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대축일, 2013 5 19일 11:00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순례단의 미사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한 마음으로 말이 통해야... 

성령강림을 하부내포 성지순례로 체험합니다.



저는 전에 있던 여러 본당에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예비교우 환영의 날로 지내곤 했습니다. 이날은 이러저러하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날이기에 그리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는 제1독서인 사도행전 2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모여 있다가 성령을 받고 말을 하기 시작하자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한 가지로 말을 알아듣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사도 2, 111 참조), 새로 나온 예비교우님들과 모두 한 식구로 서로 한 마음이 되는 자리라면 진정 오늘 성령강림의 축제로 걸맞을 것입니다.


여기 우리 만수리 공소에서는 오늘 그렇게 처음 오시는 예비자들과의 자리는 아닙니다만, 멀리서 오신 순례객 교우님들과 마치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 듯, 한 마음이 되어 미사를 올릴 수 있으니 이 또한 성령강림의 체험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이면서도 한 마음이 된다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성령강림을 체험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이란 새 인류 출현의 체험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거스르고 죄를 지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며 뿔뿔이 흩어진 바벨탑 사건(창세 11, 19 참조) 이후의 인류의 불행이 극복되는 이 성령강림 사건으로 다시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재창조되었음을 오늘의 이 축제로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령강림 대축일][오순절]이라고 부르는데, 글자 그대로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πεντηκοστη․Pentecost : the fiftieth)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축제의 완성을 이루는 날이 오늘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위대한 오십일 : the great fiftieth da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오십일만의 축제를 해방의 완성을 이루는 날(Asseret)’로 지냈는데,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진짜 해방을, 즉 새로운 삶을 얻은 부활의 축제로, 이 오십일을 통하여 완성하는 이날 [성령강림의 축제]로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동일한 체험입니다. 즉 부활과 성령강림은 한 가지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 없이 그리스도의 죽으심(묻힘)과 부활승천(일어섬과 들려 올리어짐)을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록 성령강림은 사도행전의 보도대로 오순절, 즉 부활 후 오십일만의 축제입니다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함께 입체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곧 성령강림의 축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는 요한복음서 201923절은, 부활 당일에 한 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결로 성령을 주셨다고 보도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23) 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신 바로 그 동작과 같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 7) 하였듯이, 죄악으로 스러진 우리 인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결로 성령을 넣어주심으로 죄의 바닥에서 일어나게 하여 주십니다(요한 20, 2223 참조).


그와 같이 성령, 즉 하느님의 숨을 받아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한 새 삶으로의 전환이 곧 진정 부활신비입니다. 그 부활신비를 우리는 세례로써 우리 자신의 것으로 체현하였는데, 그 사실을 매 주일 미사 때마다 신앙고백으로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례로 전환된 새 삶을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으로 실생활의 장에 펼치게 됩니다. 그러한 체험의 장이 곧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축제의 자리입니다.


이렇듯 성령강림의 축제가 드러내는 최대의 상징은 다 같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일치)’입니다(사도 2, 1 참조). 다 같이 한 곳에 모이는 거기에 성령께서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일치의) 기적을 이루어주십니다. 그것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사도들이 연설을 할 수 있게 된 기적(사도 2, 14 참조)이며, 또한 동시에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자기네 말로 다 알아듣게 된 기적인 것입니다(사도 2, 511 참조). 이 기적이 오늘 성령강림 사건의 핵심입니다. 바벨 탑 사건(창세 11, 19 참조) 이후 서로가 통할 수 없는 말들을 하면서 뿔뿔이 흩어져간 인간들로 하여금 이제는 서로 불같이 뜨거운 마음으로 말이 통하도록 변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세상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알아들을 만한 말을 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국어가 아닌 우리 한국어로 말하는데도 부모의 말을 자녀가 알아듣지 못하고, 자녀의 말을 부모가 알아듣지 못하며, 남편과 아내 사이에, 여당과 야당 사이에, 기업인과 노동자 사이에, 그리고 더 나아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남한과 북한 사이에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그것은 마음을 주지 않는 말들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서로가 진정 상대방의 마음과 하나 될 수 있는 자신들의 마음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셨던(요한20, 22 참조) 그분의 숨은 곧 성령이십니다. 그분은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 23)


