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4일 교황청 이주사목평의회에서 하신 말씀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

고통과 억압에 외치는 힘없는 이들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야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정착지를 찾아 헤매는 이방인같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보입니다. 그 이방인들은 절망에 빠져 잇습니다. 그리스도의 연민, ‘함께 슬퍼하는 마음’,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만드는 현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고통과 억압에서 터져나오는 힘없는 이들의 외침을 대변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폭력, 불의한 권력, 가족사랑의 부재, 정신적 외상을 주는 사건, 가출, 그리고 난민촌에서 직면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에 의해 사람들은 실존적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은 희망을 갖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습니다. 타인과 친분관계를 맺고 싶은 열망이 있고, 자신을 맞아주는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언어를 배우는 일이며, 일자리를 얻고 아주 사소한 것까지 익히면서 한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통해 표현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강제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이들의 현실을 고려하고, 그들이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오늘날 그들에게 자행되는 모든 형태의 핍박과 억압과 노예화의 시도를 차단하는 일을 위해서 정치인과 입법자와 국제단체 등에 간절한 호소를 해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모두 인간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곤궁에 처한 이들의 인격이 우리의 연대와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연민과 선의로 이루어지는 신속한 개입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곤궁에 처한 이들의 어려운 현실에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일원은 난민과 추방당한 사람과 상업에 희생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이방인, 슬퍼하는 사람, 폭력과 착취의 무고한 희생자와 동일시하면서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서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마태 25,31~46)을 자주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진심으로 환대하고 귀기울여 들어주고 친교를 이루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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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23일 이탈리아 주교회의 주교단의 신앙선서 때 하신 말씀


모두 내어주기

마음을 낮추고 그 무엇도 예측하거나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직무는 주님과의 깊은 친교를 토대로 합니다. 주님처럼 사는 것이 우리가 수행할 교회 직무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준입니다. 주님처럼 산다는 것은 순종과 겸손과 자기를 완전히 내어놓음을 의미합니다(필리 2,6~11).

 

그러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는 그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곧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목자의 특징입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봉사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과 그분의 활동을 드러내고 형제의 사랑으로 공동체를 세우고 육성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특징은 그것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 사랑의 불꽃은 약해지고 마침내 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원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사도 20,28)

 

사목자는 깨어있지 않으면 미온적인 태도가 됩니다. 태만하고 부주의하게 됩니다. 참을성도 잃고, 출세를 바라게 됩니다. 돈의 유혹에 빠지며 세속과 타협합니다. 그렇게 게으름에 빠지면서, 하느님 백성의 참된 행복과 번영보다는 자기 자신과 외적인 제도와 구조에 대해서만 걱정하는 관리와 같은 성직자가 되고 맙니다. 겉으로는 주님 이름으로 일하고 설교하지만, 속으로는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을 배반할 위험에 빠집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가 통과해야 할 시험이나 시련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각자 자신이 어떤 시험과 시련을 통과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반복했던 질문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그 질문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진지하게 반복되는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의 자유가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유를 위협당하고, 우리는 상실감이나 패배감에 빠져서 믿음까지 잃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상실을 주님이 마련하신 것은 아닙니다. 시험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원수인 악마가 우리를 고통과 비탄과 절망에 빠트리게 하는 도구입니다. 악마가 활용하는 도구가 바로 믿음의 상실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허물과 죄로 인한 수치심으로 더한 절망과 좌절에 빠지고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용기를 주고 사명을 맡기면서 세상을 향해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용서의 불꽃으로 정화된 베드로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주님,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은총으로 정화된 베드로는 자신의 첫째 서간에서 우리에게 말합니다.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해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 5,2~3)

 

허약한 우리에게 주님은 날마다 은총과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양떼를 앞장서서 걸어야 하는 우리의 사명을 지키는 것은 믿음 속에서 최선을 다해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요한 10,16) 우리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건전한 사도적 활동을 방해하는 쓸모없는 짐은 벗어버리고 아무런 주저함 없이 양 떼를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하느님과 같은 꿈을 꾸십시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것처럼 하느님의 집은 어떤 사람도 어떤 백성도 가리거나 배척하지 않습니다(이사 2,2~3).

