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 2013 4 14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우리 곁에 늘 와 계시는 분 

"이보게들! 아침밥이나 먹지!" (요한 21,12)



밤새 헛수고만 한 제자들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던 예수님의 말씀 따라 그물을 던진 제자들이 그물을끌어올릴 수 없을만큼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요한 21,6)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하였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채 이튿날 날이 밝아올 때(요한 21, 3-4 참조) 그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요? 아마 기진맥진하고 실망하던 그들이었겠지요. 헌데 누구인지 잘 알아볼 수 없는 어떤 분이 나타나서 뜬금없이 그들의 사정을 물어보시고는 그물을 다시 치라는 게 아닙니까(요한 21, 4-6 참조). 그날의 조업을 끝내려던 그들은 알 수 없는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기진맥진해 있던 그들이 그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의 말씀 따라 선선히 다시 그물을 던졌다는 것은 오늘의 성서 내용에서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고기잡이로 치자면 그들이 전문가들인데 웬 낯선 사람이 나타나 그들의 밤새 헛수고한 실패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는 것입니다. 이건 전문 어부들로서 자존심을 상하게 해주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데도 그 낯선 분의 말에 따라 그물을 다시 던졌다는 것은 이제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어버리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으로 해석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헛수고의 끝판에 던진 그물은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 알 수 없는 분의 말씀에 따른 것이 그런 결과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밤새 헛수고한 끝에 그물 가득 고기를 잡게 된 그 사연처럼, 우리도 살아가는 가운데 최악의 고비에서 주님 만나서 전환적 계기를 이룬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던가요? 헛수고 끝에 기진맥진 실망하고 있던 차에 그물을 다시 던져보라는 어느 알 수 없는 분의 충고를 아무 생각 없이 따랐던 베드로는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요한 21, 7 참조). 그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뒤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 주님의 말씀에만 전적으로 따르는 투신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물음에 아무 이의 없이 사랑으로 응답함으로써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책무로 결국 목숨까지 바치는 소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요한 21, 15-19 참조). 그것은 엄청난 어획에 대하여 자신의 실력으로 된 일이 아님을 철저히 깨달은 베드로의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겸허히 깨달았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서에서 밤새도록 헛수고만 하고나서 의외로 얻은 엄청난 베드로의 어획처럼, 어떠한 성공이든 그것의 주인공이 곧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릇 우매한 자만이 잘된 일을 가지고 우쭐대는 것입니다. 성공에 대하여 자만하는 것은 곧 실패로 돌아서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된 일을 가지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의 베드로가 주님을 알아볼 줄 알게 된 것은 그가 이제 참 제자로서 걸어갈 삶의 길로 눈을 돌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듯 성공을 진정 성공이 되도록 함은 오늘의 시몬 베드로와 같은 깨우침을 통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그 베드로의 깨우침이란 우리가 지금까지 혹 헛수고와 실패로 점철되어 살아왔다면 그것은 주님 없이 나 자신의 힘으로만 살려고 했던 때문이라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혹 성공을 거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께서 나의 길을 함께 걸어오신 덕분이라는 그 베드로와 같은 깨달음을 얻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실의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문득 우리 곁에 와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언제라도 우리 고뇌의 현장을 지켜보시며 새로운 희망의 그물을 던지라고 가르쳐주시는 분으로 와 계십니다. 그리고는 그분은 우리의 고뇌를 삭혀주시기 위해서 먼저 상을 차려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고기잡이에 밤새 허탕만을 치고 지친 제자들이 여명에 어장을 떠나려 하자 거기 서계시던 주님은 그들에게 다시 희망의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결국 성공을 거두게 하여 주십니다. 그 실패에서 성공으로 이끌어주신 그분은 그 성공으로 향한 마지막 땀을 흘리며 기운을 소진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장만하여 초대하십니다.이보게들! 이제 그만 아침밥이나 먹지!”(요한 21, 12)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실패의 현장에 그리고 우리 성공의 현장에 항상 함께 계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은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서는 본래 그 20장으로 끝맺음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나중에 오늘의 이야기를 실은 21장을 덧붙여놓은 것으로 성서학계에 의해 판별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서에 덧붙여진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박해로 시달리면서 실의에 빠져있는 듯 하여 누군가 오늘의 이야기를 덧붙여 들려줌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은 그렇듯 우리의 고뇌 속에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시는 분이시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실패를 맛본 시몬 베드로로 하여금 연거푸 세 번씩이나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게 하심으로써 실의에 빠진 당신의 양들을 돌보는 길로 목숨을 바치러 가도록 오늘 주님께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21, 19)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먼저 죽으셨던 분이시기에 고뇌의 터널을 지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이 나아갈 희망의 길로 초대하시면서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허나 그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확인 질문을 던지십니다.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말입니다(요한 21, 15. 16. 17).

