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6-28 금 7시30분 저녁미사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아내의 잔소리를 없애는 비결과 '하시고자 하시면'



신경질을 잘 내고, 잔소리가 많은 부인을 둔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친구가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 와이프는 어떤 이유로 신경질도 내지 않고, 잔소리도 없어진 건가?, 그 비결이 뭔가?"

 

그러자 그 남성이 답했습니다. 
"의사에게 데려가면 되네. 가기 전에 먼저 의사이기 아렇게 말해두면 돼.
"아내가 신경질을 내면 남편의 힘이 떨어집니다. 라고 말이야"

 

남편은 아주 지혜로운 처신으로 일상의 행복을 찾았습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처신은 우리가 청하는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마태 8,1-4)에서 보면, 나병환자의 현명한 기도가 보입니다. 어떤 나병환자가 산에서 내려와 많은 군중이 따르는 중이던 예수님 앞에 용기있게 다가와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손을 내밉니다. 그에게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의 기도로 주님은 그의 나병을 깨끗이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매우 대조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십니다(마르코 9,14-29) 

22절에서 아이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 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만 있다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시지요.

 

(9,23)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런 생각없이 주님께 청원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청원하기 바랍니다. 맡기고 '하시고자 하시면' 이라고 청원하면,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하니, 주님의 사랑을 맏고 의탁하고 청하십시요.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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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전민동성당 교중미사

2013년 6월 23일(일) 10:30 이경렬 베드로 신부


외적 팽창주의를 떠나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 공동체를 만들자


지난 주 평일의 5일간 대전가톨릭대학교 정하상 교육회관에서 사제연수가 있었습니다. 올해가 복음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이고,그걸 되짚어보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토론하고, 또 강의도 듣고 하던 시간이었습니다.


대전 교구에는 350여명의 신부가 있는데, 제 나이(경력) 위로 본당신부가 가능한 분의 숫자는 30여명 남짓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비판적 시각이 생기고 때론 부정적인 경우도 있어서 게다가 서슴없이 말하기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예를 들어보면,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우리 한국교회가 아시아의 선교를 주도적으로 맡아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 교회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거지요. 그러나 난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 우리들처럼 한국의 교회는 주일마다 성당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교회들은 우리에 비해서 4분의 1 정도의 인원으로 미사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망해가는 교회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과 일상 속에는 미사와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배어있는 겁니다. 우리의 현실은 성당만 찾을 뿐은 아닌가? 그래서 이런 주장도 나옵니다.


양적 팽창을 증명하는 통계를 그만 냅시다. 이제는 외적 팽창주의를 떠나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만들자.”


오늘 복음(루카 9,18-24)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냥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 때 베드로는 엄청난 고백을 합니다우리도 살면서 대답은 그렇게 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일상의 삶은 과연 어떻습니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 중의 한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공자,맹자 등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과연 우리 일상과 삶의 진정한 구원자는 누구입니까? 진정 여러분은 예수를 구세주라고 생각합니까?


돈과 명예와 정치적 실세들을 사실은 구세주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로만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지 과연 우리에게 예수님은 구세주가 맞습니까? 눈앞의 이익 때문에 달콤한 구세주를 찾고 있는 건 아닙니까? 한번쯤 나 자신을 돌아보며 예수님을 생각하는 한주가 되길 바랍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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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일, 2013년 6 23일 10:30 @ 규암성당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예수님을 오해하지 말자! 

그 분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 분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봉독 하는 복음서의 핵심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루카 9, 20)라고 표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이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 말씀(루카 9, 23 참조)입니다.


