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2013 3 10일 오전 9시 @ 도화담공소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자식 이길 수 없다는 데 ...!

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



오늘 사순 제4주일로 우리는 사순절을 벌써 반절 이상 지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순절의 지루한 여정에서 혹 힘겨워 하고 있을 신자들을 위로 격려하는 노래로 교회는 오늘의 미사 전례를 시작 합니다(사제의 장미 빛 제의 색깔도 그 뜻을 표시함). 


그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오늘 미사의 입당송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오늘의 이 입당송은 이사야 예언서 6610-11절의 메시지입니다.


이 기쁨의 메시지는 오늘의 복음 성경 내용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유명한 탕자(蕩子)의 비유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발견되지 않는 이 유명한 비유를 단독으로 전하는 루카복음서에서 우리는 이 내용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잘 식별해야 합니다. 성서학자들은 루카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하여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많이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그 특징을 짚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활동 벽두부터 그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큰 관심을 보여주셨음을 주요 기사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써 예수님의 첫 설교(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는 그 주제가 이사야 예언서(61, 12 ; 58, 6)를 인용한 가난한 사람들, 포로들, 소경들,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은총의 선포였음을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4, 1819 참조).


그리고 이어서 루카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여인들과 죄인들을 각별히 아끼시는 바에 대하여 그 말씀과 기적을 행사하심과 행적 보도 가운데 수십 편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루카복음서에 소외된 사람들의 복음서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도 그렇듯이 소외된 사람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알아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즉 이 비유의 내용은 주님께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하여 최우선적으로 지극한 관심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그 주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탕자의 비유가 그것 한 가지만 불쑥 여기에 수록된 것이 아니고, 그 앞에 다른 두 가지 비유를 연이어 루카복음서 15장에 소개하는 걸 보면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바입니다. 루카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잃었던 양 한 마리를 되찾은 사람의 기쁨’(루카 15, 47)잃었던 은전 한 닢을 되찾고 기뻐하는 여인’(루가 15, 810)의 비유를 들려주셨다고 전하고, 이어서 탕자의 비유’(루카 15, 1132)를 말씀하신 것으로 편집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루카복음서의 이 15장은 이야기 세 가지로, 잃었던 것을 되찾은 주인공의 기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 세 가지의 주인공은 공통적인 존재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주인공은 한 분, 주님입니다. 앞의 두 가지 비유는 세 번째 비유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서론적인 도움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의 비유에 대한 제목을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이라고 붙여야 합니다.


해서, 루카복음서 15장의 전체적인 제목을 간단하게 붙이자면 아버지의 기쁨이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기쁨이라는 주제(主題)에 대한 부제(副題)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도 붙이고 싶은 게 저의 마음입니다. 가출하여 객지에 나가 소식 없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매일 대문 앞에 서서 동네 입구만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던 아버지께서, 멀리 거지꼴로 터벅터벅 돌아오고 있는 작은 아들이 보이자 측은한 마음으로 달려가 그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그 장면은, 그분이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과 동일하게 자식 사랑을 보여주는 감동적 장면인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아버지이시지만, 그분은 일반적인 의미의 아버지나 어머니이기보다는 하느님 당신 자신이십니다. 그분의 마음과 태도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태도,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과 태도가, 다 융합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시고 동시에 어머니이신 분으로서 자녀를 그렇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만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는 성경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한계성 때문에 그분을 아버지의 모습으로 전하고 있습니다만, 하느님은 아버지도 되시고 어머니도 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아버지의 마음 또한 어머니의 마음 못지않은 자식 사랑으로 녹아드는 간절함을 지닌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우리말이 있듯이, 오늘 복음서에 묘사된 아버지의 모습이 곧 아들을 이기지 못하고 애간장만 타는 모습입니다. 10여 년 전에 세상을 터나신 저의 아버지께서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제가 사제 생활하면서 되도록이면 교회 관습에 따라 부모가 저의 사제직 수행에 관여치 못하시도록 저의 성당 일에 대하여 궁금해 하시는 부모님께 일체 알려드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헌데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계시던 저의 아버지께서, 제가 일하던 대전의 D성당을 보고 싶어서, 아들인 저 모르게 다른 사람의 자동차를 빌려 타고 슬그머니 그 성당에 다녀가신 일이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저는 그분 세상 떠난 지금에까지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토록 아들 있는 곳을 알고 싶으셨던 병석의 아버지 마음을 아들인 제가 몰랐었던 것이 그렇게 후회스럽습니다. 그렇듯이 아버지 또한 어머니 못지않게 자식 걱정 때문에 늘 조이는 마음으로 사는 분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정서적으로 표현할 때는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분의 모습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그런 표현이 주는 감상으로 제가 오래 전 봄철에 글을 쓴 것이 있습니다. 안면도성당에 살던 시절의 것인데, 본당의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밥해주는 분을 둘 수 없어서 저 혼자 밥해먹고 살았지요. 그러면서 매 끼니를 챙겨먹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서 주일에는 대개 가까운 음식점에 가서 사먹곤 하였는데, 봄철의 어느 주일에 본당의 주일미사를 끝내고 오후 공소의 미사를 드리러 출발하기 전에 음식점에 점심밥을 사먹기 위해 서둘러 나가던 길에 느꼈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그날 일기장에 썼던 것입니다.


점심을 사먹으러 가다가 길가의 외딴 집 앞 늙은 살구나무를 보게 되었다. 꽃봉오리가 막 터지고 있느라고 가지마다 불그레한 물감을 흘리고 있는 듯한 그런 살구나무다. 그 외딴집 앞의 살구나무를 보자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쩌면 해가 긴 봄날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오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 배가 고프던 추억처럼 어머니 생각이 났다. 집에 돌아오면서 대문 앞에 나와 나를 기다리시는 어머니를 보자 더욱 배가 고프던 그런 옛적 어느 날 같은 마음이었다. 집에 가면 어머니가 밥을 주신다는 생각으로 달려가다가 나를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모습을 집 앞에서 문득 보게 되는 그런 마음이었다.”


