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2 12 30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속 썩이는 아들 예수의 일을

마리아는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성탄 대축일의 8일내(팔부) 일요일을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한 주간(8)을 강생신비로 경축하는 가운데 주님의 날(일요일)’주님의 가정 축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성탄과 더불어 주님의 가난한 가정을 경축하는 것은 강생신비의 일차적 구현이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 삶의 길을 똑 같이 걸어가시려 하심에 있어서, 인간이라면 이 세상의 삶을 누구나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듯이 주님께서도 예외 없이 그러한 가정에 속한 삶부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인생의 관점으로 볼 때 가정을 이루지 않고 사는 저 같은 성직자가 가정에 관하여 운운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인간의 가정적 삶의 고뇌나 즐거움에 대하여 피력하는 바를 소개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나자렛에서 이루신 가정생활에 관한 우리 신앙적 관점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 성서의 짤막한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살펴보면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길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느라고 3일간이나 헤매다가 성전에서 그 아들 소년 예수를 찾았을 때(루카 2, 43-46 참조), 왜 그렇게 속을 썩이느냐는 식으로 어머니 마리아가 질책을 하자 아들 예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했다는 것(루카 2, 48-50 참조)을 우리 또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 평상시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는 아들 예수의 모습을 보고 마리아가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다(루카 2, 51 참조)고 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아들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과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엄마의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마리아의 말없는 태도에 대해서는 베들레헴 마구간의 그 밤에 천사들의 전갈과 목동들의 방문 사실도 마리아가 마음속에 간직했다 했듯이(루카 2, 19 참조), 


예루살렘의 미아 예수의 사건과 나자렛 가정생활에 대해서도 마리아가 그렇게 마음속에 간직했다고 성서가 강조해서 기록하는 것은 베들레헴 탄생의 신비만큼이나 나자렛 가정생활도 중차대한 구세사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밖에서 속을 썩인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는 얌전한 것을 보고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서 너 이 녀석 어디 두고 보자면서 벼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어느 어머니의 수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학교 선생님 생활을 하다가 효과적인 부모역할훈련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민정씨가 쓴 이 시대를 사는 따뜻한 부모들의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어느 어머니의 수기입니다.(이야기 중 작은 괄호 안 글은 윤종관 신부의 첨가임)


대학생인 아들이 연락도 없이 늦는다. 10분 전 12시다. ‘왜 전화도 못하나. 과미팅이다, 동문미팅이다, 클럽미팅이다, 소개팅이다 끝날 만도 한데, 못 먹는 술은 왜 자꾸 먹이고 먹는담! 이 녀석 오기만 해봐라. 부모 속을 이렇게 썩이다니.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다니, 오기만 해봐라.’


이럴 때일수록 왜 그 발 없는 불안한 소문들은 떠오르는지, (그리고 왜) 그 흉측한 소문을 들려주던 이의 떨리던 음성까지 떠오르는지, 초조하고 불안한 쪽으로 생각하면서 올림픽 대로를 한숨에 왔다갔다한다. ‘그래도 전화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전화도 못한 저는 얼마나 불안해할까, 집에서 걱정할까봐 더 초조해하겠지.’ (하며)나는 자신을 달랜다.


오늘따라 비가 오락가락한다. 1210, 전철에서 내리면 버스가 끊긴다.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인 전철역으로 우산을 들고 나간다. 드문드문 지나치는 사람이 무섭다. 역 출구에서 서성인다. 전철에서 나오는 사람이 끊겼다. 웬일일까? ‘! 하느님, 제 아들을 지켜주소서!’ 나는 (이렇게)기도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면서)길가에 두툼한 물체들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혹시 만취해 쓰러진 내 아들이 아닌가, 깡패에게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모습은 아닌가, (이렇게 불안해 하다가 가슴속에 원망이 맴돌아) ‘아니, 이 녀석이! 이렇게 애를 태우게 하다니! 못 오면 못 온다고,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해주지.’(하며 중얼거린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바꾼다. ‘! 하느님, 화내지 않겠습니다. 제 아들을 지켜만 주소서!’(하며 돌아오는 길에 하느님께 매달린다. 그러면서) 길이 엇갈려 이미 집에 들어와 있다가 대문을 열어줄 아들을 상상하며 초인종을 누른다. 뛰는 가슴과 떨리는 손으로.


(그때 안에서 들린다) “어머니 세요?”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 아들을 무사히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나의 얼굴을 읽으면서 그 애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만취한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다음엔 꼭 연락을 하겠습니다.” 나는 행복했다. 내 어깨를 꼬옥 감싸는 아들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까지도 싫지 않았다. 화난 대로 아들에게 쏟아 부었다면 이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까. 누가 말했던가, ‘고통을 통해 순수해지고 성숙해진다.’.......