 

이런 이유에서 사목자로 산다는 것은 양 떼의 한가운데나 맨 뒤에서도 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소리없이 슬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들을 다시 일으켜주고 격려하고 희망을 북돋아줄 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과 함께 우리의 신앙을 나누면 나눌수록 우리는 더욱더 강직한 사목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돌보라고 맡겨주신 모든 사람을 향해 마음을 낮추고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미리 예측하거나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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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22일 일반알현 때 하신 말씀


복음화

복음의 언어는 폐쇄와 무관심,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도록 

초대하는 친교의 언어입니다. 

 

  

 

복음화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복음화는 몇몇 사람만의 사명이 아니라 저의 사명이고 여러분의 사명이며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교황 바오로 6세는 강조하셨습니다복음화는 참으로 교회의 고유한 은총이고 소명이며, 교회의 가장 깊은 본성입니다. 교회는 복음화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황바오로 6세의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1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개정판) 18.

복음화 활동의 주역은 성령이시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도록 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분도 성령이시고, 사람의 의식 깊은 곳에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도록 하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75, 69

 

그러므로 복음화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지평을 향해 두려움없이 우리 자신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신앙을 실천하고 증거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실 것이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의 마음을 비춰주실 것입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날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마리아와 함께 모여있던 사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해주었습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3~4).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사도들 위에 성령이 강림하시어 그들을 다락방 밖으로 나가게 하고, 하느님의 위업”(2,11)을 전해주는 선포자와 증거자로 변화시켜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이루어주신 이러한 변화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2,5)군중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저마다 자기 고장의 말로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2,6).

 

성령의 활동이 주는 일치와 친교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활동에서 오는 중요한 효과를 발견합니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일치, 친교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바벨에서부터 민족들이 서로 갈리고 언어가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만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창세11,4) 이름을 날리고자 한 인간의 교만과 오만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그런 분열이 오순절에 극복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오만도 서로를 향해 문을 닫아버리는 폐쇄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만과 폐쇄의 자리에는 하느님을 향한 개방이 있고 성령이 마음에 부어주신 사랑의 말씀이자(로마 5,5) 새로운 말씀인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삶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이가 알아들을 수 있고 모든 삶의 자리와 문화에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성령의 언어, 곧 복음의 언어는 폐쇄와 무관심,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도록 초대하는 친교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삶과 신앙의 증거가 일치와 친교를 위한 것이 되도록 성령의 이끄심에 나 자신을 맡기고 있는가?’

내 삶의 현장에서 사랑과 화해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바벨에서 벌어졌던 일, 곧 분열, 몰이해, 시기, 이기주의 등이 오늘날에도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주위 사람들과 일치하고 있는가?’

험담과 잡담, 비판과 시기심으로 분열된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성령이 이루어주시는 화해, 용서, 평화, 일치, 그리고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고 선포함을 의미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도록 합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둘째 효과는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사도 2,14) “자신있게”(2,29)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 생명을 내어주셨고, 하느님이 그분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제자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담대하게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새로움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활동은 오늘날 교회와 우리 개개인을 위해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선교를 위한 새로운 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한 새로운 길 그리고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용기가 오순절의 불꽃에서, 곧 성령의 활동에서 계속 발산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활동 앞에 우리 자신을 닫아거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합니다! 또한 겸손과 용기를 지니고 복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삶에 가져다주신 새로움과 희망과 기쁨을 증거해야 합니다.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같은 책 80, 78)을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복음화, 곧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기주의는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고 우리를 밑바닥으로 내려가게 만듭니다. 하지만 복음화는 우리를 위를 향해 올라가게 합니다.

