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수난성지주일
2014년 4월 13일
나의 가슴을 예수님의 무덤으로!
예수님을 나 자신 속에 묻어야!
오늘 미사 중에 마태오복음서의 ‘예수님 수난기’(마태 26, 14 ∼ 27, 66)를 봉독합니다. 그 내용을 오라토리오 형식의 음악으로 작품화한 J.S.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오늘 미사 후에 가정에 돌아가서 감상하면서 주님의 수난을 묵상해보기를 교우님들께 권합니다. 천재 음악가의 대작 중의 대작인 저 유명한 ‘마태 수난곡’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을 특별히 묵상하며 감상하면 성주간을 더욱 경건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 오라토리오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상 최후 순간을 마태오 복음서 기록대로 엮은 낭송(Recitative)과 그 사이의 합창 그리고 베이스 가수의 독백처럼 노래하는 부분이 가장 감동적입니다. 그 사이의 합창은 우리 한국가톨릭성가집의 116장으로 수록되어 있는 유명한 코랄 성가입니다(성가책의 한국어 가사는 오라토리오의 노랫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만).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예수님의 최후 순간(마태 27, 45∼50)은 이 오라토리오 음악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라는 최후 말씀을 하시는데, 거기 구경꾼들의 목소리를 합창단이 내지릅니다.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하고 말입니다. 동문서답 식이지요! 저는 이 순간에 구경꾼들의 가증스러움에 대한 비애감이랄까 나 자신의 죄에 대한 증오심이랄까 하는 갈등과 분노에 휩싸이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절망에 떨어지는 심정이 됩니다. 그때 어느 누군가가 초를 적신 스펀지를 예수님 입에 댑니다. ‘초’란 무엇인가요! ‘실패’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대화하다가 분위기 망치는 말을 듣게 되면 “웬 초를 쳐?” 하지요. 그렇습니다. 숨 거둔 분에게 “네 주제에 엘리야를 불러?” 하고 구경꾼들은 다시 합창합니다. “어쭈, 엘리야가 와서 구해주나 보자!” 하고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조용한 그러나 처절한 합창이 들려옵니다. 성가 116장입니다. 우리 자신이 불러야 하는 처연한 노래입니다. “나도 언젠가 죽어야 돼! 언젠가 죽음을 당할 거라는 건 내가 어쩔 수 없는 게야! 이 처절한 두려움으로 마음 휩싸이는데, 공포와 고통에 짓눌리는 나를 잡아채는가, 죽음아! 멀리 사라져라!”
그리고 다시 성경 기록이 낭송됩니다(마태 27, 51∼54의 기록을!). 성전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지고, 공동묘지의 착한 송장들이 일어나 거리를 활보합니다. 그래서 거기 구경꾼들이 탄식의 합창을 질러댑니다. “진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네!”(마태 27, 54)하고 말입니다.
그 후, 이 모든 걸 목격한 증인들의 태도와 예수님의 안장에 관한 성경 기록이 낭송되고, 이어서 굵은 베이스 독백의 아리아(Aria)가 나의 마음이 됩니다. “나의 마음아, 순수해져라! 나는 예수님을 묻으리라. 이제부턴 영원히 예수님은 내 안에 계셔야 한다네! 그분은 그렇게 달콤한 안식을! 세상아 꺼져라, 예수님 들어오신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내 가슴에 묻어드려야 합니다. 그게 나의 죽음 물리치는 일이요, 그분의 부활에 내가 함께 할 일입니다. 나 자신이 예수님의 무덤이어야 그분의 부활을 맞이하지요!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다!”(마태 27, 54)하는 고백이라면 그것은 이제라도 오늘 나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하고, 베이스 아리아의 독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마태오 복음서 수난기를 봉독하기에 앞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군중 속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전례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을 올리면서 우리는 나뭇가지를 들고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시어라.”(마태 21, 9) 하고 노래하였지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일컬으면서 환영하던 사람들이 표변하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지르고 결국 그분을 처참하게 죽인 다음에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게 된 그 희대의 모순적 행동상황을 오늘 우리 자신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란 뒤죽박죽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님 그분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배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즉,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리는 총체적인 배척배신 가운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날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예수님 수난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손바닥 뒤집듯이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오가는 태도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은 가리웃 사람 유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그때 말을 바꾸면서 세상 편의에 따르는 비겁한 우리들의 모습 가운데 오늘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의 총체적인 배신행위를 드러나게 하면서, 그러한 우리의 배반 속에서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끄러운 우리의 신앙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기 전 과정이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에서 제자들 가운데 배반자가 있을 것임을 예고하시자 너도나도 “저는 아니겠지요?”하면서 자기는 그럴 리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하였습니다만, 사실상 제자들 모두는 예수님의 체포 이후 예수님을 버리고 도주하였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면서 배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맞이하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치던 그 배신, 백성의 신앙을 결집하여 하느님의 뜻을 살필 줄 알아야 하는 지도자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넣던 그 비열한 양심들, 그리고 정의롭게 법을 집행하여야 할 통치자 빌라도의 그 비겁한 책임회피 등으로 예수님은 고립무원 중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난무하는 비겁한 배신과 선동과 책임회피로 인한 사면초가 속에서 그분은 아무런 항거나 원망이나 변명 없이 침묵으로써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그분의 그러한 침묵과는 대조적으로 배신과 책임회피와 선동과 거짓증언의 비겁한 목소리들만 엇갈려 들리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 정치현실과 사회 현장과 우리 교회 내부에서 똑같은 상황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자들의 편에서 대신 말을 하면 ‘종북 빨갱이’로 몰립니다. 