며칠 뒤 길이 막혀 늦어진 나를 기다리던 아들은 말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의 어머니를 무사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곳은 바로 천국임을 느꼈다. 나는 다시 한 번 체험했다. 십자가 뒤엔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것을, 좋은 부모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효과적인 부모역할훈련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고통과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이 일은 고통을 감수하며 노력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부모역할은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역할이며 소중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이야기에서 말입니다. 이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 간 것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말로써 통했습니까, 아니면 마음으로 통했습니까? 마음으로 통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마음으로 통하게 되기까지의 중간 단계는 없습니까? 그것은 몸에 배기까지의 서로 노력을 기울인 상호간의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렇게 늘 기다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고 소리 없이 그 사람을 내 맘속에 담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서의 성모 마리아가 그렇게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48-50 참조)는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 서로의 삶을 간직해줄 수 있는 그것을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란 상대방이 나에게 부담해야 할 사랑이라기보다는 내가 부담해야 할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얻는 것이나, 딸 수 있는 결실이나, 바라는 성과라기보다는 이루어 가는 것, 주는 것, 거름 같이 붓는 것, 그래서 키워 가는 과정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항상 진행 중이면서 아직 결론에 이르지 않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사실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싱겁고 또 어쩐지 말로 한 사랑은 거짓 같기도 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진행 중인 사랑이 가정 안에서는 방안에 가득 차면서도 공기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부부의 사랑이란 한 나무줄기에 흐르는 물과 같은 아내의 사랑이요 거름 같이 힘이 되는 남편의 사랑이되, 줄기 속에 함께 녹아 흐르는 생명처럼 보이지 않는 서로의 사랑인 것입니다. 아마 그런 부부 사이에 그래서 꽃이 피고 또 그래서 또 한 생명으로의 열매가 또 다른 나무를 탄생시키는 자녀의 모습으로 그들의 가정이라는 것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남으로 만나서도 하나가 되는 것이 부부인가 봅니다. 남남으로 만난다는 것은 서로가 분명히 다른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이 하나의 인생을 사는 한 몸이 된다 합니다.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가 19955월에 큰 사고로 온 몸이 부서져 의식을 잃었다가 닷새 만에 깨어났을 때 의사들의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먼저 으스러진 폐부터 수술하고 그리고 목에서부터 허리 아래까지 뼈를 한 토막씩 뜯어 맞추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크리스토퍼 리브는 자기 아내 다나에게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지 말고 자기를 그냥 죽게 놔달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나를 죽게 놔두는 게 나나 당신에게 더 나을 거요라고 말입니다. 그 때 아내 다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건 당신의 마음 결정이므로 존중합니다. 허지만 떠나갈 당신은 여전히 나의 당신이에요. 그리고 난 그런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할 거예요.” 아내의 그 말을 듣고 크리스토퍼 리브는 그래서 살겠다는 마음을 되찾았고 그리고 그의 아내 다나는 전신마비의 그와 행복한 사랑의 부부로 계속 변함없이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답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라는 혼인 서약은 그렇게 해서 지속되는 사랑의 과정 속에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듯 항상 끊임없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니 영원히 결말 없이 계속 커나가는 것이 가정안의 사랑, 부부의 사랑, 부모 자녀 사이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그런 가정에서 시작하여, 그리고 항시적으로 끊임없이, 그러나 드러나지 않고 소리 나지 않게 성취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렛 성가정은 감추어진 가정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음은 구세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렇게 가정의 어머니 마음과 같은 사랑의 고요 속에서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으나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위대성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성가정 축일의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이란 볼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찬 곳이다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감추어진 보물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것이기에 감추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가정의 이야기가 밖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좋은 것이든 언짢은 것이든 말입니다. 그것은 그래서 최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일이 외적 강제력으로 보호될 지경이라면 그것은 벌써 비극입니다. 가정 폭력이 공권력에 호소되어 해결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가정폭력 방지법이든 보호법이든 그것이 노출되는 과정을 통해야 하는 실정에까지 이른 것이 현실이라면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정적 성장과 자아 성취를 이룰 수 없는 청소년들이 사회의 어두운 거리로 나와 방황하기에 이른 까닭은 가정이 은밀한 사랑의 보금자리로서의 본질적 기능을 상실한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커튼으로 가려져 보호되어야 할 방안 사정을 밖의 세상 풍조가 무차별적으로 역류해 들어와 흐트러뜨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실정을 바로 잡아 본래적 개인들의 성취 장소로 가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가정별 특수 여건이 개성적으로 보장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대학 가는 것만이 교육은 아니라는 것, 다른 가정보다 넉넉하지 못한 사정이라 해서 불행하다 여겨지지 않는 가정 나름으로 남모르게 행복한 이유 따로 있으면 그만 이라는 것, 그래서 식구마다 다른 집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귀한 역할을 이 세상에서 자랑스럽게 수행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스런 사회인으로서 인정받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사회 발전의 진원지요 인생 성공 행로의 귀착지가 곧 가정이라는 본질적 위상이 모든 것에 앞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우리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으로서의 공개되지 않은 세상살이를 나자렛에서 30년이나 하신 까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른 살 되셨을 때 비로소 공생활 하신 것으로 복음서들은 보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요즘 세상으로 쳐서 그 30살 먹도록 예수청년은 취직도 하지 않고 집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요? 그 또한 어머니 마리아의 속을 썩이며 무능한 아들이었는지 모를 일이지요.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고, 30년을 훌쩍 뛰어넘어 즉시 그분의 공생활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의 보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 기록자는 어머니 마리아가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가운데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갔다라고만 우리에게 짤막하게 그 30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사셨나 하는 것은 성서 기록자는 알지 못하고 오직 성모 마리아 가슴속에 기록된 것으로 아직 그리고 영원히 공개되지 않을 은밀한 가정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삶처럼 가정은 침묵하는 마음만큼이나 가득 찬 신비와 같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깰 수 없고 그리고 깨서도 아니 되는 그 침묵 같은 베일 속에서 사실은 사랑의 작업이 가장 생동적으로 계속되는 곳이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가정입니다. 부부가 사랑하고 그래서 부부가 부모 됨을 알고, 그리고 나아가 남남으로 만나 엄마 아빠 된 사실을 자녀들의 존재가 증명해주고, 그로써 부부 서로가 그리고 부모와 자녀 서로 서로가 개인으로서의 존중 받음을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런 곳이 가정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나자렛의 감추어진 가정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그분이 밖에서는,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어린 나이에도 하느님 아버지의 일로(루카 2, 49 참조) 모든 학자들의 경탄을 사는 모습이었습니다만(루카 2, 46-47 참조), 가정에서는 순종하는 삶으로(루카 2, 51 참조) 하느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을 채우셨던 것입니다(루카 2, 52 참조). 그러한 순종은 자녀가 부모에게 뿐만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에게 그리고 부부인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러한 마음 채워주기란 서로의 마음을 서로가 따르는 것이라고, 그런 마음 서로 따르기가 즉 순종이라 하여 그것을 강생하신 주님이 실천하셨다고 오늘 복음은 우리 모든 가정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서로의 마음 따름 즉 순종의 사랑으로 우리 모든 가정을 정화 할 다짐을 하면서 가톨릭 기도서 105쪽의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함께 바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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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5. 10:30 @ 서산 예천동 성당 
하부내포성지주임 윤종관 신부님 강론


