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6일 교황청립 외교관 학교에서 하신 말씀


나병과도 같은 출세주의

인간적 야망을 계획하지 않는 이가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내적 자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계획을 세우지도 않으면서 그러한 계획에 얽매이지도 않음을 의미합니다. 내적 자유를 지닌다는 것은 그렇게 고안해낸 방안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에 대한 계획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사제 여러분이 사목활동을 펼치는 여러분의자리와 장소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내적 자유를 지닌다는 것은 이처럼 여러분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속된 문화는 물론이고 자신의 고유한 기질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자유는 자신의 문화와 고유한 기질을 잊거나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나와 거리가 먼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나 자신을 개방하려는 것입니다.

 

내적 자유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에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는 인간적 야망이나 개인적 야심에서 자유롭기 위해 깨어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동시에 개인적 목적을 성취하거나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인정받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복음의 정신에 따라 최상의 선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선교의 임무를 삶의 첫째 자리에 놓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적 야망이나 개인적 야심에서 자유로운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출세주의는 나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출세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 대한 자신의 전망과 생각과 판단을 그리스도의 양 떼를 향한 베드로 사도의 시각과 사명과 사목적 애정에 일치시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양 떼를 사랑으로 돌보고 지키면서 양 떼와는 친교와 일치를 위해 봉사하라는 특별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사목적 애정은 세상 전체를 감싸 안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받는다는 것은 선임 교황들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듯이 특별히 교회와 인류의 관심,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소외된 지역에 찾아가 함께 함을 의미합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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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월 5일 일반알현 때 하신 말씀

재물에 대한 우상숭배

사람이 이익과 소비의 희생제물이 되어버린 세상


  


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지키고 보호하는 임무는 인간의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든 남자와 여자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익과 소비라는 우상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폐기의 문화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쓰는 물건이 망가지면 큰일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가난과 수많은 사람의 아픈 현실은 평범한 일상으로 여깁니다. 어느 추운 겨울밤에 바티칸 궁 가까운 오타비아노 가에서 노숙자가 얼어죽어도 뉴스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세상 곳곳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어린아이가 많지만 평범한 일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증권시장에서 주가지수가 10포인트 하락한 것은 비극이 됩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뉴스거리가 아니지만 몇몇 도시의 증시에서 주가지수가 10포인트 하락하는 것은 비극으로 여겨집니다. 사람이 쓰레기처럼 취급되고 버려지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폐기의 문화는 인간의 심리 구조 안에서 일반화되고 보편화되면서 모든 사람에게 전염됩니다. 이제 인간의 생명은 물론 인간 그 자체도 가장 먼저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최우선의 가치로 여겨지지 않는 듯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가난하거나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 어린아이나 태중의 아기처럼 아직은 유용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노인처럼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사람은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됩니다.

 

또한 낭비하는 소비풍조와 음식을 버리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집니다. 세상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가족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인 만큼 이는 더더욱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예전에 우리 할머니들은 음식을 조금도 버리지 않으려고 신경 쓰셨습니다. 하지만 소비주의는 날마다 필요이상으로 음식을 준비하게 하고 낭비하는 일에 무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경제적 기준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음식의 올바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버리는 음식은 가난한 사람과 굶주리는 사람의 식탁에서 훔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음식을 낭비하고 버리는 문제에 대해 깊게 숙고해보길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가장 궁핍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나눌 수 있는 방법과 길을 찾기 바랍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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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 2013 6 2일 @ 강경성당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기적은 우리의 손을 통하여! 

有錢使鬼神...?