사실 그렇게 시골 집 앞에 서있는 살구나무의 모습은 밖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서계신 어머니의 모습 같습니다. 그래서 어디고 살구꽃이 피면, 그게 나를 기다리며 대문밖에 나와 계시다가 내가 집에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반가워하시던 어머니의 얼굴 색깔로 그렇게 피는 살구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이 괴로울 때 언뜻 간절해지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저의 어머니께서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셔서, 저는 지금 아버지도 어머니도 찾아가 볼 수 없고 어쩌다가 그분들의 무덤에나 가보는 신세입니다. 가끔 미사 봉헌하면서 죽은 이들을 위한 성찬기도 대목에 잠시 부모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지금 이 강론 원고를 쓰면서도 문득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봄철이 되어 꽃피는 살구나무를 만나면 또 그렇게 어머니 생각으로 가슴이 멍멍 해집니다.


부모의 입장으로 자식 걱정에 있어서는 아버지든 어머니든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식 걱정을 하시는 분의 모습으로 대문 앞에 매일 종일토록 나와 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우리말처럼, 우리 인간들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느님께서 밤이나 낮이나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 걱정을 하시는 분이시라고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느님의 그 마음도 모르고 세상살이에 취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하느님 뜻과는 달리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가 당신의 품속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건 또는 얼마나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건 개의치 않으십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아들다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의 재산을 들고 객지로 나가 다 까먹고 타락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당신의 아들 자격마저 상실해가지고 거지꼴로 돌아와 아들이 아닌 종으로 받아달라는 그 아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으시며 무조건 당신의 아들 자격을 되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아들 자격을 무조건 되돌려 주시는 표시로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이라는 상징의 가락지를 끼워주시고는 기쁨의 잔치를 베푸십니다(루카 15, 2024 참조).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처지가 어떻든지 간에 하느님 마음은 하늘보다 더 높고 넓은 자비로 가득 차 계시다는 것을 오늘의 비유로써 예수님께서 강조하시고 계심을 우리는 새삼 깨달으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사순절 회개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자녀라면 오늘 비유의 끝 장면에 등장하는 큰아들처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심보(루카 15, 12 참조)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루카 15, 2530 참조), 행여 우리 이웃의 형제자매와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의 참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스런 자녀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우리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듯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사순절 길이 반절을 넘겼습니다. 부지런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이 되어 부활의 기쁨을 향한 회개의 발걸음 서둘러 나아가기로 합시다. 그렇게 살구꽃 피던 봄날처럼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사순 제3주일, 2013 3 3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사순절은 정치적인 기간

아름다운 세상은 회개로써 시작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우리나라 국민이라는 것이 참담할 정도로 부끄러운 게 있습니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지명한 국정 책임자들의 대다수가 이른바 비리 백화점 사람들이라는 것인데, 이게 이번의 새 정부 꾸리는 마당에서만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라 늘 있어온 것이고, 그것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이렇게 더러워진 나라인가 하는 비애감이 들어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그렇습니다. 깨끗한 삶을 보여주는 지도자, 사욕 없이 헌신하는 봉사자, 본받고 싶은 인격자를 우리나라에서는 찾기가 정말 힘든가 하는 자조적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인사청문회 뉴스를 외국 사람들이 알까봐 걱정스럽고 부끄럽습니다.


과연 이러한 우리 현실에서 좋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복음서 읽는 중에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과수원 주인이 살펴보다가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는 대목을 오늘의 복음서에서 읽게 됩니다(루카 13, 6 참조). 새 대통령이 인물 밭에서 제대로 된 을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래서 일부 국민들은 오늘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과수원 재배인처럼 말합니다.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루카 13, 8)하고 말입니다.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소개하신 과수원 주인과 재배인 사이의 대화 내용에 따라 우리의 요즘 정국뉴스를 빗대봤습니다. 저 같은 사제가 미사 강론 중에 시국 정치상황을 거론하면 교우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기분상해 하십니다. 신부가 왜 정치 얘기를 하냐면서요. 그러나 저는 정치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한 삶의 마당입니다. 거기서 혹 한 분야라고 잘못 치부되는 종교적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정치의 영향을 벗어나 살 수 없고, 경제행위를 포기하고 살 수 없고, 종교나 예술이나 취미를 향유하지 않고 살 수가 없습니다. 종교를 거부하는 무신론자도 그 자신의 무신론이라는 신념 자체가 이미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종교적 결의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듯이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땅위에 서있다는 자체가 정치적 테두리 안에서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 한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반쪽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반쪽은 정치의 영향 하에 살고 다른 반쪽은 경제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 전체가 정치와 경제와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모든 삶의 주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종교적인 일만 하고 세상 사람들의 정치경제적 삶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살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종교인이라면 성당에서 좋은 말을 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잘못 된 것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생각이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부조리하고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더라도 못 본 것으로 눈을 감고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자의 본분일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과수원 주인과 그 농부 사이의 대화 내용은 상당히 정치적인 것입니다. 주인과 농부 사이에 서로의 마음을 살피는 상황이 바로 정치적 상황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때문에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 13, 7) 하고 주인이 농부를 떠보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그냥 한해만 더 놔두었다가 그 다음의 결과를 보자면서 혹 좋은 결과를 보기 위해 투자를 좀 해보겠다고 농부가 주인에게 의견 제시를 합니다. 만일 그래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그때 가서 결단을 내리시라는 건의를 하면서 말입니다(루카 13, 89 참조). 참으로 바람직한 정치적 타협의 과정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현명한 결단을 해야 할 지도자(주인)와 그 결단을 슬기롭게 이끌어내도록 조언을 하는 협력자(농장 재배인)의 아름다운 정치 행위를 여기서 우리는 봅니다.