예수 성탄 대축일 낮미사



성탄 축하합니다!

서로 기쁜 Christmas예요!” 하고 인사말을 교환합시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 모두 함께 기뻐하는 Christmas입니다.


Christmas에서, 즉 성탄 미사에서 봉독된 전례 말씀 가운데 아주 소박한 표현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 봉독의 첫 구절인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 5278절입니다. 소박한 소식 전달이면서 한편 극적인 감동으로 전하는 외침입니다.


그 표현은 이렇습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느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고 시온을 향해 이르는구나, 저 소리, 보초의 외치는 소리.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주님과 눈이 마주쳐, 모두 함께 환성을 올리는구나.”(이사 52, 710 참조)


이 얼마나 순박합니까, 그 표현이 말입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하는 그 첫 구절의 감격 표현을 다른 성서 번역문에서는 어여쁘다, 기쁜 소식 전하려고 산등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저 발꿈치!”(Quam pulchri super montes pedes annuntiantis)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영어 번역 참고 : How wonderful it is to see a messenger coming across the mountains, bringing good news, the news of peace! ; 영어 미사경본 참고 : How beautiful on the mountains, are the feet of one who brings good news, who heralds peace, brings happiness, proclaims salvation, and tells Zion, "Your God is king!").


우리말에 며느리가 미우면 그 발뒤꿈치도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와는 반대로 이 성서 말씀은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의 발꿈치가 그토록 예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쁜 소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살려 주시러 오시는 분이 오신다는 소식이지요. 그 주님이 오시면서 우리를 처다 보시는데 그분과 내가 눈이 마주쳐서 가슴 터지는 감격의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고 오늘 예언서는 실토하고 있습니다(이사 52, 8 : Vox speculatorum tuorum ; levaverunt vocem, Simul laudabunt, Quia oculo ad oculum videbunt, Cum converterit Dominus Sion). 


그분과 눈이 마주쳐(oculo ad oculum)” 환호성을 지른다는 이 구절을 읽는 저에게 문득 지난 대통령 선거기간의 일이 연상됩니다. 대통령 후보들을 지지하는 군중의 환호 장면을 중계하던 TV 화면이 연상됩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후보와 눈이 마주쳐 악수하려고 아우성들을 처댔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런 현장을 지나간 일도 있습니다. 우연히 부여의 은행에 일보러 갔다가 그때 마침 그 부여 시장 통에 잠간 지나가는 박근혜 후보와 악수라도 한 번 하려는 아우성 때문에 제가 은행 골목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빠져버리고 골목이 열려서 은행에 들어갔더니, 그 은행의 한 여직원이 허겁지겁 들어오며 박근혜와 악수했다면서 수다를 떠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한 여직원이 그 손 죽을 때까지 닦지 마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박근혜와 악수했다는 그 여직원은 정말로 죽을 때까지 그 감동을 간직하며 행복해 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국가원수가 된 사람과 손을 잡아봤다는 그 여직원의 행복감이 죽을 때까지가 아니고 앞으로 5년 후에는 씁쓸한 추억으로 변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그러자면 그 새로이 국가원수가 된 사람이 진정 명예로운 임기를 마칠 만큼 잘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오늘 이 성탄에 듣는 기쁜 소식의 전갈은 우리에게 있어 한 순간 지나가는 추억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이 우리에게 지금 여기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우리와 잠간 악수하고 지나가시는 게 아니라, 그분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Immanel의 현실,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이 성탄 미사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서 1118절의 소식인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서 11~18절은 요한복음서의 서문(Prologue序詩前文)이며 이 요한복음서 전체를 축약하여 우리 구원이 무엇인지 세상에 알리는 典文(Canon공식 선언문)인 것입니다. 이 선언문의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분은 곧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다. 그분 자신은 그래서 하늘의 은총 자체요 진리 자체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매일같이 삼종기도를 바치며,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하고 고백합니다. ‘Immanuel’이라는 이름으로 그분을 일컫는 것입니다. ‘Immanuel’이신 그분은 그렇게 우리 가운데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오로 사도는 오늘의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 잘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이시오,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예배를 드려라.’”(히브 1, 1~3. 6)


그러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요, 진리로서 오실 때의 이 세상 실상을 오늘 요한복음서의 서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빛이신 그분이 오시는데 이곳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는 지적입니다. 앞서 히브리서의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듯이 본래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이 창조 되었듯이(히브 1, 2참조), 모든 것이 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말씀을 통하여 생겨나고 그 말씀으로 생명을 얻었는데도(요한 1, 3~4. 10 참조),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요한 1, 11 참조). 