오늘의 이 내용이 수록된 루카복음서 91824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앞뒤의 내용(context)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레아 전도를 마무리 지으시고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여정을 제자들에게 준비시키시는 내용이 오늘의 우리가 읽는 루카복음서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당신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을 가르치신 과정이 오늘의 우리가 읽는 부분 이전의 루카복음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지간히 훈련된 제자들이었기에 그들에게도 또한 당신처럼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와 기적을 행하는 능력까지 주시면서 전도를 하도록 파견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9, 16 참조). 그러한 제자들이라면 이제 복음전파를 하는 사도의 위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견 받은 제자들이 돌아와서 성과에 대한 보고를 드리고, 다시 예수님께서 따로 제자들을 데리고 벳사이다로 가셨는데(루카 9, 10),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모여옵니다(루카 9, 11 참조). 여기서 우리들은 교회를 보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교회의 일꾼들이 예수님의 분부대로 사명을 수행하게 되면 사람들이 교회가 어디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주님의 성찬을 베풀게 됩니다(미사전례 참고). 그렇듯이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사실(루카 9, 1117 참조)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루카복음서는 곧 이어 오늘 우리가 읽는 내용(루카 9, 1827)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서 모여오며,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나가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란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확인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고백한 그 신앙입니다. 이는 오늘의 우리의 믿음 즉 교회의 신앙이지요. 그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루카 9, 20) 라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진정한 의미는 그분께서 고난을 받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드러난다는 것을 루카복음서는 연결하여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제자들도 그분처럼 시련을 당해야만 그분을 닮을 수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루카 9, 2227 참조).


그러한 다음에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제자들에게 깨닫도록 산에서 당신의 영광스런 변모(루카 9, 2836 참조)를 체험케 하시고 재차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고 나서(루카 9, 4445 참조) 예루살렘으로의 상경 길에 들어가시는 것으로 이 루카복음서의 후반부가 이어집니다(루카 9, 51 이하 참조). 이제 그분을 끝까지 따라가서야 그 분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는 체험이 이루어질 것임을 루카복음서는 그 951절 이하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렇듯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나선 삶인 것입니다. 그분이 가신 길 즉 수난과 죽음으로써 부활에 이르는 길을 가고자 하여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을 교회와 더불어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그 신앙은 오늘 읽는 복음서에 수록된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루카 9, 20)를 믿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직접 뵈옵고 따르던 열 두 제자들도 사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체험하기까지는 그러한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분의 부활 이후에 가서야 그러한 신앙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사도행전 참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세례 받은 삶의 길을 가는 까닭은 그렇듯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신앙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진실로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후의 사도들이 걸었던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들 가운데는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길을 간다면서도 아직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삶에 이르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경우란, 신앙을 마치 현세적 삶의 한 방식으로 또는 도덕적 테두리의 것으로만 여기는 태도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사회현실에 대한 적응방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군사독재 치세하의 인권회복과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한 교회의 사회운동을 칭송하며 그 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세례 받은 사람들 가운데 정치적 성공 후에 가서는 정치현실에만 열중하면서 참 신앙의 길은 저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권운동가로서의 길에서 만난 교회 성직자를 따라 세례를 받았던 변호사가 정치적 성공을 거둔 지도자로 변신한 후에는 신앙을 저버린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신앙의 길을 마치 세상살이의 방편인양 여깁니다.