여기서 저는 정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간단히 저의 대답을 하고 싶습니다. ‘정치란 최선을 찾되 나 홀로가 아니라 함께 찾아서 잘 살자고 하는 인간들의 행위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뭉치는 것이 정치집단입니다. 과수원 주인과 농부는 그렇게 최선을 찾고 있습니다. 과수원에서 정치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정치적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 까닭은 오늘 성경의 바로 앞 단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아주 정치적인 질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바치려고, 즉 종교 행위를 하려고 모였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정치인 빌라도가 죽였는데(루카 13, 1 참조), 이를 어찌 보시느냐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종교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의 동시적 사건에 대한 견해를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정치와 종교의 차원을 함께 하는 인간 자신의 문제를 들어서 대답하십니다. 그것은 정치적 인간 따로 있고 종교적 인간 따로 있은 게 아니라, 한 인간이 근본에서부터 짚어야 할 과제를 지적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과제란 곧 회개인 것입니다. 인간이 변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국민 앞에 한 점도 뉘우치지 않으면서 정치 지도자로 나서겠다는 사람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잘못 한 게 없다는 듯 그보다 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울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양심에게 책임을 물어보는 태도를 터럭만큼도 엿볼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차지할 부와 권세만을 집착하여 부끄러움도 상실한 모습으로 지도자연 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러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만 하면 다 되는 세상인 것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다면 거기엔 참다운 정치도 실종 되고 있습니다. 정치는 없고 독단(독재)만 있습니다.


사람은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사람입니다. 그리고 과오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물을 줄 알아야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끼친 잘못에 대한 배상을 자신에게 청구하는 마음 즉, 뉘우칠 줄 아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사람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돌아올 줄 알 때 아름답습니다. 뉘우칠 줄 모르는 건 짐승입니다. 우리말에 아주 못된 짓을 하고 깨닫지도 않는 사람을 일컬어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데리고 사는 우리 집 강아지 오카미라는 녀석은 들어오지 마라는 방에 언뜻 따라 들어왔다가 주인인 제가 뒤돌아보면 슬그머니 저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뒤돌아 나갑니다. 그 녀석은 그렇게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못된 짓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개만도 못한 놈이라 하는 말에 이해가 갑니다.


우리의 오늘날 정치 상황에서 뉘우치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사람들 끼리 화합을 이루는 단초는 뉘우치는 일에서부터 가능합니다. 그래서 서로 믿고 살맛나게 살 수 있습니다. 뉘우치는 사람의 얼굴에 대고 차마 삿대질을 하지 못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선량한 본성이기에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태도는 사람의 모습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이기에 거기서 서로간의 증오도 녹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해서 그러한 뉘우침으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인간의 본래적 선성(善性)을 되찾는 마당이 열리고 기왕의 난국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전기(轉機)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뉘우침을 우리는 회개(悔改)라 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이라야 새로워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사순절 제3주일의 복음 메시지로 그러한 회개 촉구를 강렬하게 전해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놓고 그들이 잘못 한 게 많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에 앞서 스스로들 먼저 회개하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5) 오늘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과수원 주인과 농부 사이의 대화를 소개하셨습니다. ‘회개를 주제로 하는 비유로써 과수원 주인과 농부 사이의 마음 떠보기 대화 즉, 정치적 대화를 제시하셨습니다.


과수원에서의 그 대화를 제가 정치적 대화라고 일컫는 까닭을 앞서 설명했습니다만, ‘회개에 있어서도 정치성이 게재돼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정치적인 까닭은 회개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회에 따름이라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좋은 꼴을 보이진 못하면서 찾이할 것만 욕심껏 누리는 무화과나무처럼 백해무익한 물건은 없애버려야겠지요. 세상에서 부정부패만 골라가면서 저지르면서도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벌 받지 않고, 착한 사람들은 불행하게 사는 현실의 불합리를 개탄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불합리의 현실을 아직 참아 기다리시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함께 좀 참아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참아나가면서(undergoing) 좋은 앞날을 보자고 하십니다.


참아나간다는 것은 불합리를 인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심자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간 내면에서 희망이 심어진다는 것은 곧 인간 마음이 회개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건 사람이 변함으로써 좋은 내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곧 희망의 가장 확실한 씨앗입니다.


우리가 지금 나아가는 이 사순절의 길은 바로 그 회개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극기와 보속으로 자신을 갈고 닦음으로써 새롭게 되는 사람의 진정한 변화란 그 근본이 회개인 것입니다. 그 회개란 자신의 속을(내면을,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을, 마음을, 의지를 바꾸는 것이 곧 회개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 그것은 나를 내가 바꾸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한 나의 바꿈’, 즉 회개가 아니고서는 우리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해서 우리는 말합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말입니다. 오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수원주인과 농원지기 사이에 오간 말의 예화로, 우리 자신이 지금까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였다면, 이제 앞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화과나무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루카 13, 69 참조).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고도의 멋있는 정치적 메시지이지요. 하느님께서 기다려 주신다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화과나무로의 변화를 기다려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는 분(루카 13, 89 참조)으로 당신의 성자(예수님 자신)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러한 하느님을 찬미하는 우리는 화답송으로 다음과 같이 오늘 노래합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하늘이 땅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오늘의 제1독서 화답송 중 시편 102, 811의 내용)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자하셔서 분노에 더디십니다. 혹여 잘못을 저질러 온 것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장 징벌하시지 않고 우리가 그 잘못을 청산하여 변화되는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늘이 땅에서 높고 높은 것처럼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변화되기까지 기다려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허약한 무화과나무라면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듯이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를 통하여 은총의 거름을 얻을 수 있게 하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기회로써 사순절이라는 은혜의 시기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사순절 과제로써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행보를 걷는 것입니다. 즉 사순절은 회개를 위한 정치적 배려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치권의 사람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변화를 이룸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우리의 정치적 이 시점에서 뉘우치고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는 모습이 간절히 요구되듯이, 우리는 스스로의 변화, 즉 회개로써 거듭나는 사순절의 길을 가야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모두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뉘우치는 거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벌써 변화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는 것이 뉘우침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 뉘우침을 보이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를 자신의 탓으로 읽을 수 있는 양심 속에서 새롭게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이 다시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로써 세상 또한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부활절이 그렇게 다가올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사순 제2주일, 2013 2 24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지금 여기, 하늘나라!

산 위에서의 체험으로 ... 