이렇듯 세상은 어둠이 지배하고 무지에 싸여 있다는 이 현실의 한 가운데서 그분은 빛이요 생명으로 오신다고 요한복음서의 서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을 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요한 1, 5 참조),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현실의 암흑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며(요한 1, 14 참조), 그분의 충만한 은총과 진리를 받고 또 받을 수 있게 되었노라(요한 1, 16 참조)는 기쁜 소식을 오늘 요한복음서의 서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그렇게 암흑과 무지를 꿰뚫고 우리에게 전해옵니다


그렇듯이 오시는 분은 그래서 일 년 중 가장 어둠이 깊고 밤이 긴 동지를 가로질러 다시 떠오르는 태양으로 오시기에 이렇게 1224일 밤을 지새운 다음 1225일 아침을 맞이하며 주님 오신 곳에 모여 온 것입니다. 이렇게 오시는 소식이야말로 진정 어두운 곳에 헤매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복음이기에 교회는 옛적에(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이전까지) 미사를 끝마칠 때마다 저 어두운 곳의 상징인 북쪽을 향하여 요한복음서 서문을 매일 미사의 끝맺음으로 봉독하곤 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 전하는 그 때마다 생명과 빛, 즉 은총과 진리를 세상에 부어 넣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 전파의 전 과정을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육화’(Incarnatio Verbi)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 육화의 신비가 선포 성취되는 사건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언과는 달리 구세주 오시는 과정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탄생 과정이 그렇습니다. 그분 탄생의 소식은 어처구니없게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여행 나온 만삭의 임신부가 여관방을 얻을 수 없어 급한 김에 마구간에서 해산하여 그 핏덩어리 신생아를 가축의 여물통에 눕혀 놓았다는 어이없는 소식입니다


이러한 아기의 출생 소식은 위대한 지도자의 출현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역사적 인물들의 출생지에서는 신화 같은 어떤 위대한 내력을 듣게 됩니다.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곳은 무슨 영험한 풍수지리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팔자가 기구한 사람들은 그 출생지부터가 어떤 비극적 상황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의 어떤 아저씨가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도피 생활을 하다가 잡혀서 강제 입대를 하였는데, 그분의 부인이 논산 훈련소의 면회 날짜에 남편을 면회하려고 시어머니와 함께 작은 솥단지와 집에서 키우던 씨암탉을 잡아 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만삭의 몸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뱃속의 아기가 세상에 나오려 해서 논산 어딘가의 들판에 내려 아기를 낳았답니다.


그런 바람에 시어머니만 간신히 훈련소의 아들을 면회하고 그 부인은 길갓집에 맡겨져 있다가 핏덩어리를 안고 돌아왔는데, 그 아기를 보고 싶은 군인 남편이 전방에서 탈영했다가 다시 붙잡혀서 감방 생활을 하게 되었고, 후에 세월이 지나 그 아기가 커서 군인 가게 되었는데, 강원도 어느 전방에서 사고가 나서 죽었습니다. 그 아이의 운명은 그렇게 길가에서 태어나 객지에서 죽은 운명이었습니다.


오늘 태어난 예수님도 그렇게 객지의 외양간 동물들 사이에서 여물통에 태어나서 결국 객지에서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들의 저주 속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팔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개 병원(산부인과)에서 태어나서 병원에서 죽어 병원(영안실)에서 북망산으로 떠나갑니다. 태어나는 곳과 죽는 곳이 같게 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가 봅니다. 우리 구세주는 하느님이시라면서 하늘에서 태어나 내려오신 분이 아니시고, 인간들의 따돌림 속에서 세상에 태어나 인간들의 저주 속에서 세상에 묻히신 분, 즉 죄악의 한 가운데 오셔서 죄악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시고 이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새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시려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빛이시지만 어둠 속에 오셨고, 생명이시지만 죽음의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서의 서문이 선언하듯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요한 1, 14 참조)


그렇듯 우리는 하느님 당신 자신이 우리 인간들의 비참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러 인간들 가운데 사람으로 오심을 보면서, 그분 때문에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그 어둠을 이길 수 있는 빛, 즉 새로운 희망을 우리 인류가 지닐 수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 축제는 우리 성당의 우리만의 축제가 아니고 온 인류의 축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만의 성탄 축제로 끝내지 맙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 강생의 은총을 함께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복음서가 우리를 깨우쳐 준 말씀을 명심합시다. “그 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요한 1, 11)고 지적한 말씀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분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 3 참조)고 오늘 상기시켜 주는 말씀이 그렇듯이,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보내신 분이라고(요한 1, 7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는 만국 앞에서 당신의 큰 능력의 팔을 걷어붙이시고 세상 구석구석에 당신 승리를 현실화 하시려고”(이사 52, 10) 오신 분이시라고, 그분의 강생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들은 우리는 이제 참 빛으로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도록(요한 1, 9 참조), 그리고 그분을 믿어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게 되도록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아가 하느님 강생의 이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그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파하여, 주님의 구원 즉 우리의 평화를 펼치기로 합시다. 하여, 저기 저 온 세계에 우리 구세주는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사명을 다짐하기 위하여 이제 우리 모두 신앙을 고백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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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4. 20:30