우스갯소리 같으면서도 누구든 대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습니다.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고 물으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해서, 똑 떨어지는 답을 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돌려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실정의 고달픔을 토로하면서 흔히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우리네 삶을 꾸려나가기(, 경제행위를 해나가기)가 힘겨울 때 먹고 살기 힘들다.”는 표현을 빌려서 말을 합니다. 이 표현은 솔직히 말해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먹는다는 것이 그 기본이기 때문에 그러한 우리네 심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속담에 입이 서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서울 구경이 좋다 해도 먹는 것이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말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또 다른 의미로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먹든 마음 놓고 먹기가 힘든 실정입니다. 제조식품을 사먹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입에 넣으면서도 찜찜합니다. 불량식품이 유통되었다는 보도를 심심찮게 접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무말랭이를 넣어 제조한 만두가 유통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국민 모두 참담한 심정이었지요. 그땐 쓰레기 만두라는 별 희한한 음식 이름이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제 생활 중 많은 기간 혼자 밥해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 시절에 간편하게 식사를 때우기 위해서 가끔 마트에 가서 냉동 만두를 사다가 데워먹곤 했는데, 그 유명한 쓰레기 만두가 히트 치던 그 당시 고발된 그 불량 만두 제조업체의 명단 가운데 제가 사다 먹은 만두의 상표명도 들어있었습니다. 이른바 쓰레기 만두로 저도 가끔 끼니를 때운 거죠. 나중에 그 제조업체의 해명이 있었습니다만,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 만두를 대할 대마다 그 때의 불쾌한 기분이 되살아납니다. “내 뱃속이 쓰레기통이었구나!”하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사실 저는 만두를 좋아합니다. 만두 중에도 꿩 만두라면 소문 따라 찾아가 사먹습니다. 꿩고기를 다져서 속을 넣은 그 꿩 만두! 옛적 군종신부 시절에 전방부대에서 지내다가 모처럼 서울에 외출 가게 되면 저와 잘 알고 지내시던(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신) 북한 출신 할머니 댁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 할머니께서는 겨울이면 당신 고향(평안도)에서 해먹던 식으로 꿩 만두를 준비해 두었다가 저에게 먹여주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눈 내리는 겨울날이면 옛적 그 할머니의 꿩 만두가 생각나곤 합니다만, 꿩 만두가 아니더라도 군만두’, ‘찐만두’, ‘떡 만두’, ‘김치만두’, ‘야채만두등등으로 갖가지 만두의 이름만 들으면 저의 입속에는 군침이 돌곤 하는데, 그런 저의 입이 아마 쓰레기 만두에도 익숙해질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섬뜩해지는군요.


하긴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뱃속은 나름대로 소화를 시키는 능력을 함유하고 있어서, 어지간한 음식은 그것이 남았다 해서 버림으로써 그 음식 쓰레기로 말미암은 환경오염이 야기되는 것보다는 사람이 먹어서 소화하는 게 더 좋은 일이기에, 흔히 농담으로 사람의 배속이 가장 좋은 정화조라는 말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쓰레기 만두를 제조하여 판매한 사람들은 사람의 뱃속을 정화조로 여기고 그리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뱃속도 그 쓰레기 만두를 얼마 동안 처리한 정화조였나 봅니다.


이렇게 쓰레기 만두이야기를 하고보니 저 자신을 포함한 우리 한국 국민들의 몸이 쓰레기통 취급을 당한 기분이네요. 쓰레기를 먹고 사는 우리들! 아마도 부대찌개라는 음식의 근원이 옛적 굶주리던 전쟁시절에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 쓰레기를 끓여 꿀꿀이 죽이라면서 먹던 것에서 나왔다 합니다. 그 허기를 면하기 위한 처절하고 슬픈 부대찌개의 원조 꿀꿀이 죽의 역사를 우리 한국인들의 기성세대는 기억하고 있듯이, 거기에 더하여 쓰레기 만두를 씁쓸한 우리 역사로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자화상에 대한 비애감을 떨쳐낼 수 없고 부끄럽기 그지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비애감을 떨치고 싶은 심정이 들어, 우스갯소리 같은 말이기도 하며 사실상 철학적 질문이기도 한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하는 질문을 이 시대의 우리 모두에게 던져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떳떳한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 더욱 비애스럽습니다. 해서, 자조적으로 우리네 속담을 떠올려봅니다. ‘삼척염식영감(三尺髥食令監)’이라는 六言俗談입니다. 이 육언속담은 조선조 영조대의 선비 이덕무가 [청장관전서]라는 저서 중에 속담 100 수를 수집하여 한문으로 번역해 놓은 [열상방언](迾上方言)에 소개되어 있을 만큼 오래된 우리 속담인데, 그것은 쉬운 오늘의 우리말로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선비 이덕무는 마시고 먹는 것은 중요하고, 영감이란 존경하여 부르는 것이다. 비록 구레나룻이 석자인들 다만 먹은 연후라야 존중이 가하다.(重飮食也 令監尊稱也 髥雖三尺 惟食然後可尊重)”라고 해설을 붙이고 있습니다.


