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성야

2014년 4월 19일 밤 9시 @삽티성지


빈 무덤에서 출발합시다! 

曲線이 아닌 直線의 Passover로 갑시다!



오늘밤은 암흑을 뚫고 광명을 맞이하는 밤입니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밤입니다. 우울했던 과거를 떨치고 기쁨의 새 시대를 시작하는 밤입니다. 움츠렸던 가슴을 열고 약동하는 기운으로 생동의 계절에 화답하는 밤입니다. 이 밤은 암흑에게 붙잡혀 멈춰선 밤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밤입니다. 신 새벽의 여명으로 이 밤은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밤은 어두운 밤이 아니오, 찬란한 빛이 가득 차 다가오는 새벽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바뀌는 새로운 시간을 우리는 맞이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체험하는 어제의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전례’로써 우리는 지난 사순절 내내 억눌려온 심정을 완전히 묻어버리고 이 부활 성야에 새로운 기운으로 일어섭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이 거룩한 밤의 메시지로 들려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 4)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분과 함께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로마 6, 11 참조).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출발을 저는 그래서 ‘빈 무덤’에서부터 세상을 향하여 달려 나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덤’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의 처소입니다. 거기는 희망이 없습니다. 송장이 썩어 흙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부활 축제는 그러한 무덤에서 시작됩니다. 무덤에서의 탈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탈출할 무덤은 어떤 무덤인가요? 무덤이란, 세상을 떠난 사람이 묻혀서 다시는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는 곳입니다. 주검의 감옥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오늘 밤을 새워 맞이할 새벽의 부활 체험은 그 주검의 감옥에서 세상에 돌아오는 체험입니다. 삶에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로의 돌아옴이란 실로 가능한 것일까요? 그게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아마 미친 소리라고들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 미친 소리 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무덤에서 나갑시다!”하고…

 

우리가 탈출해야 할 무덤은 사실상 빈 무덤입니다. 거기엔 주검이 없습니다. 그 무덤은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막달레나가 찾아간 곳인데, 그건 비어있는 무덤입니다. 사흘 전에 거기 묻혔던 분의 주검은 거기에 없습니다. 그분에 대해서 천사가 막달레나에게 말합니다.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을 만나고 싶으면 갈릴래아에 가보아라.”(마태 28, 6∼7 참조)

 

그렇습니다. 그분을 무덤의 주검으로 보려 하지 말고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살아계신 분으로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찾을 게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야 합니다.

 

저는 신앙 선조 치명자들의 유적을 찾아 순례하는 분들에게 말합니다. 치명자들의 모습을 이른 바 성지에서 볼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서짓골 성지에 순례오신 분들이 거기 묻히셨던 치명 성인들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성지에 와서 거기 멋있게 꾸며놓은 성당이나 기념물을 보는(구경하는) 것으로 순례의 목적을 삼기 보다는, 거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신앙의 눈으로 치명 성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강조합니다. 그 치명 성인들의 모습은 어쩌면 거기 찾아온 순례자들 자신 안에서 발견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가정, 직장, 마을 등)에서 신앙 실천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반사해 줄 것입니다. 거기가 곧 ‘갈릴래아’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무덤에 계시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갈릴래아’에 먼저 가 계십니다. 그분께서 미리 그렇게 말씀하시고 약속하셨지요.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 10)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무덤을 떠나”(마태 28, 8) 이 사실을 알리러 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건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는 것입니다.(로마 6, 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효화시키고 무덤에 묻어버렸듯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악은 다 사라지고 이제 우리는 오늘 이 거룩한 밤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만 하면 됩니다(로마 6, 5∼11).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부끄러운 우리의 모든 과거는 사라지고 우리가 앞으로 새롭게 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새 날을 이 밤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기쁜 일이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 기쁨은 마치 어둠을 물리치는 찬란한 불빛처럼 어둠의 밤을 밀어내고 부활의 새벽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입니다.

 

부활하여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분이겠습니까?

단순히 육체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겠습니까?

 

육체적으로 죽었다가 되살아남은 ‘부활’이 아니라 ‘재생’ 또는 ‘재활’이라 할 것입니다. ‘재생’이나 ‘재활’의 현상은 새로운 차원으로의 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서진 기계를 수리하여 다시 만든 재생품이나 낡은 물건을 다른 물건으로 개조하는 재활용품, 또는 병든 몸을 약물 투여나 시술에 의해 고치는 의료 성과가 부활은 아닙니다. 황량했던 겨울의 들판이 다시 푸른 생명의 색깔로 물결치고 묵은 나무 가지에 새싹이 돋으며 새 계절의 환호로 꽃이 피는 기쁨과 더불어 주님의 부활 축제를 맞이하는 우리는 부활을 곧 순환적 계절 현상과 같은 것(환생)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부활이란 그런 계절 순환이나 환생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부활이란 예고된 반복으로 순환되어 다시 오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이란 곡선(曲線)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직선(直線)으로 건너가는(Passover) 삶인 것입니다.

 

즉, 부활은 과거의 삶이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삶을 새로 얻는 것을 뜻합니다. 과거의 삶이 아니라 이제 완전히 전혀 다른 삶을 새로 얻는다 해서 그 삶의 주인공의 존재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이전의 존재가 동일한 사람이면서 전혀 다른 삶을 시작함을 뜻합니다.

