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28일 성유축성 미사 강론


도유하기 위해 도유받은 사람

단 한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기름부음 받은 이들'... 주님의 종, 다윗, 예수님에 대한 얘기


성경에는 기름부음 받은 이들에 대한 얘기가 자주 나옵니다. 그 중 이사야가 예고한 주님의 종, 다윗 임금,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이 세분의 공통점은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을 섬기고 이 백성에게 도유하는 사명을 수행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분이 받은 도유는 가난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억압받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유가 드러내는 ‘~을 위한 존재라는 이미지는 시편 133,2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시편 133,2

머리 위의 좋은 기름 같아라. 수염 위로, 아론의 수염 위로 흘러내리는, 그의 옷깃 위에 흘러내리는 기름 같아라.

 

이 장면은 사제를 성별(聖別, 신성한 용도로 쓰기 위해 보통 것과 구분하는 일)하는 도유의 장면입니다. 이 때 아론의 옷깃은 세상의 경계를 상징합니다. 사제를 축성한 성유는 그 기름부음 받은 이를 통해 세상 끝까지 이르게 됩니다.

 

대사제의 거룩한 옷은 풍부한 상징이 있습니다. 에폿은 사제의 제의 중 조끼와 비슷한 옷인데, 에폿의 멜빵에 달린 두 개의 마노석에 새겨진 이스라엘 열두 아들의 이름이 그 중 한 사례입니다. 이 에폿에서 오늘날 사제의 제의가 유래했습니다. 오른쪽 어깨 멜빵에 달린 돌에 여섯 이름이 새겨지고, 왼쪽 어깨의 멜빵에 달린 돌에 나머지 여섯 이름이 새겨집니다(탈출 28,3~14). 가슴받이에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집니다(28,21).

 

탈출기 28,1~14

 

사제들의 옷

1 “너는 이스라엘인들 가운데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너에게 가까이 오게 하여, 사제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 곧 아론과 그의 아들인 나답, 아비후, 엘아자르, 이타마르이다. 2 그리고 너의 형 아론이 입을 거룩한 옷을 영광스럽고 장엄하게 만들어라. 3 내가 슬기의 영으로 가득 채워 주어 재능을 갖추게 된 이들을 모두 불러, 아론이 사제로서 나를 섬기도록 성별할 옷을 만들라고 하여라. 4 그들이 만들 옷은 가슴받이, 에폿, 겉옷, 수놓은 저고리, 쓰개, 허리띠다. 이렇게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옷을 만들어 주어, 그들이 사제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 5 금과,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 그리고 아마실을 가져다 만들게 하여라.”

 

에폿

6 “그들은 금과,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 그리고 가늘게 꼰 아마실로 정교하게 에폿을 만들어야 한다. 7 에폿에 멜빵을 두 개 붙이는데, 그 양쪽 끝에 붙여라. 8 에폿 위에 달 띠는 같은 솜씨로 금과,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 그리고 가늘게 꼰 아마실로 만들어 에폿에다 한데 붙이게 하여라. 9 너는 마노 보석 두 개를 가져다 거기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겨라. 10 태어난 순서에 따라 한 보석에 여섯 이름, 다른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을 새겨라. 11 보석공이 인장 반지를 새기듯, 두 보석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겨라. 그리고 그 보석들을 금테두리에 박아라. 12 이 보석 두 개를 에폿의 양쪽 멜빵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기념하는 보석으로 달아라. 이렇게 아론은 주님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기념하여 양어깨에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13 너는 또 금으로 테를 만들고, 14 순금 사슬 두 개를 줄을 꼬듯이 만들어, 그 꼰 사슬들을 테에 달아라.”

 

탈출기 28,21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에 따라, 곧 그들의 이름 수대로 열둘이 되어야 한다. 인장 반지를 새기듯 각자의 이름을 새겨 열두 지파가 되게 하여라.

 


사제는 자신의 백성을 짊어지고 가슴에 새긴다


에폿의 멜빵에 달린 마노석에 새겨진 이름은, 사제가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가슴받이에 새겨진 이름은, 사제가 백성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제는 제사를 봉헌할 때 이런 이름이 새겨진 에폿과 가슴받이를 착용합니다. 이것은 사제가 자신의 백성을 어깨에 짊어지고 그들의 이름을 가슴에 새긴 채 전례를 거행한다는 뜻인 겁니다.