주님께서 던지신 그 질문은 주님께서 사실 우리를 향하여 던지신 사랑의 그물입니다. 그 사랑의 그물은 교회를 상징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시 던지라고 명하셨던 그 그물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상징하는 갈릴래아 호수와 같은 우리 고뇌의 바다에 던져지는 사랑의 포옹인 것입니다. 그 주님 사랑의 그물 가득 사로잡히는 고기는 153 마리였는데, 그것은 갈릴래아 호수에 사는 모든 고기들의 종류가 153종이었음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성서학자들의 해석이 있듯이,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그물로 오늘도 우리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교회에 모여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 교회는 그렇듯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아우르는 사랑으로 가득 차면서도 터지지 않는 그물로(요한 21, 11 참조)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의 명에 따라 던져지는 그물(요한 21, 6 참조)입니다. 거기 모이는 주님의 모든 양들을 베드로는 목숨 바쳐 돌보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고뇌의 이 세상을 상징하는 갈릴래아 호수의 물고기처럼 주님의 교회라는 사랑의 그물에 의하여 주님의 것이 된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 사랑의 그물로 우리는 주님께서 일컬어주시는 그분의 양들”(요한 21, 17 참조)이 됩니다. 그러한 우리를 즉 당신의 양들을 돌보도록 파견 받은 베드로가 고백했던 사랑의 고백으로 우리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늘 우리의 고뇌의 현장에 와계신다는 믿음을 고백합시다!


그분은 늘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러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고뇌를 삭혀주시기 위해 상을 차려 놓으시고는 우리에게 정답게 말씀하십니다. 이보게들! 이제 그만 아침밥이나 먹지!”(요한 21, 12)하시면서 말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2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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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2013 4 7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꼭  봐야겠나?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요한 20,25)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 25)


오늘 부활 제2주일은 부활대축일 당일과 동일한 축제의 날입니다. 지난 부활주일로부터 오늘까지 교회는 만 일주일, 8일 동안의 부활축제를 올립니다. 그래서 만 일주일간의 이 축제를 우리는 부활 8부라고 부릅니다(그래서 오늘을 영어로 The Octave Day of Easter라 하고, 부활 주일 즉 Easter Sunday에 대한 Low Sunday라 부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은 새 그리스도인들이 부활 성야에 입었던 흰 옷을 일주일 간 입고 지내다가 오늘 여드렛날을 지냄으로써 그 흰 옷을 벗을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을 啣白主日, 즉 라틴어로 Dominica in albis, 독일어로 Weisser Sonntag이라 부릅니다). 그러한 부활 8부 축제의 내용을 우리는 오늘의 복음 성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요한복음서 2019-31절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부활발현사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서가 본래 그 끝맺음을 하고 있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생생한 체험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우리가 부활주일로부터 여드레 만에 맞이하는 주일, 그런 주일은 매주일이고, 그런 주일에 우리는 부활주일의 같은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분을 이렇게 일주일 만에 항상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즉 안식일 다음날 아침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두 제자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한 사실(요한 20, 1-9 참조)을 보도한 요한복음서는 그 당일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오신 사실(요한 20, 19-23 참조)을 보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을 그날 저녁에 뵙게 된 제자들의 방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우리는 부활이 의미하는 평화와, 파견과, 성령 받음과, 죄 사함의 체험 사건이라고 해설해주는 강론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불안 속에 모여 있다가 거기에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받은 평화와 파견과 성령과 죄 사함 그 자체가 모두 제자들이 체험한 부활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부활 당일 저녁의 체험에 관한 요한복음서의 보도(요한 20, 19-23 참조)와 그 다음 일주일 후의 사건에 대한 보도내용(요한 20, 26-29 참조)을 함께 이어서 오늘 읽는 전례를 교회는 거행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저녁”(요한 20, 19)의 사건과 그 여드레 뒤”(요한 20, 26)의 사건을 오늘 우리는 함께 이어서 보는 것입니다. 그 부활주일은 안식일 다음날 즉 마지막 날의 다음날로서 새 인류의 첫 날입니다. 새 삶을 시작한 날이라는 뜻의 첫 날입니다. 그래서 그 첫 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다음날 즉 일요일이 될 때마다 우리는 그 부활의 날을 매번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체험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부활의 날에 우리가 갖는 체험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만나고 새 삶을 얻는 체험인 것이지요. 새 날인 것이지요. 엄청난 변화의 날인 것입니다. 그 변화는 사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지요. 불안에 갇힌 제자들의 상태, 즉 아직도 불신앙의 문고리를 철저히 잡아매둔 상태를 타파하는 일대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 과정을 오늘의 복음서가 서술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주일의 여명에,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요한 20, 1)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발견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이 함께 확인하고 집에 돌아온 후(요한 20, 1-10 참조), 제자들은 이어서 그 동일한 인물인 마리아로부터 주님을 만나 뵌 이야기를 들었지만(요한 20, 11-18 참조), 그들은 믿음이 허약한 의혹 속에<“무서워서”(요한 20, 19)> 갇혀 있었으나, 그 불안의 벽을 무력하게 하시며 평화의 주인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그 불신앙을 일소하게 됩니다. 그 불안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이제 밖으로 나갈 파견명령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마디 말씀이 곧 그 불안을 타파하시는 평화의 선언이었고, 그리고 즉시 파견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파견이란 주저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입니다. 평화선언의 파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건네신 첫 말씀은 그래서 이렇습니다.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