사순절을 지내면서 그 두 번째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측근 제자들과 함께 산위에 올라가셔서 보여주신 것을 전하는 성경기사를 읽게 됩니다. 이와 똑같은 복음 성경의 내용에 따른 축일을 교회는 매년 86일에 지내기도 하는데, 그 축일의 명칭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變貌) 축일이라 합니다. 옛적에는 이 축일을 좀 어려운 한자어로 현성용(顯聖容) 축일이라 했습니다. 그 뜻은 거룩한 용모를 찬란하게 보여주신 축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찬란하게 보여주시는 그분의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 세 사람이었음(루카 9, 28 참조)을 오늘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모습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은 아무러한 때나 아무데서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오늘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루카 9, 2829 참조).


이렇게 오늘 복음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을 제가 강조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사제 생활해오면서 수많은 애환을 겪어왔습니다만, 그 중에서 제가 가끔 자책하면서 가장 마음 아프게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일하던 본당에서의 일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오래 근무하신 내외분을 예비교우로 맞이하여 저 나름으로 성심껏 교리와 신앙 지도를 해드려서 그 부부에게 기쁘게 세례를 베풀어드렸습니다. 그 부부께서 영세하신 후 저는 그분들 사시는 지역의 신자들과 잘 어울리도록 구역반 모임에 안내를 하여 드리고 본당의 성경 공부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권고를 했습니다. 당시 그 본당에서 저는 매주간마다 신자들께서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성경 해설을 본당주보 형식으로 발행하여 배부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도 그러한 성경 읽기 프로그램에 따라 점점 더 신앙적 기쁨과 신심의 성숙을 얻도록 이끌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본당의 전례 활성화를 위하여 전례공부와 전신자의 성가개창 연습을 시켰습니다. 헌데 그리 하던 중에 그 부부께서 저에게 항의조로 하시는 말씀이 천주교회는 시키는 일이 너무 많아서 참 힘드네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부부에게 저는신앙생활이란 세례 받은 것으로 한 번의 자격증을 얻은 삶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깊이를 더해가고 성숙해져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그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그 부부께서 보이질 않기에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드렸더니 오지 말라며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그 구역장에게 그 부부의 사정을 알아본즉, 그분들은 천주교 믿기가 힘겨워서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불교의 절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불교 사찰에 다니면 우리 천주교에서처럼 매주간 정해진 날에 모이러 가지 않아도 되고, 우리 천주교회에서처럼 밥을 굶어야 하는 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적인 공부를 하라는 닦달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안면도 성당에서 지낼 때 느낀 것인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께서는 멀리서 주말관광으로 안면도에 와서도 성당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찾아와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요일이라는 그 주말휴가의 기회에 관광지에 가서 일부러 사찰을 찾아가 불공을 드려야 하는 불교의 계율이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여튼 우리 천주교 신자들께서 관광지에 가서까지 주일미사 봉헌을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그것은 참으로 갸륵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천주교 신자들의 태도는 곧 오늘 복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측근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라 힘들게 산에까지 올라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만이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고 신앙으로써 진정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특별한 노력을 요구당하지도 않고 편리함을 도모하기만 하는 것이 신앙의 길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힘들여 올라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해서 저는 신앙의 길이란 등산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산위에서의 체험을 전하고 있는 성경은 산을 특별한 장소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러 올라간 곳, 모세가 민족을 구해야하는 사명을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곳,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체험한 곳이 산이었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의 측근 제자들이 주님께 대한 특별한 체험을 한 곳이 곧 산이었습니다.


성경에서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일반적 체험으로도 산은 그 영험함으로 인하여 거기 들어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여줍니다. 그리고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하고, 정작 산꼭대기까지 오르면 거기 오르면서 흘렸던 땀처럼 잡다한 생각과 자만과 모든 욕심을 자신에게서 떨쳐낸 마음이 되어 산 아래 세상살이 사이의 갈등이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마치 산이 하늘과 가까운 곳이듯이 거기 오른 사람은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마음이 되어 잡다한 세상의 일거리에로의 집착을 벗어버리는 순간이 됩니다.


저는 15년 전에 개인적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였습니다. 그 종주는 일주일에 하루씩 구간을 나누어 가는 산행이었습니다. 하루의 구간 목표로 삼은 산의 허리에 접근하는 그날그날의 새벽마다 여명의 하늘 아래 마루금을 드러내는 그 산의 정상을 바라보게 되면 가슴이 고동치곤 했습니다


하늘과 맞닿은 저 산꼭대기의 기상으로 이 땅위에서 버둥대는 나 자신을 이겨보자는 결의에 차서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한번은 영하 10여도로 떨어진 추위 가운데 한 밤을 자동차로 달려서 강원도 태백과 정선 사이의 만항재에 이르러 새벽 4시에 함백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밭의 어두운 산허리를 오르면서 정상의 턱밑에서 신비스럽게 밝아오는 여명을 따라 꼭대기에 빨리 올라 해돋이를 보고픈 마음으로 성급히 기어오르느라고 넘어지기를 여러 번, 드디어 1,573m의 정상에 오르는 순간 험준한 동녘 준령위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희를 전하기 위해서 대전에 있는 친구 신부에게 휴대전화를 걸었습니다. 아직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짜증스런 대답을 하는 그분에게 그 일출의 장관을 전하기에는 저의 말이 참으로 한계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의 장관을 볼 수 없는 산 아래의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그 순간 심정은 아마 오늘 복음 성경에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면서 예수님께 거기 머물러 지내자고 말한 베드로(루카 9, 3334 참조)의 기분과 같은 것이었다 할 것입니다. 그 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은 아마 제가 함백산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의 장관보다 훨씬 찬란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태양보다도 더 빛나는 그분의 모습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땀 흘려 산을 오르듯이 우리가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얻어야 할 신앙의 체험인 것입니다. 목적도 없이 세상의 편안한 길을 배회하는 삶이 신앙의 길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주인공이신 그분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건네는 예언자들(모세와 엘리야)은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당할 고난과 죽음에 관한 대화를 하던 것이었습니다(루카 9, 3031 참조). 그러한 영광의 순간은 고난과 죽음을 전제로 한 미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미래가 당도하기까지는 자기들이 본 바에 대하여 뭐라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루가 9, 3031 참조). 그것은 우리 또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까지는 지금의 현실을 가지고 진정 신앙으로 성취할 목표를 잣대질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신앙으로 성취할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는 오로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 35)하는 말씀에 따를 수밖에 다른 기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하여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오리무중에 즉, “구름 속에서”(루카 9, 35) 오로지 예수님 가시는 길을 찾아 그분 말씀 따라 갈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사순절의 길을 걷는 동안에도 그분의 영광스런 모습을 찾는 발걸음이 되어야겠기에 교회는 그분의 수난을 예견하는 순간적 빅 이벤트로써의 그 영광 체험으로 우리의 용기를 북돋우고 있습니다. “임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었기에 그 모진 길을 가셨으리라는 말은 옛 유행가의 노랫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임을 오늘 복음이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는 복음 성경의 단락에서 그 첫 구절을 잘 살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 28)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번 2월의 <매일미사>24쪽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이 구절에서 앞부분을 빼고 그 때에 예수님께서()’라고 인쇄되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할 내용을 <루카 9,28-36>라고 제시하고 있는 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거두절미하고 편의성을 따른 지침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불만스럽습니다. 미사 참례하는 신자들이 성경의 전후 배경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교우님들께서 <매일미사>책에 의존해서만 전례를 참례하는 게 불만스러워서 전에 본당신부 노릇하던 시절에는 <매일미사>책이 아니라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라고 교우들을 닦달했습니다. 그것 때문에도 앞에 예를 든 부부 교우께서 힘들다면서 불교로 개종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본론에서 비껴나간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게재에 저의 주장을 해보았습니다.