품위와 명분을 목숨같이 여기던 선비가 이렇게 문자를 써서 먹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 해설을 듣고 보니, 배고프면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쓰레기라도 먹어야 대접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비애감이 더해집니다. 허긴 따지고 보면 먹고 사는 것이 인생살이의 전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 삶이 고달픈 현실을 한탄하여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는 것은 사실 먹거리 찾기가 어렵다기보다는 돈벌이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선조 순조대의 조재삼은 그의 저서 [송남잡지](松南雜識)에 점잖은 선비답게 한자로 有錢使鬼神이라는 말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뜻은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우리네 속담입니다. 이러한 속담은 오늘날 금전만능주의를 표현하는 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신종 속담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사실상 예부터 회자되던 법도 돈 쪽으로 기운다.”고 하며 비뚤어진 우리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개탄하는 속담의 문자화인 것입니다.


그렇듯이 돈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는 인간의 더러운 탐욕에서 빚어지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차별로 다중을 살상하는 행위라 할 불량식품의 제조판매가 횡행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야말로 불량양심의 천국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에서는 이렇듯 안심하고 먹을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불량식품을 제조판매 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의 식탁에는 그 불량식품을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죽기 싫지만 돈벌이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겠다는 심보이지요. 버려야 할 단무지 꼬리를 가공하여 만두소를 만드는 그 사람들은 그야말로 자기 자신 속에 쓰레기 같이 썩은 양심을 지닌 불량인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불량인간의 심보는 쓰레기 만두이전에 이미 쓰레기 심보인것입니다.


쓰레기 만두이전에도 발암물질이 든 공업용 착색료로 물들이거나 쇳가루를 섞어 넣은 고춧가루를 팔아먹질 않나, 광견병에 걸린 개를 잡아 보신탕을 팔아먹질 않나, 꽃게 속에 납덩어리를 넣질 않나, 수입 참조기에 볼트를 넣질 않나, 공업용 소금으로 만든 젓갈 또는 공업용 본드를 쓴 떡시루라든가 공업용 이산화염소로 생선회를 닦아 먹질 않나, 하여간 쓰레기 심보들 때문에 무얼 사다 먹는다는 것이 겁나는 우리 사회는 쓰레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겁나는 쓰레기 세상에는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금전만능주의가 팽배하여 돈 앞에서 우리 사람의 생명은 쓰레기만도 못한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체는 이제 쓰레기 통 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돈이 인간에게 쓰레기를 먹이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이런 세상과는 달리 주님께서 무엇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주시는가를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새삼 깨달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주시는 것은 그분 자신의 살과 피입니다. 빵과 포도주의 표징 아래 주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라는 음식을 표징으로 하여 주님의 생명을 얻는 우리는 또한 이웃과의 먹거리 나눔에서 주님처럼 생명을 나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불량식품으로 사람들의 생명에 위해를 끼치는 우리의 세상과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입장에서 진정 생명을 존중하고 회복하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성체를 영해야 할 것입니다. 배고픈 군중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 13)하셨음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농사를 짓는 신자는 되도록이면 농약을 덜 쓰면서 나 자신의 땀을 더 흘려서라도 이웃의 생명을 존중하는 농산물을 생산해야 할 것입니다. 음식물을 제공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신자는 고객들의 건강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면 이익을 덜 챙겨도 마음이 즐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숙박업을 하는 신자는 수익에 앞서 손님들의 심신에 최선의 안위를 제공할 성실을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던”(루가 9, 13) 제자들처럼 미약한 능력밖에 없는 우리의 그 작으나 성실한 노력을 감사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넘치는 생명의 기적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루카 9, 1617 참조).


그러한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가진 것 빈약할지라도(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더라도) 세상 사람들 모두를 먹여줄 수 있는 배포(희망)로써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체성사 자체인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러한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가난하지만 세상을 몽땅 초대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변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잡게 해야 합니다. 오늘 빵과 물고기의 기적 현장에서,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루카 9, 15)고 성경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음식을 건네시고, 따라서 제자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먹거리가 무진 넘쳤습니다.(루카 9, 1617 참조) 기적은 그렇게 주님의 손에서 우리의 손으로 넘어와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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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 2013 5월26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들꽃 처럼! 

