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2014년 4월 6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원망의 기도를 합시다! 

원망, 그것은 믿음의 기도!



오늘 봉독하는 요한복음서 11장은 죽은 지 4일이나 된 라자로 라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부활시키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오늘의 이 라자로의 부활 사건 말고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구약성서에는 엘리야 예언자가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준 이야기(1열왕 16, 17∼24 참조)와 엘리사 예언자가 수넴 여인의 갑자기 죽은 아이를 살려준 이야기(2열왕 4, 18∼37 참조)가 나옵니다.

 

신약에는 복음 성경에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주신 이야기가 세 가지 있습니다.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주신 일(마르 5, 21∼43 ; 마태 9. 18∼26 ; 루카 8, 40∼56 참조), 나인이라는 동네에서 어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신 일(루카 7, 11∼17 참조), 그리고 오늘 복음 성서의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일(요한 11, 1∼45 참조)이 그것입니다.

 

요한복음서만이 라자로 부활의 기적을 보도한 의도에 유의해야


그런데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주신 일은 마르코와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가 전하고 있고, 나인이라는 동네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린 이야기는 루카복음서가 전하고 있습니다만,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오늘의 이 이야기는 앞의 세 가지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서의 그러한 아이들을 살려주신 기적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으면서 유일하게 요한복음서만이 라자로를 부활시킨 기적만을 보도하고 있는 그 의도를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에 있어서의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기적은 그 전말(顚末)이 예사롭지 않게 아주 장황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도되고 있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오늘의 이 이야기로써,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변화시켜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는 ‘기적’이라는 것을 일곱 가지만 전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신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 특별히 선별하여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카나 라는 마을에서 물을 술로 변화시킨 첫 표징에서부터 라자로의 부활에까지 요한복음서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일곱 가지 표징(Symbol)입니다. 그 일곱 가지 표징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클라이맥스에 해당된 표징이 라자로의 부활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를 하시고 일곱째 날에 당신의 그 창조과업의 완전한 성취로 안식의 날을 맞이하셨는데, 그 창조의 정점(클라이맥스)이 인간의 창조였듯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부활시키심으로써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결정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죽음을 함께 하시고 인간을 부활시키는 분!

 

그래서 오늘 되살아난 사람의 이름이 ‘라자로’라는 것을 요한복음서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루카복음서에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루카 16, 19∼31)가 나오는데, 그 예화를 우리가 이미 들어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하여 오늘의 기적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서에 따르면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은 죽어서,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갔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어 이 사실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자기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 31)

 

그렇다면 요한복음서는 오늘 라자로의 되살아남을 보고 우리가 진정 믿음을 가질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었던 라자로가 실제로 되살아났는데도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그분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보도합니다(요한 11, 45 참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부활시키기 전에도 오래전부터 반대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하던 분이었습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서 11장 이전에 이미 그 5∼10장에 이르도록 그러한 입장이셨던 예수님의 처지가 보도되어왔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지명수배자’로 오랫동안 피신하다시피 지내시던 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매우 사랑하시던 라자로가 몹시 앓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서도 이틀간이나 머뭇거리고 계시다가 거기 가보시겠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거기가면 생명이 위험해지신다고 만류하고(요한 11, 3∼8 참조), 제자 중 하나인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 16)고 동료들을 부추기던 것을 보도하는 요한복음서는 이 기적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이란, 예수님 당신 자신에게 매우 위험천만하고 긴박한 상황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도록 안내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요한복음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도록 안내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특별히 사랑하시던 사람이 중병으로 죽어간다는 전갈을 받고서도 서둘러 오시지 않았다고 그 식구들이 원망하는 말 속에 우리의 같은 심정이 토로되는 것 아닌가 하는 물음을 우리 자신에게 던지도록 하는 것입니다(요한 11, 21. 32 참조). 그리고 그 원망 가운데 일말의 믿음을 보이는 것이 라자로의 누이인 마르타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 21∼22)하고 마르타가 한 말을 우리도 예수님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26)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우리도 마르타와 같은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 27)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라자로가 묻혀있는 무덤을 향하여 가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으로써 그 불신의 무덤에서 돌을 치우라 하시고는(요한 11, 39 참조)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 43) 그리고 이어서 온몸을 감아 묶어놓았던 불신과 미혹으로부터 풀어주어 자유로이 걸어가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1, 44 참조).

 

여기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세상의 모든 불신과 미혹으로부터 먼저 우리가 벗어나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라자로의 두 여동생이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 21. 32)하고 항의한 심정에 우리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자주 당하게 되는 불행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불의의 고통 속에 정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고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무신론적 항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는 이는 그 마음속에 작은 신앙이 있는 겁니다


저는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끔 교우들로부터 하느님을 원망하는 식의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는 일이 없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는데도 집안에 우환이 끊이질 않는다,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는 식으로 불행을 호소하면서 이런 일들을 당하게 하는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이럴 수 있느냐는 식의 원망인 것입니다. 그런 원망을 사제에게 털어놓는 그 심정은 아마 사제를 하느님의 대변자로 생각하기 때문인 듯한데, 저는 그런 불행에 대하여 하느님을 대신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만 답답할 뿐입니다. 저는 그 답답한 마음으로 그런 교우에게 되묻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무슨 빚진 분입니까? 잘못 되는 일은 다 하느님 탓인가요?”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 저는 불행을 당한 신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런 말을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원망하는 신자는 그 마음속에 일말의 신앙의 바탕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리라는 저 혼자만의 추측으로 그 신자를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은 그래도 그 마음속에 작은 신앙이 있기 때문에 원망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면 원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전례기도 가운데(특히 성무일도 가운데) 주로 바치는 시편은 그 150편 가운데 원망의 시(詩)를 가장 많이 읊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하느님께 많이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 원망은 곧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행을 당한 신자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원망스러울수록 그 원망을 섞어서 기도를 하라고 말입니다. 오늘의 성경 속에서 라자로의 두 누이는 그런 원망을 섞어서 예수님께 자기들의 믿음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입니다. 그러한 원망조의 기도는 이미 믿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듣게 된 주님께서는 그래서 그 불행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 35 참조)는 오늘 성경의 보도대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제어하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요한 11, 36 참조). 그러한 주님께서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은 당신이 당할 죽음의 위험 가운데서 라자로를 다시 살려주시는 분이셨다는 것을 오늘 요한복음서는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우리 인간들의 최대의 불행인 죽음을 당신 것으로 삼아 죽기까지 하신다는 것을 요한복음서는 오늘 라자로의 부활 기적보도로써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이제 죽음의 길을 가시게 되는 것을 우리는 다음주간의 성주간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26)하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라자로처럼 미혹의 무덤에서 나와서 주검을 묶어놓던 베와 수건(壽衣) 같은 모든 회의와 불안을 떨치고(요한 11, 44 참조) 새로운 삶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 43)하시는 그 부르심은 곧 죄악으로 부패해가는 죽음의 상태로부터 떨쳐 나오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미혹의 무덤으로부터, 즉 죄악으로부터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이 사순절의 절정에 들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주간의 성주간을 통하여 죽음을 지나 부활에 이르는 주님을 새롭게 체험할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8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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