하여튼, 오늘 복음의 첫 구절 루카 928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라는 시간과 산에오르셨다는 장소를 강조한 내용을 주목하자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장소와 시간은 곧 하늘나라가 성립되는 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3명의 제자들이 산위에서 체험한 그 는 언제였을까요? 그것을 눈치 채려면 그 구절의 바로 앞 구절을 읽어보면 됩니다. 루카복음 927절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고는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셨습니다(루카 9, 27). “이 말씀을 하시고는 여드레쯤 되었을 때”(루카 9, 28)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오르셔서 오늘의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더러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들일까?’ 하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3명 제자들과 같은 예수님 최측근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열심한 신자들이어야 합니다. 그 열심한 신자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라가면서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들’(루카 9, 2324 참조)입니다. 그런 사람들이어야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루카 9, 27)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는 여드레쯤 되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루카 9, 28).


그렇다면 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죽기 전에 이미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곧 번쩍이는 옷을 입으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곧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루카 9, 3031 참조). 이때 베드로는 넋이 나간 채 말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 현실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초막 셋을 짓자고 말입니다(루카 9, 3233 참조). 


그러나 정신 나간 베드로가 얼마나 착각하고 있는 지를 그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어느 듯 구름으로 덮이고 맙니다. 그 구름 속에서는 너희는 예수님의 말을 들어라.”하는 말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아무에게도 그 본 것을 말하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루카 9, 3436 참조). 그리고는 다음 날 산에서 내려와 세상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들은 마귀 들린 사람 때문에 소란을 떨고 있었습니다(오늘 읽은 루카 9, 2834의 다음 단락 참조). 산에서 체험한 천국과 대비되는 세상의 현실로 돌아온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우리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현실하느님 나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 마침 빌그림 신부님(Fr.B.Grimm)의 이번 주 강론 말씀을 참고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아시아 가톨릭 뉴스(UCANEWS.COM)주일 복음 묵상에서 다음과 같이 강론하고 있습니다. 'The problem is that words just do not suffice'라는 제목의 강론인데 그 내용이 대충 아래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신들이 걸어가고 있는 현실의 세상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하늘을 목표 삼아 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일부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하늘나라를 지향하는 우리의 신앙이 그런 식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는 그림 신부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림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란 어느 장소와 어느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공(時空)이란 우주 안의 것입니다만, ‘하늘나라란 그걸 초월한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천국은 시공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서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였던 것입니다. ‘하늘나라란 여기 언제가 있었던 것 혹은 얼마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 또는 앞으로 생길 어떤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바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이 있는 사람들이다.”(필리피서 3, 20)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시민권이란 이 세상의 이 사람 저 사람의 정치적 시민권과는 다른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권이란 진정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 제자들이 예수님 따라 산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세상에서 보지 못한 현상으로 달라진 것을 체험합니다. 그분의 옷이 번쩍번쩍 빛나며 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나 또는 하늘의 현상을 그릴 때 빛나는 형상과 훈광(暈光)을 넣어서 묘사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현상은 우리 현실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란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볼 수 있는 것인 양 생각합니다. 이건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틀린 말입니다. ‘하늘나라는 아직 오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현실로 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우리는 지금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 하늘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희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하늘나라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고, 우리의 삶 속에는 이미 하늘나라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받음으로 인하여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늘나라가 이미 주변 현실로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림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음과 같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을 때 거기가 하늘나라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이미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 그곳이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상태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예배를 올립니다. 마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곳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끼었듯이, 우리가 하느님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 상태가 곧 이미 하늘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하늘나라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란 한국이라는 나라, 미국이라는 나라, 등등의 현실 정치적 단위의 국가 즉 어떤 곳과 어떤 시기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내가 사는 삶 속에 있는 나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속에 있는 하늘나라사람이 바로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여기, 내가 사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한 하늘나라 사람임을 확인하고 그 시민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순절이라는 특별한 시기를 각성하여 지냅니다. 그 각성하는 방식이 기도, 참회, 근신, 자선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예수님의 최측근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각성을 위하여 우리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우리의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이 아무 말도 못하였듯이 우리는 입으로 말하는 하늘나라 체험이 아니라 마귀 들린 사람들로 소란스런 현실의 세상에서 악을 추방하면서 우리가 당하는 고뇌를 묵묵히 걸머지고 부활의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 따라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듯이 우리도 부활절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의 길, 즉 고뇌와 참회 보속의 길을 가는 것은 진정 우리가 주님과 함께 얻고자 하는 영광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면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그 사순절 속에 영광의 부활의 날이 이미 함유되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봄이 왔음을 느끼고 깜짝 놀라서 땅속의 모든 미물들이 잠을 깨어 뛰어나온다는 경칩(驚蟄)이 멀지 않은 이즈음에 아직도 추위가 풀리지 않는 날씨라서 혹여 봄은 아직도 먼 데 머물러 있지 않은가 하여 움츠러들 수 있습니다만, 분명히 봄은 지금 우리의 산야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히려 찬바람으로 깜짝 잠을 깨고 서둘러 새로운 생장을 준비하라는 메시지가 이 사순절 중반의 소식인가 합니다.