보령 동대동 성당 : 윤종관 신부님 강론


예수 성탄 자정 미사



성탄 축하합니다! Merry Christmas! 서로 인사해봅시다. “기쁜 Christmas예요!” 하고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Christmas를 축하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강생을 미사로 재현하며 오늘의 이 밤을 지새우는 것을 ‘Christmas’라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Christ) 강생의 미사(Mass)‘Christ-mas’라는 이 밤의 경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Christmas를 이 어두운 밤에 봉헌하는 사연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어둠(동지의 계절)의 한 가운데서 순결한 마음으로 그 어둠을 가로질러 하늘에 영광을 바쳐드리는 그 사연은 무엇입니까그것은 아마도 질기고 질긴 어떤 집착의 너울을 지금에서야 걷어버릴 수 있는 때가 왔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그토록 길고 긴 어떤 고독의 터널을 이제 겨우 벗어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지금까지 억눌려 온 어떤 압박의 덩어리를 분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요?


이렇듯 우리네 모두는 이러 저러한 고통스런 삶의 역정을 지나왔습니다. 질기고 질긴 너울 같은 집착으로 자신의 한계 속에 갇혀 살아왔으며, 세상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 가운데 진정 나의 고민을 이해하여 해결해 줄 사람은 없고 오해와 불신으로 길고 긴 고독의 길을 걸어야만 했으며, 세상과 부딪치는 일은 고역이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얻는 게 스트레스뿐이며, 사랑을 빙자한 가까운 사이끼리란 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부담뿐인 그런 인간관계요, 그러한 인간조직의 어떤 압박으로 나를 짓눌러 온 것입니다.


사실 오늘 밤 이 성탄축제의 전례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바뀌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전환을 이룰 것이라는 메시지를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됐습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혹사의 장대와 몽둥이가 정녕 부수어질 것입니다.”(이사 9, 1~3 참조)


이런 뉴스를 우리는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서에서 청취하였습니다. 당하고만 살아온 지난 세월을 보상해 주실 분이 오신다는 소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갈은 막강한 통치권을 행사하여 이 흉포한 세상을 평정함으로써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줄 왕이 되실 아기가 탄생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뭇 정치적 변혁으로 우리의 세상을 바꿔 줄 제왕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다는 소식인 것입니다(이사 9, 3~6 참조).


하지만, 그러한 예언과는 달리 오늘의 복음서가 이 밤에 전하는 소식은 어처구니없게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이 밤에 구세주 그리스도가 마구간에서 탄생하여 여물통에 누워 있다고, 한 밤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동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소식을 전했다는 것입니다(루카 2, 8~12 참조). 위대한 지도자의 출현 이야기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상스런 이 밤의 메시지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 깨달음을 얻으려면 우선 오늘 밤 전례의 제2독서(디토 2, 11~14)로 바오로 사도가 하신 말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구원의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한다(디토 2, 1112 참조)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곧 오늘 밤 마구간의 구유에 탄생한 아기를 구세주로 알아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타락과 분망 속에서는 아기 구세주를 만날 수 없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티토에게 보낸 서간 중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2,11~15)

11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12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13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15 그대는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이러한 것들을 말하고 권고하고 또 꾸짖으십시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베들레헴 동네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동구 밖 외진 곳에서 예수 아기는 탄생했습니다. 그 아기는 인간들의 동네에서 쫓겨나신 분처럼 마을 밖 축사에서 자신의 처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곳 동물들은 그분을 내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동물들한테서만 환영받은 구세주인가 봅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깨달음을 이끌어 주는 오늘 복음의 의도를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타락 상황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무공해 장소라 할 수 있는 마을 밖 동물들의 처소에서부터 인간 구원의 첫 메시지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곳은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 하신 말씀대로 인간들의 불경건과 세속적 욕심을 찾아볼 수 없는 곳입니다. 인간들끼리 다투고 시기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속이고 무시하고 협잡하고 탓을 덮어씌워 따돌리는 등의 죄악을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진정 하느님의 손길만이 체험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눈을 뜬 어느 부부의 이야기


그렇듯 하느님의 손길만을 깨달아 새롭게 눈을 뜬 어느 부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읽은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19966월호 32)에서 얻어온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했지만 서로를 위하는 행복한 부부가 있었다. 이 부부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아기뿐이었다. 아기를 갖기 원했지만, 아기는 생기지 않았다. 기독교인이기도 한 부부는 날마다 아기를 내려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교회에 나가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 16, 드디어 부인이 아기를 갖게 되었다. 너무나 기뻤던 부부는 부둥켜안고 울었고, 주위 사람 모두 축복했다


한 달, 두 달이 흐르고 드디어 기다리던 아이와 만나는 순간이 왔다. 아이를 낳은 부인은 빨리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입원실을 들락날락하는 가족과 친척들, 친구들, 이웃들의 얼굴도 모두 슬퍼 보였다. 부인이 남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우리 아기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왜 아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거예요!” 남편의 눈에서 대답 대신 먼저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기는 보기에도 흉측한 기형아란 말이오.” 아내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안 돼! 안 돼!”를 외치던 아내는 아기의 흉측한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는 아예 할 말을 잃었다

아기도 울고 남편도 울고 온 가족이 울었다. 그 날 밤 아내는 한잠도 자지 않고 어둠 속에서 기도를 올렸다. 이튿날, 병실에 들어서는 남편을 향해 아내는 방긋 웃어 보였다. 아내는 남편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어젯밤 밤새도록 기도를 했어요. 하느님의 뜻을 물었지요. 우리 두 부부가 어찌해야 하느냐고요.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 아기를 어느 집에 보내야 사랑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너희 가정에 그 아이를 보냈단다.’ 라고요. 여보, 그 아이 잘 키워야겠지요.”