그렇게 몰아대는 사람들이란 권력을 비굴하게 차지하고 속임수로써 나라 앞날에 빨간 색이 아닌 검정 암흑으로 ‘종말 검댕이’ 칠을 해댑니다만, 열심한 신자라는 사람들이 이른바 나라를 수호하겠다며 교회를 난장판 만들려 설치고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 오늘의 예수님 수난기를 묵상하며 저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자들과 함께 하기 위한 지극히 비정치적인 행보를 걸어오신 분을 비굴한 정치의 둘레에 몰아넣어 “죽여라!(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고함지르는 현장에 와 있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한 가운데 예수님은, 빌라도가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마태 27, 14), 침묵하시면서 이사야 예언서가 전하듯 학대당하는 의인 즉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서 죽음에 임하셨습니다. 오늘의 독서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거역하지도 않고, 매 맞으면서 순순히 몸을 내맡기고, 모욕과 수모에 얼굴을 가리지도 않으면서, 그걸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 분’은 묵묵히 죽음의 길로 가십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바대로입니다(이사 50, 5∼7 참조). 그분이 딱 한 마디 원망을 하셨지요. 최후 순간에 하느님께 딱 한 마디 원망을 하셨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 46)
그렇게 죽어 가신 그분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의 우리들이 나름대로 신앙을 고백한다면서도 세상에 편승하여 비겁한 책임회피와 변명과 거짓된 자기합리화의 목소리를 내지르는 것은 여전합니다. 이렇게 어이없는 짓이 난무하는 오늘의 상황을 예수님의 수난기는 시사하고 있습니다. 죽어 가시는 그분의 침묵 가운데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을 죽음에로 몰고 간 당사자들이 실토하듯 우리도 그렇게 실토하고 있습니다. “어라,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네!”(마태 27, 54)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진짜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이 신앙고백은 우리의 일상에서 늘 그러한가 하는 자문자답을 오늘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문자답은 오늘 전례에서 제시됩니다. “저분이 누구냐?”(마태 21, 10)라는 질문을 세상 사람들(술렁거리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뭐라 대답할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호산나!” 하고 대답하는 우리이겠지요.
그런데 그런 대답을 건성 했나요? 진심으로 했나요? 그냥 구경꾼으로 어울려 환호하다가 빌라도 총독의 질문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 22)하고 돌변하는 우리들 아닌지요!
사실상 우리는 어떤 엄청난 행위로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진 않습니다. 예루살렘 종교인들처럼 기도 잘 하고 규범 잘 지키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나의 사소한 일상에서 중요하지 않지만 그때그때 마음먹고 해야 할 일에서 마음과는 달리 행동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일에 대해서는 나 자신과 상관없는 듯 지나치고 맙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의 복음 묵상에서 빌 그림(Bill Grimm) 신부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감상하고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며 실토하는 빌 그림 신부님은 자신이 그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처지에 있었다면 어찌 하였을까 하는 자문자답을 우리에게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감으로 끌고 가는 현장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어떨 것인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식으로 성당에서 열심하지만, 정작 나 자신과 가족에게 어떤 중대한 손해를 당할 일과 신앙적 행위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떨 것인가? 열심한 신자라도 손해 볼 일이 두렵다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 하는 꼴이 우리 자신에게서 보이진 않는지요?
[연결] Bill GRIMM 신부의 주님수난성지주일 복음묵상.
여기서 다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없이 당하는 억울함을 목격하고 대신 말하는 ‘종북 빨갱이’ 누명을 쓸 수 있는가? 아니면 나라를 수호하는 열심한 신자로서 그 대신 말하는 사람들을 규탄하여 “북한으로 보내라.”고 해야 하는가? 그리고 말을 대신하는 사제들의 사제직을 박탈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혹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와 비슷한 소리는 아닐까? 우리는 어떤 말과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의 대답은 말로써 제시되는 것이 아니어야합니다. 우리는 말로써가 아니라, 즉 침묵 가운데서 실천적으로 예수님의 길을 함께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오늘의 예수님 수난 묵상에서 이러저러한 말을 한다는 것 자체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로운 길을 가는데 있어서,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리 없는 희생의 자세로 기꺼이 걸어야 함을 오늘부터의 성주간 다짐으로 새롭게 하고 실제 그러한 삶으로의 변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성주간을 거쳐 맞이할 우리의 부활절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말로써 소리를 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리게 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에서부터 부활의 새벽 시간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가 그 새벽 시간의 사건입니다.
저 자신, 공교롭게도 이 주님수난성지주일의 미사를 혼자 봉헌해야 할 처지로, 무덤 속의 미사를 봉헌하는 묵상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8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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