이 평화선언의 파견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성령을 받아 죄 사함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2-23) 그렇습니다. 짓누르던 죄의 무게를 이제 벗어버릴 수 있는 새 세상을 펼치게 된 것입니다. “그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요한 20, 10) 그들은 부활하여 오신 그분으로부터 이제 그 새 세상의 새 삶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뜨는 은총을 직접 얻은 것입니다.


아직도 이러한 부활체험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쌍둥이라 불리던 토마스”(요한 20, 24)입니다. 그는 열두 제자 중 하나”(요한 20, 24)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식일 다음날 저녁 그 자리의 그 제자들의 모임에 함께 있지 않았던”(요한 20, 24) 사람입니다. 신자이면서도 공동체의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신자와 같은 사람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일주일 전의 부활주일에 우리가 체험한 것이 교회 공동체의 신앙 안에서 함께 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새 삶을 얻는 세례를 받는 것이 홀로 만의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 속에 들어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어떠한 인물입니까? 그는 유다인들이 잡아 죽이려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부활시키러 가시려 할 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예수님과) 생사를 함께 합시다.”(요한 11, 16)하며 자기 동료들인 다른 제자들을 부추길 만큼 용기 있는 사나이로서,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2, 25)하고 말씀하시며 라자로를 부활시키시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시 고별 담화를 하시면서 당신이 가실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의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시자(요한 14, 1-4 참조), 토마스는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요한 14, 5)라고 이의를 제기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면모로 보아 토마스는 말을 먼저 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사람 같기도 하고, 이유를 많이 내세우는 사람 같기도 하고, 자기 식으로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분방한 사람 같기도 합니다. 우리 교우 형제자매들 간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저는 여기서 토마스 사도나 또는 그와 비슷하게 잘난 척하며 말 많이 하고 자유분방한 신자들을 비판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서의 이 대목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토마스도 즉 말 많고 이유가 많으며 공동체 참여에 불성실한 신자라 할지라도 이제 진실로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 부활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토마스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 28)하고 고백하는 신앙에 이르게 된 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요한복음서의 이 대목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내용이자 이 복음서의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불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루는 평화와, 그 평화를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을 받아 우리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파견 받았음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평화의 성취는 성령을 받아 이루어지는 죄 사함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앙의 차원 즉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 오늘의 이 요한복음서 결론 부분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복음서의 마지막 구절이 그것입니다.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20, 31)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요한복음서의 부활체험보도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인 토마스의 태도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 핵심적 요소입니다. 토마스, 그 말이 앞서는 사람, 그런 반면 열정적으로 예수님과 생사를 같이 하자고 했던 그 제자, 그러나 의심도 많고 자유분방한, 그러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결국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 28)하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적, 즉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려내시는 것과 같은 엄청난 기적을 보아야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 25)라는 그분의 말씀 자체에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의 눈을 떠서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 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을 육안으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새 사람으로 벌써 변화하여야 하는 길을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이란 기적과 같은 것을 봄으로써 변화된 사람이기보다 믿음으로 새로워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5)


새 삶의 길로 들어섬, 즉 부활체험은 보고나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세례로써 그 길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 세례 받는 믿음이란 꼭 봐야겠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요한 20, 25)의 새 삶인 것입니다. 그 새 삶이자 부활의 세례를 받는 체험은 매주간 안식일 다음날, 곧 주일에, 그리고 그 부활주일의 여드레 만에, 즉 매주일에 다시 그 똑 같은 주님 만나는 일로 얻는 체험입니다. 즉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와 같은 우리 주일미사의 자리에서 우리는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 그 체험으로 얻은 믿음을, 곧 부활체험을 세상에 알리러 파견 받아 나아가기로 합시다! 세상에 나가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 25)하고 말할 수 있는 그 신앙을 고백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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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대축일, 2013 3 31일 오전 10시30분 @ 보령 동대동 성당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자존심의 밑바닥을 딛고 일어나다

'죽을 맛'을 보고 나서...!