용서란 무엇입니까? 묶인 마음을 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수지간이 사라지고 이제 서로 통하는 마음의 말을 하게 됩니다(사도 2, 4. 8. 11 참조).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말이 통하는 길(言路)이 트이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이 통하는 길(心路)을 터주셔서 서로의 말이 통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말이 통할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곧 소통(疏通)‘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의 소통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소통이 먼저여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 없는 말이 아니라 한 마음’(사도 4, 32 참조)에 실려 있는 말이었기에 모두 알아듣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벨 탑 사건(창세 11 19 참조)으로 무너진 인류가 새롭게 창조된 오순절 사건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류의 부활(재창조)로 실제화한 체험입니다.


그것은 즉, 언로(言路)와 심로(心路)가 동시에 꿰뚫리는 체험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도 우리들의 세상에 실현되어야 할 부활과 성령강림의 동일 사건이자, 파스카 즉 해방이 완성되는 오순절(오십일)인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주장하여 흩어져 패망하게 된 인류가 이제 한 마음으로 말이 통할 수 있게 된 새 인류로 다시 창조된 인류 부활의 사건, 그것이 곧 오순절 성령강림 신비입니다.


저는 이렇게 한 마음으로 말이 통하는 사이를 오늘도 실제로 우리 가운데 체험합니다. 서울에서 오신 순례 교우님들께서 여기 오셔서 저와 함께 이 지역 하부내포 성지를 새롭게 인식하시게 된 오늘,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말이 통하는 사이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년에 걸쳐 이곳 하부내포 성지에 관한 홍보를 하면서, 이곳의 해당 교구인 대전교구와 인근 교우 공동체들(본당들)의 몰이해와 외면을 당할 때마다 저는 적지 않은 좌절감을 마음속에서 삭이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멀리 서울에서 모여오신 순교자 현양회의 순례 교우님들의 오늘 순례를 통하여 이곳 하부내포 성지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확장과 성역화의 의의에 대한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오늘 성령강림절의 감동적인 은사로 저는 받아드립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한 마음으로 말이 통하는 사이가 되어 옛 신앙선조들이 순교로 고백한 동일한 신앙을 오늘의 우리들 사이에 생생하게 한 마음 한 말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오십일 만에 수천 명과 함께 그 체험을 공유하게 되었듯이, 우리는 이 하부내포 지역에서 목숨을 다하여 고백하던 150여 년 전의 신앙을 오늘 이 성령강림절에 동일하게 고백하는 입장이라고 저는 감동적으로 증언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순례 오신 서울 대교구 순교자 현양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150여 년 전의 신앙선조들과 동일한 신앙인들이십니다. 그 동일한 신앙으로 이 미사 후에 우리의 순례길을 걸어갑시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하부내포 성지 순례를 통하여 성령강림의 은사를 체험합니다. 150여 년 전과 한 마음으로 말이 통하는 사이가 되어 순례의 길을 가면서 신앙을 증거하게 된 감동적 체험인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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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18일 성령강림 대축일 전날, 여러 교회 운동단체와의 만남에서 하신 말씀


삶의 변두리

걸인의 손에 당신의 손이 닿아도 괜찮습니까?


  

 

교회는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곳이 삶의 변두리라면 어디든 가리지 말고 그곳을 향해 가야 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라! 그곳으로 나가라! 복음을 선포해라! 복음을 증거해라!’(마르 16,15)  그러다 사고라도 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병들어 있는 교회보다는 사고를 무릅쓰는 교회,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수천 배 더 좋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요한묵시록에는 무척 아름다운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거기에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 위해 그 문 앞에 서서 애타게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묵시 3,20).