그렇듯이 부활절은 멀기만 하고 우리의 사순절이 길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기쁨을 향하여 가기까지는 고뇌와 참회로 우리 자신을 일깨워야 함을 오늘 복음은 그 사순절 메시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강론 원고를 작성하다가 내다본 밤하늘은 정월 열나흘 달이 휘영청 뜬 하늘입니다. 잡곡밥 아홉 그릇까지 먹으며 맞이해야 한다는 대보름이 내일입니다. 원고를 작성하다가 한숨 돌리고자 밖으로 나가 바라본 열나흘 달은 두어 시간 전에 앞산 안테나에 걸려있더니 어느 듯 중천에 떠서 웃고 있네요. 만월에 아직 못 미친 열나흘 달이 오히려 더 예뻐 보입니다. 나를 내려다보면서 윙크하느라고 얼굴 옆모습이 조금 일그러져 있군요. 그러면서 내일 밤 다시 만나자 하는군요. 그렇게 보름달 다시 2(음력)에 뜨게 되면 부활절이 오는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사순 제1주일, 2013 2 17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내 그림자와 같은 마귀

성경말씀만 잘 외우고 있어도...!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고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면서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힘겨운 40일간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부활절을 준비하는 전통을 준수합니다.


본래 초기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축일 전 사흘 동안 특별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부터는 그 사흘 동안의 일을 40일 동안으로 늘려서 실천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셨던 것처럼(루카 4, 2 참조) 기도와 극기를 통하여 악()의 유혹을 끊고 새로운 다짐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의 발로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자연스럽게 사순절(四旬節) , ‘40일간의 시기(Quadragesima)’라고 일컬으면서 봉재(封齋)시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로 영어로는 Lent, 독일어로는 Fastenzeit라고 합니다. 절식하면서 검소하게 지내는 시기라는 뜻이지요.


이러한 사순 시기는 공교롭게도 봄의 절기입니다. 만물이 소생하여 새로운 기운으로 생동의 환희를 펼치는 이 절기에 하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극기로써 자신을 움츠러들게 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해마다 맞이하는 이 사순절은 저의 기분에도 매우 못마땅합니다. 길고 긴 겨울의 추위를 가까스로 헤쳐 나와 화창한 봄날을 즐기고자 들뜨게 되는 우리네의 자연스런 상춘(賞春)’의 분위기에 이 사순절이 찬물을 끼얹는 격입니다. 내일이 마침 봄을 재촉하여 비가 내린다는 우수(雨水) 절기이듯이 오늘 걸맞게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입니다. 우리 만수리 앞 아미산의 아직도 두껍게 쌓여있는 눈이 이 우수의 비로 녹아내리면서 이제 정말 앞 개천의 봄버들이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봄철이 되면 어디 함께 놀러가자는 제안이 많습니다. 그리고 전에 알던 분들이 봄나들이로 지나가다가 찾아와서 함께 먹고 마시자고 저를 밖으로 불러내게 되면 사순절의 검약정신을 빼앗기게 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 사순절이 왜 하필 이러한 절기에 오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오늘 사순절 제1주일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을 당하신 기록이 나오는데, 이 사순절에 봄나들이 사람들이 나를 유혹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생동하는 자연도 그렇거니와 우리 인간들도 들뜨게 되고 집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에 맞춰 이 봄의 계절은 마음을 산만하게 흩으려 놓습니다. 오죽하면 봄바람에 처녀들 바람난다는 속된 말이 생겨났을까마는 봄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계절입니다. 해서 사순절은 유혹의 계절, 곧 봄입니다.


하지만 봄나들이 상춘객들의 희희낙락하는 얼굴보다는 봄볕에 그슬려 임도 알아보지도 못한다.”는 속담의 말마따나, 봄바람에 터진 손등과 그슬린 얼굴로 부지런히 새로운 생명을 심고 가꾸는 논밭의 농부 같은 태도로 이 계절의 뜻을 헤아리라는 것이 사순절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해서, 행락으로 소비를 부추기는 계절이 아니라 땅을 갈고 씨를 심어 생산을 시작하는 봄의 계절이어야 하는 것처럼, 이 사순절은 우리 자신을 다시금 추스르고 마음의 밭에 은총을 심어 새로이 변화하는 삶을 일으키는 시기인 것입니다. 즉 농부가 묵은 땅 갈아엎고 새 흙으로 고르게 다져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는 봄철이듯이, 우리는 이 사순절에 자신의 낡은 습관을 떨쳐버리는 회개로써 생활 속에 주님의 은총을 씨앗처럼 심어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부활절을 준비해가야 하기에, 이 사순절은 은총의 시기라 일컬어집니다.


매년 이렇게 봄이면 다시 은총의 사순절을 새롭게 맞이하듯이, 늘 그렇게 주님의 은총은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여줍니다. 그러한 새로운 인간으로의 변화를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유혹을 이기시는 모습에서 터득해야 합니다.


유혹이란 무엇입니까?


유혹이라는 것은 나를 해코지 하려는 원수가 눈에 보이게 나타나서 마수를 뻗치는 것이겠습니까? 그 원수란 나 아닌 타자(他者)로서 나타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걸려 넘어지게 올가미를 놓아 유혹하는 악마는 사실 나 자신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내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즉 악마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늘 나와 떨어지지 않고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닙니다. 그 악마의 모습은 곧 나를 붙어 다니는 나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나에게 늘 붙어 다니면서 나를 약하게 만들고 나를 죄악에 빠지게 하는 악의 세력이 곧 악마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늘 그렇게 나에게 붙어 다니는 그러한 악마의 모습은 곧 나 자신의 그림자일 거라는 생각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담 이후 원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늘 그렇게 붙어 다니는 것이 악의 유혹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해서 악한 생각은 나의 그림자처럼 늘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나를 그 악한 생각에 담그게 합니다.