 

오늘날 제의는 아론의 것보다 훨씬 간소하고 소박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제가 제의를 착용할 때 우리의 충실한 백성, 곧 우리의 성인과 순교자의 무게가 우리의 어깨 위에 놓여 있고 그들의 모습이 우리 가슴에 새겨져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사제의 거록한 옷은 참으로 전례적입니다. 아론의 머리에 부은 값진 기름은 아론 개인을 향기롭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두리까지 흘러 모두를 향기롭게 합니다.

 

백성에 대한 도유는 훌륭한 사제의 증거


주님이 강조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대사제에게 이루어진 도유는 가난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 그리고 홀로 슬퍼하는 사람을 위한 것임을 확인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도유는 우리 자신을 향기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유리병에 그 기름을 받아 담아두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기름은 부패하여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마음은 쓰라리게 될 것입니다.

 

훌륭한 사제인지 아닌지는 그가 돌보는 백성이 어떻게 도유되었는지 보면 압니다. 백성의 도유는 훌륭한 사제를 알아보게 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미사를 봉헌한 다음 기쁜 소식을 전해받은 이의 얼굴로 집으로 돌아간다면, 이것은 그들이 기쁨의 기름으로 도유되었다는 증거입니다그래서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복음의 도유가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연결될 때, 그 복음이 아론의 기름처럼 소외되고 외진 삶의 현장까지 흘러내릴 때, 충실한 백성의 신앙이 위협받는 제한된 현실, 변두리를 그 복음이 비춰줄 때, 우리 교우들은 기뻐 환호합니다.

 

하느님의 풍부한 은총을 내려주는 중개자


사제들은 언제나 하느님 은총이 풍부히 내리도록 중개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무엇을 요구하든지 거기에는 향기로운 기름으로 도유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음을 직감해야 합니다. 때로는 적절치 않은 욕망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바랄 때가 있을지라도, 그 욕구 또한 본질적으로 향기로운 기름으로 도유되고 싶은 열망이 잘못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혈하던 여인이 당신의 겉옷자락을 만졌을 때, 치유를 희망하던 그녀의 걱정과 두려움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군중 한가운데 계셨던 그 때, 사제복을 입고 겉옷의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기름으로 도유된, 아론에게서 풍기던 모든 아름다움이 구현되었습니다. 하혈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여자의 깊은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장차 사제직을 수행할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단지 삶의 변두리에서 예수님의 주위를 숨이 막힐 정도로 둘러싸고 있던 군중의 표면적인 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루카 8,42~45). 이와 달리 주님은 당신 겉옷자락까지 도달한 하느님 도유의 힘을 느끼셨습니다.

 

루카 8,42~45

42 그에게 열두 살쯤 되는 외동딸이 있는데 그 아이가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리로 가시는데 군중이 그분을 밀어 댔다. 43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 44 그가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즉시 하혈이 멎었다. 45 예수님께서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스승님, 군중이 스승님을 에워싸 밀쳐 대고 있습니다.” 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도유의 힘과 구원의 효력을 체험키 위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과 피 흘림, 그리고 보기를 갈망하는 눈먼 삶과 그 삶이 있는 변두리에는 수많은 부정한 권력과 억압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복적인 자기반성만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는 없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자기 자신만의 체험이나 반복적인 자기반성을 통해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무익한 것은 아니지만, 특히 사제들이 자신의 힘과 노력만을 앞세워 과정과 방법을 찾고 적용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결국 우리는 펠라지우스의 추종자가 될 것이고 은총의 효력도 최소화될 것입니다. (펠라지우스Pelagius5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수도승으로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원죄와 유아세례를 부정했다.) 은총은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받은 기름을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만큼 그 힘을 발휘하고 효력을 내게 됩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참된 중개자가 되기를 마다하고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제는 차츰 중간 거래인이나 중간 상인으로 변하게 됩니다. 중간거래인이란 자신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지도, 열정을 다하지도 않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이 가득한 감사도 받지 못합니다.