 

묵시 3,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묵시록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메시지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자문합니다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몇 번이나 들어오실까? 그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몇 번이나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까?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그분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시도록 몇 번이나 문을 닫아걸었나? 무엇 때문에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인간의 틀에 갇혀 지내려 하는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합니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신앙은 예수님과이 만남이고,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돌의 문화, 분열의 문화,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없는 것을 가차없이 버리는 폐기의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백성의 지혜를 대표하는 노인에 대해서, 또 어린이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폐기의 문화에서 이들은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가치의 기준과 판단이 위기를 맞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으로 만남의 문화’, 우정의 문화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형제자매를 만나고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며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어느 면에서 세상 사람 모두가 우리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하느님의 모상이며 자녀입니다. 우리는 정체성을 간직한 채 모든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의 만남도 아주 중요합니다


가난한 사람과의 만남도 아주 중요합니다.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곧바로 가난과 마주치게 됩니다.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죽었다는 게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오늘날입니다. 이것은 무척이나 가슴아픈 일입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뉴스거리는 어쩌면 추문입니다. 추문이 뉴스거리가 되는 세상인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수많은 어린아이의 이야기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엄청 심각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 앞에서 침묵해서는 안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며 침묵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격식을 따지며 딱딱하게 구는 그리스도인, 차를 마시면서 신학적인 이야기만 즐기는 오직 학문적이고 만사태평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 거리에서 걸인들이 자선을 청하며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걸인의 손에 당신의 손이 닿아도 괜찮습니까? 아니면 그게 싫어서 바닥에 돈을 던집니까? 이 질문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는 것!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그들의 고통을 우리가 짊어지는 것을 문제삼는 것입니다.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난한 사회적 철학적 문학적 범주가 아니라 신학적 범주의 일입니다. 가난은 일차적으로 신학적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 곧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고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러난 가난, 하느님의 아드님을 강생(降生)의 신비로 우리에게 모셔다 준 가난,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난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그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향해 나아간다면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곧 주님의 가난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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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 15일 일반알현 때 하신 말씀

성령의 이끄심에 내맡기기

우리는 매 순간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성령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리를 향해 교회와 우리 개개인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성령은 진리의 영”(요한 14,17; 15,26; 16,13)이시므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16,13).

 

오늘날은 진리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대입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오늘날의 진리는 상대적이며 경향적이란 말씀을 여러차례 하셨습니다. ‘진리는 정말로 실재하는 것일까?’ ‘진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을까?’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 순간 본시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제기한 질문, 진리가 무엇이오?”(18,38)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당신의 사명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계시해주신 직후였습니다. 빌라도는 진리 자체이신 분이 자신의 눈 앞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얼굴, 곧 진리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그 분은 때가 이르자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사람이 되시어”(1,14) 우리 가운데 오신 진리이십니다. 그 진리는 우리가 움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만나는 것입니다. 진리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며 진리의 말씀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분은 누구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일깨워주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호자도움을 주기 위해 오시는 분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를 돕기 위해 우리 곁에 온 본이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요한 14,26)하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진리를 향해 우리를 이끌기 위해 우리의 삶에서 그리고 교회의 삶에서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고,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선택의 기준이 되고, 우리 삶을 이끄는 원칙이 됩니다구약에서 에제키엘은 이렇게 주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에제 36,25~27). 이 위대한 예언이 성령을 통해 실현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성령께 마음을 열면, 성령은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모든 진리 안으로”(요한 16,13)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에게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그 진리 안으로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우리가 언제나 예수님과 더욱더 깊은 친교를 나누도록 도와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절대로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내적으로 비춰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실존은 표면적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진리의 영은 우리 마음에서 활동하시면서 신앙감각을 불러일으키십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선언한 것처럼, 이 신앙감각을 통해 교도권의 인도 아래 있는 하느님의 백성은 전해받은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 올바른 판단으로 그 믿음을 더욱 깊이 깨닫고 실생활에 더욱 충만히 적용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성령의 활동에 마음을 열고 있는가?’

성령께 빛을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는가?’

내가 하느님의 일에 순응하도록 이끌어주시라고 기도하고 있는가?’