 

세 번째 효과인 활력

 

성령의 활동에서 오는 셋째 효과인 활력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겠습니다. 새로운 복음화와 이 복음화를 위해 나서는 교회는 언제나 예루살렘 다락방의 사도들처럼 성령의 불꽃을 청하는 기도로 출발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밀접하고 충실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닫혀있던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성령에게서 활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활동은 공허해지고 우리의 선포는 생기를 잃게 됩니다. ()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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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21일 난민보호소 마리아의 선물에서 하신 말씀


환대와 섬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 예수님 가르침에 따라야


  

 

이라는 말은 가족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장소, 거주지, 행복한 인간적 환경, 편히 쉴 수 있는 곳,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입니다. 특히 가정에서의 따뜻함, 애정, 사랑. 가족적 분위기 등을 떠올립니다. 이처럼 이 지닌 상징은 매우 위대한 것입니다. 가장 값진 만남의 풍요로움이며 나이와 문화와 역사가 서로 다르지만 각자의 성장을 위해 협력하며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풍요로움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은 그래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사람이 사랑을 받는 법과 주는 법을 배우는 장소이며집에서 우리 삶이 성장하고 실현되는 것이지요. ‘마리아의 선물’(Dono di Maria)도 25년전부터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선교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난민보호소 마리아의 선물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사랑의 선교수녀회에 위탁해서 설립한 것이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난민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바티칸과 이탈리아의 경계에 위치한 이 집은 우리 모두에게, 교회에게, 그리고 로마에게 언제나 더욱 더 가정의 면모를 갖추라고, 환대와 관심과 형제애 넘치는 의 면모를 갖추라고 강력히 촉구합니다이란 단어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단어는 선물입니다. 이 말은 집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집이란 상호간의 선물을 그 특징으로 삼기 때문이지요. 이 집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귀한 손님들에게 환대하고 물질적이고 영적인 도움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것입니다. 이웃에게서 우리가 섬겨야 할 주님의 얼굴을 발견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분을 섬겨야 함을 알려주는 곳이 바로 집인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봐야 합니다. 집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곳입니다.

 

이 집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국적이나 종교에 대한 차별없이 모든 사람을 환대합니다. 우리는 선물, 무상으로 베풂, 그리고 연대의 참된 의미를 되찾아야 합니다. 야만적인 자본주의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익을 창출해야 하고, 얻을 수 있을 때만 주고, 생산 극대화를 위해서는 인격을 무시한 채 착취해야 한다는 논리를 사람들에게 주입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여러 방면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는 그러한 자본주의적 논리의 결과물입니다! 이 집은 사랑을 가르쳐주는 장소입니다. 곧 이 집은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 모든 사람을 만나러 나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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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19일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 강론


새로움, 조화, 그리고 선교

성령의 조력과 은총 없이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강림대축일에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신 사건을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체험합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이 성령으로 가득찬 사건은 장차 온 세상으로 확산될 성령강림을 위한 출발점이 됩니다. 그것은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오순절이란 고대 이스라엘의 연중 순례 축제 중 하나입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밀의 추수가 끝나는 시기에 거행되던 추수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추석과도 같은 민족의 큰 명절인 것입니다. 탈출기 2316절에 보면 너희는 밭에 씨를 뿌려 얻은 너희 노동의 맏물을 바치는 수확절을 지키고, 밭에서 너희 노동의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연말에는 추수절을 지켜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오래된 명절인 오순절에 이루어진 그 일은 아주 오래된 과거입니다. 2천년 전의 오래된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현장을 가깝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사도행전은 그 해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사도 2,1-11)

 

성령 강림

1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꽃 모양의 혀들

 

위의 성경에서 보면, 사도들은 어느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서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들여와 집 안을 가득 채운 소리입니다. 두 번째로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각 사도 위로 갈라져 내려앉은 불꽃 모양의 혀들입니다. 이 소리와 불꽃 모양의 혀들은, 성령께서 사도들을 외적으로만 아니라 내면의 깊은 곳, 즉 마음과 정신까지 모든 것을 사로잡으셨음을 드러내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표징입니다.

 

모든 것을 사로잡으셨기 때문에, 사도들은 저항할 수 없이 그 성령에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힘으로 놀라운 일을 벌이신 것입니다. 이를 두고 루카는 성령께서 표헌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이윽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이들이 제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지방언어로 알아듣고 있는 현장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한국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 미국사람, 독일사람, 이탈리아 사람 등등이 저마다 자신들의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독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알아듣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그것을 알아듣는 그 현장에서도 어리둥절하면서 놀랍고 신기한 상황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은 정말 어찌된 일인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성령의 활동에 관련된 새가지 단어에 대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새로움’, ‘조화’, 선교가 그것입니다.