교우 여러분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께 축하를 드린다는 저의 이 인사말이 빗나간 말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시지 않을까요? “오늘 예수 부활 대축일이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인데, 우리에게 무슨 부활 축하람?”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축하를 드림이 당연하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 예수님을 향하여 축하인사를 환호로 드립시다. “예수님! 축하합니다! 부활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어요? 그런데 부활하셨군요! 용하시네요! 잘 된 일이네요! 부활하신 예수님, 축하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축하드리면 되는 걸, 왜 제가 교우 여러분께 먼저 부활을 축하드린다고 인사할까요? 그래서 혹시라도 어느 교우 분께서 이 축하를 받고 쑥스러워 하실 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놀리는 줄 아실는지요? 또는 기분이 나빠지신 분도 계실는지요? “아니, 내가 언제 죽었었단 말인가?” 하면서 말입니다. 또는 아니, 나 보기 싫어서 죽어 없어지기 바라다가 살아있는 걸 보고 비아냥거리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는지요? 아니면,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시지 않다가 오늘 나오신 분께서는 저 신부가 나 냉담하여 안 보이다가 오늘 나타나니깐 죽은 줄 알았나?” 하고 기분 나쁘신 건 아닐까요?


전에 제가 있던 다른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기에 병자성사받으시라고 여쭈었더니 매우 기분 나빠해 하시더라고요. “아니, 내가 죽을 병 걸린 줄 아시오? 나 빨리 죽길 바라는가 보군!” 하시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교우 여러분께 재차 강조하여 인사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더욱 노골적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교우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이 축제는 예수님의 부활 축제입니다만, 동시에 교우 여러분 모두의 부활 축제입니다. 여러분 모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의 부활을 마지하려고 여러분께서는 죽을 고생을 하셨습니다. 아니, 여러분 모두는 죽었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죽으신 일 없다고요? 여러분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시게 된 분들입니다. 어찌 그러냐고요? 그 까닭을 말씀드립니다.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콜로 2, 12)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의 제2독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 13)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오늘 부활 축제를 우리 모두 자신의 축제로 삼으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세례를 받은 지 오래 된 교우님들께서는 오늘 이 축제의 기쁨이 실감 나지 않는다고 말할는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지난 사순절을 열심히 지내오신 교우님들께서는 오늘의 기쁨이 곧 세례의 기쁨과 동일한 것임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부활 축제를 맞이하려고 사순절의 힘겨운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그 힘든 여정이란 교회의 사순절 관습대로 기도와 참회, 단식과 선행, 그리고 빈번하게 거행되는 전례 참여였습니다.


그 사순절 과정 중에서 가장 달갑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아마도 참회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형식적일 경우에는 그저 판공성사라는 것을 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고해성사라는 것을 꼭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어 자백한다는 것은 실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을 하기란 속된 말로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순절의 실천사항으로 강조되는 다른 일들 즉, 기도와 단식과 선행 등은 그래도 해볼 만 한 일들이지요. 그것들은 자존심과 상관없는 일들이니까요. 나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 정도를 기도로 아시는 분들 같으면 기도해서 마음 편해지지요. 그리고 단식이란 건강이나 몸매 가꾸기를 위해서도 기꺼이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행을 한다는 것은 명분을 세우기도 하고 이웃을 돕는다는 것이 나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허지만 나 자신의 죄과를 꼬치꼬치 살펴서 그걸 잘못한 일이라고 나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일이란 즉, 참회하는 일이란 실로 즐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히 자존심을 심하게 상하는 일이지요.