 

우리는 날마다 같은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성령님, 하루도 빠짐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향해 제 마음을 활짝 열어주소서. 선을 향해 제 마음을 활짝 열어주소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향해 제 마음을 활짝 열어주소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날마다 성령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이루어주신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루카 2,19.51) 마리아는 어떠하였습니까?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의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루어지고 발전합니다. 우리는 !”하고 순종하는 마음과 태도, 곧 하느님의 아드님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적으로 준비되어 있던 마리아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하고 순종하는 순간 마리아의 삶이 변화되었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의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일 때 변화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정말로 하느님에게서 생기를 얻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하느님보다 앞에 놓고 살아갑니까?

 

성령의 빛에 휘감기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진리 안으로, 곧 우리 삶의 유일한 주님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만또는 단순히 어떤 순간에만, 어떤 일부의 환경에서만, 몇가지 선택적 상황에서만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전적으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선물하시는 그리스도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 전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제자들의 길로 인도해주시라고 더 자주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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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승천대축일, 2013 5 12일 9시 @ 도화담 공소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하늘을 가슴에 담아 ... 

우리의 삶 속에 하늘이 내려앉아야...!



우리는 오늘 교회 전례력에 따라서 부활신비를 웅대한 입체감으로 체험합니다. 그것은 부활신비에 대한 역동적 체험, 즉 승천신비의 체험인 것입니다. 이 신비체험을 몸으로 느껴 보고픈 소박한 신자들의 관습으로 오늘 많은 본당 공동체들은 산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면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렇게 산이나 들로 나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미사를 올리는 이 관습을 야외(野外)미사라고들 말합니다만, 저는 하늘보기미사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 까닭은 마치 주님을 따라 산에 올라가 그분께서 승천하신 하늘을 바라보던 제자들의 심정을 우리도 함께 가져 보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 바라보는 하늘이란 무엇이겠습니까승천신비를 체험하고자 하는 우리의 하늘이란 결코 우리의 육안에 물리적으로 파악되는 우주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영혼의 하늘입니다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제가 거의 10년 전 쯤에 TV시청으로 들었던 김용옥 교수의 강의 내용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2004년에 MBC TV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강의 프로로 매주 월요일 밤 김 교수의 연속강의가 방영되었습니다. 그해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앞둔 517일 밤의 강의는 최한기와 니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 강의를 저는 중간에 시청하게 되었는데, 김용옥 씨는 니체의 초인(Übermensch)’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설명은 대강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명제 하에 신을 거부하기 위한 논지를 내세워서 영혼과 하늘나라 등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비하하고 오로지 인간의 몸과 현세적 차원의 땅의 의미만을 역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몸으로 달성해야할 수련을 강조하면서 영혼구원이나 하늘나라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비웃는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것을 보던 저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 자칭하는 김용옥 씨의 그러한 주장은 참으로 경솔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본성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려는 억지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김용옥 씨의 그 오만한 땅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올립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을 따라서 말입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사제가 함께 감사송을 바치기 위하여 교우들에게 마음을 드높이!” 라고 권유하면 모두 주님께 올립니다.” 하고 환호로 답하듯이, 우리는 오늘 특별히 우리의 마음을 주님 따라 하늘로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 우리의 마음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삽니다. 이 땅에서 얻을 것이 무엇일까 하고 땅에다가 마음 붙이고 사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땅의 소출을 얻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 없이 인간이 살 수 없지요. 사람이 땅을 딛지 않고 허공을 걸을 수 없듯이 인간의 삶이란 땅을 그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삶의 풍요로움을 땅으로부터 얻고 있습니다. 땅 속에서 무엇을 캐내는 것으로써 또는 땅을 일구어 얻어지는 열매로써 인간은 몸을 키우고 참 인간다운 삶을 이룹니다.