우리가 성탄 전야에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 우리는 이 밤에 무얼 찾아 이 Christmas에 참여하나요?

우리가 이 Christmas Eve에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산모가 기도하고 되찾은 마음, 그 마음은 Christmas Eve의 마음입니다. 본래 아기를 내려달라던 기도로 하느님을 향하던 마음이었다면 이제 기형아인 아기를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또한 같은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 마음은 우리 또한 이 캄캄한 Christmas Eve에 찾아야 할 마음입니다. 우리가 처음 가졌던 마음(초심)입니다. 그 우리의 되찾아야 할 마음은 White Christmas 같은 환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일까 생각할 수 있었던 마음일 것입니다. 아직 어느 누구도 미워해 보지 않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최초의 마음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보았을 때(그 다른 사람은 아마 엄마일 것입니다만), 아직 미워해 보지 않은 하얀 마음으로 그 다른 사람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마 오늘 밤 이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 사람들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가축들의 외양간에서 태어난 저 베들레헴의 아기는 그래서 세상의 배척을 받은 그 곳에서 잘못된 이 세상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첫 시간으로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신가 봅니다. 세상의 어둠만이 그리고 고독만이 그분을 맞이하였지만 그분은 하얀 마음으로 이 세상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외양간에는 미워하는 사람도, 질시와 원망을 일삼는 사람도, 싸우고 따돌리고 거짓을 휘두르는 사람도 없고, 다만 가축들만이 밤을 지새우는 동안, 순수의 허공을 까만 어둠으로 덮은 하늘에서는 별들만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그 외양간에 쏟아 붓고 있었지요. 아마 그래서 그 별들의 눈빛들은 곧 저 벌판의 외로운 목동들에게까지 천사들의 합창이 되어 울려 퍼졌던 것 아닐까요! 그 합창은 이러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 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난주간에 우리나라의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하는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국민들의 대략 반절은 자기들이 잘 선택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여 승리감을 맛보았을 수 있을 것이고, 다른 반절은 그러질 못해서 패배감을 곱씹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듯 소란스럽던 선거가 지나고 연이어서 이틀 후에는 1년 중 가장 밤이 긴 동지를 지났습니다. 길고 길었던 선거기간의 소란이 가장 긴 밤의 어둠에 묻히고 이제 새로이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이 주간에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란을 긴 동지의 밤에 묻어버리고 고요한 성탄의 새벽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는 이제 정치적 승리감도 패배감의 씁쓸함도 다 떨거내고 새하얀 희망의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듯 새하얀 마음에서라야 서로를 잘 받아들이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진정 서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이라야 세상에 진정 평화를 깃들게 할 것입니다. 참 평화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비로소 찾아지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야 평화가 무엇인지 알지요. 그 별들과 같은 천사의 합창을 듣고 깨달아 순결한 마음 되어 달려온 목동들에게 그 하느님의 사랑 자체이신 아기 예수 그렇게 새로운 세상의 구세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 목동들처럼 새하얀 마음 되어 그 아기 앞에 노래합시다. 가톨릭성가 99장입니다. 이 성가는 194년전(1818)Austria의 산골마을 Oberndorf니콜라오 성당 젊은 Joseph Mohr 신부가 시를 쓰고 Franz Gruber 라는 樂士가 작곡하여 그곳 가난한 시골 사람들과 성탄 밤 미사를 올렸던 성가이지요. 저는 오늘 밤 이 성가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여러분과 함께 부르고 싶습니다. “으로 바꾸어서 말입니다.


1. 고요한 맘, 거룩한 맘, 세상엔 없는 맘, 이 맘 우리는 찾았어요. 구유 옆에서 찾았어요. 구세주 나신 이곳, 여기서 찾았어요.

2. 고요한 맘, 깨끗한 맘, 우리가 찾은 맘, 처음 우리가 가졌던 맘. 오늘 주님이 찾아준 맘, 새하얀 마음으로, 이 세상 다시 보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 밤에 되찾은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의 구원 즉 우리의 평화를 펼치기로 합시다. 거기 우리 구세주는 탄생하실 것입니다. (끝)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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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2012. 12. 23. 만수리 공소 : 윤종관 신부)

The Lord is at hand

그러니 변해야지!





오늘은 대림절 제4주일이면서 주님 성탄의 거룩한 밤을 맞이하기 하루 전날입니다. 내일 밤에 성탄축제의 전례를 거행하게 됩니다. 성탄축제를 목전에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전례는 이렇게 다가온 주님의 강생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미 가까이 오셨으니 어서 경배하세하고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가까이 오셨다는 메시지를 영어 기도서에서는 “The Lord is at hand”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주님께서 우리의 손닿는 곳에 와 계신다는 말이겠지요.


이러한 주님의 오심에 대하여 우리는 오늘의 복음 내용으로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루카 1, 3945 참조).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외친 인사말이 곧 오늘 우리 또한 감격적으로 고백할 깨달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바치는 기도인 성모송이 곧 그 내용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모든 여인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시라면서 그분의 태중에 계신 주님이 더욱 복되시다는 칭송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엘리사벳은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가 1, 44)하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엘리사벳의 실토가 곧 우리 자신들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에서부터 주님 오심에 대한 체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가 기뻐 뛰놀듯이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에 들어오시는 주님을 만난 기쁨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그 깊은 내면은 아주 조촐하고 작은 마음인 것입니다.