제가 우리 천주교 신자 정치인한테 당한 어이없는 일이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지난 일입니다. 제가 지내던 시골 본당에 영세만 하고 성당에 다니지 않는 냉담 교우가 있었습니다. 당시 군사독재 치하에서 체육관 대통령을 뽑는 대의원 노릇을 하던 지방 유지였습니다. 그분은 성당에 나오지는 않으면서도 서울이나 대전 등에 출장 다녀오면 저에게 들러서 거기서 만난 그 지방 출신 국회의원의 인사를 저에게 전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일요일에 그 냉담 신자가 역시 이미 세례 받은 딸의 결혼식을 주례하도록 그 지방 예식장에 그 국회의원을 초빙하여 예식을 치룬 후에 역시 신자인 그 국회의원을 모시고 저에게 인사차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은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주일미사 참례할 신앙생활은 아예 생각에도 없고 그 신자 딸의 혼인성사 절차도 없이 신자로서 교회법을 거스르는 결혼식을 치르고 저에게 체면치례로 인사차 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점입가경으로 저에게 그 국회의원이 인사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가끔 이 대의원에게서 신부님 고생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전에서 주교님을 뵙게 될 때마다 신부님에 대해서 잘 말씀드리곤 합니다. 신부님께서 여기서 고생을 하실 만큼 하셨으니 주교님께서 곧 좋은 성당으로 영전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분들의 그 어이없는 언사 때문에 그 다음에 이어졌던 불미스런 대화에 대해서는 이 강론에서 차마 그분들의 명예를 감안하여 소개하지 않겠습니다만, 사제들의 사목생활을 그런 식으로 세속적인 생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사제가 시골 성당에 부임하게 되면 어떤 분들은 그 사제가 능력 부족이라서 좌천당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이없는 일이지요. 그런 생각을 하는 분에게 제가 반문하곤 합니다. “사제를 누구로 보십니까? 공무원으로 보십니까? 회사원으로 보십니까?”하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루카 9, 18 20)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루카 9, 19 참조)을 오늘날의 우리로서 바꾸어 표현해봅시다. 예수님을 오해하지 맙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베드로처럼 대답합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개는 옛날의 훌륭한 현자로 또는 공자나 석가모니와 같은 지도자로 봅니다만, 우리는 세례 받은 사람답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주시는 구세주요 하느님으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식별력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한 시대 인기를 누린 도올 김용옥이라는 억지주장 철학자의 TV 강의를 기억합니다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그 김용옥 씨의 주장처럼 한갓 도학자나 기철학계의 잣대로 예수님을 평가 비판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용옥 씨처럼 예수님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와는 달리 우리 인간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우리 또한 자신을 끊어 십자가를 지면서 죄악에 죽고 다시 새로운 삶 즉 부활에로의 길로 나아가고자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따르기로 하는 신앙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분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신앙으로 세례 때와 같이 매주일 미사에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한 주간을 그렇게 살아가기로 다짐하면서 세상의 일터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을 구세주(그리스도)로 알아보는 것은 지식(철학)으로가 아니라, 믿음(신앙)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경지에 들어가기란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름”(루카 9, 23)으로써만 기능한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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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2013년 623) 우리 교회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치면서, 그리고 특히 주일미사를 남북통일 기원미사로 봉헌하는 입장에서 아래와 같은 저의 21년 전 글을 교우님들께 드려봅니다. 1992년도에 당시 대전교구 사목국장님(당시 유흥식 신부님 : 지금은 대전교구장 주교님)의 당부에 따라 대전교구 구역반장 교육 강사로서 강의하고 대전교구의 구역반 모임 교재에 그 개략적 내용을 게재했던 원고입니다. 이 원고에서 본문은 원문 그대로이고 밑에 첨부한 각주는 약간 고치고 덧붙인 것이 있습니다2013년 올해는 6·25전쟁의 매듭으로 휴전을 한 1953년으로부터 만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휴전한지 60년이 되는 오늘까지 남과 북이 마치 원수처럼 지내온 세월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서로의 적대감은 누그러지지 않고 남북의 정권 담당자들은 양쪽 백성을 적개심으로 무장시켜 단지 정권체제를 공고히 하려고만 합니다. 민족적 양심을 바탕으로 하고 그리스도인다운 반성으로 기도하고 우리 자신 생각의 바닥을 추슬러야겠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저의 21년 전 생각을 여기에 다시 진술하면서, 오늘 남북통일 기원미사의 강론을 대신합니다.



북한 선교의 과제 

1992년 9월 발표자료

윤종관 신부 (대전 대동 본당 주임)

1992 9 / 대전교구 구역반모임 교재 제84 34


1. 교회의 관심


금년(1992) 3월에 있었던 주교회의 춘계 총회는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Directorium Pastorale Coreae)’를 확정하여 교황청에 이에 대한 인준 신청을 하였다


1) 이 사목지침서()200-203조에는 한국교회의 공식적 관심과 지역 교회법적 규범으로 북한선교의 의의와 포괄적 활동지침을 천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분단된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형제적 나눔을 실현하면서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비하여 북한교회의 부흥과 북한동포의 복음화를 위한 사목적 역량을 갖추는 교회의 활동북한선교라고 정의하고 있고, 그 활동 방안으로서 기도와 사랑의 나눔 운동과 홍보 및 신자교육과 관련연구소 설치, 통일대비 활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활동방안을 실행하기 위하여 매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행사를 하며, 교구마다 북한선교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선 사목현장에 그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장려하고 있다.