그렇듯 자존심 상하는 참회란 실로 죽을 맛입니다. 저는 여기서 죽을 맛이라는 속된 말을, 가장 꺼리는 일에 대한 우리 인간 누구나 공감하는 느낌의 단적인 표현이라고 봅니다. 얼마나 하기 싫으면 죽을 맛이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란 그렇듯이 죽는 일과 같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회 즉, 죄의 고백이란 자존심을 지닌 인간에 있어서 최악의 처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아존재(自我存在)를 존중(尊重)하는 마음()을 즉, 자존심(自尊心)을 업신여기게 되는 것이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잘못의 탓을 스스로 돌린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드러낸다는 것은 죽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듯이 자신의 죄를 자신에게 물어 참회하고 고백하는 과정을 사순절 동안 지내왔습니다. 그야말로 죽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그렇듯 죽는 일을 하고나서 오늘 새로이 일어섭니다. 나의 죄악들을 그리스도처럼 죽음의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렸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당신의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듯이,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십니다. 사순절 참회의 과정을 지낸 우리의 부활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죄를 못 박아 없앰으로써 자존(自尊)의 죽음을 지나온 우리의 다시 일어섬이 곧 세례이고 참회이듯이, 우리는 그 세례를 참회로 반복하면서 사순절에서 부활로 건너온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자존심을 없애기까지 한 우리의 처지가 곧 무덤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 무덤은 죄악의 찌꺼기랄 수 있는 죽은 몸이 거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무덤은 비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이른바 빈 무덤의 체험입니다. 그것은 곧 오늘 부활절의 여명에 무덤에 달려갔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두 제자의 체험입니다(요한 20, 1-9 참조).


오늘의 이 미사에서 읽은 부분까지의 요한복음서 구절은 그 빈 무덤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도한 내용으로 멈추고 있습니다(요한 20, 9 참조).


그 여명에 무덤을 찾아간 그들이 빈 무덤에 대한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한 반면에 우리는 오늘 보도가 멈춰진 요한복음서의 그 이하 구절(요한 20, 11-18 참조)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빈 무덤의 허망함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울고 있던 마리아가 정원지기인 줄로 오인하며 만난 예수님께 그 무덤의 시체를 누가 꺼내갔는지 알려달라고 애원하였지요(요한 20, 11-15 참조). 그러자 평소 자기를 부르시던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채고 나서 그분을 붙잡으려 하는 마리아에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0, 16 참조).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요한 20, 17)

이 말씀에서 저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떠한 것인지 번쩍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저 유명한 달라이 라마의 강연집에서 도움을 받아 얻은 것입니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이며 불교를 세계적으로 대표하는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영국의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들이자 베네딕토회 수도사제들이 초청하여 런던의 한 대학에서 사흘 동안 세미나를 개최했던 강연집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강연집은 달라이 라마, 예수를 말하다라는 책입니다. 불교 지도자의 지혜로 성경의 복음서를 강의한 내용을 세미나 기록형식으로 수록한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 불교 지도자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이해한 내용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죽음과 부활을 동시적 실존 양상이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불교의 환생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다음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전부인 부활을 표현했습니다. “환생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환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환생은 죽음 다음에야 올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말을 듣고 거기 세미나를 함께 하던 가톨릭의 수도사제 로렌스 신부가 한 마디 했습니다. “부활(復活)은 환생(還生)이 아닙니다.”라고요.


가톨릭 사제의 그 이의제기에 대하여 달라이 라마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는 윤회(輪廻)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영적으로 성장을 해나가면, 그의 육체까지도 더욱 더 미묘해집니다.”


이 달라이 라마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의 몸은 육체적인 몸입니다. 부활은 했지만 아직 하느님 아버지께로 승천하지 않은 몸은 미묘한 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간 후의 몸은 영적인 몸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이러한 설명은 불교적 표현입니다만, 저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신 죽음과 부활의 길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좋은 힌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미묘한 몸이 되는 것이고 승천은 영적인 몸이 되는 것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예수님 부활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가톨릭 수도사제 로렌스 신부께서 설명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죽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세상에 일정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후의 예수님은 다르게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사후에 마리아 막달레나와의 만남이 그렇듯이,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아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존재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눈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고 승천하기까지의 중간단계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예수님은 거기에 적혀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로렌스 신부님의 말씀대로, 십자가 이전의 예수님은 그 옆에 있던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이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예수님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고 우리 곁에 계시지만 그분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새로운 눈을 가진 이들 뿐입니다


그분은 십자가 이전처럼 육체의 손으로 붙잡아 만져서(한정적으로-물체로써) 확인할 수 있는 분이었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의 그분은 언제 어디서고 새로운 눈 즉 영신적(신앙적) 깨달음으로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내 아버지 하느님이시고 너희의 아버지 하느님이신 분께올라가신다던 분이시기에, 즉 하느님과 합일 되신 상태의 분이시기에, 즉 성령을 통해 존재하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언제고 어디서고 만날 수 있게 되셨음이 곧 그분의 부활입니다.