그러나 땅과 관련하여 인간이 동물과는 달리 참으로 인간다운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그 몸으로 딛고 있는 발밑의 땅 만을 땅이라 하지 않고, 살아가며 차지하는 영역을 일컬어 땅이라 하고, 그 땅위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땀을 흘릴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땅 거죽만 보는 존재가 아니라, 땅속까지 깊이 탐색하여 그 땅속이 품고 있는 값어치를 찾아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땅을 일구고 거기에 씨를 뿌릴 줄 알아 거기서 생명의 신비를 만날 줄 아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땅의 끝을 향하여 눈길을 멀리 보낼 줄 알기에 모험의 발걸음을 내딛기도 있고, 그렇기에 땅 끝 너머에까지 상상의 길을 마음으로 여행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땅 끝이 맞닿은 거기에 땅을 덮는 하늘을 느낄 줄도 아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땅과 씨름하는 한 삶을 인간의 한 생애라 하며, 그 땅과의 씨름을 끝마침이 곧 자신의 몸을 땅에 묻는 죽음이겠지만, 그 때 이 땅을 떠난다고 의식하는 존재가 됩니다. 즉 땅에 의지해야 하고 땅을 떠날 수도 없는 몸을 지닌 존재이기에, 땅과의 관계를 마치게 되는 시점에 몸이 땅으로 돌아가더라도, 몸이었던 인간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실체는 이 땅 끝 너머에까지 덮은 하늘을 향하면서 땅을(, 세상을) 떠난다고 의식하는 존재가 인간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망각한 김용옥의 주장은 그야말로 무식한 망발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란 물리적 공간의 땅 뿐이 아니고, ‘현세적 삶의 전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을 마치고 땅에 묻히게 될 때 세상을 따난다고 일컫습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오늘을 마치고 영겁으로 건너감을 뜻합니다. 이때의 영겁(永劫)’은 곧 하늘입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본다면, 인간은 땅에서 거저 얻어먹지 않는 존재이며, 그 반대로 인간은 땀을 흘려 삶의 질을 땅에 입혀줌으로써 땅 자체에 정신적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정 인간이라 불립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으로 땅에서 거두는 것은 땅 자체의 열매가 아니라, 땅과 상대하여 형성하는 인간 자신의 삶 자체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란 결코 땅에 묻혀 스러져버리는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즉 이 땅에서 만들어 나가는 삶이 허무하게 없어져 버릴 것이라면 인생이란 처음부터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의 굴절들을 내 생애의 씨줄 날줄로 삼았는데 그것을 어느 날 이 땅속에 다 묻어버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이 땅과 씨름하여 얻은 내 생애의 그 값을 어느 날 한꺼번에 빼앗길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땀 흘려 가꾸고 추수한 알곡을 어딘가에 잘 거두어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디가 거기이겠습니까?

하늘입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에페 1, 2021)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을 덮는 죽음의 세력을 굴복시켜 승리하신 분이 되셨음을 의미하여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곧 땅을, 그리고 이 땅위의 모든 인간을, 구원하신 분이라는 바오로의 설명인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땅은 모든 것을 담지만 하늘은 모든 것을 덮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보존을 외치면서 인간들의 오물로 땅을 더럽히고 있음을 반성하지요. 땅은 인간들의 모든 더러움을 마다하지 않고 담아주고 있지요. 그러면서 땅은 인간들로부터 훼손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은 인간들의 죄악을 담기 위해 상처받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곧 인간의 죄악이 세상을 더럽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땅은, 즉 세상은 어지럽고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땅에 가득하다 하더라도 세상을 덮고 있는 하늘은 고고할 뿐입니다. 죄악의 혼란이 하늘로 퍼져간들 하늘은 항상 하늘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이 되셨습니다. 돌아가시고 땅에 묻히셨던 그분께서 일어나시어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땅과 하늘 사이에 가득 찬 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한 그분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가 24, 4647)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시고 이 세상의 죄악으로 죽으시고 땅에 묻히셨다가 모든 권세 위의 하늘에 오르셔서 우리 모든 인간을 하늘로 불러올리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 하늘의 기운 즉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이 땅 위에 살면서 죄악과 대결하여 승리하고 그분을 따라 하늘로 오를 수 있는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얻을 것을 찾아 땅에다가만 눈을 깔고 서로 부딪치며 다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을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땅 끝 너머의 하늘에까지 눈길을 뻗어야 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승천신비는 부활의 새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땅의 테두리에 갇혀 사는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하늘로 오르시는 그분을 바라보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늘을 허공으로 보지 말고 그 하늘로부터 그분의 지배력이 이 땅을 덮게 됨을 알아보라고 말하였습니다(사도 1, 1011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승천신비를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승천신비의 체험이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이 세상의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이미 가슴에는 하늘을 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렇듯 주님 오르신 하늘을 본 사람답게 그분의 하늘을 가슴에 담아서 이 땅 위의 사람들에게 그 하늘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위의 것만을 보지 말고 우리가 가슴에 담은 저 하늘을 함께 보자면서 거기에 우리의 새로운 삶이 열려짐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줍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사에만 얽매이지 않고 산다면 그만큼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앉게 됩니다. 우리의 그러한 삶을 세상 사람들이 깨닫게 한다면 그로써 세상이 하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이 세상을 하늘과 가까워지게 하는 신비가 곧 다음주일의 '성령강림대축일'에 얻을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체험일 것입니다. 세상의 곳곳에서 모여온 사람들이 하나가 되던 오순절이 그 '성령강림'을 체험한 날이었던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7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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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일, 2013 5월 5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아담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