 

슬퍼하는 성직자는 위기의 물결을 일으킨다


사제는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여야 합니다. 자신의 양 떼 가운데 머무는 목자,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지 못한다면 슬퍼하는 사람이 되고, 슬퍼하는 성직자는 옛날의 향수에 빠져 살거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메는 처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런 사제의 정체성 위기는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이들도 위기에 빠트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오늘날의 문화적 위기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활동범위를 넓혀가면 우리는 모든 위기의 물결을 부서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곳으로 떠나가서 사람들에게 순수한 은총을 전달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그러한 바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바다는 풍부한 어장입니다. 그곳에서 기능이 아니라 도유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는 단 한분,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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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7일 일반알현 때 하신 말씀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기

베드로는 쌓아온 확신을 위협받자 예수님을 책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갈바리아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지상에게 당신 사명을 수행하시며 이스라엘의 여러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느님 약속에 깊은 믿음을 둔 백성 가운데서 열둘을 뽑아 제자로 삼고, 단순한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시어 당신 곁에 머물고 당신의 길에 동참하고 당신 사명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부유한 청년, 가난한 과부, 힘있는 사람, 힘없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차별없이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져다주었고, 치유하고 위로하고 이해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희망을 선물하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모두가 느끼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처럼 아주 일반적이고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목자없는 양 떼같은 군중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셨고, 오빠 라자로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세리를 제자로 삼고, 곁에 두었던 친구의 배신을 체험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예수님에게는 집이 없었습니다. 군중과 우리 자신이 그 분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 사명은 모두에게 하느님 나라의 대문을 열어주고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우리는 성주간 동안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곧 하느님과 인류의 사이에 맺어진 모든 관계와 그 역사를 관통하는 사랑의 정점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모든 지상 여정을 마무리하며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당신 생명까지 모두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에서 친구들과 함께 빵을 나누어 들고 우리들을 위한잔을 나누어 마시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우리 가운데 사시기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 손에 내맡기셨습니다. 올리브 동산에서도,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실 때에도 저항하지 않고 당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고한 주님의 종, 곧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고 고난받은 주님의 종이십니다(이사 53,12).

 

예수님은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을 따르듯 당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잔혹한 죽음 앞에서 당신이 인간적 고뇌에 빠졌음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그분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우리를 위한 당신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당신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셨습니다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갈라 2,20)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길이 곧 나의 길이고 너의 길이며 우리의 길임을 알아차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삶의 가장 외진 변두리를 향해 가기 위해 우리 자신 밖으로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과 사람들이 잊고 사는 이들, 그리고 이해와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우리가 먼저 다가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비롭고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의 생생한 현존을 느끼고 체험하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주간의 의미를 삶으로 실현한다는 것은 늘 하느님의 논리, 십자가의 논리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논리는 무엇보다도 고통과 죽음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의 논리이며 생명을 가져오는 자기증여의 논리입니다. 십자가의 논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복음의 논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나가는 것을 요구하는 삶입니다.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는 것, 진부하고 습관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신앙생활을 탈피하고 나가는 것,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마저도 외면하게 만드는 자기 만의 틀에 머물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리고 나가는 것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오시기 위해 당신 자신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구원과 희망을 선물하는 당신의 자비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당신 거처를 정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 자신 밖으로 나오신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 자신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리고 하느님처럼, 우리 자신 밖으로 나가야 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와 비숫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해서 밖으로 나갈용기를 내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며 모두를 위한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줄 것을 말씀하시자 마자, 베드로 사도는 그 분을 한쪽으로 모시고 가서 책망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 사도의 계획과 어긋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쌓아온 확신과 메시아에 대한 이상을 위협받았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를 향해 복음서에서 가장 심하다고 할 수 있는 말씀으로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자비로운 마음으로 생각하십니다. 하느님은 강도를 만나 곤경에 처한 이를 보고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지나칠 수 없었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생각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쓰러져 있는 이가 히브리 사람인지, 이방인인지, 사마리아 사람인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하느님도 그러하십니다. 하느님은 양 떼를 보호하고 구하기 위해 당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는 착한 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성주간은 주님이 우리 마음의 문, 삶의 문, 본당의 문, 활동의 문, 공동체의 문을 열어주기 위해 은총을 베푸시는 시기입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러 밖으로 나가고’, 가까운 사람에게 우리 믿음의 빛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데 필요한 은총을 베푸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너그러움으로, 존중과 인내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손과 발과 마음을 내놓으면, 하느님은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우리의 모든 활동이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해주십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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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수난 성지주일, 2013 3 24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네 주제에 뭘...!