성탄절이 오면 사람들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흔히 외형적 행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 마음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성탄절 사건이 있어야, 오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불우이웃을 도우러 밖으로 나간다든가 교회 공동체의 성대한 행사와 잔치를 벌일 수 있습니다만, 그런 것보다 더 먼저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미 마리아의 뱃속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로 하여금 발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 동네로 향하게 하셨듯이(루가 1, 39 참조), 또한 그 예수 아기는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세례자 요한 아기를 뛰놀게 하여 엘리사벳의 감격적 체험고백을 표출케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두 영혼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함께 깨닫는 공감을 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라는 두 여인의 영혼이 공감한 감격은 신시대와 구시대가 하나로 만난 감격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으로 부끄럽게 살아온 늙은 여인 엘리사벳이 뱃속에 품은 아기, 그리고 남자와 살아보지 않은 처녀 마리아가 뱃속에 가진 아기, 이 두 아기가 만난 감격의 뉴스를 오늘 루카복음서가 전하고 있습니다.


이 두 아기의 감격적 만남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저는 문득 며칠 전의 우리나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과정과 그 결과를 연상합니다. 여태껏 지나온 과거의 우리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지겨워해 하던 국민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면서 투표를 했지요. 그리고 그 결과를 보면서 51%의 사람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한편 48%의 사람들이 패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식으로 국민 중에 반절 조금 넘는 승리자 무리와 반절 조금 못 미치는 패배자 무리로 갈라놓는 해석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지요. 51%48%로부터 책임을 전해 받았고, 48%51%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게 되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선거 결과를 두고 함께 만든 결과라면서 축하와 위로를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여, 졌다고 생각되는 48%가 이겼다고 생각되는 51%를 향하여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으니 격려를 보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겼다고 생각되는 51%가 졌다고 생각되는 48%를 향하여 도와달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곧 진정한 새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 축구 경기처럼 두 팀으로 갈라져 상대방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시합을 한 것이 아니라, 함께 역할 분담을 하기 위하여 서로의 장끼 시합을 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른 발과 왼 발의 역할 점검을 해볼 필요성 때문에 선거라는 시험과정을 치렀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른 발이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가속 페달을 밟기만 하면 자동차는 사고를 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른 발이 필요에 따라 가속 페달에서 적절하게 브레이크 페달로 옮겨 가 밟을 줄 알아야 하고 그럴 때마다 왼 발이 클러치 페달을 밟아주면서 동력 조절을 해주어야 자동차는 정상 운행을 할 것입니다.


그렇듯 우리 사회는 우익이 있으면 좌익도 있어야 정상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익 사람들이 좌익을 일컬어 무조건 빨갱이라는 등의 욕을 해가면서 편 가르기를 하고, 표로 이겼다 해서 적게 나온 표를 무시한다면, “잘 살아보세를 표방하면서 함께라는 말을 빼버리고 내 편만 잘 살아보세하는 놀부 세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여당이 야당 되고 야당이 여당도 되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사회는 막히지 않고 흐르는 강에서 물고기가 싱싱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살맛나는 국가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자마자 맞이하는 이번 성탄절을 즈음하여 광주 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님께서는 성탄 메시지에 박근혜 당선자는 48% 반대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만난 자리에서 그 두 여인의 뱃속에 든 두 아기의 서로 알아봄을 감격적으로 전하는 뉴스와 연관 되고 있습니다. 서로를 알아보고 기뻐하는 뉴스를 창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두 여인의 뱃속에 든 두 아기처럼 선거가 보여준 라는 두 가지 입장이 서로를 진정 알아볼 수 있는 입장으로 승화되는 경과를 창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두 아기란 그 두 여인이 품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렇듯 우리 사회가 보인 두 가지 입장은 곧 서로 만나 두 마음이 함께 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쁨을 오늘 두 여인에게서처럼 체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뱃속에 든 두 아기가 만나듯이 서로의 두 마음이 만난 기쁨인 것입니다. 그 두 여인의 모습은 곧, 주님 오심을 체험하면서 변화되는 우리 자신들의 영혼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 어떤 엉뚱한 곳에 계시는 주님이라기보다 우리 자신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으로 이미 우리는 각자들의 영혼이 차지할 수 있는 행복의 최고치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왜냐면, 마리아의 모습으로 표상되는 교회 안에 주님이 계심을 우리는 엘리사벳처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엘리사벳처럼 우리 각자의 영혼은 교회를 통하여 이미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아가 듣게 된 칭송을 우리 또한 서로에게 들려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으니, 당신은 행복하십니다.”(루카 1, 45)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듯 진정 복된 여인 마리아는 그래서 그 행복에 대한 화답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가 오늘 복음 내용에 뒤따라 수록된 그 유명한 마리아의 노래’(루카 1, 4655)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처녀 마리아 개인의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주님을 만나서 새 삶의 행복을 얻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노래교회의 노래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마리아처럼 정녕 행복한 사람들로서 그 마리아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성탄절에 우리는 그런 행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듯 우리가 복된 까닭은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해서 이미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차지하시고 우리 삶을 당신의 것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의 참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으로 얻는 기쁨보다 더 넘치는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얻는 기쁨으로 다가온 성탄절에 우리 서로를 축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축 성탄!” 또는 “Merry Christmas!”라고 축하하는 내일 밤의 우리 서로 함께 하는 인사는 그래서 우리 각자의 영혼에게 보내는 기쁨의 확인인 것입니다.