'위대한 소멸' 그리고 '감추어진 현실'

이것이 '사랑의 거울'이다.



마산교구의 구병진 신부님께서 쓴 웃으면 천당 가요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성당의 주일학교 미사 중에 강론을 하던 신부님이 어린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했답니다. “아담이 낙원에서 어떤 죄를 범했지요?”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한 어린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일어나서 대답했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말을 듣고는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죄를 졌습니다.”


신부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 아주 대답을 잘 했습니다. 헌데 그 때문에 아담은 어떤 벌을 받게 되었나요?”


꼬마 녀석은 자신이 없는 듯 머뭇거리다가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저어아담은 그 벌로 하와하고 결혼하게 되었지요.”


이 우스개 이야기 속에는 혼인이란 죄의 벌인 양 어쩔 수 없이 맺어지는 수도 있다는 뜻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만, 한편 상대방의 원의를 따르다 보면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결과까지 얻게 되는 사이가 된다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꼬마 녀석의 엉뚱한 대답을 달리 해석하여, 아담은 하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하와가 시키는 대로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되었다는 우스개를 덧붙여봅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그 금단의 열매를 먹으라고 하면서 아마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신, 나를 정말 사랑하나요?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보다는 내 말을 들어줄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 열매를 나와 함께 먹어보세요.” 이렇게 하와는 아담에게 요구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본래 남편이 아내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어야만 그게 사랑의 징표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의 근성을 잘 아는 아담은 그렇게 하느님께 벌 받을 것을 깜빡 잊어먹고 그 실수를 하게 되기까지 우매한 남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남녀 간의 사랑은 맹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여자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무모한 행위를 서슴지 않기를 기대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TV 연속 드라마에서 보면, 여자가 성질내면서 우겨대면 상대 남자의 표정은 처절하리만치 비굴해지는 게 드라마의 시나리오입니다.


아마 그래서 하와는 정말 아담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금하신 일까지 자기를 따라 해보라고 강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듯 남자들은 본래 여자의 강요를 미련하게 따르게 될 만큼 착각 속에서 여자를 사랑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남자가 그렇다는 것을 최초의 여자인 하와는 이미 간파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최초의 남자 아담이 최초의 여자 하와를 만난 순간을 창세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셔서 데려다 주시자 아담은 오래도록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하고 사랑을 고백했습니다(창세 2, 2123). 그래서 남편의 사랑 고백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고픈 마음이 아내의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정말 나를 그렇듯 사랑한다면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내 말을 따를 수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라는 식으로 하와가 아담에게 앙탈을 부리는 바람에 흔히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무모한 짓을 해서라도 여자의 환심을 사려는 그 만용을 부린 것이 아담의 실수였을 것 같기도 합니다. 불쌍한 남자들의 모습이지요.


제가 덧붙인 이 우스개를 가지고 오늘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을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아내 하와가 하느님 말씀보다는 자기 말을 더 따라주어야만 남편 아담이 진정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으로 앙탈을 부렸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듯이 현실적으로 눈앞에서 요구하는 사랑에 우리 인간은 아담처럼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연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에서 들려오는 꾸짖음에 귀를 막고 죄를 짓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 신앙인들이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비리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게 나쁜 짓인 걸 다 알면서도 저지르는 것이 인간의 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꼬임에 빠져서 인간은 죄를 짓습니다.