딱 한 사람 구원한 십자가 사건!



제가 사는 여기 부여군에서는 다가오는 424일에 국회의원 재·보결선거를 하게 됩니다. 그 선거를 앞두고 여기 부여·청양 선거구에 출마 공천을 받으려고 예비후보들이 인쇄물을 돌리고 거리에 현수막을 내걸어 자기 알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당인 새누리당 공천을 신청한 사람들이 9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새누리당으로 출마하면 따놓은 당선이 될 것으로 누구나 다 짐작하고 있어서인지 공천 경쟁이 아주 치열합니다. 그와 대비해서 야권에서는 아직 아무런 열의를 보이지 않고, 새누리당 공천의 귀추가 선거 본전보다 더 뜨거운 관심사항입니다


며칠 전에는 ARS 설문전화가 저에게 걸려왔는데 아마 새누리당 쪽에서 질문을 보내온 것 같습니다. 9명의 공천 신청자들을 하나하나 거명하면서 아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9명 가운데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인물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름 아는 사람 번호에 응답 다이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그다음 질문으로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제가 대답한 내용은 이 강론에서 밝히지 않겠습니다. 왜냐면 그것까지 밝히면 사제가 강론시간에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비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강론 가운데 정치인들의 태도에 대한 일반적 비판은 사제로서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이 어떤 태도로 국민 앞에 나서야 하는지에 관하여는 사제가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거리에 나붙은 예비후보라는 사람들의 자기 PR 문구를 보면 한결같이 내가 적격자이다.”라는 식의 내용입니다. 정치에 나서는 태도란 그런 식으로 자기 잘났다고 주장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봅니다


출마하는 사람이건 정당이건 간에 공통적으로 자기들이라야 나라의 새로운 앞날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후보들은 자기만이 부패한 정치를 청산하고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여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적격자라며 큰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러한 큰소리들의 공통적인 주장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훌륭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듯 자기만이 훌륭하다고 떠들며 분위기를 달구는 사람들이 설쳐대는 이 요란한 선거기간에 우리 부여 지방은 성주간과 부활 축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선거기간과 맞닥뜨려 맞이하는 우리의 성주간은 우연찮게도 몇 가지 공통점을 보입니다.


그 첫 번째 공통점은, 사람을 내세워놓고 사람들이 심판을 하는 점입니다. 앞에 나선 사람을 놓고 다중의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합니다. 국회의원 후보자를 국민들이 평가하고,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평가 심판하는 것이 그 첫 번째의 공통점입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선거를 통해서 그리고 성주간을 통하여 무엇인가 바뀐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은, 선거를 통해서도 성주간을 통해서도 사람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는 결과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의 공통점 즉, 사람을 내세워 사람들이 심판하는 그 공통점은 선거와 성주간에 그 내용을 전혀 달리하고 있습니다. 선거에서 사람들 앞에 나온 사람 즉, 출마자는 자기가 잘났다면서 스스로 나와서 사람들의 심판을 기다리는 입장인 반면에, 우리의 성주간을 통하여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그 사람 즉, 예수님은 스스로 잘났다고 나온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붙잡아다가 내세워놓고 심판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공통점 즉, 무엇인가 바뀐다는 공통점에 있어서도 선거와 성주간에 그 내용을 전혀 달리하고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서는 이 사람의 자리를 저 사람의 자리로 바꾸는 일이 일어나는 반면에, 성주간을 통해서는 동일한 한 사람이 다른 삶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 즉, 사람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는 결과가 일어난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희비의 내용이 정반대로 다른 것입니다. 선거에서는 이긴 사람은 기뻐하고 패배한 사람은 슬퍼하게 될 결과를 내겠지만, 성주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결과란 오히려 패배한 사람이 역설적으로 참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선거에서는 다른 사람을 제치고 살아남는 기쁨을 바라고 있지만, 성주간 메시지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참 기쁨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선거기간과 성주간에 엿볼 수 있는 공통점들과 그 내용의 전혀 다른 점을 짚어보면서 이 모든 공통점과 상이점을 십자가 사건에서 한꺼번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심판, 사태의 바뀜, 그리고 엇갈리는 희비의 결과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은 예수님 옆에 좌우로 함께 못박혀 십자가에 달려있던 죄수 두 사람의 말에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죄수가 예수님께 빈정거려 모욕적인 말을 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 39)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다른 죄수가 그를 꾸짖어 말했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루카 23, 40)하는 꾸짖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거를 통하여 선택할 후보자에게 말할 수 있겠지요. “당신이 승리해서 우리가 편히 살게 하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옆에서 나에게 말합니다. “너 같은 주제에 그 같은 말을 할 수 있느냐? 양심이 두렵지도 않으냐?” 하고 누군가 나를 꾸짖습니다.