위와 같은 시목지침서()가 교황청의 인준으로 발효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일선 사목현장(본당 단위)에서 북한선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리라고 전망하여 볼 수가 있다. 이런 전망이 사목지침서라는 법률적 선언문항에서 그 실현 가능성을 진단하는 것이어서는 무의미하여진다. 그럴 경우 공염불에 그치고 만다. 교구적으로도, 본당적으로도 각 구역 반별로도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그러한 구체적 활동에 대하여 사목지침서라는 규범은 합법성을 뒷받침하여 주는 것일 뿐이다. 요는 교회와 신자들이 무엇인가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가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하긴 하였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 그렇다면 과연 하여온 일이 어떤 것이었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 반성할 점


우리 민족의 반쪽을 위하여 그리고 그 반쪽의 복음화를 위하여 교회가 과연 어떠한 일을 어떻게 하여왔는가? 이것은 우선, 우리 민족의 분단비극에 관한 교회의 역사적 관심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나를 반성하여 보는 것으로써 솔직한 답을 얻으리라는 전제를 요청하는 질문이다. 교회가 반성할 점을 자세하게 모두 나열할 지면이 부족하기에 개략적으로 아래와 같이 가장 중대 사안이라 볼 수 있는 몇 가지를 들어 본다.


(1) 민족분단 이전의 암울했던 시대에 교회는 민족 사랑의 일에 소극적이었다. 물론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박해 기간에 신앙의 선조들이 복음으로 우리 민족의 잠을 깨우고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하여 순교로써 투신했던 적극적 역사를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초기를 제외하고는 그 후 전반적으로 민족 자체적인 투신의 역사가 아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단적인 지적을 하자면 서양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기점으로 하여2) 교회는 우리 민족의 고뇌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지 않고 교회 자체의 고뇌에만 집착한 역사를 걷게 되었다는 점이다.3) 


이 점은 용기 있는 서양 선교사들의 순교 역사를 과소평가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그 제도적(교계적) 속성의 바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성을 역사적으로 표출하였다는 근원적 관점에서 반성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말기에 신교(信敎)의 자유를 얻은 후에도4) 이 나라 민족 전체의 고뇌를 파악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그 후 일제의 강점 시기에도 이 민족의 해방운동 노선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였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교회가 일제 말기에는 일제의 침략정책에 협조하다시피 한 것이다. 이러한 부끄러운 교회의 역사를 반성할 수 있을 때에 오늘의 분단 반세기 상황에서 교회는 자신의 투신 방향을 제대로 찾을 수 있다.


(2) 1945년 해방 이후에 교회는 민족 일치를 위한 노력을 실제적으로 소홀히 하였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 해방 이후 주변 강대국(특히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단 정책과 더불어 민족 내부의 정치 집단간 좌우 혼란 시기에 교회는 교회 본연상 반공정책의 강력한 추구자 노릇만 하였을 뿐 민족적 일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북을 버려둔 채 이남 만의 단독정부 수립 지지만 하였다. 그 후에 실제로 교회는 이북을 망각하고 이남 안에서만 한국교회의 실체가 건재한 듯 반세기를 살아온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점을 반성할 줄 알 때에 민족일치를 위한 투신을 향하여 교회는 의식을 찾을 것이다.


(3) 민족분단의 현실 속에서 교회는 아직도 안이한 모습이라는 자신의 실상을 깨우쳐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 선포는 늦장부릴 일이 아니다. 기다렸다가 여건이 호전될 때에 가서나 할 일이 아니다. 이북의 형제자매들을 찾아갈 일이 정치, 사회적으로 가능해질 때에나 할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루가 9, 3 참조). 우리는 이북 당국이 신교(信敎)의 자유를 허용할 때에나 혹은 그쪽 공산정부가 망하고 통일된 후에나 복음 선포하러 갈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아닌 서양 선교사들도 모든 악조건 하에서 조선에 잠입하여 복음을 선포했음을 그분들(순교 성인들) 앞에서 오늘의 교회는 반성해야 한다.


3. 하여야 할 일


앞서 제시한 교회의 관심항에서 지적했듯이, 교회가 사목지침서라는 법규 선언을 한다 해서 일이 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아니 된다. 구체적으로 지금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앞에 제시한 반성꺼리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곧바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지면이 부족하여 다 적을 수 없기에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우리들이 할 일을 제시하여 본다.


(1) 우선 북한선교의 과제란, 교회의 웃어른들(교계적 상부)의 지시만을 기다려서만 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5) 복음 선포는 제도가 명령하는 일이 아니고 복음 자체가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도권에서도 실천적 의지를 지녀야 되겠지만, 평신도로부터 성직자, 수도자 등의 자발적, 자생적, 주체적 소명으로 모두 북한선교를 위한 기도와 행동을 해야 한다.