그렇듯이 그분을 만나는 것이 곧 부활의 체험입니다. 이 세상 모든 죄악의 찌꺼기를 다 없애버린 우리라면, 즉 우리 또한 죄악에 죽고 다시 새로운 삶으로 일어선다면, 그분의 그 부활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활에로 건너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죄악을 참회하는 사순절을 다 지나고 이렇게 새로운 날 곧 부활의 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세례로써 그리 하였고, 참회로써 그리 하였습니다. 우리 자존심의 저 밑바닥 아래에 내려가는 죽을 맛같은 참회로써 나 자신의 찌꺼기인 죄악을 떨구어 낸 우리는 새로운 나의 참 자아를 예수님과 함께 되찾은 것입니다. 모든 자존심을 팽개치고 나서 저 밑바닥을 딛고 일어선 그것이 오늘의 우리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교우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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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성야, 2013 3 30일 오호 7

만수리 공소에서 도보순례자들과 함께, 윤종관 신부


우리의 부활 DNA를 일깨워서...

빈 무덤에서 출발합시다!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축하를 드린다는 저의 이 인사말이 빗나간 말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시지 않을까요? “예수님 부활을 두고 우리에게 무슨 부활 축하람?”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축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드림이 당연하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 예수님을 향하여 축하인사를 환호로 드립시다. “예수님! 축하합니다! 부활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어요? 그런데 부활하셨군요! 용하시네요! 잘 된 일이네요! 부활하신 예수님, 축하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축하드리면 되는 걸, 왜 제가 교우 분들께 부활을 축하드린다고 인사할까요? 그래서 혹시라도 어느 교우 분께서 이 축하를 받고 쑥스러워 하실 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놀리는 줄 아실는지요? 또는 기분이 나빠지신 분도 계실는지요? “아니, 내가 언제 죽었었단 말인가?” 하면서 말입니다. 또는 아니, 비아냥거리는 거 아냐?” 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는지요?


전에 제가 있던 어떤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기에 병자성사받으시라고 여쭈었더니 매우 기분 나빠해 하시더라고요. “아니, 내가 죽을 병 걸린 줄 아시오? 나 빨리 죽길 바라는가 보군!” 하시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교우 분들께 재차 강조하여 인사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더욱 노골적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교우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이 축제는 예수님의 부활 축제입니다만, 동시에 교우님들 모두의 부활 축제입니다. 여러분 모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의 부활을 마지하려고 여러분께서는 죽을 고생을 하셨습니다. 아니, 여러분 모두는 죽었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죽으신 일 없다고요? 여러분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시게 된 분들입니다. 어찌 그러냐고요? 그 까닭을 말씀드립니다.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콜로 2, 12)하고 말입니다. 이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 부활한 사람으로 자아인식을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 자신과 어찌 그렇게 실존적 관계를 갖는가 저는 이해가 가지 않던 중에 감명 깊은 책을 읽고 힌트를 얻었습니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이며 불교를 세계적으로 대표하는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영국의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들이자 베네딕토회 수도사제들이 초청하여 런던의 한 대학에서 사흘 동안 세미나를 개최했던 강연집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강연집은 달라이 라마, 예수를 말하다라는 책입니다. 불교 지도자의 지혜로 성경의 복음서를 강의한 내용을 세미나 기록형식으로 수록한 책입니다.


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죽음과 환생은 동시적 실존 양상이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환생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환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환생은 죽음 다음에야 올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말을 듣고 거기 세미나를 함께 하던 가톨릭의 수도사제 로렌스 신부가 한 마디 했습니다. “부활(復活)은 환생(還生)이 아닙니다.”라고요.