헌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진정 누구이겠습니까? 유권자로서 후보자에게 당신이 승리해서 우리가 편히 살게 하시오!”라고 말하는 사람, 그리고 너 같은 주제에 그 같은 말을 할 수 있느냐? 양심이 두렵지도 않으냐?” 하고 꾸짖는 사람은 사실 동일한 나 자신입니다. 우리가 과연 누굴 심판할 수 있으며 또 누굴 빈정거리거나 누구에게 기대할 수 있겠는지,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양심을 지니고 있는지, 그건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히 다른 사람을 심판하여 살게 하거나 죽게 할 수 있습니까? 유다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규탄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 했었지요.


그리고 선거로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꾸어 책임을 맡기기에 앞서서 사태를 바꾸기보다는 나 자신이 바뀐 사람 되어야 진정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딛고 일어서는 승리를 통해서보다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삶을 얻는 기쁨을 얻어야 하는 것이 십자가 사건임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너 같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친구를 꾸짖던 죄수가 한 말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142) 하고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이 때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 죽어 가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2)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우리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그분께 우리는 나 자신의 죄악으로 못박혀 죽게 되었음을 고백하여 그분이 나를 생명에로 이끌어 가시기를 간청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그리고 이번의 4·24 ·보결선거철에는 언제나 선거전에 그렇듯이 자기 잘났다고 나선 사람들이 상대 후보자들을 깎아 누름으로써 이기려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비난하고 나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짓거리들은 옛적에나 지금에나 마찬가지 입니다. 도무지 사람들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비난의 화살로 옛적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정치판에서 어제는 친구인척 하다가 오늘은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려 하듯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칭송하여 환영하다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허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살기 위해 맞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저주 속에 죽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최후 순간에 그분은 사람 하나를 변화시키시는 소득을 올리셨습니다. 회개하게 된 죄수 하나를 데리고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신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파하시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으시는 순간에서야 이렇듯이 딱 한 사람 바꾸는 것으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오랜 노력이 막판에 가서 그저 미미하게 딱 한 사람만 구원하신 걸 보면 그분의 실적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실적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정치인들이 나라를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나서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만 죄인 하나를 회개시키시는 마지막 소득으로 생을 마감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죄인 한 사람이나 바꾸는 것을 그 목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뀌는 그 한 사람, 그것은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해의 주님수난성지주일에 읽는 마태오복음서나 마르코복음서 또는 요한복음서는 예수님 좌우에 죄수 두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함께 죽게 되었다는 것을 보도하면서도, 그 두 죄수들 사이에 주고받은 말이나 예수님께서 죄수 하나를 함께 낙원에 데리고 가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보도되고 있지 않습니다만, 올해의 이 주님수난성지주일에 읽는 루카복음서의 수난기에서는 그 두 죄수 사이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말씀을 특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분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죽게 된 죄수와 동행하여 죽으시는 것을 루카복음서는 특징적으로 보도합니다.