태양때문에 사는 들꽃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루하루 사는 동안 수없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신앙을 특별히 축제로써 고백하는 오늘을 일컬어 [삼위일체 대축일]이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의 머리로는 삼위일체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란 그 말 자체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려니와, 하느님 당신 자신의 신비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론으로(철학적으로) 해독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어느 신학자가 말하기를, 인간이 하느님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했는데, 저는 그 말에 공감이 갑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는 더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하였는데, 그런 심정이 진정 우리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는 모든 기도에 항상 성부성자성령이신 삼위일체의 신비, 즉 세 위로 한 분이시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을 부르면서 기도합니다.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삼위일체 대축일]에만 이 신비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적인 삶 전체로써 매일같이 이 신비를 고백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다 해서, 이 신비를 터득하지 못하고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이론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삶 속에서 이 신비를 체험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말씀하기를, 우리는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로마 5, 2 참조).


언 손을 녹이기 위해서 불속에 손을 넣는다면 손을 태워버리고 말겠지만, 불에서 일정 거리에 물러앉아 불을 쬘 때 불의 열기로 손을 녹일 수 있듯이, 믿음으로 얻는 진리도 그러합니다. 믿음이란 오만한 과학적 실증과 철학적 논증을 따라서라기보다는 겸손한 삶으로써 얻는 터득인 것입니다. 태양의 온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직접 태양에 다가가서 온도계를 찔러보아야 하겠다고 오만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이 땅 위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인간의 자세로써 간접적 측정 방법을 통하여 태양의 온도를 알아내 보는 것이 타죽지 않을 인간과학의 지혜로운 겸손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과학을 꾀하는 인간들과는 달리 연약한 들꽃들은 태양의 열기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더 잘 터득합니다. 차가운 흙 속에 묻힌 꽃씨가 햇볕을 감사하며 움터 올라 자신의 꽃을 피우고 옹골지게 열매를 익혔을 때 그 꽃씨는 더도 덜도 아닌 충만으로 태양열을 터득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은 태양을 생명으로 체험한 모습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얻는 그 들꽃의 생명 체험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삶은 땅을 떠나서 태양을 향해 솟구치는 오만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이 아닌 오만으로 하느님을 대하는 인간이라면 그 오만으로 스스로 뿌리가 뽑힌 채 곧 말라죽고 말겠지요.


그와 같이 무모한 추구보다는 딛고 서있는 이 땅 위의 존재답게 태양 빛을 쏘이며 터득하듯 태양 같으신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계시의 빛을 받아드리는 태도로 터득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능력성자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창세기 1장 및 요한 1, 3 참조)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흙에서 빚어진 몸(아담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성령)을 불어 넣으셨듯이(창세 2, 7 참조), 죄악으로 죽어 흙 속에 묻혀야 할 몸(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성령)을 되 불어 넣으시어(요한 20, 22 참조), 우리 인간()을 살려(부활시켜)주시는 사랑의 역동적 모습으로 당신을 알려주시는 신비가 태양 같으신 그분의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여 주심으로써 우리가 당신을 알아보도록 활동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우리 인간이 감히 가까이 대할 수 없을 만큼 한없는 위대함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그리고 더욱 우리와 동질적으로 생명을 함께 하시기 위해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모습이 곧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인간들끼리는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쉬 드러내려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불신하는 가운데 세속적 계산이 깔린 사이에는 자신의 참 모습을 그늘에 묻어두고 가면을 내미는 게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니라 실상 서로의 마음의 거리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날이 저물어 밤의 암흑이 깔리면 나그네가 갈 길을 더 이상 갈 수 없는 그런 것보다도, 사람이 서로의 본심을 감지할 수 없을 때 서로 만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처럼, 우리가 서로를 알 수 없는 불신이란 우리들 사이에서 마음의 벽이 가로막아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는 머나먼 마음간의 사이가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넘어 서로의 친밀함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태양을 만져보지 않고도 태양의 따뜻한 빛으로 새 싹을 틔워서 태양을 바라보는 들꽃이 자신과 태양과의 관계가 사뭇 가깝다고 증거 하는 것처럼,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렇듯 가까운 사이라는 우리의 증거적 행위가 요구됩니다. 태양을 증거 하는 들꽃의 자태가 드러내주는 증거란 그 들꽃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 생명 있음을 자신의 태양과의 관계로 증거 하는 들꽃의 모습으로, 즉 그 가녀린 자태 그 자체로 자신의 생명력을 제 딴에는 100% 들어내는 그것이 그 이름 따로 내밀지 않고 피는 들꽃의 존재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이름없는 꽃들의 아름다운 존재를 우리 신앙 처럼 간파하신 고 최민순 신부님은 '두메꽃' 이라는 시를 남기셨습니다.


