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e 프란치스코

201347일 로마 주교좌 착좌미사 강론에 대한 정리글

 

우리를 끌어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  

 

하느님의 자비!

자비는 신앙의 진리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위한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진리라고 말씀하시는 프란치스코. 여느 인간의 사랑과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

언제나 한결같으며, 언제나 우리 손을 붙잡고 있으시지만, 반면에 사람은 언제나 한결같지 않게 잊고 있다고 영혼과 육신의 고통과 가난 속에서 우리 손을 붙잡고 계시는 하느님을 향해 다시 돌아서기를 반복한다.

그제야 우리를 일으켜 주며 지탱해 주고 이끌어주시는하느님에게 잠깐 잠깐 순종하다가 망각하기를 반복하는 게 어리석은 인간의 행동이다.

 

믿음이 부족한 사도 토마스의 고백

 

요한복음서 2019절부터 28절까지를 보면, 그 안에서 사도 토마스는 하느님의 자비를 뼛속 깊이 체험한다. 요한복음서의 2019절부터 23절까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서의 2024절부터 29절까지는 그 유명한 예수님과 토마스의 일화가 등장한다. 요한복음서 2019절부터 23절까지가 마태오복음서, 마르코복음서, 그리고 루카복음서 등 3대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요한의 다음 구절은 24절부터 29절까지는 다른 3대 공관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다.

 

요한복음 20,19~29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마태 28,16-20 ; 마르 16,14-18 ; 루카 24,36-49)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과 토마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로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 것이었다. 다른 사도들은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했지만, 토마스는 믿지 않았다. 토마스의 반응에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은 바로 인내였다. 토마스는 고집불통이었지만, 예수님은 인내하셨다. 그렇게 한 주간의 시간을 토마스에게 주셨다. 마음의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려주셨다. 그리고 이윽고 토마스는 자신이 미천한 존재이며 미약한 자신의 믿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서 진정된 마음으로 토로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렇게 토마스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굳건하게 믿는 새 사람이 된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는 어떠했나?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베드로는 곁에서 가장 절실하게 예수님을 도와주어야 했을 순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신한 배신자였다.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가장 밑바닥까지 끌어내렸던 순간이었다. 그 순간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눈길을 보게 된 베드로. 루카복음 2260~61절의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루카복음 22,60~62

60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말하였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61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62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과연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눈으로 말씀하시고 계셨다. 베드로를 향해서 베드로야! 너의 나약함대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그렇게 사랑 가득한 예수님의 눈빛을 느낀 베드로는 슬피 울었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 대해서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들은 무엇을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슬픈 얼굴빛이었고, 희망도 없었으며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그런 절망 속에 빠져있는 제자들을 모른척 하지 않는 예수님.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토마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당신에 관한 성경말씀을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함께 식사하기 위해 머무셨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방식이다. 인내하는 것.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또 한꺼번에 이루려고 하지 않는 것. 인간관계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처럼 인내하지 않는다. 사랑은 인내하는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Pope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루카복음서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야기를 제시한다. 그 비유가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말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기 몫으로 돌아올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난다. 그러다가 모든 걸 탕진한다. 그의 인생은 끝장이 난 것이었다. 그렇게 가장 비루한 처지 속에서 하루 하루를 연명하던 작은 아들은 그제서야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아버지의 사랑, 그런 아버지의 온기. 결국 용기를 내어 집으로 돌아온다.

 

한 순간도 아들을 잊지 못하던 아버지는 매일 매일 아들이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자신의 자유를 방탕하게 다 써버린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사랑하는 아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인내와 사랑으로, 희망과 자비로 아들을 기다리며 한 순간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던 아버지였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는 아무런 질책이나 꾸지람없이 안아주실 뿐이었다.

 

아들이 돌아왔다!’

이것이 아버지의 기쁨이었다. 아들을 끌어안은 아버지. 그것이 모든 기쁨의 표현이었다. 아들이 돌아왔다는 기쁨으로, 하느님도 우리를 기다리며 지치는 일이 없으시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하느님의 자비로운 인내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독일 출신의 위대한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1969)하느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당신의 인내심으로 응답하시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신뢰와 희망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신앙의 인내> 1949, 28)


<사진설명 . 독일의 우표사진으로 등장한 과르디니> 로마노 과르디니 혹은 구아르디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이자 작가, 신학자이다. 20세기의 가톨릭 지성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대화는 우리의 나약함과 하느님의 인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대화는 우리에게 희망을 약속한다.

 

이제 Pope 프란치스코의 강론 후반부를 옮겨본다.

 


저는 또 다른 요소를 하나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잘못을 하고 어떤 죄를 범한다해도, 하느님의 인내가 우리 마음에서 그분께 되돌아갈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당신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상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상처를 실제로 만져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사에 참여할 때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베르나르도(1090~1153) 성인은 아주 멋진 강론을 통해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상처를 통해 바위에서 나오는 꿀을 빨아 먹고 차돌 바위에서 나오는 기름을 먹을 수 있습니다(신명 32,13).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 강론 61,4>

 

<신명 31,13> 주님께서는 그가 이 땅의 높은 곳을 달리게 하시고 들의 소출로 그를 먹이셨다. 바위에서 나오는 꿀을 빨아 먹게 하시고 차돌 바위에서 나오는 기름을 먹게 하셨다.

 

예수님의 상처 안에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가 있고 거기서 그분 성심의 무한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토마스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그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이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 혹시 자신의 공로에 의지해야 하는지 자문한 뒤 말했습니다.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공로는 하느님의 자비 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는 한 내게는 공로가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비가 풍성하다면, 나의 공로도 풍성할 것입니다." <아가서 강론 61,5>

 

그러므로 예수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그분의 인내를 신뢰하며 그분 사랑의 상처 속으로 피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용기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베르나드로 성인은 마침내 단언했습니다.

 

"내 자신이 지은 많은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어떡해야 합니까?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아가서 61,5>

 

어쩌면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 죄가 이렇게 크고, 나와 하느님의 거리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의 경우보다 더 멀며, 나의 불신이 토마스의 불신과 같구나. 그러니 나는 하느님께 돌아갈 용기도, 그 분이 나를 기다리며 기꺼이 나를 맞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용기도 없다.' 하지만 하느님은 바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돌아올 용기만 내라고 당부하십니다. 저는 사목생활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매번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세속적인 제안을 받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의 제안만을 받아들입시다. 그분의 제안은 사랑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헤아리시는 다수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 중요한 존재, 그분이 소유하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죄인이라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출처. 교황 즉위 후 첫 강론집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

바오로딸 출판사, 2014-5-10 1판 1쇄 발행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090- 1153821)12세기에 활동한 수도자로 시토회를 창립하였으며 제1차 십자군 원정 중에 설교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성인. 축일은 820. 베르나르는 독일어에서 기원한 이름으로 곰처럼 힘센’, ‘힘센 곰을 뜻한다. 회화에서는 주로 시토회의 하얀 수사복에 수도원장의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발 밑에 주교관과 성체, 사슬로 묶은 악마, 하얀 개, , 벌통과 함께 그려진다. 양봉가·양초제작자·모래채취장·일꾼의 수호 성인이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