가톨릭 사제의 그 이의제기에 대하여 달라이 라마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는 윤회(輪廻)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영적으로 성장을 해나가면, 그의 육체까지도 더욱 더 미묘해집니다.” 달라이 라마는 이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의 몸은 육체적인 몸입니다. 부활은 했지만 아직 하느님 아버지께로 승천하지 않은 몸은 미묘한 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간 후의 몸은 영적인 몸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이러한 설명은 불교적 표현입니다만, 저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신 죽음과 부활의 길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좋은 힌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미묘한 몸이 되는 것이고 승천은 영적인 몸이 되는 것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머물면서도 부활한 몸이 될 수 있다는 힌트가 그것입니다. 이점에 관하여 달라이 라마의 불교적 설명으로는 사람마다 영적인 진화의 단계가 있어서 아주 평범한 상태에서부터 출발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로 옮겨간다고 합니다만, 이러한 관점에 따라 우리의 육체적 몸은 영적인 단련을 통하여 달라지는 변화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실제로 사람마다 풍기는 외양의 차이점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은 외양에서 그 마음과 삶의 상태가 험악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만,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외양에서 기품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런 차이점은 그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렇듯이 어느 한 사람이 예전 같지 않게 외양이 달라진 경우를 볼 수도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대하기 싫던 사람의 모습이 어찌 된 영문인지 경건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라서 가까이 하고 싶은 모습으로 변화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그간에 마음의 단련과 삶의 개선을 이룬 사람임이 확실합니다. 같은 육체일지라도 사람마다 풍기는 것이 다른 한편, 한 사람의 몸일지라도 예전 같지 않게 달라진 그 기품은 미묘한 변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저 자신은 그 달라진 기품의 미묘한 변신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저의 입이 부끄럽습니다만, 그렇듯이 달라진 몸의 미묘함으로 살아생전 부활의 징후를 엿보일 수 있도록 부단히 저 자신을 채찍질하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변신이 곧 부활은 아니겠습니다만, 우리의 몸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의 그러한 달라짐이란 마치 투박한 돌을 갈고 닦아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 듯이 사람이 자신을 단련하여 그 모습을 변화시킨 것을 뜻합니다. 일면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곧 부활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한 부활의 길로써 하늘(영의 세계)에 이를 경우를 우리는 영적인 몸으로의 변화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몸의 변화란 달라이 라마에게 있어서는 불교적으로 윤회의 개념에 해당된 표현이겠습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부활이어야 합니다. ‘부활윤회가 아닙니다. ‘윤회되돌아감이라 할 것입니다만,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이란 본래적으로 파스카건너감-지나감이듯이 말입니다. ‘윤회는 일종의 반복일 수 있습니다만, ‘부활은 일회적으로 지나감인 것입니다. 지나감을 우리는 파스카라 합니다. 그러한 지나감은 그래서 빈 무덤에서 그 결정적 체험을 합니다. 한 생을 확실히 마감함으로써 전혀 다른 생으로 가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봅니다. ‘빈 무덤이란 나의 모든 것이 통째로 없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모든 것이 통째로 없어진 그 빈 무덤을 우리는 오늘 오후에 서짓골에 가서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병인년에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인들의 육신이 진토 되어 그분들에 관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지요. 147년 전의 사연에 대해서 서짓골에서 보여주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분명한 것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블뤼 주교님 등 네 분의 순교자가 죽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이 1세기 반이나 흘렀지만 더욱 한심한 것은, 그분들의 육체가 없어진 그것만큼, 신앙의 후예들인 우리들까지 그 분들에 대하여 철저한 망각 속에 파묻혀온 사실이 무서우리만큼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들이 고백하고 죽은 동일한 신앙이 오늘 우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신앙이 오늘의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놀라운 것입니다. 죽어 없어진 그분들이 고백했던 신앙이 곧 오늘 우리들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신앙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한 번 죽었지만 신앙은 죽지 않고 오늘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들처럼 우리도 죽겠지만 우리의 신앙은 죽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신앙의 역설적 생명력입니까? 그래서 신앙은 죽음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죽음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우리는 한번 사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도 두려움도 없이 우리의 길을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이기에 바오로 사도의 말마따나 세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난 새로운 삶을 쟁취한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걸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게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죽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죽음의 길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껏 살아왔던 것을 통째로 없애버리고 전혀 다른 상태로 건너가는 길인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삶으로 송두리째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변함의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나 자신을 갈아치우기를 반복하면서 사순절을 지나왔고 오늘 빈 무덤에서처럼 지난 것에서 건져날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새로운 세계로 향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의 삶, 그것이 부활입니다. 적어도 지난 사순절 동안 무엇인가 나 자신에게서 바뀐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는 부활의 단계에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오후에 순교성인들의 주검을 비장한 경로로 봉송한 옛적 사연의 길을 걸으면서 자신들 내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끓어오르는 새로운 기운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어설프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살자는 각오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는 사실상 세례로써 이미 체질화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세상에서 죽음을 건너갈 체질로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활DNA’ 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오늘 우후의 도보 순례로 도착한 서짓골에서 1세기 반전에 이미 진토 된 순교성인들 안장지의 나뭇가지들이 스산한 바람소리로 우리 가슴속에 그 부활DNA’를 일깨워주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깨움의 감흥으로 우리는 이 부활성야에 우리의 세례 갱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갱신의 발걸음으로 새 삶의 새벽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부활하신 그분의 빈 무덤 앞에서 그렇게 출발합시다! 알렐루야!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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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프란치스코

2013330일 부활성야 미사 강론에 대한 정리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

너희는 왜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느냐?’