그러한 분이셨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 34)하고 기도하셨습니다. 루카복음서에만 기록되고 있는 이 예수님의 기도는 진정 그 성과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최후 순간에 사람들의 추악한 마음이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루카복음서는 강조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죄수 하나의 회개는 물론이려니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의 깨달음과 뉘우침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던 순간에 그분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한 백인대장이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고 거기 함께 있던 사람들이 또한 가슴을 치면서 돌아갔다고 보도하는 오늘의 루카복음서(루카 23, 4748 참조)는 우리 또한 그렇게 뒤늦게라도 각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 모두 세상을 죄악으로 더럽히는 주제에 선거에 나선 사람들 모두 자기선전만 일삼고 잘났다고 하면서, 편을 가르고 다른 사람 깎아내리려고 애쓰면서 스스로의 부족한 점 또는 약점은 감추려고 합니다. 그렇듯이 모두 내가 이겨야 하고 다른 사람이 져야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이치입니다. 자기 손해 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자기 탓이 아니고, 모든 것이 남의 탓이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자동차 운전하다가 무슨 사고가 나면 내 탓은 없고 상대방 탓이라고 우선 우기고 보는 식이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우리는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네 주제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하고 말입니다. 그러한 우리네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하시고 죽으시는 저 죄 없는 분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그러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고 가슴을 치는 회개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할 부활절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번 성주간은 그렇게 루카복음서의 수난기를 통하여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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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4일 주님수난 성지주일 미사강론


십자가 짊어지기

그리스도가 사랑으로 끌어안으신 십자가는 슬픔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제자들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수님을 동행합니다. 그들은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깔고서 그분이 이루신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소리높여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 19,38)

 

군중, 축제, 찬미, 축복 그리고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소박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 세상의 눈에 별 볼일 없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사람의 마음에 커다란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이해할 줄 알았고,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보여주었으며 비천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헤아리고 우리의 병고와 죄를 치유하는 사랑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기쁨과 축제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 분 사랑의 빛이 가득한 매우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우리는 성지주일 미사를 시작할 때, 예루살렙 입성 사건을 재현합니다. 우리도 팔마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지만 우리와 함께 걷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자 형제이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결코 슬픔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슬픔에 잠겨 있어서는 안됩니다. 결코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는 많습니다. 그러한 순간에 원수인 악마가 찾아옵니다. 대부분의 악마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교활한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한 때 일수록 예수님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분이 먼저 우리와 동행하고 우리를 당신 어깨에 메고 가심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기쁨과 희망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 기쁨과 희망을 세상 곳곳에 전달해야 합니다.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희망을 빼앗지 못하게 하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희망을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까요? 아니, 어떻게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까? 군중은 예수님을 임금님이라고 외쳤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그들 군중의 외침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입을 막지도 않으셨습니다(루카 19,39~40).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계셨습니다. 신하들의 행렬도, 힘을 상징하는 군대도 없었습니다. 그분을 영접하는 이들은 순박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님에게서 더욱 더 깊고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감각, “이 분이야말로 구원자이시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신앙감각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거룩한 도성에 입성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지상의 임금이 되기 위해서? 권력가가 되려고? 지배자가 되려고 그랬던 것이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것처럼, 그 분은 채찍을 맞고 모욕을 당하기 위해 그곳에 입성하신 것입니다(이사 50,6). 그분은 가시관을 쓰고 매질을 당하고 자주색 옷을 입고 조롱을 당하려고 그곳에 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왕권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나무형틀을 짊어지고 갈바리아 언덕에 오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강조해야 할 두 번째 단어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 뜻에 따른 그분의 눈부신 왕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왕좌는 십자 나무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왕자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왕의 왕자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왕좌입니다. 예수님은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악과 더러움, 세상의 죄와 우리의 죄 곧 세상 사람 모두의 죄를 당신에게 지우고 그 모든 것을 당신의 피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악으로 생겨는 인류의 상처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끝까지 지고 갈 수도 없는 돈에 대한 갈망이 인류에게 상처를 입히는 악입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단다.” 어렸을 때 제(Pope Francis) 할머니가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돈에 대한 사랑, 권력, 부패, 분열, 그리고 인간의 생명과 피조물을 거스르는 온갖 범죄는 악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 모든 피조물을 향한 사랑과 존중의 부족으로 비롯되는 개인적인 모든 죄도 악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그 악을 이기고 당신의 부활로 그 악을 물리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왕좌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이루어주신 선()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랑으로 끌어안으신 십자가는 절대로 슬픔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 곧 구원받은 기쁨은 물론 우리 역시 예수님이 돌아가시던 날 보여주신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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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2013 3 17일 오전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예수님은 누구편? 그 여자 편?