그런 기쁨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 안에서 눈에 띄는 티끌까지 일일이 씻어내는 참회의 고해성사로 정결한 순백의 영혼을 회복했습니다. 그러한 순백의 영혼이 실제의 White Christmas를 우리 내면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그럴 준비를 해온 대림절을 마치게 될 내일 밤 주님과의 고요한 만남을 체험하러 세상의 번잡함을 피하여 동네 밖 외양간 같은 오로지 주님만이 계시는 곳, 즉 우리 자신 마음의 고요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의 외양간을 덮을 밤하늘은 그래서 소리 없는 합창 같은 찬미가인 듯 별들의 초롱초롱한 빛으로 반짝일 것입니다. 그 때 하얀 영혼 즉, 하느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평화가 있으리라고 저 하늘 높은 곳의 영광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합창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얀 마음의 포대기로 내일 밤 강생하실 우리 주님 아기 예수를 감싸 맞을 준비를 해야겠지요!


그 아기 예수 같이 욕심 없이 가난한 마음의 우리 주변 사람들과 함께 성탄 축복을 나눌 채비로 어서 하얀 우리 마음의 보자기를 깔아 놓을 말구유를 찾읍시다. 고해성사로 깨끗해진 우리 마음이라면, 아직 불우함의 어둠 속에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작은 구유처럼 조촐한 우리 마음이어야 합니다. 동네 밖 마구간인 듯 가난한 이웃집에, 그리고 선거 결과로 우울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또 노력을 해도 해도 성공을 마주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노동자 농민들의 마음에, 베들레헴 밤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천사들의 기쁜 노래 소리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행 소식과 정치사회 지도층의 참된 변화의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대하는 성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가 성탄절에 예수 아기 같은 작은 모습으로 변화 된 모습을 이웃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내일까지 남은 대림절의 하루만이라도 그 작은 모습의 조촐한 우리 마음이 되어봅시다.


이 글의 출처는 하부내포 공식카페입니다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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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시흥 캠퍼스 생길까?


서울대학교는 대학 발전을 위한 중요한 중장기 프로젝트로 추진된 시흥 국제캠퍼스 조성과제에 대한 추진경과와 향후계획을 2012년 7월 20일 보도자료를 통해 발표했다. 이 대학의 국제캠퍼스 조성사업은 2007년 ‘서울대학교 장기발전계획(2007-2025)’에서 제시된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5년여 동안 지속적으로 관련 업무를 추진해 왔는데, 그 추진 경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07 : 국제캠퍼스 위원회 구성

-2009. 6. : 서울대-시흥시 MOU 체결

-2010. 2. : 서울대-경기도-시흥시 MOU 체결

-2011. 9. : 시흥 국제캠퍼스 마스터플랜 수립

-2011. 12. : 서울대-시흥시 기본합의서 체결

-2012. 1-6. : 공동추진단 운영


군자배곧신도시의 부동산 열기로 이어지나


시흥 국제캠퍼스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군자배곧신도시 내에 약 20만평 규모로 조성된다. 이러한 조성계획과 관련해 서울대는 2011년 하반기에 캠퍼스조성 종합계획(Master Plan)을 수립했으며, 이후 시흥시와 공동협의체를 구성해 군자배곧신도시에 국제캠퍼스를 조성키로 협의 했다고 밝혔다.


시흥시 배곧신도시는 약 149만평 부지에 21,541세대(약 56,000명) 수용을 목표로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조성을 목표로 하는 곳이다. 이 중 20만평에 서울대 시흥캠퍼스가 입주한다는 계획이 있다. 



학생 4천명을 수용하는 기숙사가 생긴다


시흥 국제캠퍼스에는 미래형 교육기본시설, 글로벌 고급인재의 정주시설, 의료관련시설, 바이오 클러스터 연구시설, 산학협력시설, 지역사회와의 파트너십을 위한 복합시설들이 조성될 예정이다. 마스터플랜에 따르면, 4,000여명을 수용하는 학생 기숙시설, 600여 세대를 수용하는 교직원 아파트, 500병상 이상의 병원과 치과병원으로 구성된 메디컬센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밖에도 부속학교, 컨벤션센터, 문화 및 스포츠클러스터, 산학협력 클러스터 등 지역과 함께 상생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구상되고 있다고 한다. 


먼저 기숙사와 교육시설, 병원이 생긴다는데


이와 같은 캠퍼스 조성계획은 첫번째 단계로 기숙사를 중심으로 한 핵심 교육 관련시설과 병원 등 의료-바이오 클러스터의 핵심 시설들이 조성되며, 이후 단계에서 교육시설을 심화 확대하고, 산학협력 클러스터의 범위를 확대하며, 기타 지역상생 프로그램을 뒷받침하기 위한 시설들을 확충해나간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무협의는 지속한다고 하지만


한편 이러한 계획에 따라 서울대학교와 시흥시는 2009년 6월, 2010년 2월 각각 상호 양해각서를 교환하였고, 이를 토대로 실무협의를 진행했는데, 2011년 12월 캠퍼스 구축을 위한 기본 사항을 담은 기본합의서를 채택했고, 2012년 상반기 동안 상호 실무협의를 지속하면서, 본 사업에 관심을 가진 잠재적인 시장참여자들과도 깊은 논의를 진행하여 왔다고 보도자료는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2012년 7월 현재 토지공급조건 등 캠퍼스 조성을 위한 재정적 조건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의견접근을 이루어 가고 있으며, 조만간 이런 내용들을 중심으로 부속합의서 등 추가적인 합의서를 채택해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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