여기 하부내포성지의 홈카페에 그 멜로디와 함께 제가 소개해드렸던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 처럼, 그렇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 자체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태로써 너무나도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로 또는 이론으로 증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그분은 어떤 분이시더라고 인간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기운을 우리 속에 품어 우리의 생명력으로 뿜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증거 하는 존재가 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6, 13 참조).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다 당신의 것이라 하시면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만,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6, 1215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알 수 있으려면 하느님의 기운 즉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인간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기운을 얻어야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려한다면 그 순간 인간의 눈은 타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이사야 예언자는 이제 하느님을 뵙고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이사 6, 5 참조).


이사야의 고백이 그렇듯이, 하느님은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는 분”(1 티모 6, 16)이시면서, 자비와 은총의 신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출애 34, 67 참조) 아버지이시기에,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셔서”(요한 2, 16)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오신 외아드님(성자)께서 부르시던 [아빠 -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우리들도 아빠 -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가르쳐주십니다(로마 8, 15 참조)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성자로써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성령을 우리 안에 넣어주심으로써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하여 주십니다(로마 5, 5 참조). 다시 말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체험하는 인간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시는 분의 모습이 곧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혼자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에게 항상 창조와 구원의 생명을 주시고자 활동하시는 분이시라서 곧 성삼위의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일컬어 우리는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님과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2 고린 13, 13)이 우리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미사의 개회 인사 참조). 그러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는 분으로 머무시는 분이 아니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언제나 당신의 생명에 참여시켜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같은 [삼위일체 대축일]일수록 우리는 실감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들꽃이 태양을 체험하여 꽃을 피우듯, 나약한 우리 인간이, 그리고 더욱 죄 많은 우리가, 감히 하느님 그분의 삼위일체 신비를 체험하는 감동의 신앙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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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5일 교황청 백주년 기념재단에서 하신 말씀


새로운 연대를 위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의 유지를 위한 새로운 연대가 필요합니다


  


연대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연대에 대해 교도권이 최근까지 내놓은 가르침을 토론에 붙여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교도권의 가르침은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미래를 대비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생각으로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도권의 가르침과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연계해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사회적, 경제적 발전은 지속적이면서도 빠르게 전개되고 있으며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 교도권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연대가 지닌 모든 가치와 유용성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더욱 깊이 연구하고 숙고한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연대의 본질적 가치와 유용성은 복음서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재발견한 연대는 무한한 가능성과 힘을 지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경제적, 사회적 위기로 인해 연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이 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 18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위기는 경제와 사회에 대한 교도권의 가르침이 지닌 진실성과 현실성을 게속 부각시켜 주고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늘날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위기상황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 중 하나인 인간의 노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세계의 모든 인류 가족을 볼 때, 우리를 지극히 당혹하게 하는 사실에 충격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 자원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면서도,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가 없거나 일자리가 있다 해도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각 정치 공동체에서, 그리고 국제관계에서 핵심적이고 중대한 사회문제인 노동과 고용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음을 분명히 증명해줍니다.”

 

일자리 부족이나 해고로 인한 실업은 오늘날 서구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는 현상입니다. 실업으로 인해 가난의 경계가 점점 더 넓어지는 현실이 심히 염려스럽기만 합니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적하신 대로 자연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생기는 가난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자원이 부족해서 일자리를 잃고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거나 노동의 품위를 상실할 수 밖에 없어서 생기는 가난은 없습니다. 지금의 실업 확산 현상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서구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고심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연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 권리에 부합하게 사회구조와 체계 전반을 올바르게 수정하고 개선하기 위한 전체적인 재고 차원에서 시급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경제적 시각에서 연대라는 말은 잘못 이해되어 부정적 용어로 인식되었습니다. 우리는 연대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합당한 자리를 되찾게 해주어야 합니다. 연대는 고상한 태도나 행위도 아니고, 사회적 자선도 아닙니다. 연대는 사회적 가치입니다. 따라서 연대가 우리 사회에서 제 자리를 되찾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현 사회의 위기는 단순히 경제적이고 재정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위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권력, 이익, 돈이라는 우상을 좇는 것이 사회적 활동의 기본 원리가 되었고 사회조직의 결정적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우리는 사업이나 시장의 논리와 변수보다 인간 존재 자체가 더 중요함을, 인간의 존엄성이 손상되지 않도록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는 일임을 잊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누구든지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간직하고 살면서 공동선을 위해 능동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새로운 연대를 모색해야 합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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