나는 나를 고발해야 한다.



이즈음에 연예가 뉴스에 참으로 낯 뜨거운 이야기 오가는 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박 모라는 인기 연예인의 성폭행 사건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의 전모를 제가 미사강론 중에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 연예인의 부끄러움모르는 태도 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성폭행또는 성추행등등의 용어를 보도매체는 물론이고 일상인들의 대화 가운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실태가 이미 우리 모두 부끄러움을 상실한 사람들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 마치 교통법규 위반한 것 정도의 비일비재한 일상적 이야기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랬다더라.’ 하는 식의 무덤덤한 대화 속에 섞여 말해지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운운하는 뉴스 꺼리에 대해서 혀를 차는 표정들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당혹감이 무뎌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 앉아 생각해보면 이를 어쩐단 말인가!’하면서도 저는 뚜렷하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도 한 성직자로서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고 돌아서서 얼른 다른 생각을 해버리는 식이고, 나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인 양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부끄러움을 지니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 현실을 진단하자면, 사실은 우리 모두 비겁해진 양심으로 살고 있다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비겁하게 무뎌진 우리 양심이 더욱 깜깜한 무감각에 절여진 것을 우리는 문득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남 탓돈의 힘으로 우리 양심이 깜깜해졌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박 모연예인 이야기는 보도에 의하면, 한 마디로 진흙탕 이야기입니다. TV인터뷰에 미소 띤 얼굴로 무슨 말인가 하는 그 사람의 변명에 대해서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저지른 짓에 대한 부끄러움은 이미 실종되었고, 피해자라는 여성을 더욱 치졸한 인간인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매체들 또한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찾을 기미마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합의서를 써주는 마무리를 향하는 수순으로 나아갈 것을 예상하게 하는 보도입니다. 아마 피해자라는 여성이 가해 혐의자에게 다음과 같은 합의서를 써주고 마무리 될 것을 우리 사회는 점치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육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가해자가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기에 고소를 취하하고, 이후 그 어떠한 민형사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 이러한 합의서 이후에 가해 혐의자는 법률적 무혐의로 뉴스 깜에서 벗어나게 되겠지요.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그에게 윤리적 유죄까지를 더불어 묻지 않겠지요.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무덤덤한 양심의 비겁함을 모두가 깨닫지 못하겠지요.


그리 된 다음에 그 피해자였던 여성은 어떠한 삶을 살아갈까요?


저는 여기서 그 여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나 자신들의 처지에서 짚어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여성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아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치졸하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억울하지만 그만하면(보상 받았으면) 됐다고 봐줄 것인가

저는 생각의 이 지점에서 오늘 복음 성경의 현장을 봅니다. 그 현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 누구의 편이셨나? 오늘의 이 성경 대목을 읽는 어떤 분들은 선뜻 대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그 불쌍한 여자 편을 들어주셨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싶습니다. “옳소!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 여자 편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욱 인간의 편을 들어주신 것이 정답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의 편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고 말입니다. 저의 약간 모호한 이 대답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해명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우선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들이댄 모세율법이라는 것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레위기 2010절 이하와 신명기 2220절 이하에 수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개략적으로 보자면, 간음 당사자는 남녀 모두 처벌하라는 것입니다. 가혹하게 돌로 쳐서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 모두를! 가혹하지요! 아마 그 시절에 성문란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리 가혹한 법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은가요?