해서, 그러한 인간인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누구든지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 23)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하와가 아담에게 했음 직 한 저의 앞의 상상과 같은 뜻으로 오해하진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여 내 말을 지키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나와 아버지께서) 그에게 가서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526)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와가 아담에게 자기 존재를 알아달라는 식으로 맹목적인 요구를 했음 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증표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을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눈앞의 사랑에 눈이 멀었던 최초의 인간 아담 이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제쳐두고 맹목적으로 현실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깨우침을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은 아버지의 사랑을 앞세워서 이제 성령의 무대 뒤로 사라지시는 분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 2728)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요한 14, 3 28 참조) 여기서 예수님의 떠나심되돌아오심의 양상을 우리는 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을 저는 위대한 소멸감추어진 현실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위대한 소멸이야말로 참 사랑입니다. 오늘이 마침 어린이 날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어버이 날을 맞이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참 사랑입니다. 왜냐면, 부모는 자녀 앞에 자신을 다 바치고 사라짐으로써 그 자녀 사랑을 다합니다. 그 사랑은 위대한 소멸입니다. 그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다만 그렇게 자녀를 위해서 살다 가는 부모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무대자체에서부터 사라지시고 위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뒤로 숨으십니다. 그렇게 숨어버린 그분의 사랑을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로써 현실화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 사랑은 눈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닌 듯 감추어진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위대한 소멸감추어진 현실로 우리 안에 사랑으로 계속 남아 계신 분, 되돌아오신 분이라고 그분을 일컫고 싶습니다. 이렇게 그분은 떠나심되돌아오심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분,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분을 우리는 이제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알아 뵈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비를 충만케 하는 성령강림절이 다가오고 있는 이 부활절의 끝 무렵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묵상을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아직 이 세상에 속하는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현세적 유혹에 쉽사리 이끌리곤 합니다. 하지만 피조물 가운데 우리 인간은 육체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 육체적인 한계 너머에 인간이 건너갈 수 있는 그 능력을 일컬어서 인간의 영성(靈性)이라 합니다. 즉 물질적 및 육체적인 테두리를 초월하는 그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육체적 한계성을 함께 지닌 동물들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듯 육체적 현실의 한계성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본성을 인간으로 하여금 새롭게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 곧 부활의 신비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영적 본성을 먼저 보여주신 분이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현세적 상황에서 알게 된 바를 통하여 이제 현실 너머에까지 이르는 영적 깨우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적 단계에 이르는 것이 곧 본래적 인간의 참 본성 회복인 것입니다.


그 인간의 참 본성인 영성을 회복하게 될 때에는 곧 하느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진정 알아듣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를 옳게 되새기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단계에 이르도록 예수님께서는 그 보호자이신 성령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주실 것이라고 보증해주신 것입니다(요한 14, 26 참조). 우리에게 있어서 영적인 주도를 해주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주도자이신 성령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 27 참조), 그러한 인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창조주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그 영적 주도를 하실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로써 이제 우리에게는 성령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전에 떠나갔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하여(요한 14, 28 참조)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이루어주십니다. 그 부활하신 분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새로이 회복된 인간상을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 부활하신 분이 우리 인간 안에 성령으로 이루어주시는 구체적인 새 인간상은 진정 평화를 얻은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인간의 꾀에 넘어감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거역한 이래 우리 인간 자신 안에서 상실된 평화가 진정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참 평화란 곧 인간이 하느님과 이루는 평화입니다. 즉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대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참 삶의 길로 돌아서는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여,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모두에 우스개로 제가 풀이했던 바대로 아담이 사랑하는 하와의 말을 들어서 하느님을 거역했지만, 이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줄 앎으로써 그분을 사랑한다는 증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새로운(부활 신비의) 삶을 주도하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 성령의 주도하심에 따르는 삶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듯 성령을 받는 세례 때 고백했던 믿음은 곧 주님 사랑을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믿음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행위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부활 신비 가운데 다시 고백하는 우리 믿음은 그래서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거울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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