(2) 반세기 동안 이북에 한 명의 비밀선교사를 파견한 일이 없다면 민족의 역사 앞에 한국교회는 죄를 지은 것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비밀 선교사를 파견하여 이북 형제자매들에게 성사를 볼 기회를 주어야 한다.6)


(3) 반세기 동안 이북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실제적으로 선교 자금을 보낸 일이 없다면 민족의 역사 앞에 이 또한 한국교회는 죄를 지은 것임을 자각하고, 지금이라도 헌금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서 그것을 이북에 보내야 한다. 그것이 직접 이북 형제자매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보내야 한다. 통일 전의 서독 교회가 수십 년 동안 동독 교회에 헌금을 모아서 보냈음을 한국교회는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7)


(4) 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 하지 말고 인내롭게 대화하고 우선적으로 민족의식에 따라 기회를 다각적으로 찾아야 한다.8)

(5) 황해도는 서울 대교구 지역이고 휴전선 이북 강원도는 춘천 교구 지역임을 간과했던 지난날을 반성하고 교구 현황 등에 이북 교회를 매년 새로 파악 표기하고, 이북의 옛 본당에 대한 주임신부를 임시로라도 임명하여야 한다.9) 이것은 지금까지 이남의 교회만을 한국교회인 듯 잘못 생각했던 것을 깨우치고 의식전환을 하자는 뜻이다.


(6) 이남의 각 본당은 통일 후에 이북에 성당 하나씩 세울 계획으로 지금부터 자금 확보를 해나가야 한다.10)


(7) 통일 후에 이북 형제자매들이 이남의 성당 규모나 이남의 신자들이 사는 생활모습을 보고 이질감이 들지 않도록 가난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8) 이북의 실상에 대하여 정부의 발표 자료만 믿을 것이 아니고, 교회와 민간 개인 차원의 연구 노력을 하여야 한다.


(9) 이북 형제자매들과의 접촉 시도를 외국(혹 교포들)을 통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이남의 교회가 직접 접촉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11)


(10) 국가보안법 등, 이남의 체제가 민족 화해를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도록 교회와 신자들이 앞장 서야 한다.12)


---- 아래 각주


1)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에 대하여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장관 요세프 톰코 추기경 명의로 1995123일부 인준서한(Prot. 2188/92)이 당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이문희 대주교에게 발신되었고, 이에 의거하여 동 지침서에 대하여 동년 부활절인 416일에 이문희 대주교는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교령 제95-50호로 동년 성령 강림 대축일인 64일부로 사행을 선포했다.


2) 1831년 조선교구(대목구) 설정으로 프랑스의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교계제도적인 한국교회를 맡게 된 시점을 뜻한다.


3) 당시 박해 하에서 교회 자체는 박해를 헤쳐 나가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4) 1886년 한불통상조약으로 완전한 신교의 자유를 보장 받았다.


5) 교계제도의 뜻을 거스르자는 뜻이 아니다.


6) 여기서 비밀선교사란 마치 19세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국 정부의 승인 없이 비밀리에 밀입국(?)하여 선교했듯이 북한에도 남한 교회가 비밀리에 사제들을 파견할 의지가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혹 그런 사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하여 공개적 및 공식적인 발표를 할 수 없겠지만, 그런 사실이 전혀 없었다면 차후 역사 기록에서 부끄러운 과거로 비판 받을 것이라고 본다.


7) 실제로 서독 교회는 ‘Bonifatius Verband'라는 기구를 통하여 동독의 교회를 위한 지속적 지원을 했다. 그것을 동독의 공산 정부의 승인된 통로를 통하여 전달되도록 했기 때문에 이른 바 '배달사고'가 많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실제 동독 교회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의의를 삼으면서 지속함으로써 동독교회를 유지토록 공산정부에 대한 일종의 압력의 효과도 있었다는 증언을 필자가 통독 전의 현지에서 들은 바 있다.


8) 그렇다 해서 필자가 공산주의에 동조하자는 뜻이 아니다.