그런데 말입니다. 구약의 그 율법을 자세히 읽어보면, 어떤 경우에는 여자는 놔두고 남자만 죽이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는 오늘 예수님 서 계시던 그 현장에서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왜 그 자들이 여자만 끌고 왔으며, 예수님께서는 너희들, 그 남자는 왜 끌고 오지 않았느냐?”고 호통 치셨어야 하는데 그 말씀은 왜 하시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혹 율법 공부를 제대로 하시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이 생각의 지점에서 다시 앞의 연예인 사건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봅니다. 언론보도의 맥락이 이른바 성범죄에 관한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귀추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주목하도록 보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결국 억울하다 하더라도 그만한 보상이 따르고 합의 될 것이다라는 통념에 대한 우리의 무덤덤한 양심을 반영할 것이라는 점을 저는 오늘의 복음 성경 현장과 대비하고 싶습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의 지점에서, 오늘의 성경 대목을 읽는 분들 가운데 예수님의 대답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 7)하신 말씀에 통쾌한 느낌을 가지실 분들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속 시원 하십니까? 그리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사라졌다는 보도(요한 8, 9 참조)에는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하고 말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다른 질문을 해봅니다. “예수님 덕분에 죽음을 면한 그 여인은 그만하면 잘 되었다고 행각하십니까?”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지혜로운 분 맞습니다. 그분 당신 자신이 지혜 자체이신 분이시니까요. 그분께서는 이 당혹스런 상황에서 속된 말로 머리를 잘 굴리셔서 사면초가로 닥친 당신 자신의 위기를 타개하신 분이시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 복음 성경의 보도 기사의 행간에 숨어 있는 것을 오늘 미사 강론의 주제로 삼고 싶습니다. 그 행간에 예수님의 본마음이 들어계십니다


그분께서 진정 인간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거만하고 음흉 교활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그리고 불쌍하고 더러운 창녀를 모두 사랑하셨습니다. 그들 모두를 참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양심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부끄러움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오늘날 네 탓돈의 힘에 절여있는 양심에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묵묵히 말씀하십니다.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그리고 여인아,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이 그 후 어떠한 삶으로 돌아가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여인에 대해서 더 보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는 그 후 요한복음서가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자들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괴롭히고 결국 그분을 죽이는 일에 주동적 역할을 합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앞의 많은 보도 기사 중에 예수님의 반대세력 주역들을 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 보도하였고, 그 후의 예수님 처형 경위를 보도함에 있어서도 그들이 앞장섰음을 보도합니다. 그들은 간음한 여인 앞에서 속된 말로 쪽팔린 처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정 인간의 양심에로 돌아가지 않았지요. 그들은 왜 그렇게 간악스러웠을까요?


제가 앞에 언급했듯이, 네 탓만을 일삼고, 세상 권력인 돈의 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요?


오늘의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관한 일화(요한 8, 111)는 교회 초기부터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단계적 세례예식에 있어서 예비자들에 대한 마지막 단계의 수련식 때에 이 이야기를 복음으로 들려줍니다.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한 정식 절차의 수련식을 사순 제5주일에 거행하는 복음 성경 내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복음 성경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자인하라고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멩이를 우리 자신에게 던지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차마 쪽팔린 처지에 돌을 여인에게 던지지 못했지만, 진정 자기 자신들의 양심에 던지지도 않았습니다. 비겁했지요. 그래서 진정 회개한 사람들이 되질 못했습니다. 네 탓만 일삼는 비겁함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용기를 내어 우리 자신에게 돌을 던져야 합니다. ‘나의 탓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 중에서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인인 우리들 모두는 곧 주님 앞에 끌려와 단죄 받을 것밖에 없는 그 여인의 처지인 것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과 만난 것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주님께서는 자비가 넘치도록 풍성하여, 가장 심각한 죄까지도 언제나 용서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용서받은 죄인이 온갖 죄를 피하고 버리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순절 동안의 복음독서로 알맞은 것인데, 사순절은 온 교회가 세례의 약속을 하거나 새롭게 하기 위한 준비로써 참회와 회개의 자세를 갖추는 시기이고, 그런 정신으로 고해성사를 보게 됩니다. 고해성사 때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을 만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한 비난을 일삼는 습성을 이 사순절 피크에 이제 그만 멈추면서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돌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나의 탓, 나의 잘못이라는 자신의 죄의식을 회복함으로써만, 우리는 사실상의 올바른 사회와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 돈의 힘으로 우리의 모든 비겁함을 해결하려는 그 비겁의 수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선언합시다. “나를 쳐야 할 돌은 나의 양심이요, 내가 나를 고발해야 한다.” 하고 말입니다. 나는 나를 고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양심이 마비된 세상의 진흙탕에 허우적거리지 말고, 진정 인간의 인간다운 상태로 돌아가는 부활의 삶에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7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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