오늘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도 인간이시기에 그분에게도 그림자가 있었듯이 악마의 유혹이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마터면 빠지게 되는 것이 유혹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세상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그러한 유혹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유혹하는 악의 세력이 얼마나 집요하고 강렬한 것인지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오늘의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 사화’(루카 4, 1-13)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렇듯 집요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다가왔던 유혹의 악마는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었습니다. 인간의 그 본능이란 나 자신을 붙들고 나를 약하게 하는 육욕과 권세욕과 자기과시욕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인간을 어떻게 흔드는 것인가를 우리는 오늘 악마가 배고픔에 대하여, 명예에 대하여, 그리고 자만심에 대하여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에서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육욕은 어떠한 것입니까? 우리는 배고픔을 참으로 이기기 어려워하는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육체는 배고픔을 면하기로 그 욕망을 멈추지 않고 더욱 나아가 끊임없이 쾌락을 채우려고 합니다. 해서 먹고 마시고 육체의 즐거움을 채우기 위한 향락 산업이 도처에 성황을 이룹니다. 이러한 풍조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루카 4, 4 = 신명 8, 3 참조)는 성경 말씀으로 육체의 욕망을 물리치십니다. ‘빵만으로라는 말은 대통령 깜을 뽑을 때 경제문제를 우선시하는 선거 캐치프레이즈와 같은 것입니다. 먹고사는 게 우선이고 도덕이나 정의감은 뒷전인 현실이 빵만으로의 마귀 장난인 것입니다.


우리의 권세욕은 어떠한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굴하게 만들기 까지 하면서 세상에서 얻는 것을 가지고 권세를 지닌 것처럼 착각합니다. 권력에 빌붙어서 신념을 팔아먹는 짓은, 요즘 높은 자리 후보자로 지명 받고 국회 청문회를 통하여 망신당하는 사람들이나 정치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평범한 우리들도 세상 체면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는 짓을 숨 쉬듯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듯 세상에 대한 굴종으로 그 세상 것을 얻으려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는 성경 말씀(신명기 6, 13 참조)을 상기시켜 주십니다(루카 4, 8).


우리의 자기과시욕은 어떠한 것입니까? 우리 인간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탓에, 우리 그리스도 신자라는 사람들도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고 세상살이에만 몸을 바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치 하느님 아니 계신 듯 착각하면서 늘 인간 자신의 생각만을 척도로 삼고 신앙인의 기도를 비웃기만 합니다. 그러한 비신앙적 인간에게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성경의 경고(신명기 6, 16 참조)를 들려주십니다(루카 4, 12).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먼저 그러한 유혹을 물리치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은 자신을 억제하시는 광야의 40일 체험이었습니다. 광야라는 곳은 세상의 번다함을 떠나 자신만의 존재를 확인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40일간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 걸어간 40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순절에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광야 같은 나 자신만의 조용한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나 자신만의 조용한 자리란 오로지 주님을 만나는 나 자신의 내면인 것입니다. 세상의 번다한 바람 즉 유혹을 차단한 나 자신의 내면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그것을 일컬어 기도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 속에서 오로지 주님만을 만나는 그것은 곧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신 예수님의 태도와 같습니다.


그래서 광야, 그곳은 나 자신의 내부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세상의 유혹에게 휘둘리지 않는 평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끊어버린, 즉 나 자신의 인간적 욕망을 벗어버린 나 본래의 참 자아가 그 광야에 나선 모습이요, 거기서 유혹이라 할 모든 것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광야의 참 자아는 그래서 닥치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기도로써 물리칠 수 있습니다. 기도란 오로지 하느님께만 마음을 기울이는 내면의 응답인 것입니다.


옛적에 어느 고명한 스승에게 제자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날마다 많은 유혹이 저를 괴롭힙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사는 방법은 없습니까?”


스승은 대답 대신 작은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한 후, 그 그릇을 들고 정해진 시간 안에 동네를 한 바퀴 돌아오되 물을 조금도 흘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그 제자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스승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자 스승이 물었습니다


거리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거리에 누가 있었는지 아무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제자에게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삶도 그와 같은 것이다. 네가 하는 일에 전심을 다한다면 유혹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전심으로 하느님 말씀을 따르려고 기도하며 자신을 억제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본능 속에서 뻗어 나오는 유혹의 손길과 세상의 악의 세력을 예수님과 같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40일의 여정을 함께 가고자 하는 신자들께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응수하여 들려주신 세 가지 성경 말씀을 외우다시피 하면서 죄악에 빠질 위험시에 늘 기억하기를 제안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유혹의 계절에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우리는 광야에 나선 듯, 나 자신만의 시간으로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길을 감으로써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러 40일의 여정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유혹이 닥칠 때면 늘 예수님처럼 이 성경 말씀을 외워서 대처하기로 합시다. 그래서 오늘 미사에 참례하신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유혹자에게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신 성경 말씀을 저의 선창에 따라 외쳐봅시다. 무슨 시위 현장에서 선창자의 외침을 따라 복창하듯이 따라 외쳐봅시다. 오른손주먹을 치켜 뻗으면서 말입니다.


1) “사람은 밥만으로 살지 않는다.” (신명 8, 3 / 루카 4, 4)

2)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신명 6, 13 / 루카 4, 8)

3)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신명 6, 16 / 루카 4, 12)


그렇습니다. 이러한 성경 말씀을 외우기만 하여도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

재의 수요일, 2013 2 13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정초에 재수 없게?

왜 재를 뿌려?



우리는 오늘부터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단식 그리고 금육으로 정신무장을 하고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회개하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런 재를 받는 전례예식을 집전하는 사제로서 저는 오늘 참례하시는 교우님들께 다소 미안한 생각을 합니다.