 

1. 새로움

 

새로움은 언제나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품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관리되고 통제되는 상황에서 우리 계획과 확신과 취향에 따라 우리 삶을 구상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을 계획하고 설계할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어느 단계에까지 하느님을 따르고 영접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단계에까지따른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완전히 그 분께 맡기는 의지가 부족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매 순간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데 우리는 순간순간 주저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실까 봐 두려워합니다. 또한 당신의 지평을 향해 우리 자신을 열게 하시려고 제한되고 닫혀 있고 이기적인 우리의 지평 밖으로 우리를 나가게 하실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모든 구원의 역사를 보면, 하느님은 당신을 계시하실 때마다 당신 백성을 변화시키고 당신에게 전적인 신뢰를 두라고 요구하면서 새로움을 가져다주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새로움을 가져오십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모든 이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그 방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만을 믿고 고향을 등지고 떠났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권세에 맞서면서 자유를 향해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두려워하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신선함이 필요할 때나 싫증을 느낄 때마다 새로움을 찾지만, 이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에 가져오시는 그 새로움이야말로 우리에게 참되게 실현되는 것이고 참되게 기쁜 것이며, 참된 고요함이 담긴 선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선()만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이루어주시는 놀라운 일을 향해 열려있는가?”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새로움을 두려워하며 나 자신을 닫고 있는가?”

하느님이 가져다주시는 새로움이 주는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자신을 방어한다는 핑계로, 새로움을 받아들일 능력을 잃은 쇠약한 틀에 갇힌 건 아닌가?”

 

2. 조화

 

겉으로 보기에 성령은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드시는 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다양한 은사와 선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활동 아래 이 모든 은사와 선물은 형언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이루어줍니다. 성령은 일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치는 획일화와 다른 것입니다. 일치는 모든 것을 조화로 이끈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성령이 이루시는 것이 조화입니다. 교부의 말씀을 인용해봅니다. 성령은 그 자체로 조화이십니다.” (Pope Francis)는 이 표현을 좋아합니다. 성령은 조화 자체이십니다. 그분만이 서로 다르고 다양하고 여럿이게 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일치시키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르고 독특하고 차별화되면서 특권적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 마음 속에서 조화로운 일치보다는 개별적인 배타성에 갇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간적 계획에 따라 일치를 이루고 싶어할 때, 우리는 어느새 전체를 획일화하고 단순한 일치를 선언하는 것만으로 일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면, 풍요롭고 서로 다르고 다양해도 결코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교회의 친교 안에서 다양성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은사를 받고 직무를 수행하는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교회 안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에서 성령의 활동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성이며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공동체 그리고 모든 단체가 지녀야하는 본질적 특성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줍니다. 함께 걷지 않고, 서로 평형을 이루며 길을 걷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 공동체를 벗어난다면, 사도 요한이 그의 둘째 편지에서 경고한 것처럼, 우리는 그 안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 일치할 수도 없게 됩니다.(2요한 9절 참조)

 

요한의 둘째서간(2요한) 9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온갖 형태의 배타주의를 극복하면서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조화에 열려있는가?”

교회에서, 교회와 함께 생할하면서 나 자신을 성령의 이끄심에 내 맡기고 있는가?”

 

3. 선교

 

새로움과 조화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묵상해야 할 단어는 선교입니다. 옛 신학자들의 표현을 보면 영혼은 돛단배에 비유할 수 있고, 성령은 배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돛을 부풀리는 바람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바람의 밀어붙임과 추진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교회 선교의 원동력, ‘성령

 

실제로 성령의 조력과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령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십니다. 또한 교회가 영지주의적 성향에 빠지거나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 자기 신원만 보증하는 삶에 빠져들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아가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고 증거하며, 신앙의 기쁨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오는 기쁨을 나누도록 부추기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교회 선교의 원동력입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사건은 아주 먼 옛날의 일이 아닙니다. 그 사건의 현장에 우리는 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성령강림 사건은 하나의 시작점, 계속 이어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선물이 모든 이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보호자성령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 곳곳을 누빌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기 위해 삶의 변두리까지 찾아가도록 독려하십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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