9) 황해도는 실제로 서울 대교구이며, 평양교구와 함흥과 덕원교구 및 연길(연변과 만주 지역) 교구에 대하여 그 교구장 서리가 임명되어 있는 실정인데, 그렇다면 교구장 서리들은 그 해당 지역의 옛 본당들에 대한 주임신부(서리)를 임명함으로써 북한 지역을 적어도 상시 기억하여 사목 대상으로 삼는 의지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10) 필자는 봉직하던 본당들에서 북한선교회를 결성하여 지속적으로 기도와 성금 모으기를 하였다. 모으는 성금의 지향은 북한의 옛 본당을 자매결연한 것으로 하고(일명 짝사랑 자매결연이라 함 - 북한의 현지인들을 만나지 못한 결연이므로), 어느 날이던지 그곳 성당을 복구할 때 즉각적인 시행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적립해가는 것이었다. 필자가 그런 본당들을 떠나온 후에 북한선교회는 흐지부지 없어지고 그 모아가던 성금은 용도변경으로 사라졌다는 씁쓸한 소식을 듣고 있다.


11) 정부나 적십자사 주도의 남북 이산가족 만남을 통해서 북한의 신자들을 접촉할 수 있으면 공식적인 것으로 바람직하지만, 한편 남한의 교회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지 북한의 신자들을 파악한다든가, 남한 교회의 특별한 축제에 북한의 신자들을 초청하는 마음을 가져봐야 할 것이 아닌가? 적어도 한국천주교 200주년이나 성체대회등의 행사를 하면서 임진각에 북한 형제자매들을 모셔올 대절차량이라도 몇 대 보내서 남북 당국간에게 이를 알리는 열성이라도 보였어야 하지 않았는가? ‘한국천주교회라 함은 북한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의 한국천주교회라는 뜻을 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12) 인권운동의 차원에서 볼 때 신앙의 자유 또한 기본적 인권이므로 북한의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도록 남한 교회가 접촉하고 지원하려면 남한의 체제적 걸림돌 또한 우리의 해결 과제인 것이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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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프란치스코, 2013년 6월 17일 

로마교구 사제단 회의참석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대한 정리글


자유의 혁명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은 위대한 변화입니다


신앙의 선조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생각은 어떨까요? 그의 저서 로마서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 6,14). 우리는 율법에 따라 걷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은총 아래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걷는 길 위에서 은총이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곧 복을 주신 것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우릴 구원하셨고 또 용서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 아래에서 걷고 있는 것이며,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아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그 발언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지평을 열어주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은총 아래 있습니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왜 이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또 자유를 주는 것일까요? 우리는 은총 아래 있기 때문에 자유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은총 아래에 있다는 것은 율법 아래있는 게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은총 아래서 사는 하느님 자녀가 누리는 충만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은총 아래에 있다는 현실 자체가 우리에게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 아래에 있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율법 아래에서 은총 아래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성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인간의 역사에는 수없이 많은 혁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혁명 중에서 예수님이 가져다주신 혁명만큼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를 바꾼 혁명이며, 인간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 바로 예수의 혁명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벌어진 혁명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정치체제를 바꾸거나 경제구조를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꾼 혁명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 근본적인 혁명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부활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이 참된 혁명은 그 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 혁명을 두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변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혁명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참된 혁명이라고 할 때, 그리고 이 위대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나서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지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변화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다는 그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를 바꾸는 혁명의 길 위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든 이 시대에 혁명가가 아니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은총에 힘입어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 우리를 혁명가로 나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변화를 이루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인간의 마음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를 두고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 36,26). 이는 바오로 사도가 체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전망이 바뀌었고 세례도 받았습니다. 바오로는 혁명가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오로가 누굽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순식간에, 한 순간에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뼛속까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바오로는 그 이전에는 무서운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바오로는 이제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수그리스도의 용감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곧 사도가 된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한 자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말씀하신 가장 위대한 변화입니다. 죄인이었던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 죄인의 마음이 거룩하게 바뀌는 것! 사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인간 중에 죄인 아닌 이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외없이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합니다. 그 은총이 우리 모두를 구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들인다면, 그 분은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죄인인 우리를 성인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리거나 먼 곳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표정을 지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단 한가지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은총이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준다는 것!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간이기에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은총에 힘입어 주님은 자비하고 좋은 분이시게 우리를 기다려주며 용서하시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그 위대한 은총이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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