부활 성야에 선포되는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그 분의 무덤으로 향하는 여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루카 24,1~3).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여인들은 왜 무덤으로 향했을 것이며, 또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여인들은 연민과 사랑을 표현하려고 갔던 것이며, 그것이 바로 향유를 바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전형적인 행동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을 들었던 여인들.

 

그 여인들은 예수님만큼 자신들을 존중해주는 이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여인들은 갈바리아(해골산의 라틴어, 그리스어 골고타, 아람어 골골타, 히브리어 골골레트)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지던 그 순간에도 함께 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여인들이 무덤으로 향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자신을 존중해주던 최고의 인품을 소유했던 예수님의 시신을 향하던 그 여인들은 슬픔과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돌아가셨고, 그들 곁을 영영 떠나셨던 것이기에.

 

이제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으로 돌아갈 운명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복잡한 심정 속에서 그리운 예수님의 시신을 향해 가던 그 여인들의 사랑은 변치 않고 더 깊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으로 향하던 그 여인들 앞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인들의 마음과 계획을 완전하게 뒤흔들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삶을 완벽하게 바꾸어버릴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먼저 여인들은 무덤을 막은 돌이 굴려져 있는 걸 목격합니다. 무덤에 들어가서는 주님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당혹스럽고 의혹 가득한 장면 앞에서 여인들은 의문을 품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 모든 걸 뭘 의미하는 것일까?’(루카 24,4)

 

전혀 일상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 여인들은 어떤 상상 속에 빠져서 미궁을 헤매고 있었을까요? 전혀 새롭고 낯선 장면 앞에서 여인들은 두렵습니다. 우리도 새로움에 두려워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시는새로움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새로움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복음 속의 사도들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평온한 상태를 지키면서 죽은 이를 기억하는 태도로 그저 무덤 앞에 머물고만 있습니다. 죽인 이는 과거의 위인이 되어 역사의 기억 안에 갇혀서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이룩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을 때 그만 두려움에 빠져버립니다.

 

심지어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삶에 지치고 절망하고 또 실망과 슬픔에 자주 빠집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에 눌려서 힘겨워하고, 스스로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기 연민에, 자기 위로에, 자기 상처를 핥으면서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절대로 자신 안에 갇혀서는 안되고, 스스로를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바꾸실 수 없는 상황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분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루카복음서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어떠했습니까? 무덤이 비어있는 걸 발견한 그들이었습니다. 시신은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비어있는 것임과 동시에 무엇인가 전혀 새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분명하지는 않은 상황입니다. 당혹스럽고 온갖 의문부호들이 여인들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 상황을 어느 누구도 속시원하게 설명해줄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가신 것은 오로지 순진무구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바야흐로 인간의 삶을 참으로 바꾸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여인들의 삶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인류의 역사에서 처음과 동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계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단순한 되살아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민수 14,21~28; 신명 5,26; 여호 3,10)

 

예수님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닙니다. 현재에 살아계시고 또 미래를 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원한 오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새로움입니다. 여인들의 눈 앞에, 제자들의 눈 앞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눈 앞에 펼쳐진 하느님의 새로움입니다.

 

그 새로움은 모든 것에 대한 승리입니다. 죄와 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생명을 억압하고 인간의 본 모습을 왜곡하는 모든 것에 대한 승리입니다. 바로 이 메시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너희는 왜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느냐?’는 말씀을 우리는 일상에서 많이 듣고 있지만, 그 생각을 진지하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 오늘을 살고 있다는 믿음의 생활에서 멀어지면서 내가 겪는 매일의 문제와 일상의 온갖 걱정 속에 갇혀 삽니다.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슬픔의 감옥, 고통의 감옥,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감옥에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그 감옥 속에서는 살아계신 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감옥을 열고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일상과 삶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열쇠는 바로 믿음입니다. 신뢰를 가지고 예수님을 친구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감옥을 열고 나와서 그 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십시오. 아주 조금씩 옮겨도 괜찮습니다. 두 팔을 벌려 나 자신을 맞이하여 주실 그 분을 향해 간다는 그 시도와 지향은 그 동기와 과정과 결과 모두가 사랑의 행위이며 생명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런 삶에서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생명을 잃고 사랑을 잃고 어둠과 죽음의 감옥 속에 갇히는 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한다면 결코 실망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께 모든 것을 전부 의탁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그 분은 여러분 가까이에서 함께해주실 것이고, 여러분이 바라는 평화를 주시고, 그분이 바라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주실 것입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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