠습니다


두 시간 가량 그런 인간적 한계 상황을 버티고 나서 그 더러운 물에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귀신같은 몰골로 유격훈련장까지 달리면서 우리 모두는 참으로 어느 때보다도 더 우렁찬 군가를 부르면서 뛰었습니다. 유격훈련장에 도착하여 대충 몸을 씻었지만 그 후 며칠간의 그 유격훈련장 체류기간 내내 역겹게 코를 찌르며 우리 서로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를 배겨내기란 정말 지옥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한 훈련과정을 거치고 나서 본대에 돌아와 다음과정의 교육에 들어갔을 때에는 모두가 훈련의 고됨을 마치 즐거움인양 받아들이는 자세로 변한 것 같았습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뚜렷한 태도 변화를 한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동료 사관후보생들이라야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입대한 저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들 사이에서 나이 많은 선배요 더욱 사제로서 늘 그들과는 다르게 근엄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일종의 차별 행위를 하고자 하는 강박감 속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중이었습니다만, 그 똥물 속의 잠수 훈련을 받은 후에는 그런 강박감을 떨쳐버렸던 것입니다. 그 더러운 구렁텅이에서 함께 뒹군 처지에 이제는 나이고 신분이고 스스로 따질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들과 똑같이 악을 써가며 달리고 고함치며 군가를 부르는 한 청년의 처지로 스스로 변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최악의 상황에 기꺼이 몸을 맡기게 된 것이지요. 그보다 더 처참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랴 싶은 그런 한계상황에서 체득한 새로운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이 추억담이 마치 저의 자랑을 위한 것처럼 소개되었습니다만, 오늘 세례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하기 위하여 저의 이야기를 늘어놓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해야 할 죄악의 인간들 대열을 함께 하시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상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 깨달아야 진정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회개의 대열 속에 몸소 들어가신 분이 오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씻어내려 들어간 그 더러운 물에 당신 자신의 온몸으로 잠기셨던 그분이 오늘 요르단 강물에서 세례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물에서 올라와 기도를 하시자 하늘이 열렸습니다


차단되었던 땅과 하늘 사이가 이제 소통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모든 죄악을 그분이 당신 몸에 무치고 감사를 드리시는 그 순간에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죄 없으시면서도 당신 자신의 죄인 듯 그 죄악을 당신 몸에 씌워서 감사드린 그분 때문에 새로운 삶의 기운 즉 성령이 내리고 하늘과 땅이 화합하는 새 세상이 된 것이지요. 그러한 하늘과 땅의 화합의 사다리가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결국 그러한 천지 화합의 사다리처럼 땅과 하늘 사이에 매달리시게 되는 사건은 골고타의 십자가 사건이 됩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여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란 그래서 인간의 죄악 위에 세운 사다리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으로 만들어져 하늘로 오르게 하는 사다리입니다. 십자가를 한번 새삼스런 시선으로 살펴보세요! 인간의 죄악을 모두 뒤집어쓰신 분이 당신의 온몸으로 형상을 이룬 것이 곧 십자가이지 않습니까? 그분이 그렇게 자신의 몸만들기를 시작하신 사건, 곧 인간들의 죄를 씻는 물속에 잠기시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신 사건을 오늘 성경이 보도한 것입니다. 죄악으로 멸망하게 된 우리 인간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악으로 찌든 세상에 빠뜨리신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 더러운 세상의 죄를 상징하여 죄악을 씻은 더러운 물속에 우리와 함께 들어가 당신 몸을 담그신 그분(미사 중 영성체하기 전에 바치는 기도의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바뀌게 된 것처럼, 우리 세례 받은 사람들 또한 세상 속에서 세상의 죄를 뒤집어쓰고 살면서 세상의 회개를 즉 세상 바뀜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바람으로 사랑 나눔회라는 모임을 이끌고 계신 이광석 님의 다음 시를 읽어봅니다.



물이 물을 만나 선()해지듯이

사람이 사람을 만나 물처럼 선한

세상을 만나고 싶다.

물이 물을 업고

더 큰 물길을 건너가듯이

삶의 등짐에 어깨가 처진 사람들과

주름살을 맞대고 싶다.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말귀를 알아듣는 물,

마음을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보다 먼저

제 소리를 만들 줄 아는 물,

언제나 가까이 다가가도

오래된 시집처럼

세월의 이끼를 잡고 있는 그대

물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침묵에

흠뻑 젖고 싶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7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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