제가 미안한 생각을 하는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저 자신부터 회개를 옳게 하고서 교우님들께 회개하라는 말을 하는가하여 저의 마음 한 구석이 찔리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오늘이 정월 초나흘인데 설날을 갓 지난 명절 분위기를 망치는 말을 하게 되어 그렇습니다. 사람을 두고 먼지()에서 왔으니 먼지로 돌아가라고 을러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초에 재수 없게끔 말이에요. 우리네 미풍양속에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정초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면서 새해의 좋은 일을 서로 축원해주는 게 인사인데, 이 새해의 벽두에 재를 뿌리니 정말 기분 잡칠 일이지요.


이러한 재의 수요일을 설날과 같은 날짜로 맞이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2005년의 설날이 그랬었습니다. 그해의 양력 29일이었는데 그날이 마침 설날이자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절과 교회 전례가 상충되어 교우들께서 당혹스러워 할 것을 염려하신 주교님께서 그 얼마 전에 공문을 내려 보내셨는데, ‘재의 수요일을 이틀 연기하여 금요일에 지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다시 정정 공문을 보내시길 재의 수요일은 중요한 전례의 날이므로 생략할 수 없는 것이니, 그 재의 수요일 미사 중에 설날의 조상을 기억하는 기도를 하고, 단식과 금육의 의무를 관면하지만 재의 예식은 다른 적당한 날에 꼭 거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선 사목 현장의 본당 공동체에서는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엔 다행스럽게도(?) 설날과 4일의 시차를 두고 재의 수요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정초에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이 좀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명절 당일이 아니라 해도 며칠 상간의 정초 기분을 좀 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설날부터 보름 동안의 이러한 정초는 우리네 민간 습속에서 신성시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초신수는 곧 일년신수라고 하며, 정월 보름까지 치성을 올리는 습속이 바로 그런 정초신수를 신성시하는 심성입니다. 그러한 우리네 심성을 정반대로 거슬려서 교회는 재의 수요일이라면서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단식을 하라 하니 이 어찌 고약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올해처럼 며칠 상간이 아니더라도 으레 재의 수요일은 설날과 그리 멀지않은 기간으로 만나는 절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달력으로 맞이하는 정초와 절후로 맞이하는 입춘에는 새해 운수를 조심스럽게 점쳐보는 습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입춘과 정초에는 점집의 문턱이 번잡하기도 합니다. 봄맞이와 새해맞이는 그렇듯 민간에서 행운의 창을 열고 그것을 맞이하려는 간절한 염원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간 심성을 미신이라 해서 타파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저는 백성의 그러한 연약한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염원을 무조건적으로 배격하기란 좀 잔인하지 않은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러나 이러한 정월신수(正月身數)’사순절 맞이의 만남을 절묘한 조화로 읽고 싶습니다. 정월신수란 먹고 마시며 즐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심신을 곧바로 세워서 치성(致誠)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사순절 맞이의 재를 머리에 얹음은 우리의 치성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말에 시작이 반이다.” 하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새해맞이로 살피는 정초신수로써 한해 목표성취의 반절이 달려있다 할 수 있고, 가족과 이웃과 위아래 사람들 사이에 도리를 찾고 다짐하여, 하늘과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알고 그 뜻을 실천에 담도록 새로운 각오를 세우는 사순절 정신은 매 한가지 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소홀히 된 우리네 사이의 그늘진 곳에 대한 새삼스런 보살핌의 마음을 다시 지니게 되고, 대동 공영의 복을 함께 비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늘 재의 수요일에 다짐하는 40일간의 사순절 행보에 대한 기초로써 참회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결심 하에 부합되는 동일맥락으로 마음의 다잡음을 하는 것은 정초의 마음과 같은 정신인 것입니다. 참회로 묵은 때를 씻음은 정초의 새로운 마음과 같은 것이며, 자선은 서로 간에 혹여 잊었던 마음 씀씀이를 되살려 사랑하는 사이로 만남의 축제를 이룸과 같고, 기도하는 자세를 새로이 간추리는 것은 자신의 내면과 하늘과 생의 근본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이며, 몸과 마음을 삼가 다잡는 설날이었듯이, 오늘 우리는 진정 단식과 금육의 뜻을 올바로 찾기 위해 재를 머리에 얹습니다.


그러므로 설날에 정신을 삼가 뜻을 세웠듯이, 오늘 머리에 재를 얹는 경건한 참회를 통하여, 흙에서 온 우리의 실상을 하늘에 향하도록 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흙에서 온 몸의 욕망을 제어하여 단식을 합니다만, 그것은 몸의 단련에 앞서 정신으로 먼저 나 자신을 곧게 세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단식이란 입으로가 아닌 몸으로 바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율법적 명령으로서의 금육과 단식을 실천하기보다는, 오늘로 시작되는 사순절 기간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어주기 위하여 나 자신의 정당한 몫을 조금이라도 포기하는 실천의 하나라고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단식의 실천은 나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기 위한 작은 자선행위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당한 나의 몫을 타인에게 조금씩이라도 양도하는 그것이 진정 자선이요, 그럼으로써 타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참된 기도임을 깨달아서 이 사순절을 시작함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함과 같은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 그것이 곧 회개(참회)’인 것입니다.


정리하여 말씀드리자면, 사순절에 우리는 네 가지 덕목을 특별히 과제로 삼아 실천합니다. 참회, 기도, 단식, 자선입니다. 이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간결하면서도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와 닿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인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6장중). 하느님께서 알아보시는 자선과 단식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알아보시는 그런 자선과 단식은 세상의 눈에 띄게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서만 평가 될 수 있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참회(회개)로써 내 마음이 달라져서 내 마음의 말을 하느님께서 알아들으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 까닭이 나의 마음에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마음과 상통할 수 있도록 변화 되어 표출되는 내 마음의 지향이 곧 하느님께서 알아들으실 수 있는 나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나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머리위에 재를 얹습니다.


왜 재를 뿌리는가? 오늘의 전례는 재수없게끔 재를 뿌리는 게 아닙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누구나 뭔가 새로운 다짐 하나라도 하듯이, 우리는 사순절을 이 봄맞이로 맞이하면서 새로운 삶을 다잡기 위해서 머리에 재를 얹고 참회와 기도를 바치며 단식과 자선의 길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재의 수요일 전례를 올리기로 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2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