 

과거에 폭력배로서 갖은 비행을 저지르며 살던 사람이 이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개과천선하여 선행으로 지역 사회에 기쁨을 선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결손 가정의 어린이들이나 소년소녀가장을 위하여 매일 자기 승합차로 도시락을 제공하러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과거 젊은 시절에 작은 가게를 하며 자녀를 키우는 아내로 하여금 걸핏하면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도록 그런 못된 폭력배로 살아온 그 사람이 이제는 아내의 가게를 돕기 위해 승합차를 운전하면서 매일 불우한 소년들을 돕는 일을 하며 동네 사람들로부터 “전혀 딴 사람 되었다”는 칭송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렇듯이 ‘A’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이전까지 살아온 그 동일 인물의 ‘A’이면서도 지금부터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그것이 부활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전에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던 그 분이시고, 불쌍한 병자를 고쳐주시고 소외된 죄인들을 사랑하여 어울리시던 그 분이시며, 모함을 받으셔서 부당하게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이제 2천 년 전의 그 갈릴래아라는 일정 지역이나 돌아다니시다가 불쌍한 사람들을 만나시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부활하신 그 분은 이제 어디서나 그리고 언제나 어떠한 사람들에게나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그 분은 이제 한 마디로 ‘세상에 매어있지 않은 분’이 되셔서 오늘도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하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보여주시는 부활은 ‘달라진 삶’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전혀 다른 사람의 삶인 듯 달라진 것이 부활입니다. 이러한 부활은 먼 훗날 육체가 부활하여 다시 살게 될 때 오늘의 이 삶을 다시 반복하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되는 그 날에 오늘의 이 삶을 다시 영위하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 훗날 모두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그 삶을 오늘 우리가 먼저 살아가는 것이 부활을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부끄러운 삶을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무덤에 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체험하는 무덤은 ‘빈 무덤’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부끄러운 죄악의 옛날이 완전히 사라져야 함을 이 부활 성야에 확인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변화, 즉 부활의 체험이 우리의 세례입니다. 그렇듯 세례로써 우리 과거 죄악의 삶을 묻어 버렸다 해서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고,(…)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 6∼8) 그러한 우리의 새로운 삶을 재차 확인하여 우리는 이 부활 성야에 세례를 갱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활 성야를 세례 기념일로 맞이합니다.

 

이러한 부활 성야에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부활초를 축성하여 그 불빛을 따라 어둠을 밝히면서 성당에 들어가 부활 찬송을 올린 다음 이스라엘 민족이 기념하는 해방의 구세사를 되새기는 말씀의 전례를 거쳐서 우리의 세례를 확인하는 갱신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 성야를 맞이하는데도,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슬프고 어둡게 하는 이 며칠간의 뉴스 때문에 우울합니다. 4·19 혁명의 54년 전 젊은이들의 수많은 목숨으로 새로운 나라로의 바탕을 다졌음을 기념하는 오늘이지만, 수백 명의 학생들 생명을 남해 바다에 수장시킨 사고 때문에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이 일을 어이 하면 좋겠습니까! 그 학생들을 살려내어 부모님들의 품에 돌아가게 할 수 없단 말입니까? 그 부모님들을 위로할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누구를 원망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 절망을 어찌 떨쳐낼 수 있을까요? 이러한 사고를 당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군요! 온 나라가 절망의 무덤 같습니다. 이 무덤에서 서둘러 달려 나가 전할 수 있는 소식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학생들의 교감 선생님 또는 살아나온 동료 학생이 이 참담한 절망의 무덤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참으로 온 나라가 무덤 같습니다.

 

이런 판국에 수장 된 목숨들이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 평안의 삶을 얻게 해달라는 우리의 기도 또한 허무한 부르짖음 같습니다. 그 생때 죽음의 어린 생명들에게 저 세상의 삶이라도 얻게 해달라는 우리의 기도가 그 유가족 부모들과 똑 같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거짓 기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형 참사를 당하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무감각해지고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그건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무덤에 포위된 사회인 것입니다.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심심찮게 그런 참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드리운 우리 사회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참된 것이어야 할 터무니는,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철저한 깨달음에서부터 모든 정치도, 경제도, 신앙행위도 영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을 써야할 (정치적)명분도,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할 모든 (경제적)바탕도,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신앙적)바탕도 ‘사람이 사람을 위한 길’을 모두 함께 걸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지금 깨달아야 할 점인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내면 깊이에서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면의 진실한 깨우침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건 말로써(주장으로써) 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실천에서 철저한 재출발로 시작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사회(나라)도 갱신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적 표현으로 오늘 다짐할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총체적으로 뒤죽박죽인 우리 사회적(국가적) 현실이 마치 썩어가는 시체의 공동묘지가 아닌지 철저한 반성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다짐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얼마나 참담하고 부끄러운 모습인지 깨달은 순간에 서둘러 무덤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을 깨우는 발걸음으로 새로운 사회, 갱신된 나라, 쇄신의 신앙생활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으로 이 부활 성야의 우리 세례 갱신 서약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갈릴래아로 어서 달려가, 즉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나아가, 이제는 죄에 억눌려 살지 말고, 이제는 서로에게 죄를 짓는 일이 없이, 새로운 삶을 그렇게 살자고 맹세(서약) 해야겠습니다. 이제 주검이 없는 무덤, 즉 빈 무덤에서부터 새로은 삶에로 나아갑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8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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